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8화 (18/193)

18화 : 장례식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가 영면에 든 지 며칠 후.

포츠담 상수시 궁전에서 빅토리아 황태후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추모 분위기 속에서 독일 전역에 조기가 게양되었고, 황실의 친척들과 독일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제후국의 군주들을 비롯한 수많은 독일의 왕족과 귀족들이 빅토리아 황태후를 추모하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황태후 마마의 서거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폐하.”

뷜로 총리와 내각의 각료들이 상주인 빌헬름 2세를 향해 황태후의 죽음을 애도했다.

오랜만에 보는 슐리펜과 티르피츠를 위시한 군부 인사들이 그 뒤를 이었고, 라이히스탁의 의원들과 재계의 거물들도 조문을 위해 장례식장을 찾아왔다.

하지만 조문 행렬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직 황태후의 모국인 영국을 비롯한 외국의 왕족들과 사절들이 장례식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 도착하고 난 뒤에야 8월 13일에 장례식의 마지막 절차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13일이 되면 빅토리아 황태후의 관은 상수시 궁전을 떠나 프로이센 왕실 교회이자 포츠담 평화교회(Friedenskirche)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3세의 영묘로 운구될 것이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 그리고 요절한 어린 아들들과 함께 안장되면서 비로소 장례식이 끝난다.

“하암, 장례식은 언제쯤 끝나려나.”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시죠. 루이제 공주님.”

빅토리아 루이제가 며칠 동안 계속되는 장례식이 지루해졌는지 입을 삐죽이자, 옆에 있던 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 황실 가족들과 함께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물론 어린애에 불과한 나나 요아힘, 루이제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의 역할은 뭐라고 해야할까, 어른들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일종의 장식품(?) 같은 거였다.

“한스, 넌 지루하지도 않아?”

“글쎄요. 사람 구경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덜하네요.”

게다가 이런 규모의 장례식은 전생에서도 겪어본 적 없었고 말이다.

웅성웅성

“이런, 누가 오셨나 보네요.”

“일어서야겠네.”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의자에 앉아있던 나와 루이제가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은 장례식에 높은 분이 오셨다는 뜻과 같은 소리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서둘러 다른 왕자들의 옆에 서서 조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스 왕국의 디아도코스(왕세자)이시자 스파르타의 공작이신 콘스탄티노스전하이십니다.”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곧 멋들어진 콧수염의 중년 신사가 수많은 사람을 대동한 채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장남이자 조피 왕세자비의 남편인 콘스탄티노스왕세자.

훗날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Κωνσταντ?νο? Α?)란 이름으로 더 유명해지는 인물이다.

“왔는가. 콘스탄틴.”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빌헬름 2세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악수하며 매제를 반갑게 맞이했다.

“소피아(조피)는 좀 어떻습니까?”

“힘들어하지만 잘 버티고 있네. 저쪽에 있으니 어서 가보게나.”

빌헬름 2세의 말에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아내에게 갔다.

조피 왕세자비는 남편을 보자마자 포옹하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나누었다.

“애도를 표합니다. 폐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왕세자비에게 가자, 왕세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제히 카이저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리스 왕국에서 빅토리아 황태후의 조문을 위해 파견한 사절단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빌헬름 황태자를 비롯한 왕자들 쪽에도 인사를 하곤, 자신들의 왕세자비에게도 애도를 표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압뒬하미트 2세(II. Abdulhamit) 폐하의 장남이신 세자데(황자) 메흐메트 셀림(?ehzade Mehmed Selim) 전하이십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외국 조문 사절단이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그리스 사절단의 얼굴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일그러졌다.

마치 외다리 나무에서 원수라도 만난 것 같은 얼굴이다.

진짜 원수긴 하지만 말이다.

“폐하. 아버지를 대신하여 폐하와 독일 제국에 애도를 표합니다.”

“고맙소. 황자. 오스만 제국이 보여준 우정은 내 잊지 않을 것이오.”

빌헬름 2세에게 인사를 마친 오스만 사절단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리스 사절단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은 그리스 왕국보단 오스만 제국에 우호적이었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그리스 사절단의 얼굴은 더 험악해졌고, 주변을 의식했는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주의를 시키고 나서야 표정이 풀렸다.

남의 장례식에서 이러지 마. 이것들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이신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루트비히 요제프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Erzherzog Franz Ferdinand Carl Ludwig Joseph Maria von Osterreich-Este) 대공이십니다.”

잠시 후,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의 뒤를 이어 사라예보 사건의 주인공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참석을 시작으로(이때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차례대로 외국의 조문 사절단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대공이신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니콜라이 2세의 남동생,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전하이십니다.”

“불가리아 공국의 공작이신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카를 레오폴드 마리야 삭스코부르고츠키(페르디난트 1세, Фердинанд Максимилиан Карл Леополд Мария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 전하이십니다.”

“네덜란드 왕국 빌헬미나 여왕 폐하의 부군이신 하인리히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Hendrik van Mecklenburg-Schwerin) 대공자이십니다.”

“벨기에의 왕위계승자이신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공이······.”

어디서 들어본 이름들도 있고, 못 들어본 이름들도 있다.

이들 중 누군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군이 되고, 누군가는 적이 되겠지.

씁쓸하지만 그것이 바로 20세기란 현실이었다.

“···폐하. ‘그분’이 오셨습니다.”

