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27화 (27/193)

27화 : 삼궤구고두례 (3)

1901년 9월 모일.

독일 제국, 포츠담 신궁전 앞.

“결국은 이렇게 되는가.”

순친왕은 씁쓸한 얼굴로 독일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지금부터 저곳에 들어가야 한다.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 앞에서 사죄의 뜻으로 ‘삼궤구고두례’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하···.”

양성이 힘없는 순친왕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지만, 결국 순친왕에겐 평생 한이 맺힐 굴욕을 강요하는 꼴이 되었다.

‘다 내 탓이다.’

양성의 얼굴이 자책과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에겐 청의 신하를 칭할 자격이 없었다.

“신을 죽여주십시오. 신이 무능하고 우둔한 탓에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사옵니다.”

“양성, 이 모든 일이 어찌 자네의 탓이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은 근원을 따지자면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청나라와 지나친 처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자신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한 독일 황제.

그리고 음험하기론 저 영길리(英吉利, 영국) 사람들과 맞먹을 그 조선 출신의 어린 남작 때문이었다.

‘최한수, 아니 한스 폰 초이···!’

놈은 어린아이의 인두겁을 뒤집어쓴 악귀였다.

어찌 자신과 청에 굴욕 하나 주겠다고,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가지고 그리 협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양성에겐 잘못이 없다.’

평범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사람의 도리를 저버린 외도를 상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자네는 나와 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양성.”

“전하아······!”

순친왕의 진심 어린 위로에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양성.

다른 청나라 사절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은 와신상담을 위해 그저 참고 버텨야만 할 때이다.”

그러니 오늘의 이 굴욕을 절대로 잊지 말자.

“전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궁에서 나온 독일인 관리가 무뚝뚝한 어투로 말했다.

때가 되었다.

“···알겠네.”

순친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궁전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폐하. 청의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왜 이럴 때일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기나긴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알현실 앞에 도착한 순친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들라 해라.”

끼이익───!

이윽고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순친왕과 청나라 사절단은 긴장한 얼굴로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

“한스, 저자가 청을 대표해서 온 자이펑이냐?”

“예. 폐하.”

“웃긴 머리를 하였군. 다른 자들도 말이다.”

“변발이란 것입니다. 청을 건국한 유목민인 만주족의 풍습이지요.”

나는 아까부터 즐겁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빌헬름 2세를 향해 말했다.

드디어 삼궤구고두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애처럼 들뜨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순친왕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군.’

알현실 내부는 나와 카이저 말고도 리히트호펜 외무장관과 뷜로 총리를 포함한 내각의 관료들, 그리고 군의 장성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순전히 순친왕의 굴욕을 지켜보라는 카이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자신을 아예 구경거리로 삼겠다는 뜻이니 순친왕으로선 당연히 열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은 이것 만해도 감지덕지하는 상황인데 말이지.’

빌헬름 2세는 원래 이 장면을 영원히 박제하겠다고 이 자리에 사진사와 영화촬영 기사까지 데려오려고 했었다.

나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말렸기에 그나마 이 정도에 그친 거다.

‘그러다가 결국 순친왕이 못 참고 카이저 앞에서 자결이라도 해버리면 어쩌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곤란하다.

찌릿!

하지만 내 고생을 모르는 청나라인들은 이 모든 일이 내 책임이라는 듯, 아예 날 잘근잘근 씹어먹을 기색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에휴, 어째 카이저와 순친왕 사이에 껴서 내 이미지만 계속 나빠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게 중간관리직의 고충인가?

‘차라리 삼궤구고두례를 빌미로 중국 이권이나 더 가져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안 좋았다.

지금 독일이 삼궤구고두례를 빌미로 청나라를 더 뜯어먹으려고 했다간 왜 너 혼자 처먹냐며 다른 열강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으니까.

애초에 의화단 전쟁이 진작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야 신축조약이 체결되는 것은 서로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열강들의 알력 다툼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권을 요구했다간 신축조약 그 자체가 터져버릴 것이다.

그건 나도, 그리고 리히트호펜 외무장관과 뷜로 총리도 원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 발언력과 위치가 올라간 것에 만족해야지.’

삼궤구고두례를 받을 수 있게 되자 빌헬름 2세를 나를 매우 칭찬하며 앞으로도 종종 의견을 구하겠다고 말했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도 나에게 꽤 호감을 품은 모양이고 말이다.

