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삼궤구고두례 (2)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에 양성이 얼빠진 얼굴로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다시금 되물었다.
저쪽 입장에선 당연히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이저 폐하께서 순친왕 전하께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저들에게 현실의 지독함을 상기시켜 주는 것.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순친왕과 양성에겐 미안하지만, 인생이란 게 원래 좋은 일만 생기지만은 않는 법이다.
원망하려면 빌헬름 2세를 원망해라.
“천지신명이시여···.”
양성이 두 손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이 상황이 지독한 악몽이길 바르는 모양이다.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지금 남작님이 말씀하신 것이 제가 아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양 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그 ‘삼궤구고두례’가 맞습니다.”
“(닥쳐라)!”
결국 순친왕이 폭발했다.
“(이 고려봉자 애새끼 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대청의 친왕인 나 아이신기오로 자이펑에게 그냥 절도 아니고 삼궤구고두례를 하라니! 천하에 이런 무례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전하, 제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순친왕이 나를 향해 뭐라 뭐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양성이 다급한 얼굴로 순친왕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순친왕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입에서 나온 단어가 단어니까.
게다가 순친왕은 아직 젊어도 너무 젊은 10대 후반. 한창 화가 많을 나이다.
적어도 정신만큼은 어른인 내가 이해해 줘야 하지 어쩌겠나?
“지금 순친왕이 뭐라고 하는 건가?”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내가 중국어는 니하오랑 니취팔러마 밖에 몰라.
“다만 지금 순친왕이 저를 향해 욕이란 욕은 다 내뱉고 있는 건 알겠습니다.”
“음. 그건 나도 알겠네. 일단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시키지.”
쾅!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눈앞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어우야, 소리 한번 요란하구만.'
한 두세 번 더 내리쳤다간 테이블을 부숴버릴 것만 같다.
덕분에 중국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내뱉던 순친왕도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기세에 깜짝 놀란 모양인지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자중해주시죠. 전하. 전하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남작은 지금 우리 독일 제국 황제 폐하의 대리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
“계속 그리 남작을 모욕하신다면 본국은 이를 카이저 폐하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서슬 퍼런 엄포에 양성이 땀을 뻘뻘 흘리며 순친왕에게 이를 통역했다.
양성의 말을 들은 순친왕은 아직 노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는지 나와 리히 트호펜 외무장관을 번갈아 노려봤다.
하지만 이 자리의 절대적인 갑은 순친왕이 아닌 우리.
순친왕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숨 돌린 양성은 나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순친왕 전하의 행동을 양해해 주십시오. 젊으신 분이라 아직 혈기가 왕성하십니다. 게다가 귀국의 요구가 요구이다 보니···.”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희 측의 요구가 귀국이 받아들이기엔 매우 무리한 요구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지만 우리 황제 폐하의 뜻은 확고하십니다. 폐하께선 이미 저와 남작에게 삼궤구고두례가 아니면 그 어떤 사죄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확언하셨습니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단호한 말에 양성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청에서 삼궤구고두례는 오로지 대청의 황제 폐하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예법입니다. 대청 황제 폐하의 신하인 순친왕 전하께서 외국의 군주에게 이를 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청은 건륭제 시기에 청에 무역 허락을 받기 위해 찾아온 영국과 네덜란드의 사절에게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자존심 강한 영국은 거절했고, 자존심보단 이익이 먼저였던 네덜란드는 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애초부터 서양과 대등한 위치에서 무역할 생각이 없었기에 네덜란드는 그냥 대접만 받고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지만 말이다.
“청의 황제가 외국의 신하에게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하는 건 되고, 우리 독일의 황제 폐하가 사죄로 청의 신하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하라는 것은 안 되다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입니까!”
“그, 그렇지만 사죄의 뜻으로 삼궤구고두례를 하는 것은 전례도 없을뿐더러 그 어떤 예법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일입니다!”
“전례가 없다니요. 비슷한 사례는 있지 않습니까.”
“허. 비슷한 사례라니, 무슨 사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래전 병자년에 일어난 ‘삼전도’의 일 말입니다.”
“그건 200년도 더 된 일이지 않습니까!”
삼전도의 굴욕을 언급하는 내 말에 어이가 나간 양성이 언성을 높였다.
나도 굳이 이렇게까진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원래 외교라는 게 뻔뻔한 놈이 승자 아니던가?
“하지만 항복의 뜻으로 당시 조선의 왕이 청나라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것은 맞지 않습니까?”
“하지만···!”
“게다가 공교롭게도 지금은 귀국이 패전국이군요.”
“지금 조상들 대신 삼전도의 치욕을 갚기라도 하시겠단 것입니까?!”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닙니다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게 누가 의화단이랑 손잡고 전쟁 일으키래?
“정 삼궤구고두례를 못 하시겠다면 대신 함벽여츤(銜璧輿?)이라도 하시던가요.”
“이···이······!”
함벽여츤이란 말에 기가 막힌 나머지 말이 안 나오는지 계속 나를 노려보기만 하는 양성.
그도 그럴 것이 삼궤구고두례는 황제에게 올리는 인사 같은 거였지만 함벽여 츤은 진짜배기 항복 의식이었으니까.
치욕의 수준으로 따지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물론 귀국 측에 바로 선택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의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시지요. 가세, 남작.”
“예. 외무장관님.”
나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은 분노한 채 우리를 노려보는 순친왕과 양성을 뒤로 하고 정원을 빠져나왔다.
“결국 자네 말처럼 받아들인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군.”
“예.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 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카이저가 직접 명을 내린 만큼, 나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은 이걸로 이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
“그 뻔뻔한 조선 어린아이 놈! 그놈은 제 선조들의 치부를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가?”
