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어머니와 아들 (2)
독일 속담 중에 ‘아침은 시민처럼, 점심은 왕처럼, 저녁은 거지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아침과 저녁은 비교적 평범하고 간단하게 먹지만, 점심만큼은 푸짐하게 먹는 독일인들의 식습관을 빗댄 것이다.
그렇기에 점심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정찬을 즐기는 것은 독일의 전통이자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 프리드리히쇼프에서의 정찬은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오히려 살벌한 전쟁터란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
무거운 침묵 속에서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가 아무 말 없이 접시 위에 올라온 생선을 썰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식사를 진행했다.
티르피츠와 슐리펜이 함께했던 그때 그 저녁 만찬은 떠들썩하기라도 했지, 이건 뭐 먹다가 체하라고 기도라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식탁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카이저와 황태후의 눈치를 보며 불편한 식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이럴 바엔 아까 요아힘이랑 루이제가 나들이하러 나간다고 할 때 같이 따라갈걸 그랬다.
“폐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러다가 진짜 소화불량 걸릴 것 같아서 그냥 적당히 배부르다 하고 일어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사용인 하나가 급히 달려와 빌헬름 2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게 정말인가?”
“예. 폐하.”
“후우······. 알겠네. 이만 가보게나.”
사용인이 전한 내용이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빌헬름 2세가 얼굴을 찡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아우구스테 황후가 물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샤를로테를 찾았다는 소식이었소.”
“오.”
아우구스테 황후가 탄식하듯 말했다.
빌헬름 2세는 와인을 들이키며 말을 계속했다.
“노이뮌스터 근처에서 열린 파티에서 발견했다는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참 멀리도 갔구나.”
빅토리아 황태후가 뻔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그래서 이 어미 얼굴은 보러 온다니?”
“황태자가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예. 대학에 들어가기 전, 형제들과 마지막 여름을 같이 보내고 싶다며 그쪽에 가 있었거든요.”
아우구스테 황후가 빌헬름 2세의 말을 이어받으며 대신 말했다.
분명 본 대학교에 들어가 헌법과 행정학을 공부한다고 했던가.
정식 명칭은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본 대학교(Rheinische Friedrich-Wilhelms-Universitat Bonn)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등도 수학한 독일의 명문대학이다.
‘그러고 보니 빌헬름 2세도 본 대학교 출신이지.’
개인적으로 가고 싶은 독일 대학을 고르라면 난 단연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Ruprecht-Karls-Universitat Heidelberg)를 선택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내게 그럴만한 시간과 여유가 허락될 때의 이야기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이면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일 테니까.
“괜히 애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놔두거라. 이미 그 샤를로테 그 아이에겐 이 어미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니.”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샬리 언니도 분명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오. 마음에도 없는 말 말아라. 조피.”
조피 왕세자비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황태후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장녀가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 못난 것. 페오도라 그 착한 아이가 불쌍할 따름이구나. 어미를 잘 못 만난 탓에 어렸을 때부터 고생만 했으니.”
“···어머니가 그런 말씀하실 자격이나 되십니까?”
“뭐?”
어머니의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빌헬름 2세가 그리 중얼거리자 황태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덩달아 식탁엔 이 걷잡을 수 없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왜 꼭 밥 먹을 때 일이 터지는 걸까.
게다가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한 채, 그냥 가만히 앉아서 소시지나 썰고 있었을 뿐인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빌헬름.”
“제가 무슨 틀린 말 했습니까? 어머니도 그리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최악의 어머니에 가까웠죠.”
“오, 오라버니이···!”
어머니의 눈치를 본 마르가레테 공주가 제발 그만하라며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빌헬름 2세를 말려보려 했지만, 카이저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후를 향해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그분을 지도자이자 군인으로선 존경했지만, 아버지로선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허구한 날 어머니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나약한 가장이셨으니까요!”
“네 아버지를 모욕하지 말아라. 빌헬름! 그분은 너보다 훨씬 강하고 또 멀리 볼 줄 아는 분이었다. 그분이 살아있으셨다면 제국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거다!”
“뭐라고요?!”
빌헬름 2세의 계속된 폭언에 빅토리아 황태후마저 폭발하고 말았다.
‘제발 누가 좀 말려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리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 격렬한 모자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선 할 수가 없었다.
“난 평생 비스마르크를 싫어했지만, 지금처럼 그가 그리웠던 적이 없다.”
“어머니!”
“빌헬름, 넌 제국을 망치고 있다. 그놈의 헛된 야심과 망상에 빠져서 말이다!”
“시끄러워!”
와장창!
빌헬름 2세가 식탁 위를 쓸어버리며 노호성을 질렀다.
“오빠!”
“폐하!”
카이저가 이성을 잃자 당황한 가족들이 급히 빌헬름 2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카이저는 가족들을 밀어내며 쌓여있던 울분을 터트렸다.
“당신이 언제나 그런 식이지. 당신이 나에게 단 한 번이라도 사랑이란 것을 준 적이 있어?! 내가 그렇게 애원할 때 당신이 내게 단 한마디의 다정한 말이라도 한 적 있냐고!!”
“형! 너무 흥분했어. 이제 그만해!”
결국 보다 못한 하인리히 왕자가 완력으로 형을 밖으로 억지로 끌고 나갔다.
아우구스테 황후도 불안한 얼굴로 급히 남편을 따라 나갔다.
그러나 카이저의 과격한 행동은 죽음을 목전에 둘 정도로 병약해진 빅토리아황태후의 몸과 마음이 버티기엔 너무 큰 충격이었다.
