34화 :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보시오. 경찰청장. 그러니까 지금 그 망할 놈들을 아직도 체포하지 못했다. 이 말이오?”
“그, 그게···.”
바깥 겨울 공기보다도 더욱 냉랭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뉴욕 경찰청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 등 뒤에 문으로 달려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
그러나 지금 그에겐 선택지는커녕 그럴 권리조차 없었다.
“실망이군.”
이곳은 월스트리트 23번지(23 Wall Street).
또 다른 이름으론 JP모건 컴퍼니 빌딩(J.P. Morgan & Co. Building)이라 불리 우는 미국 금융계의 마왕성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청장이 대면하고 있는 이 코가 커다란 배불뚝이 사내야말로 그리고 이 마왕성의 주인.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JP모건 은행의 수장이자 미합중 국의 금융왕.
“정말 실망이야.”
그 이름도 악명높은 JP모건(John Pierpont Morgan)이었다.
아무리 위세 드높은 NYPD의 수장이라도 그의 앞에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일개소시민에 불과했다.
미합중국은 20세기에도, 그리고 100년 후인 21세기에도 변함없이 돈이 지배하는 나라였으니까.
“죄송합니다. 미스터 모건!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뉴욕 경찰들을 총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이 딕시 미치광이 놈들을 체포하겠습니다!”
“그래야 할거요. 청장을 위해서라도 말이오.”
JP모건이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청장의 말을 끊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서슬 퍼런 경고를 덧붙이며 말이다.
“···NYPD가 정말 그 ‘KKK’들을 체포할 수 있을까요?”
모가지가 잘릴 위기에 처한 경찰청장이 고개를 연신 숙이곤 서둘러 JP모건의 사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JP모건의 비서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JP모건이 그리 말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방금까지 경찰청장을 눈빛만으로 죽여버릴 기세였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얼굴이었다.
“솔직히 그놈들이 진짜 KKK인지도 모르겠군.”
자신의 후원을 받아 테슬라가 건설 중이었던 워든클리프 타워를 폭파한 정체 불명의 테러리스트들.
그들은 스스로를 ‘쿠 클럭스 클랜’, 일명 KKK라 자칭했지만 JP모건이 보기에 너무 미심쩍은 면이 많았다.
“애초에 KKK놈들이 남유럽의 가톨릭 행사에서나 볼법한 괴상망측한 모습으로 돌아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어.”
한스의 실수 아닌 실수였다.
흔히 대중에게 알려진 하얀 고깔 두건을 뒤집어쓴 기괴한 컨셉의 KKK는 2차 창설 때인 1915년 이후에나 등장했다.
그 이전의 KKK는 두건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나름 평범한 두건이었다.
“게다가 남부 머저리들의 짓거리치곤 너무 뒤처리가 깔끔하지 않나?”
경찰은 그렇다 치고 JP모건이 고용한 ‘핑거튼 탐정 사무소’조차 이 자칭 KKK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모건이 아는 중2병 걸린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이렇게 깔끔을 떠는 놈들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의 짓일까요?”
“아니, 아니야. 빨갱이들이라면 차라리 여기에 폭탄을 던졌으면 던졌지.”
굳이 워든클리프 타워를 터트릴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그 괴상한 철제 탑은 테슬라나 중요하게 생각했지, JP모건은 어떠한 성과도 없는 워든클리프 타워에 대해 점점 흥미를 잃어가던 차였다.
‘애초에 테슬라에 대한 투자를 끊을 생각이기도 했고.’
경찰청장을 윽박지르긴 했지만, 사실 JP모건은 워든클리프 타워가 박살 나든 말든 딱히 감흥이랄게 없었다.
그 정도 푼돈 날려봤자 딱히 모건에게 있어 손해랄 것도 없었으니까.
“테슬라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듣기론 충격을 받고 독일로 요양을 떠났다고 합니다.”
“독일, 독일이라···.”
어째서 독일일까?
JP모건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테슬라가 독일어권 출신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였지 독일 제국은 아니었다.
게다가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설마 배후에 독일 제국이 있나?’
JP모건이 생각하기에도 무리한 억측이었다.
테슬라는 확실히 세기의 천재이긴 했지만, 돈이 될만한 실질적인 성과를 낸 적은 별로 없었다.
독일 제국이 타국에 공작을 벌여가면서 이렇게 빼돌릴만한 인물은 아니란 소리다.
“쓸만한 자 몇을 독일로 파견하게.”
하지만 JP모건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비서에게 그리 명령했다.
돈 냄새 하나는 잘 맡는 그의 큰 코가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테슬라를 지켜봐야겠어.”
이 건을 그냥 지나치면 왠지 모르게 평생을 후회할 게 분명하다는 외침을.
***
어느덧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사다난했던 1901년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궁전 또한 성탄절 분위기에 물들어 여기저기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내 걸리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궁전의 홀을 장식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유럽에 왠 크리스마스 트리인가 싶겠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란 것은 원래 독일의 오랜 크리스마스 전통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이었던 앨버트 공이 영국에 전파한 것을 계기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어쨌든 나도 오랜만에 바쁜 나날에서 벗어나 요아힘, 그리고 루이제와 함께 독일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어느 날 갑자기 20세기 독일에 떨어져 어쩌다 보니 빌헬름 2세의 목숨을 구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엔 카이저에게 거두어져 포츠담 신궁전으로 오게 되었고, 만찬회에서 카이저에게 드레드노트를 제안했으며, 드레퓌스 사건을 재점화시켜 프랑스를 엿 먹였다.
또한 빅토리아 황태후와 빌헬름 2세가 마음속 앙금을 푸는 데 도움을 주고, 그 덕분에 프리드리히쇼프 성을 비롯한 황태후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도 모자라 귀족 작위를 받아 한스 폰 초이 남작이 되기도 했다.
