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황태후의 선물
“재미있는 소년이었어.”
에드워드 7세가 한스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오랜만에 즐거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재미 반, 흥미 반으로 짖궂은 농담을 하는 노인처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일부러 던지며 그 아이의 본질을 볼 생각이었지만, 한스 초이란 소년은 자신의 예상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아이였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였습니까?”
“옛날에 비스마르크랑 만났을 때가 생각나더군.”
비스마르크.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솔즈베리 후작이 눈을 찡그렸다.
솔즈베리 후작 또한 그와 동시대를 산 인물로서 독일 제국의 철혈재상, 오토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가 어떤 인물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도 말이다.
‘두려우면서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외교의 천재.’
솔즈베리 후작도 존경하는 디즈레일리 총리 시절 외무장관으로서 비스마르크를 자주 상대해봤지만 언제나 그의 수완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렇기에 솔즈베리 후작은 에드워드 7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쿨럭, 비스마르크라니 농담이 지나치시는군요. 그래봐야 고작 황인종 소년 아닙니까.”
“로버트. 피부색 따위가 인간의 지성을 판가름하진 않는다네.”
당대인으로선 상당히 깨어있는 인물이자 인종차별에도 부정적이었던 에드워드 7세는 그리 말하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 비스마르크에 비하면 아직 한참은 모자라지. 하지만 세계정세를 보는 식견과 제 생각에 대한 확신은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네. 솔직히 섬뜩할 정도였어.”
“그 소년과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셨길래···.”
“영일동맹을 언급하더군.”
“!”
영일동맹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솔즈베리 후작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은 분명 영국 정부 내에서도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었을 터.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한스 초이란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단 말인가!’
“설마 기밀이 유출된 것은?”
“아니, 그건 아닐걸세. 오로지 그 아이 스스로 생각해서 내놓은 결론으로 보였다네.”
“허.”
“하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야. 우리 영국이 러시아에 위기감을 가지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티가 나더군.”
빌헬름 2세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유럽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외교능력을 갖춘 군주였던 에드워드 7세는 그리 웃으며 말했다.
영리하긴 하지만 자신과 같은 수준의 외교관을 상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성장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말이다.
“그 아이도 아는 게지. 러시아와 우리 영국이 계속 신경전을 벌여야만 독일에 유리하다는 것을.”
“9살짜리 애도 아는 걸 카이저만 모르고 있군요.”
“흐하하, 빌리는 내 친애하는 조카긴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나로서도 할말이 궁색하구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의 말을 그냥 ‘어린애의 가상한 노력’으로 취급할 순 없네.”
에드워드 7세가 소문난 골초답게 담배가 마려웠는지 입에 시가를 물며 말했다.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분명 러시아에 먼저 선제공격을 가할 것이라 하더군.”
“전쟁 말입니까?”
솔즈베리 후작이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군요. 아니, 그러고도 남겠죠. 지금의 일본 정부라면.”
한스의 말처럼 이미 자신들보다 체급이 훨씬 큰 청나라에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다.
호전적인 현 일본 정부의 성향을 생각하면 일본이 자신들의 대륙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 그래서 내가 그 아이의 식견 하나 만큼은 대단하다 칭찬한 거야.”
“폐하께선 일본이 러시아에 패배해 극동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경계하고 계신 겁니까?”
“그래. 일본이 러시아에 이길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지 않은가.”
솔즈베리 후작도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원 역사는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서양이 동양을 내내 압도하던 제국주의의 시대를 살아온 솔즈베리 후작과 에드워드 7세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 러시아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열강이었고, 일본은 이제야 나라 꼴을 갖춘 신흥국에 불과했다.
물론 처음엔 일본이 우세할 수도 있다.
주전장이 될 극동은 일본의 앞마당이었고, 러시아의 정예 병력은 죄다 유럽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에드워드 7세와 솔즈베리 후작은 러시아와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결국 일본이 패배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국력은 여전히 일본보다 훨씬 압도적이었고 영국의 지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러시아와 일본이 싸우는 거야 상관없네. 오히려 러시아와 한 판 붙어서 그들의 힘을 빼주면 우리야 좋지. 하지만 일본이 패배한다면? 그땐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나와버릴걸세.”
“으음···.”
솔즈베리 후작이 심각한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지난 세기 내내 러시아 제국이 대양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갖은 수를 썼던 영국이다.
그간의 노력을 모조리 수포로 돌릴 순 없었다.
“쿨럭! 알고도 당한다는 것은 역시 기분이 더럽군요.”
물론 자신들도 일본의 패배를 그냥 눈뜨고 지켜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듣게 된 이상, 영국으로선 러시아를 어떤 식으로든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솔즈베리 후작에게 상당히 기분이 찝찝한 일이었다.
“그 소년이 여기까지 계산했을까요?”
“그럴지도. 이미 프랑스라는 화려한 전적이 있지 않나.”
“아!”
솔즈베리는 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현재 프랑스에서 뜬금없이 재점화된 드레퓌스 사건과 이로 인해 발생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
그 시발점은 프랑스의 한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고, 그 인터뷰를 한 사람은 바로······.
‘한스 초이!’
“처음엔 뒤에 빌리가 있는 줄 알았지. 하지만 인제 보니 알겠어. 그건 한스그 녀석의 작품이야.”
