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9화 (19/193)

19화 : 피스메이커 에드워드

“뚱보 에두아르트께서 오셨군.”

“황태자 전하?”

에드워드 7세가 장례식장에 나타나자 빌헬름 황태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예전에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내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빌헬름 황태자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빌헬름 2세는 에드워드 7세를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후와는 다른 방향으로 혐오했다고 하던가.

심지어 원 역사에서 자기 외삼촌한테 사탄이라고 패드립을 날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빌헬름 2세도 뒤에서나 구시렁댔지, 정작 에드워드 7세 앞에선 끽소리도 못 냈다지.’

유럽 왕족들에게 에드워드 7세의 영향력과 위상은 그만큼 대단했다.

또한 에드워드 7세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진 않았지만, 뛰어난 외교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영국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 훌륭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모 빌모씨와는 다르게 말이다.

당장 제1차 세계대전의 구도를 결정지은 영불협상이 성사된 것도 프랑스인들의 호감을 산 에드워드 7세의 활약 덕분이었다.

피스메이커 에드워드.

영국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이 저물고 대영제국에 황혼이 찾아오기 시작한 시절, 영국이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게 만든 자신들의 국왕을 존경을 담아 그리 불렀다.

물론 에드워드 7세에게 집중 견제당한 카이저와 독일인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독일에 반대한다고 에드워드 7세를 매우 싫어했지만 말이다.

“아, 한스. 여기 있었구나.”

“···조피 왕세자비님?”

내가 잠깐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조피 왕세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빅토리아 황태후의 일 덕분인지 나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남편이 너와 만나보고 싶다는구나.”

“왕세자 전하께서 말입니까?”

조피 왕세자비의 남편이면 분명 그리스 왕국의 왕세자인 콘스탄티노스 1세다.

그 사람이 대체 나에게 무슨 볼일일까?

나는 순순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피 왕세자비를 따라갔다.

“오. 소피아가 입이 닳도록 칭찬한 그 소년이 바로 너로구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유창한 독일어 실력을 자랑하며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왕세자는 독일 제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근위대로 복무한 적도 있는 인물.

독일어를 잘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스 왕국의 디아도코스(왕세자)를 뵙습니다.”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덕분에 장모님이 웃는 얼굴로 영면에 드실 수 있었다지?”

“저는 그저 카이저 폐하와 황태후님의 등 뒤를 밀어드린 것 말곤 한 것이 없습니다.”

“하하. 겸손한 아이구나. 아, 하지만 내가 너를 보자는 건 그 때문이 아니다.”

“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왕세자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책이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제목의 책 말이다.

[불멸의 리 제독]

‘이게 여기서 왜 나와?’

심지어 그리스어 번역본도 아닌 찐 오리지널 독일어 버전이었다.

애초에 해외판이라고 해봐야 영어판이 다였지만 말이다.

“몇몇 서적상이 개인적으로 들여온 것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게 읽다 보니 날이 밝는 줄도 모르겠더구나. 하하하!”

서적상이라.

어째서인지 해외에서도 팬레터가 날아오더니만 그놈들 때문이었나.

“사인 좀 해주겠나?”

“물, 물론입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왕세자에게 단행본을 건네받았다.

왕세자가 직접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다.

“아, 그런데···.”

펜이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연필이나 만년필이라도 챙기고 다닐 걸 그랬다.

“여기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내 곤란을 눈치챘는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의 일행 중 하나가 나에게 펜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사람 손에도 내 책이 들려있는 것일까.

“팬입니다.”

펜을 빌려준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싱글벙글한 웃음을 지었다.

그 뒤를 바라보니 한 대여섯 명 되는 사람이 대체 어디서 꺼냈는지 다 똑같은 책을 가지고 줄을 서 있다.

대체 어디까지 내 책이 퍼진 거야?

이러다 무슨 음모론의 주인공이 될 판국이다.

'불멸의 리 제독은 유럽 왕족들의 비밀 커넥션이 존재했단 증거다!' 하고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오, 고맙네!”

졸지에 장례식장에서 사인회를 열게 생긴 나.

심지어 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제발 착각이길 빈다.

“호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구먼.”

“?!”

정신없이 책에 서명하는 도중,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사인본을 들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랑 그런 남편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조피 왕세자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에드워드 7세 폐하.”

“외숙부님.”

“콘스탄티노스. 조피. 오랜만이구나. 다들 잘 지냈느냐?”

“예. 덕분에······.”

“그거 잘됐군! 그럼 잠깐 이 친구 좀 빌리겠다.”

“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이해되지 않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날 어디론가로 데려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반갑구나. 한스 초이!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영국 국왕이신 에드워드 7세 폐하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래, 그래. 사실은 그런 거창한 칭호보단 그냥 에드워드라고 불리는 걸 더 좋아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영어를 잘하는구나?”

“어렸을 때 배울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그냥 에드워드께서 대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 이런 한적한 곳으로 데려온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영국이 믿을 수 없는 혐성국이란건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

그리고 에드워드 7세는 그 영국의 국왕이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내가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내 개인 비서인 프레데릭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 내 누님을 위해 큰일을 해주었다지? 가족으로서 고맙구나.”

“아, 아닙니다. 그런데 프레데릭이요?”

“폰슨비 말이다.”

‘폰슨비 경이 에드워드 7세의 개인 비서였어?’

전혀 몰랐다.

물론 영국 귀족이란 것은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영국 왕실을 모시던 사람이었을 줄이야.

