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어머니와 아들 (3)
“한스,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해?”
“루이제 공주님.”
저녁.
고모인 빅토리아 공주와 함께 나들이를 나갔다가 해가 거의 져서야 프리드리 히쇼프로 돌아온 루이제가 나에게 물었다.
“공주님의 아버님과 할머님을 어떻게 화해시킬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게 가능하긴 해?”
요아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린 요아힘이라도 아버지 빌헬름 2세와 할머니 빅토리아 황태후의 관계에 대해 알건 다 아는 모양이다.
“솔직히 저도 모르겠네요.”
이 복잡한 가족 문제를 대체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딱히 좋은 생각은 안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 교양강좌로 들었던 심리학 강좌를 조금만 더 제대로 들을 걸 그랬다.
이 두 모자에겐 제대로 된 심리상담사가 시급하다.
‘그러고 보니 프로이트(Sigismund Schlomo Freud)가 이 시대 사람 아니던가?’
근데, 프로이트는 기승전 성적욕구잖아.
안될 거야. 아마.
“그냥 포기해. 아버지랑 할머니가 화해하는 건 돼지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소리라고.”
“뭡니까. 그 이상한 예시는.”
독일 속담인가?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아까부터 계속 방에 틀어박혀 계시네.”
“황태후께서 쓰러지셨으니까요. 폐하께서 아무리 독하신 사람이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죠.”
카이저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니 말이다.
빌헬름 2세는 속 좁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아니었다.
웅성웅성─
“응? 어째 바깥이 시끄러운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나는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
“빌헬름 형이라고? 내일쯤에나 올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빨리 왔지?”
요아힘과 루이제가 날따라 창가에 붙었다.
밖은 어두웠지만, 저 얼굴은 다른 누구도 아닌 100% 빌헬름 황태자였다.
그리고 황태자 옆엔 처음 보는 여성이 있었는데 꽤 화려하고 눈에 띄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요아힘 왕자님. 황태자님 옆에 계신 여성분은 누구죠?”
“여자? 헉!”
요아힘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라며 창가에서 떨어졌다.
“···샤를로테 고모님이다.”
“예? 저분이요?”
“응. 샤를로테 고모 맞네. 저런 드레스 입고 다니는 사람은 우리 가족 중에 샤를로테 고모밖에 없어.”
루이제가 그리 말하며 다시 한번 확인을 해주었다.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 폰 프로이센(Viktoria Elisabeth Auguste Charlotte).
빅토리아 황태후의 방탕한 장녀의 등장이었다.
***
“정말~빌헬름.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니? 어머니가 당장 돌아가시는 것도 아니잖아.”
“샤를로테 고모님. 전 아버지가 시키신 대로 한 것뿐입니다.”
빌헬름 황태자는 그리 말하며,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고모의 철없는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황태자는 원래 프리드리히쇼프에 이리 빨리 올 생각은 없었다.
하필이면 황태자 근처에 샤를로테 공주가 있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아버지 빌헬름 2세는 황태자에게 전보를 보내 샤를로테 고모님을 프리드리히 쇼프 성으로 끌고 오라고 했고, 빌헬름 황태자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 오랜만이구나.”
“마르가레테 고모님!”
빌헬름 황태자가 저택 앞으로 나온 마르가레테 공주와 반갑게 인사했다.
“모지.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
“하아, 샬리 언니.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가족 분위기가 많이 안 좋거든?”
“고모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빌헬름 황태자의 질문에 마르가레테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음. 확실히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폐하와의 말다툼 때문에 황태후께서 쓰러지셨단다.”
“예?!”
“오, 그럼 어머니는 다음에 뵈어야겠네.”
빌헬름 황태자는 예상치도 못한 일에 당황했지만, 샤를로테 공주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마르가레테 공주는 그 모습을 보고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샬리 언니. 언니는 어머니가 걱정도 안 돼?”
“걱정되지. 하지만 정말 큰일이 났으면 네가 여기 이러고 있겠어?”
“그래도···!”
“게다가 지금 어머니가 내 얼굴 봐봤자 심기만 더 나빠지실걸?”
