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드레퓌스 사건
“대사님. 본국에서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흠. 이리 줘보게.”
주독일 영국 대사 프랭크 라셀레스(Frank Lascelles)는 보좌관이 건넨 전보를 읽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전보의 내용은 독일 굴지의 철강기업 크루프와 영국의 방위산업체 비커스 간의 기술거래가 있었다는 것.
기업 간의 기술거래는 자주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그 거래로 오간 기술이었다.
12인치 함포.
조국 대영제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의 해군들이 전함의 주력 함포로 사용하고 있는 대포.
크루프는 비커스 사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 12인치 함포 제조 기술을 얻어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독일 황립 해군 카이저마리네는 12인치 함포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독일 해군의 현 해군교리는 화력을 약간 희생해서라도 고속으로 포탄을 퍼붓는 고속사격이다.
그렇기에 독일 대양함대의 전함들은 다른 열강들과 달리 소구경의 주포를 사용했다.
당장 현 독일 황립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함 중 가장 최신형에 속하는 비텔스바흐급 전함의 주포 구경은 9.4인치(24cm)다.
올해 건조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의 주포의 구경은 더 커졌다지만 그마저도 11인치(28cm)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독일 해군의 함포를 제작하는 크루프가 대구경 함포를 제작한 경험이 거의 없단 이유도 한몫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기술을 사 오면서까지 12인치 함포를 제작할 이유도 없었다.
“얼마 전엔 증기터빈이더니, 이번엔 12인치 함포라.”
파슨스에게 증기터빈 기술을 구매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조국의 자랑인 왕립 함대(Royal Navy)도 신형 구축함에 실험적으로 증기 터빈 추진방식을 사용하는 등, 증기터빈에 대한 각국 해군의 관심은 점점 높아져만 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12인치 함포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건 명백한 전함용 무기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독일 황립 해군이 예정되었던 전함 건조 계획을 모두 일시 중단했지.”
처음엔 그저 전함 설계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라셀레스의 직감은 이 두 가지 사건은 99% 관련이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설마 신형 전함?”
노련한 외교관답게 라셀레스 대사는 독일 황립 해군의 의도를 알아챘다.
카이저마리네는 분명 12인치 주포와 증기터빈 추진방식을 사용한 신형 전함을 건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굳이 기존의 건함 계획을 취소하면서까지 이를 진행할 필요가 있나?”
12인치 함포는 이미 영국을 비롯한 많은 열강 해군들이 주력 함포로 사용하는 무기이다.
그렇기에 라셀레스 대사가 생각하기에 독일 카이저마리네가 이렇게까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일 정도로 특별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증기터빈은 영국에서도 어디까지나 소형 함선에만 사용되었을 뿐.
전함 같은 대형 함선에 장착된다 한들 효과가 얼마나 있을 진 라셀레스 대사로선 의문이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라셀레스 대사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일이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 이 일에 카이저의 의지가 관여한 건 분명해.”
라셀레스 대사는 빌헬름 2세와 상당히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였던 만큼, 카이저의 강력한 해군에 대한 집착 또한 잘 알았다.
이건 사건의 규모로 봐도 독일 황립 해군이 독자적으로 벌일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빌헬름 2세의 명령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로선 카이저의 의중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가 없어.”
라셀레스 대사는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았다.
영국이란 나라의 특성상 해군에 대한 다소의 지식은 있었지만, 당연히 전문가는 아니었다.
“이 일은 해군에 맡기는 편이 좋겠어.”
대영제국의 자랑스런 왕립 해군이라면 자신과 다르게 카이저가 만들려는 신형 전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짚이는 게 있을 것이다.
라셀레스 대사는 홍차를 마시며 본국으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의 즉위 이래, 독일 황립 해군의 급성장은 이미 양국의 외교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 일로 독일의 해군력에 크게 변화가 생긴다면 영국으로선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였다.
똑똑!
“들어오게.”