‘후, 설마하니 그걸 진짜로 해낼 줄이야. 대단하군.’

심지어 그 뷜로 총리도 마지못해 날 인정했다.

이것만 해도 나에겐 충분히 이득인 일이었다.

순친왕에겐 미안하지만 말이다.

“대청 황제 폐하의 신하인 순친왕 재풍이 대독일 제국의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 올립니다.””

양성의 통역과 동시에 순친왕과 청나라 사절단이 빌헬름 2세에게 예를 표했다.

빌헬름 2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청의 춘 왕자(Prinz Chun, 순친왕의 독일식 번안명), 자이펑은 들으라.”

카이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해 6월 20일, 청 조정은 의화단과 손잡고 주청 독일 공사 클레멘스 폰케텔러 남작을 잔혹하고 살해한 것도 모자라 남작의 시신을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또한 독일인들을 비롯한 백인들을 향한 무차별 살육과 약탈, 강간과 고문, 식인 행위 등 도저히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야만스러운 행위들을 자행했으니 이는 천상에 계신 주께서도 용서치 않을 큰 죄이다.”

의화단이 현대에서 중국판 탈레반 소리를 들으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절대적인 이유였다.

“···그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짐은 관대하다.”

‘무슨 크세르크세스 1세세요?’

관대하긴커녕 쪼잔함으론 유럽 군주 1순위를 다투는 인간이 말은 잘한다.

“사죄의 뜻으로 짐에게 그···한스, 뭐였지?”

“’세 꿇기와 아홉 조아리기의 예’입니다.”

“그래. 세 꿇기와 아홉 조아리기의 예를 한다면 짐과 독일 제국은 청의 죄를 용서하도록 하겠다.”

“황제 폐하의 자비에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으드득!

순친왕이 이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그리고 굴욕과 분노로 몸을 떨며 ‘삼궤구고두례’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폐하, 삼궤구고두례에는 구령을 넣는 자가 필요하옵니다. 그러니 제가 그 일을 하여도 되겠사옵니까?”

그때 양성이 순친왕 홀로 굴욕을 감내하게 둘 순 없다는 듯,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빌헬름 2세는 그 말에 또 무슨 짓궂은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아니, 그 일은 한스 폰 초이 남작에게 맡기겠다.”

“폐하?’

아니, 왜 뭐만 하면 자꾸 나한테 시키는 거야?

“사양하지 마라. 한스. 모처럼의 여흥 아니냐. 자, 내 옆에서 서서 그 구령이란 걸 넣어 보아라.”

“···예.”

씨발.

나는 마음속으로 그리 욕을 내뱉으며 빌헬름 2세의 옆에 섰다.

이 인간이 나를 물 먹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너도 좀 즐겨보라고 하는 생각에 한 말이란 게 더 짜증 난다.

카이저는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순친왕이랑 양성 좀 봐라.

이젠 아예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검어지고 있다.

저렇다 쓰러질까 봐 무서울 지경이다.

“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뜻을 전신으로 표출하며 순친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순친왕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꿇어라.”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연하지만 독일어다.

본래라면 만주어로 해야겠지만, 난 만주어 같은 건 모르니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언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뜻만이 중요할 뿐.

쿵!

순친왕이 당장이라도 죽고 싶단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자신의 머리를 큰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세게 박았다.

“오···.”

“하느님 맙소사···.”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훨씬 강렬하고 과격한 순친왕의 행동에 놀란 좌중에서 탄식과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스, 이 예법이 원래 저렇게 과격한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게 평범한 것이었다면 청의 관료들은 황제와 만날때마다 진작 머리가 터져 죽어 나갔겠지요.”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나온 것과 달리 인조도 삼전도에서 저렇게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홍타이지 앞에서 머리를 박진 않았다.

애초에 삼궤구고두례는 그 방식 좀 과할 뿐, 그냥 인사법이다.

“그저 울분이 쌓여서 저런 것이겠죠.”

순친왕이 그만큼 분노하고 또 수치스러워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그대로 다음 구령을 외쳤다.

“조아려라.”

순친왕이 머리를 떼고 빌헬름 2세를 향해 머리를 세 번 조아렸다.

“일어서라.”

순친왕이 힘겹게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머리를 얼마나 세게 받았는지, 그의 이마는 붉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흑, 전하······!”

이를 본 양성을 비롯한 청나라 사절단이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나 순친왕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뭣 하는가. 계속해라!’

