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0화 (10/193)

10화 : 가족 위기

어느새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되었다.

황태자와 왕자들은 공부를 위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위치한 왕실 별장인 왕자의 집(Prinzenhaus)으로 떠났고, 포츠담 신궁전에는 빌헬름 2세 부부와 아직 어려서 부모 곁에 남아있는 요아힘과 빅토리아 루이제만이 남아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재심에 대한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보수 세력의 계속되는 반발. 분노한 에밀 루베 대통령 예수회 추방령 발의할 것!]

한편 프랑스는 내 불장난으로 아직도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에밀 루베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추진했다.

하긴 현 상황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선 그것 말곤 답이 없긴 했다.

다만 루베 대통령은 내 생각보다 더 과격하게 나왔다.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아예 기회로 삼아 이 시대엔 사실상 극우에 가까웠던 프랑스 가톨릭 세력을 치워버릴 생각인지, 원 역사의 정교분리 정책을 4년이나 더 빨리 밀어붙이고 있던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겠다는 과감한 행동.

하지만 언제나 빠른 것만이 답은 아니다.

에밀 루베의 성급하고 과격한 행동은 프랑스 가톨릭과 보수 세력이 결집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프랑스 제3공화국은 이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대립으로 상당한 진통을 앓고 있었다.

물론 에밀 루베는 나름대로 능력 있는 정치인이니 언젠가는 이를 해결하겠지만 글쎄.

내 생각엔 적어도 2, 3년 안에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무슈 한스 초이에게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감사를 전하며.]

다만 에밀 루베가 드레퓌스의 재심을 팍팍 밀어주면서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도 그만큼 더 빨리 인정될 모양이었다.

이렇게 본인이 직접 나에게 감사 편지를 보낼 정도로 말이다.

그를 위해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싱숭생숭해지는 기분.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들었다.

드레퓌스 대위에겐 미안하게도 난 그의 조국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그를 이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드레퓌스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

그 꼴을 당하고도 말이다.

나 같으면 조국이고 뭐고 더러워서 이민이라도 갔을 텐데 참 대단한 사람이다.

“하아, 이래서 전쟁이 싫어.”

나라고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전쟁이 남기는 건 결국 고통과 잿더미밖에 없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열강들이 열강으로 남고자 하는 한 막을 수 없는 전쟁이다.

그렇기에 난 독일 제국을 무슨 수를 써서든 승리시켜야 했다.

독일 제국이 패전하는 순간, 빌헬름 2세와 그 가족들도 파멸을 맞이할 테니까.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황태자와 왕자들은 왕정복고를 위해 철모단 같은 극우세력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하지만, 결국 장검의 밤으로 히틀러에게 버림받으며 쓸쓸히 잊혔다.

아, 아우구스트 왕자는 빼고.

갠 빌헬름 2세의 자식 중 유일한 열성 나치라 쉴드 쳐주긴 커녕 쉴드로 패야 한다.

이 세계에서도 그러기만 해봐라.

‘게다가 요아힘 녀석은 자살하지.’

독일 제국의 멸망 후, 요아힘 왕자는 달라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리고 아우구스테 황후는 그런 아들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다 숨을 거둔다.

“그 꼴 만큼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아.”

빌헬름 2세의 가족들은 이미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거리를 둘 생각이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더라.

그렇기에 난 내 소중한 사람들이 원 역사처럼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는 건 최대한 막고 싶었다.

내가 반드시 독일 제국을 살려야 하는 이유에 한 줄 더 추가된 순간이었다.

[독일 황립 해군, 카이저마리네의 베일에 싸인 신형 전함 건조 시작. 전 세계 해군의 시선 집중!]

한편 드레드노트 프로젝트, 독일어로 푸어히틀로스(Furchtlos, 두려움이 없다) 프로젝트는 절찬리에 진행 중이었다.

다만 듣기론 함명을 두고 아직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그냥 푸어히틀로스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독일 해군은 전통적으로 함선 이름에 지명이나 위인 이름을 붙이는 게 관습이었던지라 이는 가볍게 묵살 되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 해군이 드레드노트에 거는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오만한 독일인들 답지 않게 타국에서 기술을 가져오는 것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에 대한 영국을 비롯한 타 열강들의 ‘쟤들이 뭘 잘못 먹었나?’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나와 독일 제국에 있어서 잘된 일. 그러나 여전히 약간의 불안도 남아있었다.

