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28화 (28/193)

28화 : 신축조약

1901년 9월 7일.

북경, 주청 스페인 공사관.

“···이 이상 조약에 대한 의견이나 이의는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청의 흠차전권대신 이홍장(李鴻章, 리훙장)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무너져가는 청을 지탱하는 거인이었으나, 지금은 초라한 노인이 된 그의 두 눈동자엔 깊은 슬픔이 담겨있었다.

오늘은 훗날 신축조약(辛丑條約), 또는 베이징 의정서라 불릴 조약이 체결되는 날.

그리고 그가 평생을 바쳐온 조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었으니까.

“그럼 다시 한번 조약의 내용을 확인하겠습니다.”

조약의 대표를 맡은 스페인 전권대사, 베르나르도 데 콜로간 이 콜로간(Bernardo J. de Cologan y Cologan)이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조약문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전권대사 중 가장 오랫동안 베이징에서 근무해온 최선임자.

그리고 그렇기에 신축조약의 대표를 맡은 자다.

“···5조, 청은 무기 및 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재의 수입을 2년간 금지한다.

그 이후로도 각국이 계속 이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최대 2년에 한해 연장할 수 있다. 6조, 청은 배상금······.”

콜로간 전권대사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말이 점점 길어질수록 이홍장은 마치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청은 배상금 원금 4억 5천만 냥을 연리 4%로 1902년부터 1940년까지 39년간 상환, 총 9억 8천 이백여 만 냥을 지불할 것.

북경에 공사관 구역을 설정하여 외국 군대의 북경 주둔을 사실상 인정할 것.

다구 포대를 비롯한 북경에서 천진(天津, 톈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포대를 철거할 것 등등.

청의 유리한 조항이라곤 단 한 개도 없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는 순간 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하리라.

‘내게 힘만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불리한 조항들을 수정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청의 대표로 이 자리에 나와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실권 없는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진짜 대표는 흠명전권대신 경친왕 애신각라 혁광(愛新覺羅 奕?, 아이신기오로 이쾅).

무능하고 부패하기론 청에서 제일가는 인간이었다.

경친왕은 자신의 선조들이 세운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열강들의 무자비한 요구를 아무런 반발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이홍장으로선 울화가 치밀 노릇이었다.

“그럼 저부터 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모든 조항의 확인이 끝나자 콜로간 전권대사가 대표로서 먼저 조약문에 서명했다.

“드디어 의화단 전쟁의 끝이 찾아왔군요. 지긋지긋한 1년이었습니다.”

영국 전권대사 어니스트 메이슨 사토우(Ernest Mason Satow)가 그리 말하며 콜로간 전권대사를 따라 조약문에 서명했다.

“동감입니다.”

그 다음은 러시아 제국 전권대사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폰 기어스(МихаилНиколаевич Гирс).

그리고 일본 제국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 프랑스 전권대사 폴부(Paul Beau), 미국 특사 윌리엄 우드빌 록힐(William Woodville Rockhill), 독일 제국 전권대사 알폰스 뭄 폰 슈바르첸슈타인(Alfons Mumm von Schwarzenstein) 등이 뒤를 이었다.

“자, 이제 청의 대표 두 분이 서명하시면 조약은 마무리입니다.”

“알겠습니다.”

11개국에서 파견된 전권대사들이 모두 서명을 끝낸 것을 확인하자 콜로간 전 권대사가 말했다.

이에 경친왕 혁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약문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홍장의 차례가 되었다.

‘내 손으로 청의 미래를 끝내는구나.’

지금까지 어떻게든 청을 살리려고 했던 자신의 노력은 결국 허사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홍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어 올렸다.

쓱-

“이것으로 베이징 의정서가 체결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각국의 대표 여러분께서는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짝───

그렇게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열강의 전권대사들은 밝은 얼굴로 악수를 하며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그저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허망한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패전국의 비애였다.

벌컥!

“큰일 났습니다!”

그때였다.

공사관의 직원으로 추정되는 청년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조약 체결식이 진행되고 있던 방 안에 들이닥쳤다.