어머니에게 난 못된 딸이잖아.
샤를로테 공주가 이젠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마르가레테 공주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도저히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방이나 안내해줘. 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여기까지 열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샤를로테 공주가 하품하며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르가레테 공주는 그런 언니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샤를로테 언니가 하루 이틀 저러는 것도 아니고. 괜히 화내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고모님.”
“네가 더 고생이 많았지. 오늘은 늦었으니 너도 바로 쉬러 가거라. 아, 그리고 애들이 아마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인사는 하고.”
빌헬름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요아힘과 루이제, 그리고 한스도 프리드리히쇼프에 와있다고 들었다.
빌헬름 황태자는 마르가레테 공주를 따라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빌헬름 형!”
“오셨습니까. 황태자님.”
“오랜만이다. 얘들아. 별일 없었지?”
“저희는 괜찮은데 황태후 마마와 폐하가 문제죠.”
내 말에 빌헬름 황태자가 알만하다는 듯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달베르트가 너에게 안부 전해달래. 왜 소설 다음 화가 안 나오냐고 난리를 치던데?”
“제가 여기서 글을 어떻게 씁니까.”
애초에 쓸 상황도 아니었다.
참고로 빌헬름 2세의 삼남 아달베르트 왕자는 내 신문연재소설 ‘불멸의 리 제 독’의 광팬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형제 중 유일한 물개···. 아니 해군을 지망하는 만큼, 이순신 장군에게 느끼는 게 많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뭐 하고 있었냐?”
“아버지랑 할머니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어.”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루이제의 무심코 뱉은 말에 빌헬름 황태자의 입꼬리가 안 좋은 쪽으로 비틀어졌다.
내가 앞으로 얘 앞에서 뭘 말하나 봐라.
“한스. 너 또 쓸데없는 짓 할래?”
“쓸데없는 짓이라뇨. 필요한 일입니다.”
“필요한 일 같은 소리 하네. 그래서 축구장에선 필요해서 말도 없이 그딴 짓을 저질렀냐?”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그 소리야?
“폐하께선 프랑스 놈들 엿 먹였다고 좋아하셨잖습니까.”
뷜로 총리는 입꼬리를 올리면서도 투덜거리며 일 늘리지 말라고 한 소리 했지만 말이다.
뭐,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장땡인 법이다.
“아, 됐고 제발 좀 평화롭게 살자. 게다가 이건 네가 나서봤자 해결될 문제도 아니야. 아버지랑 할머니가 화해하는 건 돼지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소리란 말이야.”
“아니, 왜 다들 그 예시를 드는 건데요.”
날아다니는 돼지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어쨌든 좋은 말로 할 때 그만둬. 이건 아버지랑 할머니가 진짜 자존심 버리고 서로 마음 터놓지 않는 이상, 답이 없는 문제니까.”
빌헬름 황태자는 나에게 그리 경고하곤,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말이 맞았다.
이건 빌헬름 2세랑 빅토리아 황태후가 직접 부딪혀야지 결판이 나는 이야기다.
“한스?”
“왕자님.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게 뭔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밤이 늦었다.
내일을 위해 지금은 잘 시간이었다.
***
“흑··· 훌쩍, 흐흑······.”
“빌헬름! 빨리 다시 말에 오르렴!”
1867년, 프로이센 왕국.
8살의 어린 빌헬름 2세는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의 호통에 눈물을 흘리며 다시 조랑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빌헬름의 불편한 왼팔은 작은 조랑말에 오르는 것조차 힘겹게 만들었다.
“히힝!”
“흐아앙!”
겨우겨우 조랑말 위에 올라타려고 하는 순간, 조랑말이 몸을 흔들었다.
빌헬름 2세는 또다시 말에 오르지도 못하고 다시 바닥에 넘어졌다.
다시 울음이 터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이런 간단한 그것도 못 하는 거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분통을 터트렸다.
대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조랑말 하나 못 타는 걸까.
가뜩이나 자신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시부모님의 질책이 빅토리아 아델레이 드 왕세자비의 눈에 어른거렸다.