“음험하군요.”
“그래. 딱 우리 스타일이지.”
“몸은 동양인인데 정신은 독일인이고, 혀는 영국인입니까. 키메라가 따로 없군요.”
한스가 들었다면 썩은 얼굴을 지을만한 발언을 태연하게 내뱉는 솔즈베리 후작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는 솔즈베리 후작의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내심 무언가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녀석이 굳이 나에게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을 텐데 왜 그런 거지?’
설마하니 정말로 선의에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에게 저지른 짓을 보면 한스 초이라는 소년은 그런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진 천사 같은 아이가 결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작은 악마 같은 녀석이었지.
그런 녀석이 자신의 패를 보여준다는 것은, 대부분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냥 블러핑이던가.
‘흐음, 모르겠군. 녀석이 굳이 그런 말을 해서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지 도통모르겠어.’
우리 영국을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걸까?
독일 제국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스 초이라면 글쎄···.
“지금은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로버트.”
“폐하?”
“그 아이는 그럭저럭 쓸만하면서도 재미있는 패야.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느긋하게 기다려보는 것도 나이 든 자의 특권 아니겠나.”
물론 그들이 패를 이용할지, 아니면 패에게 이용당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
1901년 8월 13일.
드디어 장례식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관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영국의 유니언 잭과 독일 제국의 흑백적기로 감싸져 있었다.
원 역사에선 흑백적기에 대한 언급 없이 관 위에 유니언 잭만 감싸서 매장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알고 있는데, 빌헬름 2세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그녀의 유언에도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준비! 조준! 발사!”
타타탕!
빅토리아 황태후의 관이 운구 마차에 실려 포츠담 평화교회(Friedenskirche)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3세의 영묘로 운구되는 모습을 시민들이 엄숙한 모습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호령 소리와 함께 의전대가 조포(弔砲)를 발사했다.
나와 빌헬름 2세를 비롯한 빅토리아 황태후의 가족들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마차의 뒤를 따라 걸으며 천천히 평화교회로 향했다.
이윽고 운구 마차가 평화교회에 도착하자 아들들인 빌헬름 2세와 하인리히 왕자, 그리고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빅토리아 황태후의 형제들이 황태후의 관을 들어 올려 교회 옆의 영묘로 운구했다.
“고인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독일 황실의 종교인 루터교회의 장례 절차에 따라 빅토리아 황태후를 위한 마지막 기도가 행해진 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빅토리아 황태후의 매장이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 형제의 영혼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맡기오며 그 육신을 대지에 안장하니,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리라.”
조용히 있던 에드워드 7세가 갑자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먼지에서 먼지로, 재에서 재로’라는 문구로 유명한 영국 성공회의 진혼시.
“······.”
이를 들은 빌헬름 2세는 흠칫 놀라면서도, 이내 어머니의 관을 바라보며 에드워드 7세의 진혼시를 묵묵히 듣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가 구원의 희망으로 영생하리라 믿나니. 주님께서 영광중에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에 대지와 바다는 그 죽음을 내어주리라.
주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에 두셔서 놀라운 일을 펼치시리니. 주의 품안에 잠든 그의 썩은 육신도 변화되어 주님의 영화로운 몸처럼 되리라. 시원에서 주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뼈로 이브를 만들었나니, 죽음은 시원으로 회귀하는 성스러운 의식이로다.
먼지에서 먼지로, 재에서 재로.
(dust to dust, ashes to ashes.)”
이윽고 에드워드 7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관위에 흙이 덮였다.
그녀는 이제 사랑하던 남편, 프리드리히 3세와 가슴에 묻은 어린 아들들과 함께 영원히 이곳에 묻혀있으리라.
“여러분, 잠시 떠나지 마시고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장례식이 끝나자 슬슬 황실 가족들과 조문객들이 평화교회에서 떠나려는 순간, 마르가레테 공주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생전 저에게 남기신 부탁에 따라, 지금부터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의 마지막 유언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르가레테?”
웅성웅성
갑작스러운 마르가레테 공주의 발언에 나도 놀라고, 빌헬름 2세도 놀라고, 모두가 놀랐다.
황태후의 마지막 유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께서는 이 유언의 증인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누님의 마지막 부탁이면 어쩔 수 없지. 그러도록 하마.”
에드워드 7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가라테 공주는 조심스럽게 빅토리아 황태후의 유언장을 꺼내 들었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에게.”
마르가레테 공주가 그리 말하며 서두를 놓았다.
“이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땐, 이미 내 장례식이 끝난 뒤이겠지. 그러나 나에게 후회는 없단다. 내 삶은 고난과 불행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어머니···.”
조피 왕세자비가 눈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마르가레테 공주 또한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유언장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이는 나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란다. 어느 날 내 곁에 찾아온 작은 친구 덕분이지.”
“응?”
“한스 초이.”
아니, 여기서 갑자기 내 이름이?
“내 친애하는 벗이자 사랑스러운 아이야. 너의 다정한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리 후련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없었겠지.”
“······.”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너에게 프리드리히쇼프 성을 비롯한 내 재산들을 물려주려고 한다.”
“예?”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내 자그마한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독일의 황태후이자 영국의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가.”
마르가레테 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전혀 작은 선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