콜로간 전권대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디에고,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일으키는가!”

“헉···헉···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표 여러분께 최대한 빨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 정도로 급한 일인가?”

“예. 이것 좀 보십시오.”

청년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콜로간 전권대사에게 내밀었다.

“···신문?”

그렇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신문이었다.

“예. 방금 나온 것입니다. 지금 베이징 전체가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커흡?!”

의아한 표정을 짓던 콜로간 전권대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헉?!”

“하나님 맙소사···.”

“푸흡! 이거 실례합니다. 푸하핫!”

다른 대사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대사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냐는 듯, 신문을 가져온 직원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봤고, 프랑스 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오직 이 자리에서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 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독일 제국의 슈바르첸슈타인 전권대사뿐이었다.

“···대체 그 종이에 적혀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다들 이리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무언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이홍장이 말했다.

콜로간 전권대사는 이걸 과연 말해줘야 할지 망설이다가, 끝내 이홍장에게 문제의 신문을 건넸다.

“대체 무슨 일이···흡!”

신문을 쥔 이홍장의 양손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인가?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순친왕 아이신기오로 자이펑,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사죄의 뜻으로 자청하여 ‘세 꿇기와 아홉 조아리기’를 하다!]

“순, 순친왕 전하께서···삼, 삼, 삼궤구고두례를 하셨다고···?”

“재풍이 삼궤구고두례를 하였다니. 숙의백(이홍장의 작위),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외국어를 몰랐기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가만히 있던 경친왕 혁광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러자 이홍장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경친왕에게 신문에 그려진 삽화를 보여주었다.

“허, 허헉?!”

털썩!

경친왕이 그대로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삽화에는 순친왕이 빌헬름 2세와 구령을 외고 있는 동양인 어린아이 앞에서 바닥에 머리를 찧고 있는 장면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전형적인 구시대적 인물인 경친왕이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런 일이···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재풍을 보좌했던 자들은 대체 무얼 하였던 것이야!”

“모르겠습니다. 여기엔 순친왕 전하께서 자청하셨다고 하는데···.”

이홍장은 신문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청일 리가 없었다.

분명 온갖 협박과 협잡이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순친왕 전하의 보령이 이제 고작 18살이다.

그런데 그 어린 분께서 먼 타지에 끌려가 협박까지 당하며 이런 말도 안 되는 굴욕을 겪었다.

‘거기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조선인 출신의 어린 귀족이 구령을 넣었다고?’

“허···허허···.”

결국 몸과 마음,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이홍장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찌 청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대체 청은 어디까지 떨어졌단 말인가.

“끝났군.”

청은 끝났다.

쿨럭!

“이 대인? 이 대인!”

“의사! 의사를 불러!”

이홍장이 입에서 붉은 선혈을 내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기겁한 콜로간 전권대사를 비롯한 외교관들이 그를 급히 부축하고 의사를 불렀지만, 이홍장에겐 더는 이 잔혹하고 더러운 세상을 버틸 힘이 없었다.

“인재를 키우고도 나라를 망쳤으니 그야말로 한스럽도다!”

마지막 남은 기력을 짜내 그리 외친 이홍장은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는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원 역사보다 두 달 빠른 사망이었다.

***

“···중위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나도 알고 싶다네. 레프 소위.”

의화단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중국 원정군 소속의 빌헬름 리터폰 레프(Wilhelm Ritter von Leeb) 소위는 공사관 앞에 몰려든 중국인들을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독일 제국은 대체 얼마나 중국의 존엄을 짓밟아야 속이 풀리는가!”

“더는 못 참는다!”

“독일은 중국에서 꺼져라!”

원인은 다름 아닌 오늘 아침에 나온 신문 때문이었다.

중국 황족이 카이저 폐하께 사죄의 뜻으로 무슨 특이한 절을 올렸다고 했던가?

‘대체 그게 뭔 대수라고.’

중국 문화에 그리 밝지 않았던 레프 소위로선 이게 이렇게 난리를 칠 문제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본래라면 중국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예법이라더군.”