“으음.”

한참 조문 사절들을 맞이하던 빌헬름 2세가 시종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올 것이 왔군.”

이윽고 카이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 중 가장 거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에드워드 7세(His Majesty Edward VII, by the Grace of God, King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and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Defender ofthe Faith, Emperor of India) 폐하이십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남동생.

배불뚝이(Tum-Tum) 에드워드의 등장이었다.

***

“결국 누님께서 눈을 감으셨구나.”

대영제국, 런던 버킹엄 궁전.

빅토리아 황태후가 서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폰슨비 경이 보낸 전보를 받아들고 슬픈 얼굴로 그리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었다.

에드워드 7세는 이미 누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의 죽음을 직감하고 반년 전에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왔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을 잃은 슬픔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도 너무하시지. 어머니가 눈을 감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누님까지 데려가는구나.”

“쿨럭, 이런 때일수록 굳건히 있으셔야 합니다. 폐하.”

“알고 있네. 로버트.”

영국 제49대 총리,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개스코인세실(Robert Gascoyne-Cecil)의 말에 에드워드 7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왕세자 시절을 보낸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그림자는 여전히 거대했다.

영국인들은 에드워드 7세가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을 이어나갈지, 아니면 대영제국의 황혼을 상징하는 군주가 될지 아직 걱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에드워드 7세는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어만 했다.

“음. 가능하면 나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다만 웨일스 공께선···.”

“그래. 조지는 아무래도 참석이 힘들겠지. 지금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 말이야.”

영국의 왕세자이자 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웨일스 공, 조지는 현재 대영제국 순방을 위해 해외에 나가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장례식에 참석하는 건 무리였다.

“조문 사절단을 꾸밀 준비도 해야겠군요.”

“그래. 다름 아닌 누님의 장례식이니 최대한 성대하게 준비하게나.”

“예. 폐하.”

대영제국의 프린세스 로열이란 이름이 가지는 위상은 그만큼 컸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영국의 사절단이 초라해서야 얼굴의 먹칠만 하는 꼴이다.

“내각 쪽에선 누가 갈 것인가?”

“제가 갈 생각입니다.”

“로버트 자네가 직접?”

에드워드 7세는 놀라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솔즈베리 후작의 건강 상태는 막말로 좋은 편이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

사실상 현 내각도 차기 총리로 유력한 아서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가 외삼촌인 솔즈베리 후작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이끄는 판국.

에드워드 7세는 이번 방독이 솔즈베리 후작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했다.

“그 몸으로 괜찮겠나? 차라리 자네 조카와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쿨럭쿨럭!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공주님의 장례식이 아닙니까. 저도 참석하고 싶습니다.”

솔즈베리 후작의 고집에 에드워드 7세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 늙은이의 고집을 꺾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그리고 폰슨비 경의 전언도 신경 쓰이니 말입니다.”

“그렇군.”

확실히 그건 에드워드 7세도 신경 쓰이긴 했다.

“설마하니 빌리 녀석이 누님에게 마음을 열 줄이야.”

프리드리히쇼프 성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도 누나와 조카의 관계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물론 누님이 마지막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는 건, 남동생으로선 다행인 일이지만 에드워드 7세로서도 이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것이 ‘한스 초이’란 동양인 소년이라.”

“얼마 전 런던에서도 화제가 되었지요.”

조카 빌헬름 2세를 무정부주의자의 총탄으로부터 구한 황인종 소년.

이것만 해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굶주려있는 런던 시민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인데, 그도 모자라 조카는 무슨 생각인지 그 소년을 직접 거두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영국인들이 해가 서쪽에서 뜬건 아닌지 의심했다.

빌헬름 2세가 황화론이란 이상한 사상에 빠져있던 건 영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프레데릭은 그 아이를 주의하라더군. 영·독 관계에 무슨 변수가 될지 모르는 위험한 아이라고 말이야.”

“제 생각엔 너무 호들갑을 떤 게 아닐까도 싶습니다만.”

“그거야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지.”

에드워드 7세는 그 흥미로운 소년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장례식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물론 당장 한스 초이를 만날 순 없었다.

그전에 우선 자신을 보자마자 눈앞에서 대놓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카부터 처리해야 했다.

“오랜만이구나. 빌리!”

“···오셨습니까. 외숙부님.”

에드워드 7세와 빌헬름 2세가 어색한 포옹을 나누었다.

“프레데릭한테 이야기는 들었다. 누님과 결국 화해했다지?”

“화해까지는 아니고 그냥 서로에 대해 이해한 것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어쨌든 잘된 일이구나. 매형도 천국에서 기뻐하고 있을 거다.”

입에 발린 말에 기분이 살짝 좋아졌는지 조카 빌리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여전히 알기 쉬운 녀석이다.

“그나저나 둘이 화해한 건 한스라는 소년 덕분이라고 들었다.”

“예?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구나. 어디 있지?”

한스의 이름이 나오자 빌헬름 2세가 무슨 꿍꿍이냐며 외삼촌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에드워드 7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저기 있군!”

장례식장을 두리번거리던 에드워드 7세는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카사위인 그리스 왕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인상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군.’

특별해 보이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피부색과 동양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카락과 눈동자 정도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알겠지.’

그리 속으로 중얼거린 에드워드 7세는 유쾌하게 미소 지으며 한스를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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