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발더제의 귀환
슐리펜의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독일 제국군 원수, 알프레트 폰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
대(大) 몰트케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 2대 육군참모총장이 된 뛰어난 전략가.
그리고 훗날 등장할 콧수염 총통처럼 반유대주의에 빠져 살았던 인물이자 평생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혐오했던 전형적인 극우 인사다.
그리고 그런 발더제가 중국 원정군과 함께 독일로 귀환한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주 후에 말이다.
“최악의 경우 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발더제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있던 내 실책이었다.
슐리펜이 괜히 나보고 조심하라고 번거롭게 편지까지 보낸 게 아니다.
내 인종이 인종인 만큼, 발더제 원수의 성향상 날 가만히 내버려 둘 확률은 0%.
발더제는 분명 날 빌헬름 2세의 곁에서 제거하려 들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속 발더제는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인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발더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당장으로선 아무것도 없단 말이지.”
게다가 발더제는 절대로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제국 정계에서 가장 성공한 정치군인.
전성기 시절엔 그 비스마르크조차 발더제를 경계할 정도로 야심과 정치력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나이도 나이고 발더제가 군부에 끼치는 영향력이 많이 줄었지만 조심해야 한다.
섣불리 빈틈을 보였다간 발더제, 그리고 나에게 이를 갈고 있는 융커들에게 기회만 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나마 빌헬름 2세가 예전만큼 발더제를 신임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네.’
원인은 10년 전인 1891년에 있었던 군사 훈련 때문이었다.
이날 발더제는 빌헬름 2세를 모의 전투에서 박살 낸 것도 모자라 전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놓고 깠고 당연히 우리의 빌리는 분노했다.
그리고 가뜩이나 적이 많았던 발더제는 이 일로 인해 카이저의 신임까지 잃어버리면서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게 바로 슐리펜 백작이고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지켜볼 수밖에 없어.”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답게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서 말이다.
***
““와아아아아~!””
1902년 12월 모일.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은 전국에서 모여든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차 있었다.
의화단, 그리고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중국 원정군이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해 화려한 개선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척! 척! 척! 척!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래,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 원정군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발을 맞추며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했다.
“독일 제국 만세! 승리 만세!”
“너 제국이여, 영원하여라!”
오랜만의 개선식에 흥분한 독일인들이 중국 원정군 병사들을 향해 승리에 대한 환희가 담긴 함성을 내뱉었다.
원정군 장병들 대부분은 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몇몇 장교들이나 병사들은 중국에서의 일이 떠올랐는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하지만 적어도 웃고는 있는 그들과 달리 중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자 개선장군이 된 알프레트 발더제 원수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중국에서 독일로 오는 내내 심기가 불편해 있었다.
원인은 한스 폰 초이.
자신이 없는 사이 황제의 옆자리에 달라붙은 그 가증스러운 칭키 때문이었다.
‘아시안 따위를 제국의 귀족으로 삼다니, 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게야!’
어느 날, 본국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너무나도 분노한 나머지 온몸의 혈관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한스가 빌헬름 2세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더제는 고작 그 정도 공으로 녀석을 궁에 들인 카이저를 전혀 이해 할 수 없을 뿐이었다.
거기다 그 영국 여자와 가까웠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기론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저택까지 물려주었다던가?
어쩌면 그 여자에게 역겨운 자유주의가 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발더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 황인종 꼬마를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독일 제국에 역병과도 같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퍼트릴 것이란 이유로 선제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부부를 끌어내리기 위해 쿠데타까지 계획했던 것처럼 말이다.
척! 척! 척! 척!
“모두 제자리에~섯!”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어느새 개선 행렬이 베를린 궁 앞까지 도달했다.
정신을 차린 발더제는 대열의 가장 앞에 서서 프로이센 정신을 상징하는 그 위대한 건물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자랑스러운 독일의 아들들이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 카이저는 발코니에 서서 중국에서 귀환한 원정군 병사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머나먼 동방에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마치고 조국으로 귀환한 그대들을 이리 다시 보니 기쁘기 그지없다.”
