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임종
그날 이후.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황태후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프리드리히쇼프 성에 오고 나서 얼굴이 펴질 일 없었던 카이저의 얼굴은 답답하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해소된 듯 상당히 편안한 표정을 지었고, 까칠했던 빅토리아 황태후도 상당히 부드러워진 모습을 보였다.
“하. 진짜 돼지가 하늘을 날게 생겼네. 아버지랑 할머니가 싸우지 않고 서로 웃으시며 대화하는 것을 보다니. 한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황태자 전하. 전 그냥 두 분의 등을 살짝 밀어준 것뿐입니다.”
“고작 그런 걸로 아버지와 할머니가 저렇게 바뀐다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필요했던 일이니까요.”
“어머니와 고모님들이 너에게 고마워하더라. 그 누구도 못 한 일을 네가 해냈다고 말이야.”
하긴 아우구스테 황후를 비롯한 다른 황실 가족들이라면 빌헬름 2세와 빅토리 아 황태후에게 나처럼 대놓고 그런 말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성격이 보통 성격이 아니다 보니, 다들 카이저와 황태후를 두려워해 그 둘을 대하기 어려워했으니 말이다.
“다만 샤를로테 고모님은 이런 분위기가 그다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만.”
“그렇습니까.”
“뭐 그다지 신경 쓸 거 없어. 고모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
빌헬름 황태자가 그리 말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빌헬름 황태자도 처음엔 나를 별로 안 좋아했지.’
지금은 이렇게 서로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이지만 말이다.
꼬르륵~
“음. 슬슬 배고파지네. 한스, 지금 몇 시냐?”
“11시 반쯤 되었습니다. 전하.”
나는 허리춤에 매단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처음엔 고풍스러워 보이는 외양이 마음에 들어서 산건데, 이거 생각보다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 힘들다.
손목시계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으려나?
“그래? 그럼 이만 성으로 돌아가자.”
“예.”
“빌헬름! 한스!”
고개를 끄덕이며 프리드리히쇼프 성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마르가레테 공주가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쩐지 불길함을 느꼈다.
“마르가레테 고모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그건 빌헬름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빌헬름 황태자는 굳은 얼굴로 묻자 마르가레테 공주는 숨을 헐떡거리며 우리를 향해 외쳤다.
“빨리, 빨리 성으로 돌아오렴!”
“예?”
“어, 어머니가···!”
마르가레테 공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충격과 두려움으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신이시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한 황태자가 그리 중얼거렸다.
결국 그날이 오고 말았다.
***
“할머님!”
“황태후 마마!”
“쿨럭, 쿨럭···. 아, 드디어 왔구나.”
마르가레테 공주를 따라 급히 프리드리히쇼프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린 빅토리아 황태후의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난 황태후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명 아침만 해도 평소처럼 괜찮아 보였던 분이, 지금은 급격히 쇠약해진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한계에 달한 것처럼.
“···아무래도 때가 된 모양이구나.”
빅토리아 황태후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황태후의 곁을 지키고 있던 아우구스테 황후와 빅토리아, 그리고 조피 공주가 눈물을 흘렸다.
빌헬름 2세와 하인리히 왕자도 눈물만 안 흘릴 뿐,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얼굴이었다.
샤를로테 공주는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마르가레테. 우리 막내딸.”
“어머니.”
마르가레테 공주가 눈시울을 붉히며 어머니의 가냘픈 손을 잡았다.
그 옆에는 어느새 왔는지 마르가레테 공주의 남편이자, 이 자리에 있는 빅토리아 황태후의 유일한 사위인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카셀 방백이 슬퍼하는 아내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주고 있었다.
“지금처럼 언제나 남편,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화목하게 지내거라. 가장 소중한 건, 언제나 가족인 법이니까.”
“네.”
“프리드리히 카를. 자네는 언제나 좋은 사위였지. 마르가레테를 앞으로도 아껴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장모님.”
