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융커들의 나라
폭풍과도 같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장례식이 끝났다.
애도의 시간이 끝났으니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본래라면 순리.
그러나 베를린은, 아니 독일 전역은 때아닌 가십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포츠담의 동양인 소년, 독일 제국의 귀족이 되다!]
[남작이 된 황인종!]
[황태후의 유산을 물려받은 소년 남작!]
한스 초이.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목숨을 구한 자이자 최근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신문소설의 작가이기도 한 소년은 거대한 저택을 물려받은 것도 모자라 독일 제국의 ‘한스 폰 초이’ 남작이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독일 사회의 반응은 말 그대로 가지각색이었다.
“허. 황인종이 작위를 받아? 쯧쯧,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에잉~! 빌헬름 1세 폐하 시절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세로군. 말세야!”
“그러고 보니 그 소년이 카이저의 애첩이라는 소문이 있던데···혹시?”
대다수의 독일 상류층은 아침 신문을 보자마자 혀를 차며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전형적인 유럽 백인이었던 그들의 눈에 황인종이란 것은 흑인과 마찬가지로 열등한 존재였고 결코 백인과 같은 동일선상에 둘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황인종이 독일 제국의 귀족이 되었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을 떠나 결코 용납돼선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흑인이 백인과 동등하다는 말도 안 되는 농담보다 더 악질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카이저를 향해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온갖 음모론과 함께 한스가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 상류사회에 퍼졌던 빌헬름 2세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소년애에 빠졌다는 불건전한(?) 추문이 또다시 뒤따른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이거 봐. 한스 초이가 귀족이 되었다는데?”
“그게 누군데?”
“그 있잖아. 카이저를 구한 동양인 소년.”
“동양인이 귀족이 되든 개가 귀족이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일이나 가자고.”
다만 상당수의 독일 시민들은 이번 일에 놀라면서도 높으신 분들과 달리 생각보다 그리 격양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인종차별적인 시선은 여전했지만, 그들로선 황실의 일은 머나먼 구름 위의 일이나 마찬가지였고 언제나처럼 한스에 대한 가십과 뒷담화를 맥주 술안주로 삼는 것에 그쳤다.
애초에 동양인 하나가 귀족이 된다고 자신들에게 딱히 피해가 오는 것도, 그리고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많은 독일인이 이를 그저 카이저 빌헬름의 기행 중 하나로 여겼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누구는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자식들 끼니 챙기기도 어려운데 누구는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것도 모자라 귀족까지 되네.”
“부럽다. 부러워!”
또한 한스를 질투하는 자들도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잘나가는 사람에 대해 질시의 감정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그들이 보기에 한스가 프리드리히쇼프 성을 포함한 황태후의 재산을 물려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카이저의 총애 때문이었기에 배가 더 아플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스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인종주의에 부정적인 몇몇 사회주의자들이나 유럽식 인종차별에 기가 질려 있던 독일 내의 얼마 안 되는 동양인 유학생들은 한스가 귀족이 된 것에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전자는 엮여선 좋을 게 하나 없는 빨갱이였고, 후자는 정치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심지어 그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융커(Junker), 독일 제국 내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꽉 막힌 것으로 악명높은 프로이센 융커들이었다.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말이다.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카이저가 미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원숭이 새끼 따위를 고결하고 명예로운 독일 귀족의 일원으로 삼는단 말인가!”
빌헬름 2세가 한스를 궁에 들인 일?
백번 양보해서 그것까진 참을 수 있었다.
한스는 어린아이였고 적어도 그땐 카이저의 목숨을 구했다는 명분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스에게 귀족 작위를 내린 것은 선을 넘어도 세게 넘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융커들은 곧장 행동에 나섰다.
첫 번째 타겟은 역시나 만만한 뷜로 총리였다.
빌헬름 2세를 직접적으로 들이박는 것은 융커들에게도 부담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애꿎은 뷜로 총리 입장에서야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총리는 이를 막지도 않고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게요?”
“이는 제국의 권위에 먹칠하는 일! 우리는 그 동양인 꼬맹이에 대한 작위 수여를 인정할 수 없소!”
“옳소! 옳소!”
제국 의회, 라이히스탁에서 융커들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회에 출석하자마자 온갖 모욕 어린 언사를 들어야만 했던 뷜로 총리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썩어들어간 것은 덤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폐하께 라이히스탁의 의지를 전하시오. 이번 일에 대해 재고를 해달라 말이오!”
“적어도 한스 초이에게 주어진 작위는 수여를 취소하거나 박탈해야 하오!”
라이히스탁의 의지? 융커들의 의지겠지.
당장 프로이센 융커 출신들은 제외한 다른 의원들은 ‘저것들 또 시작이네’라고 말하는 듯한 짜게 식은 표정으로 이 촌극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철없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게 훨씬 낫겠군.’
그리 속으로 중얼거린 뷜로 총리는 인내심이 폭발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가며 독기 어린 목소리로 융커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하겠소.”
“뷜로 총리!”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당신이 그러고도 제국의 총리인가!”
“난 지극히 제정신이니 그 입들 좀 다무시오. 애초에 작위 수여는 황제 폐하가 가지신 고유한 권한. 폐하께서 누구에게 작위를 내리든 나나 라이히스탁에게 간섭할 권한이 없소.”
“뭐, 뭐요?!”
“지금 장난해!”
뷜로 총리의 말에 융커들의 어이가 말 그대로 나갔다.