“······.”
“그대들은 문명을 파괴하려는 야만성에 맞서 이 땅에 정의와 도덕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그대들이 짐의 군대라는 것을, 그리고 짐이 그대들의 황제라는 것을 매우 영광으로 여긴다!”
카이저의 연설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짐은 그대들을 진심으로 칭송하는 바이다. 독일 만세! 승리 만세!”
““독일 만세! 승리 만세! 카이저 빌헬름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빌헬름 2세의 연설이 끝나자 침묵은 열렬한 함성과 환호가 되어 전 베를린을 뒤덮었다.
하지만 지금 발더제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카이저에게 그 간사한 황인종 꼬맹이를 내치라고 충언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
“중국에서의 일, 고생이 많았소. 원수.”
“아닙니다. 폐하!”
개선식이 끝난 뒤.
빌헬름 2세가 중국에서의 활약을 치하하는 뜻에서 발더제 원수를 비롯한 원정군 장성들에게 직접 훈장을 달아주며 말했다.
물론 발더제가 실제로 전쟁을 지휘하는 일은 없었다.
발더제가 중국 원정군 총사령관이자 연합군 총사령관이긴 했지만, 그가 중국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의화단과 청의 나약한 군대는 이미 분노한 열강 군대에 짓밟힌 뒤였다.
그렇기에 발더제가 중국에서 한 일은 주로 카이저가 명령한 청에 대한 ‘징벌’이었다.
그리고 발더제는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빌헬름 2세가 흡족해 만할 정도로 말이다.
“폐하, 잠시 독대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행사가 끝나자마자 이어진 발더제 원수의 말에 빌헬름 2세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성질 괴팍한 노원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한스에 대한 이야기겠지.’
빌헬름 2세 또한 오랫동안 발더제를 측근으로 둔 만큼 그가 어떤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뷜로와 슐리펜이 몇 번이나 경고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빌헬름 2세도 나름대로 이에 대한 대처를 미리 생각해놨다.
“거절하겠소.”
“허, 허나 폐하!”
빌헬름 2세가 선택한 것은 바로 무시하기였다.
귀찮은 이야기?
안 들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발더제 원수는 당황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물러나긴커녕 오히려 빌헬름 2세에게 달려들었다.
“단 몇 분이면 됩니다. 이는 제국과 황실의 위신과도 관련된 일이니 부디 이 늙은이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원수가 무슨 말을 할진 알고 있소. 하지만 내 대답은 어디까지 ‘들을 가치도 없다.’요. 그러니 헛된 기대 말고 이만 돌아가서 푹 쉬며 여독이나 푸시오.”
“하지만 폐하! 그 칭키는···!”
“어허, 입조심 하시오. 원수.”
빌헬름 2세가 경고하는 얼굴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한스 그 아이를 모욕했다간,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 알겠소.”
“그 녀석의 존재 그 자체가 독일에 대한 모욕이자 모독입니다. 황인종은 결국 황인종일 뿐입니다!”
“한스는 저열한 다른 황인종들과는 다르오. 그 아이의 높은 지성, 그리고 나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은 다른 이들도 인정하고 있소.”
“하지만 그 아이는 그 영국 여자와도 가깝게···.”
“발더제 원수! 지금 내 어머니를 모욕하는 거요?”
“예?!”
발더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니, 자기도 그동안 그렇게 불러왔으면서 인제 와서?
‘대체 내가 중국에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냐!’
발더제가 알기론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사이는 나쁘면 나빴지, 결코 좋은 적이 없었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발더제는 설마 둘이 한스의 도움으로 마음속 앙금을 풀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됐소. 더는 듣기 싫소.”
“폐, 폐하···!”
“이 이상은 모욕으로 받아들이겠소. 불명예스럽게 그 제복을 벗고 싶지 않거든 이만 물러가시오.”
