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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16화 (16/193)

16화 : 어머니와 아들 (4)

“마르가레테. 어머니는 계시느냐?”

“오라버니?”

갑작스러운 큰오빠의 말에 빌헬름 2세의 막내 여동생, 마르가레테 공주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빌헬름 오라버니가 왜 어머니를 찾는 거지?’

마르가레테는 솔직히 놀랍고, 또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어제 정찬 이후, 조용하던 빌리 오라버니가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일어난 것일까?

“어머니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데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어머니와 단둘이 말이다.”

“네?”

마르가레테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오라버니가 어머니랑?

그것도 단둘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거기다 어제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말이다.

“또 푸닥거리라도 할 생각이야?”

마르가레테가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샤를로테 언니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의 손에는 어디서 꺼내 왔는지 모를 와인병이 들려있었다.

“샤를로테.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흥. 나도 관심 없거든? 난 빨리 이 칙칙한 곳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후우······.”

빌헬름 2세가 눈앞의 철없는 여동생 때문에 짜증이 치민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스캔들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동생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혀를 여전히 신랄하게 깐족거리며 자신의 속을 벅벅 긁어놨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샤를로테.”

“네. 네. 황제 폐하.”

“빌헬름 오라버니. 그런데 어머니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려고 하는 거예요?”

샤를로테가 엉망으로 만든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마르가레테가 말했다.

빌헬름 2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뜸을 들이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한스가 어머니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해서 말이다.”

“한스 군이?”

마르가레테가 빌헬름 2세의 입에서 한스의 이름이 나올지는 몰랐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샤를로테는 한스가 누군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샤를로테 공주가 프리드리히쇼프에 온 건 어젯밤이었고, 일어난 것은 방금이었다.

한스의 얼굴을 볼 기회도 없었다.

“한스? 그건 또 누구야?”

“언니. 오라버니의 목숨을 구한 아이잖아. 지금 프리드리히쇼프에도 와 있어.”

“아~ 그 칭키.”

샤를로테가 인제야 기억났다는 얼굴로 탄성을 질렀다.

하필이면 단어 선택을 잘못해서 마르가레테와 빌헬름 2세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샤를로테 언니. 한스를 칭···. 어쨌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뭐어? 칭키를 칭키라고 부르지 또 뭐라 부르는데? 노란 원숭이?”

“언니!”

마르가레테가 소리를 높였지만, 샤를로테는 귓구멍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각이 없었다.

사실 지금 샤를로테 공주의 발언은 대부분의 유럽인이 황인종들을 대하는 태도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적어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말을 떠들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샤를로테. 그 입 조심해라.”

“뭐?”

“한스는 내 목숨을 구해준 아이이자 나와 황후에겐 가족과도 같은 아이다.”

그렇기에 황궁이나 베를린의 그 누구도 대놓고 한스를 향해 칭키같은 멸칭을 뒤에서 구시렁거릴지라도 적어도 대놓고 입에 담지 않았다.

만약 빌헬름 2세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어가는 순간, 카이저의 분노를 감당해야만 해야 할 테니까.

독일 귀족들은 괜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실수라고 치고 봐주겠다.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딴 소리를 입 밖으로 꺼냈다간 널 이번에야말로 독일에서 추방해버릴 거다. 알겠느냐?”

“알, 알았어.”

빌헬름 2세의 기세에 놀랐는지 샤를로테 공주가 살짝 주눅이 든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안하무인처럼 구는 샤를로테지만, 그녀에게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그래서 마르가레테. 어머니는?”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난생처음 보는 오라버니의 모습에 얼이 탄 마르가레테가 정신을 차리고 황태후의 침실로 들어갔다.

“오라버니. 어머니가 들어오시래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후의 허락이 떨어졌다.

***

“···빌헬름.”

“···어머니.”

말다툼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마주한 두 모자의 첫마디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어제의 일도 있었고, 막상 이리 둘이서 이야기하려니 생각보다 어색한 것도 있었다.

“마르가레테에게 들었다. 한스가 날 만나보라고 했다지?”

짧은 침묵 후, 먼저 입을 뗀 것은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였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어머니와 직접 결판을 지으라더군요.”

“후후, 그 아이가 너에게 이야기해보겠다고 나에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론 그리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위로인 줄 알았지. 하지만 정말 너에게 말을 꺼냈을 줄이야.”

“그 녀석은 원래 그런 아이입니다.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지요. 제 면전에서 대놓고 ‘틀렸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말입니다.”

빌헬름 2세는 한스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어안이 벙벙한 순간이었다.

“어머니. 제가 8살 때의 일, 기억하십니까? 처음 승마를 배웠을 때 말입니다.”

“···그래. 기억난다. 넌 작은 망아지를 제대로 타지 못하고 계속 넘어졌지.”

이놈의 왼팔 때문에 말이다.

“전 그때 계속 울음을 터트렸죠. 아프고, 또 서러워서요. 하지만 어머니는 계속 절 윽박지르기만 하셨습니다. 제가 넘어지고 다쳐도 계속 말에 다시 오르라고요.”

“···그때 일을 사과라도 하란 말이냐?”

“아뇨. 묻고 싶습니다. 대체 그때 제게 왜 그러셨는지요.”

아들의 말에 빅토리아 황태후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대답이 나온 것은 꽤 한참 뒤였다.

“난 영국에선 어머니와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독일에 시집와선 그리 환영받지 못했단다. 알다시피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똑똑한 며느리가 아닌 순종적인 며느리를 원했었거든.”

