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마마. 아우구스테 황후님과 요아힘 왕자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님이 오셨습니다.”
자신의 병시중을 들던 시녀의 말에 빅토리아 아델레이드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한때 대영제국의 자랑이었던 프린세스 로열은 어느새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눈은 여전히 옛 시절처럼 총명하고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님.”
“아우구스테. 오랜만이구나.”
이윽고 맏며느리 아우구스테 황후가 황태후의 침실에 들어오자, 빅토리아 황태후가 시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한때는 자신이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길 원했던 독일 적십자사와 애국 여성협회의 수장 자리를 빼앗아간 미운 며느리였다.
하지만 이후, 빌헬름 2세와의 결혼 생활 중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아우구스테황후가 시어머니를 의지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앙금을 풀 수 있었고 그렇기에 황태후는 맏며느리를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할머니.”
“요아힘. 루이제.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정말 많이 컸어.”
어린 손주들이 자신을 향해 인사를 올리자 미소로 화답하는 빅토리아 황태후.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작은 아기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이리 훌쩍 큰 모습을 보니 시간이란 게 참 빠르단 생각이 들었다.
못난 아들이 ‘자유주의’ 사상이 옮는다고 자신에게서 손주들을 떼어놓지만 않았어도 이 아이들과 가까이 지내며 더 많은 애정을 줄 수 있었을 것을.
빅토리아 황태후는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빌리는 같이 오지 않았느냐?”
“예. 제가 포츠담을 떠났을 때만 해도 쾨니히스베르크에 계셨던지라. 폐하는 아무래도 내일쯤에나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빌리는 어미가 죽는 꼴을 보러는 오는구나. 장녀라는 것은 아예 소식조차 없는데.”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샬리(샤를로테 공주의 애칭) 언니도 연락을 늦게 받아서 그런 것일 뿐, 곧 어머니를 보러 올 거예요.”
“쯧. 그 아이는 내가 잘 안다. 분명 지금도 어디선가 파티나 즐기고 있겠지.”
가장 아끼는 막내딸, 마르가레테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황태후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장녀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렸을 때부터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대하며 오빠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속을 썩였던 아이다.
젊었을 때도 하나뿐인 딸아이를 내팽개쳐둔 채 사교계에 빠져있던 못난 딸이 지금이라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나저나 저 아이는 누구냐?”
빅토리아 아델레이드가 아우구스테 황후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작은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황후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앞으로 내보냈다.
“한스 초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프린세스 로열이자 선제 폐하의 황후이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황태후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오. 그래. 네가 빌리를 구했다던 그 아시안 꼬마로구나.”
한스의 예의 바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빅토리아 황태후의 입가가 곡선을 그렸다.
손녀인 빅토리아 루이제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상당히 의젓하고 점잖아보이는 아이다.
“못난 아들 녀석이 너를 궁에 들였단 이야기를 들었을 땐 드디어 이놈이 맛이 갔나 싶었지. 아니면 무슨 이상한 약에 손을 댔던가.”
“어머니!”
“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모레타(빅토리아 공주의 애칭). 네 큰오빠가 허구한 날 황인종들이 유럽을 정복할 거라는 등 헛소리를 떠들고 다녔던 건 길거리의 거지도 아는 사실이니.”
빅토리아 황태후의 뻔뻔한 태도에 자식들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이런 분이셨다.
“그래. 한스 초이. 궁 생활은 어디 할만하더냐?”
“솔직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듣기 좋게 포장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뭐?”
“한스 너 또···.”
“아하하···아하하하하하하!!”
아우구스테 황후가 한스를 제지하려는 찰나, 오히려 그런 한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가 오랜만에 폭소를 터트렸다.
“이거 재치 있는 아이구나. 그럼 어디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그럭저럭 괜찮게 지내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비롯한 황실 가족분들도 저에게 잘 대해주시고요. 적어도 어디서 원숭이 취급은 받지 않죠.”
“푸훗! 아우구스테. 빌리는 어디서 이런 애를 주워왔다니?”
“덕분에 전 머리가 아픕니다. 애는 참 착하고 똑똑한데···. 가끔은 그게 지나칠 때가 있어요.”
아우구스테 황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말썽꾸러기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이는 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네 남편이 좋아할 타입은 아닌데.”
황태후가 아는 큰아들은 자신에게 대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소위 말해 꼰대 같은 성격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말이다.
당장 여동생 소시(Sossy, 조피 왕세자비의 애칭)가 시집간 나라의 종교로 개종했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만 봐도 답이 나온다.
“흥미가 생기는구나.”
“어머님?”
“엘리자베스. 날 좀 이 망할 침대에서 일으켜다오.”
빅토리아 황태후의 말에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하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태후를 부축했다.
“어머니, 몸도 안 좋으신데 무리하지 마세요.”
조피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빅토리아 황태후는 괜찮다며 손사레를 쳤다.
그리곤 시녀의 도움으로 침상 옆에 놓여져 있던 휠체어에 힘겹게 몸을 앉혔다.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빅토리아 황태후의 모습을 아우구스테 황후와 자식들이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황태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동정 어린 시선은 이미 익숙했다.
“프레드릭. 지금 날씨가 어떻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습니다.”
대자 폰슨비의 대답에 빅토리아 황태후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구나.”
빅토리아 황태후가 한스를 바라봤다.
“네가 좀 도와주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는 이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
“우후후후, 한스, 넌 참 재밌고 놀라운 아이구나.”
“과찬이십니다. 황태후 마마.”
“정말이지 빌헬름 곁에 놔두기엔 너무 아까워.”