‘이러다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드레드노트의 성능은 이미 원 역사에서 증명된 바이지만 사람이 손이 타는 것이 으레 그렇듯 설계 방향이랑은 정반대인 이상한 함선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발 망하지만 말아라. 제발.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대서양 무선 통신 실험 성공!]

그렇게 걱정을 하던 도중, 지난달엔 이런 흥미로운 일도 일어났다.

무선 통신.

그 가치가 무궁무진한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기술.

군용으로도 활용도가 높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라디오 쪽이었다.

라디오는 TV가 나오기 전까지 유일무이한 대중 방송 매체.

선점하기만 하면 언론과 여론을 내 입맛대로 주무를 수가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인 물건이다.

“그러고 보니 레지날드 페슨든(Reginald Fessenden)이 세계 최초로 라디오 전파를 이용해 무선 통신에 성공한 것도 올해였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까진 기억 안 나지만 아마도 12월이었을 거다.

그리고 페슨든이 최초의 라디오 방송을 한 건 1906년.

하지만 돈이 더 들어간다면 그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

물론 내 주머니에 그런 큰돈은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 빌어먹을 빌리가 내게 용돈을 안 주더라.

‘물론 받을 필요가 없긴 한데 말이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봐라.

아마 유럽의 웬만한 상류층보다 내가 더 풍족하게 지낼 거다.

다만 그것이 내 개인적인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인생사인데 만일을 대비해 호주머니가 묵직하면 안심도 되고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내가 이 잼민이의 몸뚱이로 사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리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것이다.

[셜록 홈즈와 바스커빌 가의 개]

홈즈에 질린 끝에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모리아티와 동귀어진을 시켜버린 아서 코난 도일이 ‘왜 셜록 홈즈 죽임? 님 도르신?’이라며 난리 치는 사람들과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서 쓴 셜록 홈즈 시리즈의 세 번째 장편.

그리고 영국의 월간 잡지인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에서 현재 절찬리에 연재되고 있는 소설이었다.

이래 봬도 전생에서 대학물 먹은 놈인지라 영어쯤은 할 줄 알아서 팬심으로 원어본을 구독하기 시작한 건데, 생각해보니 나도 신문이나 잡지에 이런 식으로 연재소설을 쓰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시기 독일 제국은 유럽에서 신문을 많이 읽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수도 베를린은 아예 신문 도시(Zeitungstadt)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으니까.

독일 신문들은 정치적 상황에 관한 토론이나 사설들을 주로 실었지만,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건 역시 매주 한 챕터 씩 연재되는 신문 연재소설이었다.

물론 난 딱히 진지하게 작가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흥미 반, 용돈벌이 반으로 시작한 일이었을 뿐.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더라.

[화제의 신작 역사소설 ‘불멸의 리 제독’, 현재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Berliner Morgenpost)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

아, 갓순신은 못 참지.

덕분에 용돈을 쏠쏠하게 벌고 있는 것도 모자라, 팬레터도 상당히 많이 받고 있다.

리 제독이 이상적인 프로이센 군인상 그 자체라 마음에 들었다던가?

누가 뇌까지 군국주의에 절여진 놈들 아니랄까 봐 이유도 참 그렇다.

심지어 최근엔 해외에서도 팬레터가 날아오고 있어서 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는 베를린 지역신문이잖아. 대체 어떻게 본 거야?

하여튼 나는 평온하지만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런 나날이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한스, 큰일 났어!”

하지만 여긴 격동의 20세기 초.

“빅토리아 할머니가 위독하시대!”

조용한 일상을 바란다는 건 사치인 시대였다.

***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Victoria Adelaide Mary Louisa).

영국의 프린세스 로열이자 선제 프리드리히 3세의 황후, 그리고 빌헬름 2세의 친어머니.

그녀가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 이후, 몇 달 후에 사망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게 지금이라는 것은 몰랐을 뿐.

“서두르렴, 애들아. 크론베르크까지는 먼 길이니.”