융커들에게 한 방 먹인 뷜로 총리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고 말이다.
물론 독일 제국이 제대로 된 입헌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였으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제국은 사실상 입헌군주제의 탈을 쓴 전제군주국가였고 라이히스탁으로선 법적으로 문제가 전혀 없는 데다가 엄연히 카이저의 신성한 권리에서 나온 결정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뷜로가 나섰다면 모를까 그는 아예 융커들의 편을 들 생각은 없어 보였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는 독일 제국의 정치체제를 이용한 일종의 꼼수라고 할 수 있었고, 이에 당한 융커들은 핏발 선 눈으로 총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결국 총리께선 이 일을 방관하겠다, 그 소리요?!”
“제국의 법이 그런 것을 어쩌란 말이오. 불만이 있으면 그대들이 카이저 폐하께 가서 직접 청을 드리시오. 물론 폐하께서 그대들의 말은 들어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이, 이······!”
융커들은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가는 뷜로 총리를 향해 이를 박박 갈았지만 그렇다고 뷜로의 말대로 빌헬름 2세에게 직접 이 문제를 따질 용기는 없었다.
결국 융커들은 소득 없이 의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뷜로 총리에게 이번 일을 바꿀 의지가 없는 이상, 그들이 종일 떠들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다음 수를 쓰기로 했다.
융커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군부를 움직이려고 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 보게나.”
“각하!”
그러나 이번에도 융커들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몇 융커 출신 장성들이 군부의 수장인 참모총장을 찾아갔지만, 지금 독일제국 육군 참모총장은 슐리펜 백작이었고 슐리펜은 한스에게 우호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슐리펜은 자신의 전임자와 다르게 정치군인과는 거리가 매우 먼 사람이었다.
“군인은 군인의 일만 잘하면 되는 법. 군은 중립을 지킬 것이네.”
“하지만 이는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입니다!”
“고작 이런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제국의 근간이 흔들린다면 우리 독일은 진작에 망했네. 자네들이 이리 열 내는 이유는 알고 있지만, 의미 없는 일이니 허튼짓할 생각하지 말고 이만 돌아가 보게나.”
슐리펜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융커들은 고개를 떨구며 참모총장실을 나섰다.
군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슐리펜이 저리 나오는 이상, 그들로선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뷜로도 그렇고 슐리펜도 그렇고 어찌 다들 이리 이 일을 가볍게 여기는지!”
“이젠 정말 카이저께 직접 우리의 의지를 전하는 수밖에 없소.”
“하, 하지만 그랬다간 카이저의 진노를 사는 건 아닐지···.”
한스에게 불만을 가진 융커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 황인종 꼬맹이가 자신들과 같은 귀족이 되는 건 융커들로선 분명 자존심이 상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나섰다간 괜히 빌헬름 2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융커들 중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잃을 것이 많았으니까.
결국 일부 과격한 융커들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자를 끌어들입시다.”
“그자?”
“발더제 원수 말이오.”
“뭐요? 발, 발더제?!”
발더제란 이름에 융커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알프레트 폰 발더제 백작(Alfred Ludwig Heinrich Karl Graf von Waldersee).
전 육군참모총장이자 현 독일 제국군 원수.
그리고 그 카이저가 선녀로 보일 정도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다.
적어도 빌헬름 2세는 유대인들에게 반감이 있지도 않았고, 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을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아도 그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며 빨갱이 들처럼 때려잡아야 한다는 소리를 대놓고 지껄이고 다니지는 않았으니까.
만약 발더제가 8개국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 나가 있지 않았더라면 한스가 궁에 들어왔을 때 분명 사달이 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슐리펜은 뷜로 총리의 적극적인 동의를 받아 발더제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것을 최대한 늦추었다.
한스라는 기름이 흥건하게 끼얹어진 상황에서 발더제라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불꽃은 뷜로나 슐리펜이나 절대 사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달이면 드디어 의화단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가 체결된다.
발더제가 중국에 머물러있을 명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중국에 주둔 중인 열강의 군대들은 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일부를 제외하고 철수를 시작할 것이고 중국에 파견된 독일 원정군 또한 임무를 마치고 조국으로의 귀환할 것이다.
발더제 원수와 함께 말이다.
“그···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당신들도 알고 있지 않소. 발더제는 통제할 수 없는 자요.”
발더제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는 일부 융커들이 조심스럽게 발더제를 끌어들인다는 말에 우려를 표했다.
지금은 카이저의 신임을 잃고 몸 또한 노쇠해 예전보다 그 권력이 못하다지만, 발더제는 한때 그 비스마르크조차 경계했던 악명높은 정치군인.
잘못하면 빈대 하나 잡자고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꼴이 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잘 드는 칼은 자기 자신마저도 베어버리는 법이니까.
“게다가 발더제에겐 적이 너무 많소. 그를 끌여들였다간 괜히 문제만 커질거란 말이오.”
“이 문제는 역시 다시 생각해보는 게···.”
“그러면 당신들이 총대를 멜 거요?”
“크흠···.”
누군가의 빈정거리는 말에 발더제를 끌어들이는데 부정적이었던 융커들이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그럼 모두 동의한 것으로 알겠소.”
독일은 프로이센이 움직이고, 프로이센은 융커들이 움직인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랬으며, 미래에도 그래야 한다.
거기에 한스 폰 초이라는 노란색 이물질이 끼어드는 것을 융커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