훗날 짧게나마 핀란드 국왕이 되기도 하는 프리드리히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재감이 좀 없긴 하지만 마르가레테 공주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인 만큼, 별다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마르가레테. 내가 너에게 맡긴 것을 잘 부탁한다.”
“예.”
그리 말한 빅토리아 황태후는 시선을 다섯째 조피 왕세자비에게 향했다.
조피 왕세자비는 슬픔을 추스르지 못하는 것이, 혹시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내가 다 걱정될 정도였다.
“조피. 너는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무척이나 슬퍼했지. 너에겐 힘든 시간이 되겠구나.”
“흑···. 어머니······.”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언제나 굳세게 있어야 한다. 네가 있는 자리는 그런 자리니까 말이다.”
“네···.”
조피 왕세자비가 한때 독일의 황태자비였던 여인의 충고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리아 황태후는 차녀인 빅토리아 공주와도 짧게 이야기를 나눈 뒤, 둘째 아들 하인리히 왕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하인리히.”
“네. 어머니.”
이번엔 하인리히 왕자의 차례였다.
“네가 어린 시절, 나는 너에게 언제나 게으르고 어리석은 아이라고 혼을 냈었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자꾸 딴짓만 한다고 말이야.”
“하하, 그러셨죠.”
“하지만 내가 틀렸단다.”
“!”
“넌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란다. 훌륭하게 커 주어서 고맙구나.”
“어머니이······.”
하인리히 왕자가 그 말에 울컥했는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샤를로테.”
“···네. 어머니.”
샤를로테 공주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많은 말은 안 하마. 페오도라를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해주거라. 하나뿐인 딸이잖니. 나중에 네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결국 가족밖에 없단다.”
“하아, 알겠어요.”
샤를로테 공주가 한숨 쉬며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남매들과 달리 그리 귀담아듣는 표정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빌헬름.”
“네, 어머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빌헬름 2세의 차례가 되었다.
그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지만 슬픈 기색을 지울 순 없었다.
‘만약 원 역사였다면 샤를로테 공주와 비슷한 태도였겠지.’
“너와 겨우 마음을 열고 지내게 되었거늘, 주께서 나에게 조금 더 시간을 허락해주시지 않은 것이 안타깝구나.”
“어머니···.”
“빌리. 내 아들아. 앞으로 너의 앞을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가로막을 것이란다. 예전에는 네가 그것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습니까.”
두 모자가 피식 웃으며 어째서인지 나를 바라봤다.
어깨가 한결 더 무거워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이리 오거라. 한스.”
“예. 황태후 마마.”
“너에겐 고맙다는 말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
“앞으로도 빌리를, 내 가족을 잘 부탁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빅토리아 황태후는 그리 말하곤 내 손을 쓰다듬었다.
전과는 달리 상당히 차가워진 손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콜록콜록! 어머니, 프리드리히, 지기스문트, 발데마르···.”
이제 곧 만나러 갈 수 있겠군요.
빅토리아 황태후는 그리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는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1901년 8월 5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는 사랑했던 남편과 어린 아들들의 곁으로 떠났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은 채.
***
“폐하. 애도를 표합니다.”
“고맙네. 프레데릭.”
빅토리아 황태후의 대자, 프레데릭 폰슨비 경은 침울한 얼굴의 카이저를 위로 하며 존경하던 대모님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황태후가 영면에 든 후, 프리드리히쇼프 성 전체가 슬픔에 잠겨있었지만, 황실 가족들에게 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피와 피로 연결되어있는 유럽 왕실의 특성상, 왕족의 죽음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는 유럽의 할머니라 불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가장 사랑하던 장녀.
전 세계의 왕족과 정부 관료들이 조문을 위해 독일에 방문해올 것이 분명한만큼, 이제 빌헬름 2세와 그 가족들은 황태후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럼 이제 각국 왕실과 정부에 대모님의 부고를 알려야겠군요.”
“음.”
