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삼궤구고두례 (1)
독일 제국, 베를린.
“여기가 백림(柏林, 베를린)···.”
청나라 사절단과 함께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한 순친왕 재풍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대국인 독일 제국의 수도를 바라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을 딛은 구라파(歐羅巴, 유럽)의 도시인 함복(咸福, 함부르크)도 놀랄만한 대도시였지만, 이곳 베를린은 차원이 달랐다.
“우리는 이런 나라와 전쟁을 한 것인가.”
“전하···.”
“우리 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도 다 옛말이로구나.”
순친왕은 어쩐지 기가 질리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청이 전쟁에 패배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나라를 하나도 아니고 여덟이나 적대했으니 그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전하. 주눅들 것 같더라도 버티셔야 합니다. 독일인들이 전하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순친왕이 무거운 좌절감에 축 늘어지는 것만 같았던 순간, 옆에 있던 양성이 말했다.
“절대 얕보여선 아니 됩니다. 부디 용기를 내시옵소서.”
“···고맙네. 양성.”
충성스러운 신하의 말에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은 순친왕이 굳은 얼굴로 어깨를 폈다.
그 말이 맞다.
자신이 여기서 두려움을 보이면 보일수록 저들은 자신과 청을 얕보며 조롱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전하, 경호를 위해 밖에서 독일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네. 그럼 바로 황제를 만나러 가는 건가?”
순친왕의 물음에 양성이 독일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양성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제는 백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포주담(布朱淡, 포츠담)에 있는 황궁에 기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과 내일은 이곳에서 여독을 푸시고 이틀 뒤에 알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네.”
순친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황제를 만나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순친왕과 청나라 사절단이 역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밖에는 양성의 말대로 독일군이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봤던 독일 병사들과는 입고 있는 군복이 달랐지만, 흉흉한 분위기는 거기나 여기나 똑같았다.
순친왕과 양성은 긴장한 얼굴로 미리 준비된 마차 위에 올랐다.
“호텔로 모셔라.”
“예.”
마차 밖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 대화가 오고 간 뒤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그렇게 잘 닦인 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30분 후.
“도착했습니다.”
순친왕 일행이 탄 마차가 웅장한 외관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듣기론 구라파의 왕족과 귀족들도 자주 애용하는 숙소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럴만한 화려함이긴 하군.’
그게 너무 지나쳐 어쩐지 천박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마차에서 내린 순친왕은 속으로 자신의 감상을 내뱉으며 일행들과 함께 안내인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게 카이저께 사죄하러 온 칭의 황족인가?”
“역겨운 야만인 놈들. 중국에서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뻔뻔하게 돌아다니는군.”
호텔 안에 들어서자 양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혐오와 증오가 대놓고 묻어나오는 저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 좋은 뜻은 아닐 것이다.
“전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알고 있다.”
앞으로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이런 일들은 수도 없이 일어날 것이다.
수치스러워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이 땅에서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죄인이었으니까.
똑똑똑
“무슨 일이오?”
숙소에 짐을 풀고 피로한 몸을 침상에 누인 채 여독을 푸는 도중, 노크 소리가 들려갔다.
“전하. 독일 외무장관과 황제의 대리인이 전하와 만나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양성이 말했다.
“외무장관과 황제의 대리인?”
“아무래도 모레 있을 알현과 관련된 사항을 논의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순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미리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있었다.
“허락한다고 전하여라.”
“예. 전하. 다만 이곳에서는 논의를 진행하기에 불편하실 수 있으니 따로 공간을 마련하겠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어디든 호랑이 입속인 것은 똑같았다.
***
잠시 후.
순친왕과 순친왕의 외교 고문 겸 통역으로 논의에 참여하게 된 양성은 독일인 관리를 따라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멀리서 다과상이 마련된 한적하고 넓은 정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누기엔 딱 좋아 보였다.
“음?”
하지만 자신을 만나기를 청한 독일 외무장관과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자가 눈에 들어오자 순친왕의 얼굴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아이?”
그것도 자신과 같은 동양인 아이였다.
어째서 이런 자리에, 그것도 독일인들 쪽에 동양인 어린아이가 있는 것일까?
순친왕은 어찌 된 영문인지 묻기 위해 양성을 바라봤지만, 정작 양성도 저 아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이보시오. 분명히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은 귀국의 외무장관과 황제 폐하의 대리인이라 들었소. 그런데 저 아이는 대체 누구요? 누구인데 이 자리에 나온 것이오?”
당황한 양성이 자신들을 안내한 독일인 관리에게 물었다.
독일인 관리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말조심하시오. 저분이 바로 대독일 제국, 황제 폐하의 대리인이신 한스 폰초이 남작이시오.”
“뭐, 뭐요?!”
양성이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순친왕에게 독일인 관리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자, 순친왕 또한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다.
‘···설마하니 독일 황제가 나를 일부러 조롱하기 위해 벌인 짓인가?’
자신이 들은 황제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아, 귀국 측은 2달 넘게 배 위에 있었으니 모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런 순친왕의 의심은 이어진 독일인 관리의 말에 산산조각이 난 유리처럼 깨져버렸다.
“초이 남작은 황제 폐하의 목숨을 구한 자이자 총애를 받으시는 분이오. 이번 자리에 나온 것은 극동의 정세와 문화에도 잘 알기 때문이지. 뭐, 아무래도 인종이 인종이니 말이오.”
독일인 관리가 내심 자기 생각을 드러내며 그리 덧붙였다.