“실례하겠습니다. 대사님.”
라셀레스 대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좌관이 심각한 얼굴로 손에 무언가를 들고 대사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 있나?”
“예. 대사님. 우선 이것을 보시지요.”
보좌관이 라셀레스 대사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독일 신문은 아니었다.
“이건 프랑스 신문 아닌가? 그것도 어제자 신문이군.”
“주프랑스 영국 대사관에서 급히 보내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주독일 대사관도 아는 편이 좋을 거라 하더군요.”
“주프랑스 대사관에서 우리한테?”
프랑스와 독일이라.
양국의 관계가 관계인 만큼, 어째 불안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후우, 읽어보지.”
라셀레스 대사는 안경을 끼고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럽 외교가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인 만큼, 라셀레스 대사도 통역없이 신문 정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카이저를 구한 소년, 한스 초이와의 단독 인터뷰 공개. 드레퓌스는 무죄! 에스테라지도 이중간첩일 가능성 있어. 특별 사면은 추악한 진실을 덮으려는 프랑스 정부의 음모?]
“푸??!”
그러나 라셀레스 대사는 1분도 지나지 않아 입에 머물고 있던 홍차를 그대로 내뿜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한스 초이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
최근 베를린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동양인 소년을 주독일 영국 대사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아이가 뭘 떠들었다고?
드레퓌스 사건? 지난 몇 년간 프랑스를 미쳐 돌아가게 만들었던 그 ‘드레퓌스’ 사건??
“bloody hell···!”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라셀레스 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는 독일 제국의 신형 전함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나마 잊어버렸을 정도로 신문에 집중했다.
***
파리, 엘리제궁.
“다들 이야기해 보시게.”
프랑스 제3공화국의 7대 대통령, 에밀 루베(Emile Loubet)가 얼어붙을 것만 같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문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할지.”
“그게······”
프랑스 군부 인사들과 내각 장관들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창백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사실 그들로서도 대체 이번 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1899년, 악마섬에서의 수감 생활을 견디지 못한 드레퓌스 대위가 정부의 특별사면을 받아들이며 원만하게 끝날 줄 알았던 드레퓌스 사건이 이런 식으로 다시 재점화될 줄 그 누가 알았겠나?
“일단 이번 일의 모든 원흉인 ‘르 쁘티 파리지앵’의 모든 신문을 회수하고 이 이상의 보도를 막으면···.”
“언론탄압이라고 더 날뛰겠지! 자넨 지금 그딴 멍청한 생각을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건가?!”
쿵!
분노한 루베 대통령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제발 정신들 좀 차리게. 드레퓌스, 그 드레퓌스 사건이네! 이미 파리, 아니 프랑스 전체가 다시금 불타오르고 있단 말일세!”
당장 엘리제궁 밖에선 누가 프랑스인들 아니랄까 봐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방금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에밀 졸라(Emile Zola)와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가 드레퓌스 대위의 가족들과 접촉했다고 하는군.”
두 사람 다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주장하며 정부에 맞서 싸웠던 친 드레퓌스파의 상징과도 같은 이들이다.
“이번에야말로 재심을 통해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받아낼 생각이겠지.”
성급한 친구들 같으니.
에밀 루베는 그리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투덜거렸다.
자신이라고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걸 모르겠는가?
당장 에밀 루베 그 자신도 친 드레퓌스파에 속하는 진보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내겐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 더 이상의 혼란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기에 에밀 루베는 드레퓌스에게 특별 사면을 제안했다.
이것으로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드레퓌스 사건을 잠재울 순 있을 테니까.
무죄야 그다음에 천천히 받아내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그런 루베의 노력은 지금 한 동양인 소년 때문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독일 대사는 뭐라고 대답했나? 우리의 ‘항의’에 대해서 말일세.”
대통령의 질문에 프랑스 외무장관이 한숨 쉬며 대답했다.
