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8화 (8/193)

8화 : 불장난

프랑스의 대형 일간지, 르 쁘티 파리지앵 (Le Petit Parisien)의 기자, 피에 르 마르탱은 우울했다.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독일 제국 주재원으로 뽑혀 베를린으로 오게 되었지만, 피에르는 우중충하기론 영국과 순위를 다툴 것 같은 이 나라에 영적응을 못 했다.

피에르는 고향 보르도의 따뜻한 기후와 와인이 그리웠다.

하지만 프랑스로 돌아갈 방법은 어떻게든 공을 세워 영전하는 것뿐.

그리고 기자가 공을 세운다는 것은 세상을 뒤흔들 엄청난 특종을 취재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현 독일엔 그다지 큰 사건들이 없었다.

따분할 정도로 무난하고 또 전쟁 좋아하는 독일인들과 그다지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평화로웠다.

언제나 특종에 목말라 있는 기자 입장에선 가히 최악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말이다.

[브레멘에서 일어난 카이저 암살 미수! 범인은 또 무정부주의자?]

기자들의 좋은 친구인 아나키스트들이 또 한 건 해냈다.

빌헬름 2세가 상처 없이 멀쩡하다는 점이 프랑스인으로선 조금 아쉬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카이저를 암살로부터 구한 자가 하필이면 ‘한스 초이’란 이름의 황인종 소년이었단 것이다.

이런 대박 특종 거리를 놓치다니.

피에르는 그날 자신이 브레멘이 아니라 베를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빌헬름 2세가 무슨 약을 했는지 이 ‘한스’란 소년을 궁에 들였고, 언론의 관심사는 그야말로 한스 초이에게 초집중됐다.

하지만 피에르뿐만 아니라 어떤 기자도 한스 초이를 취재할 수 없었다.

한스 초이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포츠담 신궁전.

카이저 빌헬름 2세와 그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황궁이었다.

제아무리 간 큰 기자라 해도 유럽에서도 특히나 보수적인 독일 황실을 취재하겠다고 나설 정신 나간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악명높은 프로이센 비밀경찰들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행방불명 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나 오늘 피에르는 마치 행운의 여신이 자신에게 강림한 듯한 기적을 목도 했다.

괜찮은 기삿거리도 없겠다 스트레스나 풀 겸 방문한 축구 경기장에서 말 그대로 ‘우연히’ 황태자 옆에서 축구를 구경하고 있는 한스 초이를 발견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태자랑 같이 있는 황인종 소년이 ‘한스 초이’말고 또 있겠는가?

100% 본인이 확실했다.

이미 프랑스에도 열정적인 축구 후원자라 잘 알려진 빌헬름 황태자가 축구장에 찾아오는 건 특종은커녕 가십거리도 안 되지만, 한스 초이라면 달랐다.

그동안 베일에 숨겨져 있던 ‘카이저를 구한 소년’.

이건 진짜 특종이었다.

찰칵!

관중석에 있던 피에르는 급히 직업병으로 인해 항상 챙기고 다니는 카메라로 반대편 VIP 특별석에서 황태자와 같이 축구를 구경하고 있는 한스 초이를 촬영했다.

‘이것으론 부족해···’

피에르는 욕심이 생겼다.

단 몇 마디라도 좋으니 한스 초이와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으론 특별석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생각하던 그 순간.

피에르의 눈에 한스 초이가 특별석에서 나와 어디론가로 향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기회다!’

피에르는 짐을 챙긴 채 서둘러 한스 초이를 따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스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피에르는 카메라를 품속에 숨긴 채 일반인인 척하며 화장실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피에르는 몰랐다.

그때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려는 한스와 딱 마주칠 줄은.

팍!

“으?”

피에르는 한스 초이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기자의 본능에 따라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은 이미 한스가 카메라 플래시에 눈뽕을 당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후였다.

“아, 아아! 죄, 죄송······”

“이봐! 당신 뭐야!”

“예? 아니, 전···으아아아악!”