“아니, 우리 카이저께서도 황제이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되고 우리는 안된다 이 말입니까?”

“중국인들의 문화는 원래 그런 부분에 엄격하네. 소위. 특히 황제와 관련된 예법은 말이야.”

“어쨌든 우리만 귀찮게 되었습니다.”

이미 공사관 앞에 몰려든 중국인들만 수백이었다.

무기를 들고 있진 않았지만, 잘못했다간 폭동으로 번질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기다니. 이거 그냥 진압하면 안 됩니까?”

“소위. 지금까지 손에 묻힌 중국인들의 피론 만족하지 못한 건가?”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중위님.”

“웬만하면 평화롭게 가세나. 평화롭게. 이젠 학살은 신물이 날 지경이니 말이야.”

중위는 그리 말하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자신들이 소속된 중국 원정군은 카이저의 명령에 따라 북경과 그 주변의 중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청소’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저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런 명예롭지 못한 짓을 했겠습니까? 명령이니까 한 거지.”

“···그래. 빌어먹을 명령이었지.”

“죽일 거면 차라리 식량을 끊고 알아서 굶어 죽으라고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총으로 쏴죽이나, 굶겨 죽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중위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척!

“중위님. 발더제 원수 각하의 전언을 전하러 왔습니다!”

“음.”

사령부에서 파견된 전령이 도착하자마자 경례를 했다.

드디어 친애하는 사령관 각하께서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다.

“공사관을 포위한 중국인 ‘폭도’들을 ‘무력’을 써서라도 즉시 ‘격퇴’하라는 명령입니다!”

“뭐···?”

하지만 발더제 원수의 명령 내용을 듣자마자 중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력을 써서라도 격퇴.

그러니까 모조리 쏴 죽여서라도 쫓아내란 소리였다.

“···명령은 그게 틀림없는가?”

“그렇습니다.”

“허.”

중위는 물고 있던 담배를 땅에 버렸다.

사령부를 들락날락하는 그 중국인 매춘부가 분명히 말렸을 텐데도 이런 명령이라니.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최근 발더제 원수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는데 그 때문일까?

“···역시 그 일 때문인가.”

“중위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레프 소위가 물었다.

중위는 아까의 신문을 집어 들며 말했다.

“친애하는 원수 각하께서 이리 성깔을 부리시는 이유에 짚이는 곳이 있어서 말일세. 여기 이 동양인 소년 보이나?”

“그 카이저를 구한 소년 아닙니까?”

그건 이미 중국 원정군에도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 사건이 있은 지 벌써 반년이나 흘렀으니 말이다.

“자네 신문을 제대로 안 읽은 모양이구먼. 그 소년에 대해 뭐라 쓰여 있는지 다시 한번 잘 읽어보게.”

레프 소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신문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무얼 놓쳤는지 깨달았다.

“어? 잠, 잠깐만요. 왜 그 아이의 이름이 한스 폰 초이로 쓰여 있는 겁니까?”

“카이저께서 작위를 내리신 모양이군. 이젠 무려 한스 폰 초이 남작님이야.”

“남작이요? 황인종이?”

레프 소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신문과 중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중위는 이제 알겠냐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원수께서 이를 안 모양이야.”

“허···.”

“우리 원수님 성격 알지?”

“폭발할 만하군요.”

“그래. 폭발할 만하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발더제 원수다.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인 성격 탓에 군부 내에서도 적이 많은 그 인간이 황인종이 제국의 귀족이 되었다는 것에 격노하지 않을 리가 없다.

허나 자신도 오늘에야 안 사실을 발더제 원수는 어찌 안 것일까?

‘어쩌면 조국에서 누가 일부러 알렸을지도.’

어쨌든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몰려오는 저 중국인들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웬만하면 위협 사격에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레토포어베크 중위님. 레프 소위님. 전원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하사관의 말에 중위,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Paul von Lettow-Vorbeck)가 짧게 한숨 쉬며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관 앞에서 총성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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