하인들이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는 가운데, 아우구스테 황후가 초조한 목소리로 나와 요아힘, 빅토리아 루이제를 재촉하며 말했다.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는 빌헬름 2세의 즉위 이후, 프랑크푸르트 인근크론베르크(kronberg)란 마을에 남편의 이름을 딴 프리드리히쇼프 성(Schloss Friedrichshof)을 짓고 지금까지 그곳에 쭉 거주 중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같이 안 가시나요?”

“아버지께선 나중에 오실 거란다. 요아힘.”

요아힘의 질문에 아우구스테 황후가 대답했다.

지금 빌헬름 2세는 일로 인해 포츠담이나 베를린이 아닌 동프로이센의 쾨니히 스베르크에 있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지금 출발한다 해도 우리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독일의 북쪽 끝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있는 황태자와 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황후마마.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가자, 얘들아. 한스 너도.”

“예, 마마.”

우리는 아우구스테 황후를 따라 황실 마차에 올랐다.

물론 마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쭉 가는 건 아니고 포츠담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또 마차로 갈아타 프리드리히쇼프 성으로 갈예정이었다.

“출발하게.”

아우구스테 황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가 기차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차역에 도착한 우리는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나온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역사로 들어갔다.

곧 역장으로 보이는 뚱뚱한 중년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아우구스테 황후를 향해 급히 예를 표했다.

“황후마마.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

“상황이 다급하니 인사치레는 됐네.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특별열차는 준비되었나?”

“물,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역장의 안내에 따라 기차 승강장으로 향하니 그곳엔 시대가 시대인 만큼 올드 한 분위기의 고풍스러워 보이는 증기기관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쯤 출발할 수 있지?”

“앞으로 15분 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알았네. 자, 가자. 애들아.”

나와 요아힘,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는 원래 황족이나 상류층을 위해 준비된 것인지 화려한 장식들로 멋드러지게 꾸며져 있었다.

전생에서도 일등석은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했는데, 현생에선 이런 호사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와 요아힘, 루이제는 대충 편해 보이는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보니 우릴 뒤따라온 궁의 하인들이 마차로 옮겨온 짐을 서둘러 기차에 싣고 있었다.

“오늘 하루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후마마, 왕자님, 공주님, 그리고······.”

황실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나온 차장이 날 보더니 흠칫 놀라며 할 말을 잊었다.

내가 독일에 온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네.

“혹시 한스 초이 되십니까?”

“응? 예, 그런데요?”

“연재하시는 ‘불멸의 리 제독’은 잘 읽고 있습니다! 혹시 싸인을 좀 부탁해도······.”

그쪽이었냐.

나는 부담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차창의 시선을 피하며, 그가 내민 단행본 위에 펜으로 내 서명을 휘갈겼다.

그나저나 단행본은 또 언제 나온 거야?

아니, 지난번에 신문사에서 편지로 말했구나.

대충 읽고 버려서 지금까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스, 인기인이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팬을 만날 것까진 몰랐지.

이러다가 나중에 마지막 화에서 이순신 장군이 죽으면 셜록 홈즈처럼 살려내라고 그러는 건 아니려나 모르겠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단행본을 받아든 차장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사라졌다.

좋은 하루라.

애들은 그렇다 쳐도 황후의 얼굴은 그렇게 밝아 보이진 않는데 말이지.

“황후마마, 괜찮으십니까?”

“음? 아,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한스.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말이다.”

“황태후님 때문이시군요.”

내 말에 황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눈은 속이지 못하겠구나. 그래. 걸리신 병이 병이신 만큼 오늘 같은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빅토리아 황태후는 유방암이었다.

21세기에서도 암은 고치기 어려운데 20세기는 오죽할까.

“황태후 마마와는 가까우셨습니까?”

“처음엔 미묘한 관계였단다. 아무래도 내 시어머니와 남편의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은 편이라 나도 그분을 멀리했거든.”

그리고 못된 짓도 많이 했었지.

그때의 죄책감이 아직 남아있는지 아우구스테 황후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업무로 인해 궁을 자주 비우게 되자 나는 외로움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황태후께선 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단다. 그리고 난 어느새 그분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지.”

“······.”

“황태후께선 불쌍하신 분이란다. 한스. 폐하께서도 그것을 이해해주셨으면 좋을 텐데···.”

황태후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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