“허억···허억···억!”
“어머니? 어머니!”
“의사! 빨리 의사를 데려와!”
거친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빅토리아 황태후가 심장을 움켜쥐며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황태후에게 달려갔지만, 황태후는 정신을 잃은 채 도통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씨이발···!’
나는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태후를 급히 침대로 옮겼다.
정말이지 내 인생 최악의 점심 식사였다.
***
“으음······.”
“어머니!”
그로부터 1시간 후.
공주들의 간호 속에서 빅토리아 황태후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오늘 장례식 치를 뻔했다.
“조피, 마르가리테···.”
“네.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빌헬름은······.”
“폐하께선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한스?”
빌헬름 2세는 황후랑 왕자가 밖으로 데리고 나간 뒤 아직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모양이다.
“너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줘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마마. 그저 단순한 가족 싸움일 뿐이지 않습니까. 어떤 집이든 으레 있는 일이지요.”
“후후···. 가족, 가족이라. 넌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나와 빌헬름 그 아이를 가족이라 부르는 것이냐?”
빅토리아 황태후가 힘겹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입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애정의 반대는 증오가 아닌, 무관심입니다. 마마와 폐하 사이엔 아직 정이 남아있다는 뜻이지요.”
내가 심리학 전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다.
빌헬름 2세가 정말 황태후에게 일말의 정도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냥 없는 사람 취급했을 거다.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보는구나.”
빅토리아 황태후가 말했다.
그녀는 내 말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왠지 모르게 감회에 잠긴 얼굴이었다.
“어쩌면 빌헬름 그 아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아니, 조피. 네 오빠의 말대로 난 그리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단다. 특히 빌헬름, 그 아이에겐 말이다.”
흔히 빌헬름 2세가 불꽃 속성 효자라서 어머니를 그리 막 대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 두 모자 관계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사실 빅토리아 황태후의 잘못도 컸다.
그녀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차갑고 엄격한 어머니였다.
항상 자식들에게 아이들이 따라가기 버거운 높은 기준을 요구했고, 이러한 황태후의 행동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가뜩이나 서먹서먹한 관계였던 빌헬름 2세와 샤를로테 공주, 하인리히 왕자에게 특히 더 심했다.
게다가 빌헬름 2세는 알다시피 왼쪽 팔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이 많이 필요했는데, 빅토리아 황태후는 어린 빌헬름을 보듬어 주기는커녕 아들의 팔을 고치겠다며 학대 수준의 치료를 진행했다.
오죽했으면 어린 빌헬름 2세가 제발 사랑을 달라며 어머니께 편지를 보낼 정도였을까.
‘빌헬름 2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이 둘 사이를 중재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문제는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얼어붙은 모자 관계에 도움이 아닌 해만 되었다.
공처가이자 애처가였던 프리드리히 3세는 언제나 아내의 행동을 두둔했고, 아들 빌헬름이 아닌 빅토리아 황태후의 편만 들었다.
괜히 빌헬름 2세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휘둘린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태후는 한 나라의 지도자로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었지만, 부모로선 가히 최악에 가까웠다.
물론 시대의 한계를 비롯해 독일 황실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분위기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난 내 행동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단다. 빌헬름 그 아이는 나중에 황제가 될 아이였기에 더욱 엄하게 대했지. 하지만 내가 틀렸다. 나는 그 아이를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해줘야 했어.”
빅토리아 황태후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마마. 바닥에 흐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새로운 물을 담을 순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한스.”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분명 카이저께서도마마의 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하지만 빌헬름이 과연 내 말을 듣기라도 하겠느냐.”
“제가 폐하께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나는 황태후에게 그리 말하며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솔직히 어떠한 이득도 없는 멍청한 짓.
어쩌면 그냥 황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대로 빅토리아 황태후가 이리 상처받은 채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빌헬름 2세가 어머니에 대한 후회 속에서 살아가게 두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황태후가 죽기 전에 빌헬름 2세랑 화해했으면 좋겠어.’
물론 지금 같은 상태론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
“당장 포츠담으로 돌아가겠소!”
“폐하, 고정하시지요!”
한편 밖으로 끌려 나온 빌헬름 2세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노호성을 터트리며 프리드리히쇼프를 떠나 포츠담으로 돌아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우구스테 황후는 식은땀을 흘리며 남편을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젠장!”
빌헬름 2세가 애꿎은 지면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화만 계속 쌓이고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한 거야!’
그리고 그건 황태후에게 울분을 쏟아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빌헬름 2세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계속 분노로 쏟아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황후 마마. 큰일 났습니다!”
그때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후께서 쓰러지셨습니다!”
“!”
“뭐라?!”
아우구스테 황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근처에 있던 하인리히 왕자도 당황한 듯,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어머니, 어머니는 괜찮으신가?”
“의사의 말로는 황태후 마마께선 좀 놀라셨을 뿐,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라더군요.”
“후, 그건 천만다행이군.”
하인리히 왕자가 안도의 한숨의 내쉬며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털썩-
“폐하?”
그러나 황태후가 쓰러졌단 소식이 빌헬름 2세에겐 몸을 휘청일 정도로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빅토리아 황태후가 쓰러진 원인은 다름 아닌 빌헬름 2세, 자신이었으니까.
카이저는 화내는 것도 잊어버렸다는 듯, 허망한 얼굴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려오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젠장···.”
카이저의 마음은 더욱 깊은 수심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