피에르는 급히 한스를 향해 사과하려 했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로이센비밀경찰이 악마 같은 얼굴로 피에르를 바닥에 넘어뜨리는 것이 더 빨랐다.

"아니, 뭐 하는 사람이길래 다짜고짜 남의 사진을 찍으려 드는 겁니까?"

"그, 그게······."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한스 초이가 겁에 질린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애라곤 생각도 못 할 싸늘한 얼굴.

피에르가 대답을 망설이자 한스 초이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당신을 붙잡고 있는 건 프로이센 비밀경찰이거든요."

"비, 비, 비밀경찰?!"

망했다.

자신의 인생이 말 그대로 끝날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된 피에르는 벌벌 떨며 자신에 대해 있는 그대로 불었다.

이대로 어디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피에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들은 한스의 얼굴에 떠오르는 묘한 웃음을.

***

‘이놈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밑에서 칠칠치 못하게 눈물 콧물을 질질 쏟아내고 있는 이 ‘프랑스 기자’를 내려다봤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가?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로 독일에 엄청난 치욕을 당한 뒤, 복수의 칼날만을 갈고 있는 현 독일 제국의 명실상부한 제1 적국이다.

그리고 6주 당한 2차와 달리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협상국의 딜탱을 맡으며 독일 제국의 야욕을 가로막았던 1등 공신이었다.

독일 제국을 존속시키려는 나에게 있어서 반드시 쓰러트려 할 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레기 녀석을 잘만 쓴다면 그 프랑스에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현 프랑스의 지도자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제7대 대통령, 에밀 루베(Emile Francois Loubet).

강경한 정교분리 정책을 펼치며 프랑스 특유의 세속주의 사상인 ‘라이시테’를 확립시킨 대통령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루베의 가장 큰 위업은 바로 1904년, 영국과의 영불협상 체결.

영불협상의 탄생으로 독일은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영국마저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오헝제국을 빼곤 완전히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만다.

그러나 프랑스 정국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잘만하면 그 시기를 늦출 수도 있었다.

게다가 실패해도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손해를 입을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기자라니, 어느 신문사 소속입니까?”

“파, 파리지앵. 프랑스의 르 쁘티 파리지앵입니다!”

좋다.

르 쁘티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프랑스의 4대 일간지 중 하나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론 중도에 가까워서 내 말을 프랑스에 퍼트리기에도 딱 적합했다.

“이분 풀어주시죠.”

“음? 하지만···”

“괜찮습니다. 위험한 자도 아닌데요. 뭘.”

비밀경찰은 내 말에 잠깐 망설이더니, 기자를 풀어주었다.

기자는 곧바로 비밀경찰의 곁에서 떨어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아뇨. 그러지 말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깐 인터뷰나 하죠.”

“예? 예엣? 그, 정말로요?!”

기자가 좋아하며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20세기나 21세기나 기레기들은 거기서 거기인 법이지.

그러자 비밀경찰이 무슨 생각이냐는 듯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얼마 안 걸릴 테니.”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잠깐 여흥을 즐기는 것 가지고 황태자도 뭐라 안 할 거다.

우리는 이 좁은 화장실에서 나간 뒤, 근처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선동과 날조의 시간이었다.

***

“후반 경기가 시작되기 전엔 돌아가고 싶으니 짧게 끝내도록 하죠.”

“예. 예예. 물론입니다.”

기자가 수첩을 꺼내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슈 초이는 암살자의 총탄을 대신 맞음으로써 황제의 목숨을 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혹시 어째서 그리 행동했는지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생각보다 정상적인 질문이다.

근데 그건 나도 모른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상황은 한참 전에 끝나있었는데 내가 알 길이 있나.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같은 게 필요할까요?”

“네? 아, 아하하하.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이가 혹시···?”

“1892년생입니다.”

1901년 3월 기준으로 만 9살이다.

사실 정확한 나이는 나도 모르지만, 나와 연령이 가장 가까운 걸로 추정되는 빅토리아 루이제가 그해에 태어났으니 나도 아마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9살···제 조카와 비슷한 나이인데 대단합니다. 그리고 그 후, 황제에 의해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하지만 아무래도 황인종이란 점 때문에 곤란하신 일이 많을 것 같은데요. 특히 이 ‘독일 제국’에선 말이지요.”