나는 그리 대답하며 빅토리아 황태후가 타고 있는 휠체어를 천천히 앞으로 밀었다.
빅토리아 황태후와 둘만의 산책은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처음엔 이렇게 황태후랑 가까이 지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우리 둘은 상당히 마음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 나와 말이 잘 통하는 것이 좋네.’
빅토리아 황태후는 19세기 여성스럽지 않게 매우 총명하고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이 시대 기준으로도 좀 많이 보수적이었던 독일 황실에선 똑똑한 황태후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견제하고 푸대접했지만 말이다.
오죽했으면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에 우호적이었던 빅토리아 황태후의 아버지, 앨버트 공이 분통을 터트렸을 정도였을까.
“그래서 네 생각으론 군주제는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냐?”
“예. 황태후 마마.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시민들의 권력은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는 반면에 왕정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습니다. 아직 군주제가 공화제보다 우위에 서 있긴 하지만 그것도 반세기 후엔 반대가 되겠죠.”
“후후, 빌헬름 녀석, 나보고 ‘자유주의자’라고 욕할 땐 언제고 자기는 궁에 ‘공화주의자’를 들였구나.”
아무래도 21세기에 내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이 있는지라.
다만 여기서 내가 그녀의 말에 긍정해버리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지금은 황태후의 말을 수정해주자.
“전 딱히 왕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군주제와 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있습니다. 마마의 모국이신 영국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왕정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겠지요.”
실제로 20세기의 격변을 거치고 현대에 살아남은 군주제 국가들은 입헌군주제가 절대다수였다.
그나마 21세기에도 계속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는 곳은 기껏해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아랍국가들 정도?
어쨌든 그리 일반적인 건 아니었다.
“···내 남편도 너와 같은 말을 했었지.”
“프리드리히 3세 폐하 말씀이시군요.”
빅토리아 황태후는 아직도 먼저 떠나보낸 남편을 잊지 못한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프리드리히 3세 역시 금실 좋은 아내였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처럼 자유주의자에 가까웠고 독일 특유의 군국주의에도 반감을 지니고 있었기에 보수적인 아버지 빌헬름 1세, 그리고 융커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3세의 치세가 길었다면 독일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며 제1차 세계대전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주장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적잖이 존재했지만 말이다.
특히 프리드리히 3세가 정말로 자유주의적인 독일 제국을 꿈꿨는지는 21세기에도 상당한 논란거리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가 정말 독일을 바꿀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결국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인, 1888년 6월 15일에 후두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아버지와 달리 자유주의 그 자체를 혐오하던 빌헬름 2세였다.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
빌헬름 1세에 이어 프리드리히 3세, 그리고 빌헬름 2세로 연달아 황제가 바뀌었던 1888년은 이후, 독일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운명적인 해라 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눈을 감았을 때, 빌헬름은 아버지의 죽음을 내 탓으로 돌렸지.
게다가 내가 영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반역’적인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내 개인 편지까지 샅샅이 뒤졌단다.”
나를 몰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빅토리아 황태후가 그리 덧붙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지간히 불쾌한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선제께서 살아계셨다면 좋았을 것을.”
“···역시 카이저의 치세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한스. 너 정도 되는 아이라면 알고 있지 않니. 빌헬름 그 아이는 내치는 그 럭저럭 잘하는 편이지만 외치는 무능의 극치라는걸.”
알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지.
“그렇기에 난 두렵구나. 한스.”
황태후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 아들의 경솔한 행동들이 미래에 대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그리고 이로 인해 내 사랑하는 고향과 내 남편의 나라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그녀의 눈동자는 슬픔과 회한의 감정으로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
덜컹- 덜컹-
“······.”
달리는 기차 안.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폐하.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입맛이 없군. 그냥 도로 가져가도록 하게.”
“예. 폐하.”
식사를 가져온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카이저의 식사를 도로 쟁반에 담았다.
“잠깐.”
시종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문뜩 무언가가 생각난 빌헬름 2세가 시종을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샤를로테에게 아직 연락은 안 닿았나?”
“예. 마이닝겐에도 연락해봤지만, 평소처럼 그저 ‘외출한다’라는 말만 남기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독일 어딘가엔 있을 것 아닌가.”
“이미 내무부에서도 비밀경찰을 동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소식이 올 겁니다.”
“후우···. 저번엔 그놈의 편지 문제로 골치를 썩이더니 이젠 이런 쓰잘데기 하나 없는 문제로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군.”
고작 이런 일로 비밀경찰까지 움직이게 만들다니 정말이지 곤란한 여동생이었다.
빌헬름 2세는 여동생 중에선 샤를로테 공주와 가장 친했지만, 그놈의 까탈스럽고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성격과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무책임한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저도 샤를로테 공주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분도 어머님의 마지막은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요?’라는 아우구스테 황후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냥 내버려 뒀을 거다.
“후, 가뜩이나 그 ‘영국’ 여자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그 영국 여자란 당연히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였다.
빌헬름 2세는 어머니를 싫어했다.
어머니의 그 영국인 특유의 불순한 ‘자유주의’적인 생각도 그렇고 사사건건 자신의 행동을 나무라며 대놓고 무능하다 비판하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 여자는 언제나 그랬지.’
매정하고 비정한, 어머니라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것도 이젠 끝이다.
단 며칠.
며칠만 참으면 된다.
“그런데 왜 속이 시원해지긴커녕, 이런 답답한 기분만 드는 거냐.”
설마하니 그 여자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피곤하고 짜증 나서 이러는 것이겠지.”
빌헬름 2세는 그리 중얼거렸다.
하지만 밤이 깊어 갈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