“자신들은 상관없는 일이라더군요. 그 한스 초이란 황인종 소년의 인터뷰에도 독일 정부는 일체 관여한 적이 없다고 덧붙이면서 말이죠.”
심지어 독일 대사는 ‘고작 애가 한 말 아님? 왜 이렇게 심각함? 님들 혹시 어린애 하나에게 쫀거임ㅋㅋ?’이란 모욕적인 언사를 외교적 수사로 고상하게 돌려 말하기까지 했지만, 외무장관은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대통령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럼 고작 9살짜리 동양인 꼬마애가 혼자서 우리 프랑스 정부를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 썩은 양배추나 처먹는 놈들 아니랄까 봐 뇌까지 썩어버린 모양이군. 개소리 작작 하라고 전하게!”
한스 초이.
빌헬름 2세의 목숨을 구했다는 그 동양인 소년은 그냥 얼굴마담일 뿐, 사실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의 뒤에는 분명 카이저나 독일 정부가 뒤에 있다.
상식인이었던 에밀 루베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에스테라지가 정말 이중간첩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또 뭔가?”
그건 영국으로 도망간 에스테라지가 지껄인 헛소리 아니었던가?
이것 때문에 자신이 드레퓌스를 특별 사면한 것도 추악한 진실을 숨기기 위한 음모라는 등 가당치도 않은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건······.”
군부 인사들이 눈치를 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결국 대답할 수 없다 이거냐?’
에밀 루베는 살기 어린 눈으로 군부 인사들을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이 위대한 프랑스를 좀먹는 쓰레기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분란을 일으킬 순 없었다.
지금은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참아야 했다.
결국 루베 대통령은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에스테라지는 이중간첩이 아닐세.”
“예?”
“그는 독일과 내통한 반역자야. 무조건 그리되어야 하네.”
“알, 알겠습니다. 각하!”
에스테라지가 정말 이중간첩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그를 이중간첩이었다고 인정해버리면 그건 드레퓌스가 무죄인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무려 군부와 정부라는 작자들이 드레퓌스가 체포된 이유였던 기밀 누출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한 이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에밀 루베 자신의 정치 인생은 물론 프랑스 정부의 신뢰성은 그날로 끝장이다.
그렇기에 에스테라지는 무조건 반역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에밀 졸라와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전하게.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대위 본인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을 요구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고.”
“예? 각하! 하지만···!”
“오, 설마 군부 쪽에서 반대할 거로 생각하진 않네. 생각이란 게 있다면 말이야.”
루베 대통령의 서슬 퍼런 눈빛에 프랑스 군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미 에스테라지 건을 덮은 것으로 대통령은 이미 그들을 많이 봐주었다.
만약 이 이상 선을 넘었다간, 그땐 군부를 향한 피의 대숙청이 벌어질 것이다.
“···군은 드레퓌스 대위의 재심에 어떤 이의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음. 좋은 선택일세.”
그렇기에 프랑스 군부는 대통령의 관대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도 자기 밥그릇은 소중했으니까.
“다만 저희가 가만히 있다고 해도 가톨릭 같은 다른 보수세력이 이에 반발할 것입니다.”
“그건 자네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네.”
에밀 루베 대통령은 어차피 가톨릭 세력을 프랑스 정계에서 아예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그들이 드레퓌스 사건 때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정치화된 현 프랑스 가톨릭은 프랑스의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암세포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루베 대통령은 원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몇 년 정도 시간을 들여 국교 지위 박탈을 시작으로 프랑스 가톨릭의 세속 영향력을 완전히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루베는 아예 이번 일을 기회로 정교분리 계획을 앞당길 생각이었다.
뛰어난 정치인이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몇 년간은 내부 정리에 집중해야겠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벨 에포크.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화로운 좋은 시절이었다.
설마 그사이에 유럽 어딘가에서 전쟁이라도 터지겠는가?
작가의말
독일 대역에서 프랑스는 고통받는다. 그것이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