“그럼 영국 왕실과 정부엔 제가 대신 알려도 되겠습니까? 정부에서 알리는 것보단 그편이 더 나을 테니까요.”
“알겠네. 그럼 부탁 좀 하지. 프레데릭.”
빌헬름 2세는 그리 말하며 수고해달라는 듯, 폰슨비 경의 어깨를 탁탁 두들겼다.
“······.”
이내 카이저가 내각에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떠나자, 폰슨비경의 얼굴에 대모를 잃은 대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냉철한 영국 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모님의 죽음은 분명 슬픈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분이 돌아가신 만큼 폰슨비 경도 제 본분을 다해야 할 시간이었다.
“호텔로 가지.”
“예. 나리.”
프리드리히쇼프 성에서 나온 폰슨비 경은 곧장 마차에 올라타, 자신이 머물고 있던 크론베르크의 호텔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폰슨비 경. 평소와는 달리 일찍 들어오셨군요.”
방에 도착하자 폰슨비 경의 하인들이 폰슨비 경을 반갑게 맞이했다.
“프린세스 로열께서 영면에 드셨네.”
“!”
그러나 폰슨비 경이 전한 소식에 하인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둡게 변했다.
그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자신들의 보물이었던 대영제국의 자랑,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를.
그런 그녀가 마침내 눈을 감았다는 건 그들에게 무척이나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본국에 소식을 전하셔야겠군요.”
“그렇네. 바로 전신을 보낼 준비를 하게나.”
폰슨비 경의 말에 하인들, 아니 영국 왕실의 하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폰슨비 자신은 그사이에 본국에 보낼 정보를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임무는 황태후의 임종을 지킴과 동시에 독일 황실과 카이저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지 비밀리에 관찰하는 것.
그다지 신사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폰슨비 경은 순도 100% 영국인답게 영국과 영국 왕실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더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던 프리드리히쇼프에 최근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설마하니 그 카이저가 대모님께 마음을 열고 앙금을 풀었을 줄이야.”
폰슨비 경이 중얼거렸다.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황태후의 사이는 그도 잘 알았다.
당장 몇 달 전, 대모님의 부탁으로 카이저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대모님의 개인 서신들을 영국으로 비밀리에 옮긴 것이 바로 폰슨비 경이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두 모자의 관계는 결코 정상적인 가족의 관계가 아니었다.
물론 대부분의 유럽 왕실이 그렇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한 동양인 소년 때문에 말이다.
“한스 초이······.”
영국에선 빌헬름 2세를 암살자로 구해낸 동양인으로 유명한 소년.
카이저와 황태후의 관계가 개선된 것은 그 소년 때문이었다.
첫인상은 그저 황인종치고 말끔하게 생겼다 싶었다.
하지만 그가 프리드리히쇼프에 도착한 날로부터 그를 계속 지켜보면서 관찰한 결과, 한스 초이는 결코 평범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냐. 그건.”
똑똑한 아이가 있을 순 있다.
하지만 한스 초이는 똑똑해도 지나치게 똑똑했다.
대체 뭔 놈의 꼬맹이가 군주제와 민주주의의 한계와 미래를 논하고, 헤겔과 토마스 밀의 말을 인용한단 말인가.
‘분명 나이가 만 9살이라고 했지?’
영국 최악의 복마전이라 할 수 있는 영국 의회 한가운데 던져놔도 멀쩡하게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녀석이 고작 9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됐다.
‘카이저는 대체 궁에 뭘 들인 거야?’
독일 황실과 영국 왕실 간의 연결고리였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의 죽음으로 영·독 관계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할 것이다.
카이저의 외가에 대한 태도가 태도인 만큼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하지만 한스 초이 그 아이는 충분히 변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폰슨비 경은 그것이 영국에 이득이 될지, 위험이 될지 도저히 판단이 안 섰다.
“폐하께 그 아이를 조심하라고 전해야겠군.”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개인 비서관, 프레데릭 에드워드 그레이 폰슨비 경은 그리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