신분이 신분이고 뒷배가 뒷배이니 어쩔 수 없이 존칭은 하지만 인정은 아직 안 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 순친왕과 양성의 귀엔 관리의 말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은 이미 한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독일 땅에 황인 귀족이 있다니 내가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저도 전혀 몰랐사옵니다. 애초에 이 백인들의 땅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황인은 전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어린아이라니······.”
순친왕과 양성이 중국어로 그리 떠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릿속엔 어쩌면 이번 일이 좋게 끝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황제의 대리인으로 나온 저 아이는 어쨌든 우리와 같은 동양인 아닌가.
어쩌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까?
순친왕과 양성은 그런 작은 기대를 품으며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앞으로 나아갔다.
“머나먼 청에서 이곳 독일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전하. 독일 제국 외무장관 오스발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입니다.”
“독일 제국의 카이저이신 빌헬름 2세 폐하의 대리인을 맡은 한스 폰 초이 남작입니다. 대청국의 순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독일 측의 인사가 끝나자 이에 대한 대답으로 순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양성이 자신의 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전 전하의 외교 고문이자 통역을 맡은 양성이라 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서양인들을 많이 상대해본 외교관답게 양성이 능숙하게 한스, 그리고 리히트호펜 외무장관과 악수했다.
인사를 마친 양측이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자, 이윽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나저나 이 독일 제국에서 동포를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양성이었다.
양성은 본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자리의 변수가 될 수 있는 한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캐내고자 했다.
“그것도 무려 남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라니. 이 양성, 처음엔 두 눈과 두 귀를 의심했습니다. 하하하!”
“허허, 우리 독일에서도 떠들썩한 화제가 되었지요. 아니, 그렇소. 남작?”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양성의 웃음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곤 한스에게 잘 대답하라며 눈치를 주었다.
“카이저 폐하께 제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입은 것뿐입니다.”
한스는 그리 말하며 말을 이었다.
“다만 동포라는 말엔 어폐가 있군요. 저는 여러분과 피부색은 같지만 어디까지나 독일인이자 황제 폐하의 신하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비록 모시는 나라와 군주는 다를지라도 결국 피는 못 속이는 법이지요.”
한스가 자신들과 선을 그으려 하자, 양성이 그리 말하며 어떻게든 한스와 접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순친왕과 양성은 한가지 오판을 하고 있었다.
둘은 어디까지나 눈앞의 한스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독일 땅에 있는 황인이라고 하면 대개 일본 아니면 중국인이었고, 한스의 성씨인 초이는 일본식이 아닌 중국식 이름과 비슷하니 당연히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과 달리 한스는 중국과 일본, 그 어느 쪽 출신도 아니었다.
“하하, 피는 못 속인다라.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 몸에 여러분과 같은 피는 흐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조선’ 출신이거든요.”
“!”
조선이란 말에 양성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조선인이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리견이면 모를까 왜 그다지 연도 없는 독일에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인가?”
“초이 남작이 조선인이라고 합니다.”
“뭐? 조선?”
양성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순친왕의 눈이 커졌다.
그 역시 한스가 조선인이란 말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참고로 조선식 이름은 최한수라고 하지요. 어쩌다 보니 여기선 한스가 되어버렸습니다만.”
“하하, 그렇습니까?”
“朝鮮人勝過奸詐的日本人.”
양성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스의 조선인 커밍아웃으로 받은 충격을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있을 때, 순친왕이 양성을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중국어라 양성 말고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조선인이 간사한 일본인보다 낫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양성이 한스의 물음에 그리 대답했다.
순친왕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고, 양성이 이를 통역했다.
무려 한국어로 말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21세기 한국어와는 문법이나 표현에 차이가 있긴 했지만, 이 자리에서 한국어를 들을지는 몰랐기에 이번엔 한스의 눈이 동그래해 졌다.
“조선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려온 훌륭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서양의 흉내를 내며 조선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행패를 부리니 참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하, 예. 그 점엔 대해선 저도 전하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겠군요.”
한스가 오랜만에 한국어를 입에 담으며 미소 짓자, 순친왕의 얼굴이 밝아졌다.
“청과 조선은 예로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 이 자리에서도 그 관계처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다고도 하십니다.”
“물론입니다.”
한스는 순친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리히트호펜 외무장관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 고향과 청이 가까운 관계였으니 이 자리에서도 그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는군요.”
“노력은 가상하군.”
“중국인들의 오만이지요. 애초에 제 고향에서 일본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중국입니다.”
“흐흐, 그런가?”
짝!
몰래 코웃음을 친 리히트호펜 남작이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 남작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하는 게 좋겠습니다. 슬슬 본론을 시작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양성이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국은 지난해, 황제 폐하께서 파견하신 외교관인 클레멘스 폰 케텔러 공사(Clemens von Ketteler)를 잔인무도하게 살해하고 독일 국민을 향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를 인정하십니까?”
“예. 그 일에 대해선 순친왕 전하께서도 통탄을 금치 못한다고 전해달라 하십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에 대해 순친왕 전하께 사죄를 받고자 하십니다. 귀국은 이에 대한 이의가 있습니까?”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무엇이든 받아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양성이 무리한 요구는 못 받아들인다고 딱 잘라서 말하자, 리히트호펜 외무장관과 한스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청에 요구해야 할 것은 ‘무리한 요구’조차 따위로 만드는 ‘지나치게 과도한 요구’였기 때문이다.
“빌헬름 2세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황제 폐하의 요구 사항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결국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한스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선 순친왕 전하께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