따분한 밑밥만 던지다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적당히 아부하다 내가 힘들다고 한마디만 하면 프랑스에 ‘뿌슝빠슝 독일 황실의 민낯 고발!’ 같은 조롱 기사를 퍼트릴 생각이겠지.

다만 마음대로는 안될 거다.

난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비롯한 황실 가족분들은 언제나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시거든요. 하지만 이유 없는 인간의 ‘악의’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죠. 그 ‘드레퓌스’ 대위가 당한 일처럼 말입니다.”

“푸흡?!”

드레퓌스란 단어를 내가 입에 담자마자 기자의 얼굴에 경악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게 프랑스인이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니까.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

프랑스 정부와 군부가 드레퓌스 대위란 평범한 군인을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독일과 내통한 간첩 혐의를 씌운 것도 모자라 끝내 무기징역을 선고하면서, 한 무고한 이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내버린 반유대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제3공화국을 대혼란에 빠트렸던 원인이자 흑역사다.

“드, 드레퓌스 사건은 이미 끝난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현 정부에서 재작년에 드레퓌스에게 특별사면을 내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죠. 참 가식적인 일 아닙니까? 드레퓌스는 무죄가 분명한데 재심을 해도 모자랄 판에 고작 특별사면이라니 사실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꼴 아닙니까.”

“하, 하하. 무슈 초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저희 프랑스에도 있죠.

정말 무죄인지는 저야 모르지만요.”

“아, 드레퓌스는 무죄가 맞습니다. 그 사건과 관련이 있던 독일 장교에게 들었거든요.”

“예? 잠, 잠깐만요.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 있는 독일 장교라면 설마 슈바르···.”

쉬잇.

나는 일부러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기자가 누구를 말하려는지는 알고 있다.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Maximilian von Schwartzkoppen).

드레퓌스 사건 당시 주프랑스 독일 대사관의 무관으로 프랑스군 정보부가 드레퓌스가 슈바르츠코펜에게 군사 기밀문서를 넘겼다고 판단하고 드레퓌스를 체포한 것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의 발단이었다.

진짜 간첩은 방첩대 장교였던 ‘페르디낭 에스테라지(Ferdinand Walsin Esterhazy)’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프랑스 군부는 그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끝까지 에스테라지를 체포하지 않았다.

‘그리고 슈바르츠코펜은 독일로 돌아와 현재 근위대 소속으로 포츠담에서 근무하고 있지.’

공교롭게도 말이다.

물론 난 슈바르츠코펜을 만나기는커녕 그의 얼굴조차 모른다.

하지만 이는 눈앞의 기자가 내가 정말로 그에게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들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들기에 충분한 떡밥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기자님이라면 비밀 지켜주시겠죠?”

“아, 예! 물론입니다.”

“저도 우연히 들은 궁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분 말씀으론 ‘드레퓌스는 무죄다.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한다.’라고 하더군요.”

“이, 이럴 수가···!”

실제로 1917년, 슈바르츠코펜이 죽기 전 남겼다고 알려진 말이다.

“그럼 역시 진짜 범인은 에스테라지인 겁니까?”

“글쎄요. 어쩌면 에스테라지도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그저 이중간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렇다면 더 심각한 일 아닙니까! 기밀이 누출된 적도 없는데, 군부가 드레퓌스 대위에게 일부러 사건을 뒤집어씌웠단 소리니까요!”

그거야 나야 모르지.

어차피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 일이 프랑스 대중들에게 미칠 영향이 중요하지.

“어쩌면 특별사면도 그 일을 덮으려 한 것일 수도···!”

“그럴지도 모르죠. 전 이만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예?!”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셔서 말이죠.”

기자가 제발 몇 마디만 더 해달라며 날 붙잡으려 했지만, 비밀경찰이 이를 제지했다.

기자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 곧장 어디론가로 급히 달려갔다.

씨익─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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