거기다 슈나이서 부자와 기관단총을 개발하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순친왕에게 굴욕을 주고, 발더제 원수와 시연회에서 맞붙고, 마지막으로 테슬라까지.
‘그러고 보니 테슬라 씨는 일 잘하고 있으려나?’
내 자그마한 도움 덕에 워든클리프 타워 문제를 잘 해결한 테슬라는 JP모건과의 관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잠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전에 독일로 완전히 넘어왔다.
워든클리프 테러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독일에서 몇 년 동안 요양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JP모건은 별말 없었다는데,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다.
내가 관련되었다는 증거도 없고, 애초에 지금 미국은 KKK를 박멸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들었다.
내가 벌인 일의 자그마한 나비효과였다.
지금까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서 KKK의 이미지는 흔한 남부의 백인 우월단체에 불과했지만, 워든클리프 사태가 터지고 난 지금은 미치광이 사이코 테러리 스트 집단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미 연방정부는 미치광이 사이코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을 활보하게 놔둘정도로 호구가 아니었다.
나쁜 일은 아니다.
KKK 같은 쓰레기들이 일찍 사라지는 건 세상에도 좋은 일이니까.
어쨌든 독일로 돌아온 니콜라 테슬라는 현재 프리드리히쇼프 성의 별관에 머물며 라디오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프리드리히쇼프 성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조용하고 또 경치도 좋아서 연구도 잘 진행될 것 같다나?
덕분에 난 마르가레테 공주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어야 했지만 말이다.
테슬라가 큰 사고 안 치기만을 빌자.
“그나저나 아버지나 형들은 아직 무도회인가?”
“좋겠다. 나도 무도회 가고 싶은데.”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그림책을 읽고 있던 요아힘과 루이제가 투덜거렸다.
카이저 부부와 황태자를 비롯한 왕자들은 신궁전 바로 옆에 있는 상수시 궁전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갔다.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걸 보니 아직도 한창 진행 중인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안 갔냐고?
그야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무도회라는 건 그냥 모여서 춤을 추는 행사가 아닌 인맥을 다지기 위한 상류층의 대표적인 사교 활동.
사교 데뷔도 하지 않은 우리에겐 아직 이르고 이른 일이다.
“그러고 보니 한스, 넌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저요? 딱히 없는데요?”
요아힘의 질문에 나는 그리 대답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없었다.
프리드리히쇼프 성도 그렇고 귀족 작위도 그렇고 이미 올해 너무 많은 걸 받아버렸다.
“이 이상 뭔가를 바랬다간 크램푸스(Krampus,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 전승되고 있는 악마. 크리스마스에 나타나 나쁜 아이를 혼내고 납치한다고 한다)가 저를 잡아가도 아무 말 못 할걸요?”
“하긴 한스는 좀 위태위태하지. 착하다 나쁘다 어느 쪽이냐면 나쁜 쪽이잖아.”
아직 산타클로스와 크램푸스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루이제가 말했다.
나는 반박 대신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착한 아이와는 거리가 멀긴 하지. 못된 짓도 꽤 했고.’
가령 프랑스라던가, 순친왕이라던가.
-Stille Nacht. Heilige Nacht. Alles schl?ft, einsam wacht Nur das trautehochheilige Paar···.
내가 추억에 잠겨있을 때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알고 있는 노래였다.
우리나라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알려진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보아하니 궁전 근처 교회에서 다 같이 합창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Holder Knab' im lockigen Haar, Schlaf in himmlischer Ruh. Schlaf inhimmlischer Ruh···.
우리는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고요한 밤, 평화로운 밤이었다.
이 평화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되면 좋을 텐데.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그리고 격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대영제국 런던.
주영 일본 공사관.
“오늘 런던은 떠들썩하군요. 하야시 상.”
“크리스마스이브니까요. 서양에선 가장 중요한 기념일 아니겠습니까?”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의 말에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 타다스(林董)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나라 황제의 이복동생이 독일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했다죠?”
“아, 그 일 말이군요. 런던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죠.”
“하지만 본국에선 그보다도 카이저의 총애를 받는 동양인 귀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더군요.”
“한스 폰 초이 남작 말이군요.”
하야시 공사도 남작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커다란 사건을 터트리고 다니는 유명인이니 말이다.
‘심지어 얼마 전에 독일 공사에 듣기론 독일 제국군 원수의 콧대를 눌러주었다던가.’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같은 황인종으로선 내심 통쾌한 일이었다.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 갓 10살이라는데 대단한 소년입니다.”
“동감입니다. 뭐, 이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죠. 지금 우리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대일본제국의 명운이 걸린 매우 중요한 일 말이다.
“이토가 결국 러시아와의 협상을 단념했다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 대단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젠 퇴물이 다 됐어요.”
고무라 주타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호색한 늙은이는 러시아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
일본 제국에 별 이익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의 협상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겠지.
‘결국 내 예상대로 실패로 끝났지만.’
하지만 고무라 주타로는 이토 히로부미와 달랐다.
“보다시피 러시아 제국은 이야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에요. 로스케들은 결코 요동과 만주, 그리고 조선에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답은 역시 ‘무력’ 밖에 없다 이 말씀이시군요.”
“네. 그리고 그걸 위한 영일동맹입니다.”
고무라 외무대신이 하야시 공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국 외무장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랜즈다운 후작은 우리가 러시아와의 협상을 그만둔 것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 동맹에 우리 대일본제국의 미래가 걸려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성사시켜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해가 밝아옴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새 시대에 대일본제국은 승리자로서 우뚝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