객실로 돌아온 순친왕은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리며 한스에 대한 비난과 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조선인들에겐 역린과도 같은 삼전도를 언급하면서 그런 태연한 얼굴이라니 철면피도 그런 철면피가 따로 없다.
그 무섭다는 염라대왕도 최가 그놈과 만나면 아주 기겁할 거다.
“양인들이 본래 무례한 족속들이라곤 하지만 이 정도로 무례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삼궤구고두례라니! 절대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전하!”
분노한 것은 순친왕뿐만이 아니었다.
순친왕과 양성에게 리히트호펜 외무장관과 한스와의 일을 전해 들은 나머지 청나라 사절들은 머리끝까지 격노한 나머지 당장이라도 포츠담 신궁전에 쳐들어갈 기색이었다.
삼궤구고두례.
다른 것도 아니고 대청의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그 삼궤구고두례다.
이건 받아들이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양이들에게 짓밟히면서도 끝까지 지켜온 청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게다가 전하께서 삼궤구고두례를 하시는 날엔 우리 모두 끝장이다!’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청 황실의 권위가 완전히 박살 날 것이다.
전 중국이 순친왕과 순친왕을 보좌했던 사절단을 비난할 것이고, 무엇보다 청의 실권자인 서태후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순친왕은 황족이라 죽지는 않겠지만, 나머지는 그 자금성의 늙은 여우에 의해 삼족멸을 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독일 황제가 반드시 삼궤구고두례를 받아야겠다고 하니 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순친왕이 울분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어떤 수모도 감당하겠다고 각오를 한 순친왕이지만 삼궤구고두례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그 뒤에 일어날 일들도 두려웠다.
하지만 독일 측이 저리 강경하게 나오는 이상, 순친왕과 청나라인들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양성.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방법은 아직 있습니다.”
“오오! 그것이 정말인가?”
“예. 소신이 다시 한번 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양성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남은 방법은 이제 이것밖에 없었다.
***
“남작님. 청 사절단의 외교 고문이란 자가 남작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 하세요.”
그날 밤.
포츠담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텔에 머물고 있던 내게 양성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양성을 보자마자 일부러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양 대인,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그거야 남작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절 이리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겠지요.”
“하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긴말은 안 하겠습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양성이 고요하게 불타오르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원 역사 대로였다.
순친왕이 절 못하겠다고 끝까지 버텨도 어디 우리 빌리가 그냥 ‘그래? 그럼 하지마.’하고 넘어가 줄 사람이던가?
다 양성이 이렇게 뒤에서 외교 관계자들에게 청나라의 금고를 털털 털어 모은 돈으로 로비를 하고 다녔기에 그냥 허리 숙이는 정도로 넘어간 거다.
“죄송하지만 그 돈을 받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양성이 주는 뇌물을 받을 순 없었다.
내가 딱히 깨끗하고 청렴한 인간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저는 양 대인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빌헬름 2세는 이미 ‘삼궤구고두례’에 꽂혀도 너무 단단히 꽂혀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받아야겠단다.
게다가 나나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나 카이저의 뜻을 꺾으면서까지 청을 편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삼궤구고두례를 빌헬름 2세에게 꺼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순친왕이 삼궤구고두례를 하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득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리히트호펜 외무장관님은 물론 독일 외무부의 누구를 찾아가도 똑같을 것입니다. 양 대인의 ‘성의’를 받아들이더라도 그냥 입만 닦고 말겠지요.”
“그런···!”
마지막 희망이 꺾인 양성의 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순친왕 전하께서는 귀국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아직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
“차라리 저희 사절단과 함께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자결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순친왕 전하와 양 대인을 비롯한 사절 여러분의 처지는 이해합니다. 자존심과 체면은 둘째치더라도 서태후와 조정이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부디 황제를 설득해 주십시오. 남작께서도 삼궤구고두례는 너무 지나친 처사란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건 무리라니까 그러네.
“제가 할 수 있는 건 삼궤구고두례를 하더라도 순친왕 전하와 여러분의 명예를 지켜드리는 것뿐입니다.”
“!”
명예는 지켜준다는 말에 양성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슨 뜻입니까?”
“내일, 리히트호펜 외무장관께서 순친왕 전하와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할 것입니다.”
“제안 말입니까?”
“예. 삼궤구고두례를 하는 대신 50억냥을 배상하라고 말입니다.”
“예? 5, 5, 50억 냥이요?!”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당장 신축조약의 배상금의 원금이 4억 5천만 냥이었다.
39년 분할 납부로 이자까지 쳐도 9억 8,200만 냥 정도였고 말이다.
참고로 신축조약 배상금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못 갚았고 나중에 중화인 민공화국 시절까지 가서야 갚았다.
어디까지나 동독이나 소련 같은 공산권 한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돈은 중국 대륙 어디를 뒤져봐도 없습니다!”
“순친왕 전하와 양 대인이 이를 거부하시면 외무장관께선 그럼 중국 백성들의 피 값으로 대신하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건 그냥 협박 아닙니까!”
양성이 외쳤다.
“하지만 이 정도는 돼야 순친왕 전하께서 삼궤구고두례를 받아들여도 뒷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순친왕 전하의 굴욕은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남을 테니 말입니다.”
독일 제국과 빌헬름 2세의 중국에서의 평판?
이미 ‘훈 연설’까지 하며 중국에서 잔혹한 학살을 지시했던 카이저다.
여기서 더 떨어질 평판도 없다.
‘게다가 다른 유럽 나라들도 실제로 피를 보지 않는 이상, 빌리가 또 빌리 했네 하고 신경도 안 쓸걸?’
중국인 몇천, 몇만 명이 죽어 나가든 말든 백인들에겐 그저 가십거리에 불과한 일.
역겹지만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만약 그 제안에도 불구하고 삼궤구고두례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
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양성의 고개가 아래로 푹 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