순친왕의 독기를 품은 두 눈이 나를 향해 그리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천하의 간신배이자 악한인 줄 알겠다.

‘아니, 저들 눈엔 이미 그렇게 보이려나.’

나는 한숨 쉬며 다시 구령을 외웠다.

이게 다 망할 카이저 때문이다.

“···꿇어라.”

***

“일어서라.”

순친왕은 마지막 구령에 바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일어났다.

드디어 이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영겁의 세월을 보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전하, 옥체에 상처가 나셨습니다. 어서 치료를···!”

“괜찮다.”

이마를 바닥에 너무 세게 박은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상관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에 쌓인 울화에 자신이 먼저 미쳐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기겁하는 양인들의 얼굴에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고 말이다.

“그대의 진심은 잘 보았다. 이것으로 짐과 독일 제국은 청의 만행을 용서하도록 하겠다.”

황제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신하들과 함께 알현실에서 나갔다.

더는 볼일 없다는 듯이 말이다.

비열하고 악독한 작자.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하지만 여전히 뺀질뺀질한 얼굴로 알현실에 덩그러니 남은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조선 놈에 비하면 황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때리는 놈보다 옆에서 부추기는 놈이 더 미워 보인다고, 순친왕은 자신에게 기어코 삼궤구고두례를 하게 만든 한스를 빌헬름 2세보다 더 증오했다.

“決不會忘記這個屈辱.”

“예?”

“이 굴욕은 절대 잊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양성이 자신의 말을 남작에게 통역했다.

본래라면 이리저리 돌려 말했을 것을, 양성도 자신처럼 이 어린 조선인 남작에게 상당히 분노한 모양이었다.

“전하와 양 대인에겐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두 분이나 청에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그저 명령이니 따랐을 뿐.

“옛말에 출세보다 사람이 먼저 되라고 했다. 하지만 네 놈은 인간이 되길 포기한 놈이니 그 앞날이 훤하다!”

“인간이 되길 포기한 놈이라니. 그냥 넘기기 힘든 모욕이로군요.”

“내가 끝까지 삼궤구고두례를 하지 않는다면, 청의 백성들을 학살하겠다 협박한 놈이 말은 잘하는구나!”

“예?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뭐라?”

한스의 진짜 모르겠단 표정에 순친왕은 자신에게 한스의 말을 전한 양성을 바라봤다.

설마 양성이 거짓말을?

‘아니, 양성이 이런 일로 나에게 왜 거짓을 말하겠는가.’

애초에 양성이 거짓을 말했다면 한스의 말에 저리 억울하고 억장 터질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진 않을 것이다.

양성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남작! 분명 지난 밤에 나에게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 안 했습니다. 양 대인. 그저 미소를 지었을 뿐이지요.”

“뭐, 뭐라고요?!”

한스의 거짓말은 안 했다는 듯, 뻔뻔스러운 얼굴에 양성의 얼굴에 핏줄이 돋았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들을 속였다 이 말인가?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배상금 이야기나 피 값 같은 건 어디까지나 순친왕전하의 명예를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고요.”

“하, 하지만···!”

“설마 양 대인은 제가 그 옛날 위무제 조조가 서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고한 이들을 마구 학살하기라도 할 줄 아셨던 것입니까? 이거 마음이 아프군요.”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듯이 슬픈 얼굴을 하며 고개를 젓는 한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고려봉자 새끼!’

물론 한스에게 완전히 낚여버린 순친왕과 양성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열불이 뻗쳤지만 말이다.

“그리 화내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미 잘 끝난 일 아닙니까.”

“대체 무엇이 잘 끝난다는 것이냐! 나는 네놈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할 정도의 수치를 맛보았다!”

순친왕의 분노를 양성이 그대로 옮겨 한스에게 전했다.

하지만 한스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혀를 놀렸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 황제께선 만족하셨고, 청의 백성들도 이 문제 때문에 고통받을 일은 없어졌죠. 순친왕 전하와 전하를 모시는 자들도 무사할 테고 말입니다.”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것입니다.

한스가 덧붙였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따로 없다.

“이···이······!”

“그럼 괜찮으신 것 같으시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스가 싱긋 웃으며 알현실을 떠났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전하! 전하아!”

곧 청나라 사절단만 덩그러니 남은 알현실에서 순친왕의 울분 어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작가의말

한스 : 거짓말은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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