발더제 원수는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는지 축 처진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발더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빌헬름 2세는 미소를 지었다.
뷜로와 슐리펜의 우려는 자신의 말처럼 결국 기우에 불과했다.
봐라. 저 꼬장꼬장한 발더제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이걸로 이 문제는 해결이군.”
빌헬름 2세는 그리 웃으며 승자의 여유를 즐겼다.
***
“어찌 카이저께서 나에게 이런 치욕을 주실 수 있는가!”
물론 이는 카이저의 착각이었다.
발더제의 지독한 분노와 증오는 고작 그 정도로 꺾일 만한 게 아니었다.
“다 그놈! 그 노란 원숭이 놈 때문이다!”
오히려 불길을 키웠으면 더 키웠지.
“자네들은 이 지경이 될 동안 대체 뭘 했나!”
그리고 발더제의 분노는 이내 주변에 있던 군부 인사들을 향했다.
원수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기껏 축하연을 준비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늙은 원수의 욕설과 비난뿐이었다.
‘골치가 아프군.’
슐리펜 참모총장이 이마를 잡으며 말했다.
카이저께서 이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신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원수의 분노에 부채질해놓으면 대체 자신보고 어쩌란 것인가.
“프로이센의 자랑스러운 융커들이 어쩌다 이런 한심한 꼴이 되었단 말인가!”
“하, 하지만 원수 각하. 저희도 이 상황이 불만스럽긴 하지만 카이저께서 저리 녀석을 아끼시니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한 장교가 용기를 내어 말하자 다른 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동의했다.
“거기다 동양의 신비한 요술을 부리기라도 했는지 폐하뿐만 아니라 황실 전체가 녀석에게 넘어갔습니다. 황후 마마와 황태자 전하, 심지어 왕자님들까지 말입니다.”
“마음 같아선 결투라도 신청하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장갑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자신들이라고 황인종 주제에 카이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것도 모자라 귀족행세를 하는 한스가 마음에 들겠는가?
치워버릴 수 있으면 진작에 치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스의 뒤엔 빌헤름 2세와 황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 녀석을 죽이기라도 해야지!”
“예, 예에?!”
융커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이라는 표정으로 발더제를 바라봤다.
어른이면 모를까 어린아이를 암살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을 넘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발더제 원수님.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 발언은 선을 넘으셨습니다.”
“슐리펜! 지금 그 꼬맹이의 편을 들 생각인가?”
“후환을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지금이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암살은 무슨 암살입니까?!”
“젠장, 이놈이나 저놈이나 겁쟁이처럼···.”
슐리펜의 반대에 발더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참모총장이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그럼 머리를 써야지. 카이저의 총애? 하! 그러면 녀석이 카이저의 총애를 잃게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발더제가 말했다.
빌헬름 2세는 기본적으로 변덕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충성스러운 신하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분을 거슬리면 바로 내쳐버리기 일쑤였다.
발더제 자신이 겪은 일처럼 말이다.
“폐하께선 어째서인지 녀석을 높이 평가하고 계시지. 그러니 녀석이 제 족속들처럼 무능한 황인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카이저께서도 생각이 바뀌실 거야!”
“오오···!”
장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카이저의 비호만 없다면 녀석은 끝장이다.
그 재수 없는 황인종 꼬맹이를 궁에서 내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암살을 하자는 무리수보단 훨씬 나은 계획이었다.
‘이 멍청한 작자들이···!’
물론 어디까지나 그것이 정말로 가능할 때의 이야기였다.
한스가 그저 운 좋은 꼬맹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슐리펜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마침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더제가 흥미롭다는 듯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어디까지나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남작이 최근 해괴한 신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하더군요.”
“신무기?”
그런 짓을 하고 있었어?
자신도 몰랐던 사실에 슐리펜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쩌면 이를 이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호오···. 자네 이름이 뭔가?”
“옛! 제9보병사단 소속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소령입니다!”
척!
루덴도르프가 발더제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발더제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한스를 향한 발더제의 음모가 그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