“어, 어머니···. 팔 때문에 도저히 못 하겠어요.”
“약한 소리 말렴. 빌헬름!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 포기하지만 않으면 넌 분명 좋은 기수가 될 수 있을 거란 말이다!”
“흐으윽···훌쩍.”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딴에는 아들을 응원한다고 하는 소리였지만,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된 빌헬름 2세에겐 듣기 싫은 소리에 불과했다.
저 멍청한 조랑말도, 자신을 혼내기만 하는 어머니도 전부 싫었다.
“왕세자비님. 왕자님께서 너무 힘들어하십니다. 조금 쉰 후에 다시 진행하시지요.”
“그럴 시간은 없습니다. 힌츠페터 박사.”
보다 못한 어린 빌헬름 2세의 가정교사, 그레고리 힌츠페터(Georg Ernst Hinzpeter)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빅토리아 아델레이드는 강경했다.
“빌헬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의 왕이 될 사람이에요.
그러니 말 정도는 충분히 탈 줄 알아야 한다고요.”
빅토리아의 시선은 다시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고 있는 아들을 향했다.
“빌헬름! 꾸물거리지 말고 다시 말에 오르렴. 어서!”
“훌쩍···. 네.”
빌헬름 2세는 정말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머니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결국 빌헬름 2세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조랑말에게 다가갔다.
털썩.
“다시.”
털썩.
“다시!”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린 빌헬름 2세는 수도 없이 바닥에 넘어졌다.
자신이 눈과 코에서 눈물 콧물 다 쏟아도 어머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냉정한 목소리로 어린 자신을 질책할 뿐이었다.
떨어지고, 혼나고, 떨어지고.
어린 빌헬름 2세는 몇 주 동안이나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계속 반복해야만 했다.
“황제 폐하.”
“한스?”
뒤에서 들려온 한스의 목소리에 빌헬름 2세가 어린 시절의 회상에서 깨어났다.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안 오셔서 모시러 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잠깐 아침 바람을 쐬러 나왔다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상념에 빠지게 한 모양이다.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네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느냐?”
빌헬름 2세는 한스에 말에 피식 웃었다.
하긴 어제 그 난리를 쳤는데 아무리 아이라도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그 영국 여자가 뭐라고 하더냐?”
빌헬름 2세가 말했다.
어제 말싸움 이후로 어머니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빌헬름 2세는 궁금했다.
그 여자가 그날 터트렸던 자신의 울분에 대해서 뭐라 했는지.
언제나처럼 뻔하디뻔한 비난일까?
아니면 격렬한 분노?
“황태후께서는 폐하께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뭐?”
그러나 한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빌헬름 2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미안하다고? 누가?
“···그 어머니가?”
“그리고 후회하시더군요. 폐하에게 따뜻하게 대해드리지 못하셨다고요.”
“하! 지금 그런 말을 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인제 와서 사과한들 빌헬름 2세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늦었다.
너무나도 말이다.
“나와 그 여자의 사이엔 증오밖에 안 남았다. 한스.”
“폐하. 애정의 반대는 증오가 아닙니다.”
무관심이죠.
한스는 그리 덧붙이며 황태후 때도 써먹었던 말을 황제에게도 똑같이 써먹었다.
“예컨대 미운 정도 정이란 소립니다.”
“나에게 그 여자에 대한 정이 남아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은 무슨 놈의 정이란 말인가.
그 여자에 대한 정나미는 진즉 다 떨어져 나가진 오래다.
“폐하께서 정말 그리 생각하셨다면 이리 답답한 얼굴로 수심에 잠겨계시진 않으셨겠죠.”
“······.”
황제의 표정을 읽었는지 정곡을 찌르는 한스의 말에 빌헬름 2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카이저의 대답이었다.
“제 생각엔 폐하의 답답한 응어리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한가지?”
빌헬름 2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폐하의 진심을 황태후 마마께 직접 부딪히십시오.”
“!”
“그 결말이 어찌 끝나든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말입니다.”
작가의말
어린 빌헬름 2세가 승마로 고통받은 일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참고로 오늘은 연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