“그러셨죠. 어머니의 그 ‘영국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생각’도 마음에 안 들어하셨고요.”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곁에서 떨어져 할머니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의 밑에서 자라야만 했다.

빌헬름 2세는 딱히 그것에 불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반강제로 자식들과 거리를 두어야 했던 빅토리아 황태후에겐 큰 상처가 되었다.

“그래. 그렇기에 나는 너와 샤를로테, 빌헬름에게 필요 이상으로 매정하고 엄하게 대했다. 나보다 시부모님을 더 따르는 너희에게 섭섭한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증명하고 싶었거든.”

당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던 며느리가 낳은 자식들이 이렇게 뛰어나다고.

황태후는 그리 말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 인제 와서 보면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고 말이다.”

“전 조금이라도 좋으니 어머니가 절 따뜻하게 안아주시길 바랐습니다. 빅토리 아나 조피처럼 말입니다.”

빌헬름, 샤를로테, 하인리히와 달리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빅토리아황태후가 직접 키웠기에 오빠들과 큰언니와 달리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 때문에 빌헬름 2세는 어린 시절 여동생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너무 늦었단다. 아들 둘을 잃고 나서야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 버렸으니까.”

“···지기스문트와 발데마르 말이군요.”

빌헬름 2세가 슬픈 옛 기억을 떠올리곤 고개를 떨구었다.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에겐 사실 빌헬름 2세와 하인리히 왕자 말고도 아들들이 더 있었다.

지기스문트(Franz Friedrich Sigismund)와 발데마르(Joachim Friedrich Ernst Waldemar) 왕자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뇌수막염으로 태어난 지 2년 만에, 발데마르는 11살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면서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는 어린 아들들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아들들을 잃고 난 이후에야 나는 자식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어야만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빌헬름 너는 이미 나와 많이 틀어진 상태였지.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다투기만 했고······.”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죠.”

빌헬름 2세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너에게 섭섭한 게 많았단다.”

하지만 할 말이 있는 것은 빌헬름 2세뿐만이 아니었다.

“가령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일처럼 말이다.”

“······.”

선제 프리드리히 3세의 죽음으로 빌헬름 2세가 모후 빅토리아 아델레이드를 원망하며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빌헬름 2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어머니 빅토리아가 영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분명 영국과 내통한 서신과 서류들이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사실은 자신의 명성에 해가 될 수도 있는 편지들을 찾는 게 진짜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빌헬름 2세는 아버지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병사들을 이끌고 빅토리아의 처소에 들이닥쳐 어머니의 개인적인 편지까지 샅샅이 조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때 빌헬름 2세는 어머니의 방에서 그 어떤 편지도 찾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자신이 죽은 뒤, 이런 일이 생길 것을 걱정하여 문제가 될만한 편지들과 문서들을 영국의 윈저성에 맡겨놓았기 때문이다.

“전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어머니 탓이라고 생각했죠.”

프리드리히 3세의 사망원인은 후두암이었다.

그렇기에 생전에 독일 의사들은 프리드리히 3세에게 후두 절제 수술을 권했지만, 빅토리아 아델레이드가 데려온 영국 의사들은 조직 검사에서 악성 종양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음을 근거로 들어 프리드리히 3세의 수술에 반대했다.

이는 후두 절제 수술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수술이었기 때문인데 당시 후두절제 수술이란 건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술된 적이 없는 그야말로 이론만 존재하는 수술법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도 이것을 알았기에 아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와 논의한 끝에 수술을 거부했다.

“하지만 폐하의 상태는 계속 악화했고, 끝내 숨을 거두셨지. 차라리 그때 용기를 내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이야기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래도 아버지는 수술을 거절하셨겠죠. 그분은 의외로 고집이 세셨으니까요.”

“그래. 그리고 그건 빌리 너도 마찬가지였지. 자존심 강한 건 날 닮았지만 말이다.”

카이저와 황태후의 작은 웃음소리가 방 안에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거 아십니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다 문뜩 떠올랐는지 빌헬름 2세가 말했다.

“한스, 그 아이를 거두게 된 것도 사실 아버지 때문입니다.”

“뭐?”

빅토리아 황태후의 얼굴에 의문과 놀람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남편이 사망했을 때, 한스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그것이 대체 무슨 소리 일까?

“한스를 만나기 며칠 전. 아버지의 유령이 꿈에 나왔습니다.”

빌헬름 2세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 날의 꿈 이야기를 천천히 읊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독일 제국에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고, 그것을 막을 자는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구할 동방의 귀인뿐이라고 했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한스가 제 목숨을 구했죠.”

“세상에···.”

“그게 제가 한스를 거둔 이유입니다.”

빅토리아 황태후는 아들의 믿지 못할 이야기에 매우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이 아닌 진심 어린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죽는 순간까지도 독일을 걱정했었지. 어쩌면 한스 그 아이는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해 보낸 선물일지도 모르겠구나.”

“어머니.”

“덕분에 이렇게 멀기만 했던 너하고도 이리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말이다.”

물론 이것으로 험악한 관계를 지속해온 두 모자가 화해했다곤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죽기 전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황태후에겐 충분했다.

“고맙다. 빌헬름.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빅토리아 황태후가 어느새 자신보다 커져 버린 아들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빌헬름 2세는 잠깐 흠칫했지만, 이내 눈을 감고 어머니에게 손을 맡겼다.

마음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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