‘어쩐지 날 관찰하듯이 바라보더니 그 때문이었나?’

대모인 황태후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프리드리히쇼프에 온 김에 겸사겸사독일 황실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는지 감시라도 했던 것이겠지.

에드워드 7세라면 변덕스러운 조카가 이끄는 독일 제국이 영국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폰슨비 경이 저에 대해 무슨 안 좋은 말이라도 하셨습니까?”

“널 주의하라고 하더구나. 우리 영국에 위협이 될지, 이득이 될지 판단이 안서겠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것참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군.

아무래도 폰슨비 경이 빅토리아 황태후와 대화를 멀리서 엿듣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때 내가 신이 나서 이것저것 좀 떠들긴 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그리 말한 에드워드 7세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왕의 눈동자는 호선을 긋고 있는 입가와 달리 진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넌 어느 쪽이냐?”

영국의 적인가. 아니면 아군인가.

나는 에드워드 7세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에 일부러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야 국왕 폐하와 카이저 폐하의 의중에 달리신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잘 빠져나가는구나. 결국 두 제국의 외교관계에 따라 다를 것이란 말이렷다?”

“영국이 독일이 적이 되지 않는다면 제가 영국의 적이 될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독일 제국 스스로 우리 영국의 적이 되어가고 있지 않으냐?”

“···카이저 폐하의 외교적 판단이 좀 성급하시긴 하시죠.”

우리 카이저는 없는 적도 스스로 만드는 인간이니까.

슬프게도 말이다.

“하지만 적은 적을수록 좋고,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법 아니겠습니까?”

“허, 이 독일 제국에서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이군.”

“게다가 영국이 당장 독일을 적대할 이유도 없지요. 저 동토의 거대한 불곰때문이라도 말입니다.”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냉전(Cold War)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펼쳐진 영국과 러시아 간의 대립은 19세기를 지나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에드워드 7세가 한 대 맞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그것참 아픈 곳을 찌르는군. 그래, 우리로선 아직 러시아 때문이라도 독일을 적으로 돌리긴 힘들지. 만에 하나라도 독일과 러시아가 손을 잡았다간 큰일이 날 테니 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독일이랑 러시아가 오헝제국을 반갈죽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이야기다.

‘하지만 영국은 아직 러시아를 과대평가하고 있지.’

러시아 제국이 겉만 강해 보이지 사실 땅만 큰 병신이었단 사실은 1904년, 러일전쟁 때 가서야 알려진다.

‘괜히 그 해에 영불협상이 탄생한 것이 아니야.’

프랑스는 자신의 유일한 동맹이란 놈이 일본 따위에게 얻어터지자 기겁하며 어떻게든 새 동맹을 찾으려 했고 영국도 이젠 러시아를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판단에 그 동맹국이던 프랑스에 손을 내밀었던 것이 그 배경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나중에 영국이 러시아와도 영러협상을 맺으면서 삼국협상으로 이어진다.

독일 제국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나에게 있어선 참으로 곤란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한번 찔러볼까.’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깐 채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예. 게다가 극동에서도 러시아의 확장 행보는 멈출 기미가 안 보이니 말입니다. 영국으로선 걱정이 크겠군요.”

“중국에서 복서 반란(의화단 전쟁, Boxer Rebellion)을 마무리하기 위한 조약이 체결되면 러시아인들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날 거야.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명분은 어디까지나 복서 반란의 진압이니.”

“폐하. 설마 진심으로 그리 믿고 계시는 겁니까?”

“호오.”

별 재미있는 소리를 다 한다는 듯, 에드워드 7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럼 한스, 네 생각은 다르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폐하. 아시다시피 러시아 제국의 영토 욕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들은 절대로 중국에서의 확장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와 영국 정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죠.”

“그렇다 해도 우린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다만?”

“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러시아 제국을 저지하려 하시겠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에드워드 7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영국은 자신들을 대신해 러시아에 대적할 챔피언을 구하려고 하겠지요. 가령 이번엔 일본이겠군요.”

“!”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던 에드워드 7세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의 감정이 떠올랐다.

물론 나야 내년에 영일동맹이 체결되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지금 영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일본밖에 없기도 하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에 적대적이면서 적당히 강하고, 무엇보다 영국에 위협이 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당장은 말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습니까?”

하긴 영일동맹은 영국인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영국 정부 입장에선 발표 전까진 비밀로 하고 싶을 거다.

“다만 빅토리아 황태후님을 생각해서 조언을 하나 해드리자면 일본과 동맹을 맺더라도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진 마십시오.”

“일본을 신뢰하지 말아라?”

“영국이 ‘만약’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극동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하지만 일본이 과연 그것으로 만족할까?

그 일본이?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겁니다.”

“···뭐?”

상식인인 에드워드 7세로선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야 현실적으로 일개 지역 강국에 불과한 일본이 그 러시아 제국과 진심으로 전쟁을 벌일 것이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영국은 일본이 결국엔 러시아에 패배할 것으로 생각했지.’

하지만 이 시대의 대일본제국에 상식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다.

“그게 말이 되는가? 일본이 진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일본은 오랫동안 대륙진출을 꿈꿔왔고, 또한 제 고향인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그들의 야욕을 가로막고 있죠.”

“흐음.”

“폐하, 일본인들은 이성과 상식으로 움직이지 않는 충동적인 족속들입니다.

당장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을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상황은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것이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