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궁극의 전함
“폐하. 전 오늘 카이저마리네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늦은 밤.
카이저의 집무실.
“당장, 이 ‘드레드노트’를 도입해야 합니다!”
‘아깐 다 죽어가더니 이젠 완전히 펄펄 날아다니는군.’
슐리펜은 몇 시간째 한스가 말한 그 '궁극의 전함'에 대한 열변을 내뱉고 있는 티르피츠 제독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설마하니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이야.
슐리펜 자신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스 초이···.’
카이저의 목숨을 구한 동양인 소년.
현재 베를린 사교계에서 좋든 나쁘든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
슐리펜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빌헬름 2세가 황인종을 궁에 들이다니.
평소 카이저가 떠들고 다니던 아시안들에 대한 유별난 발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독일인들로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스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졌을 때, 베를린엔 말 그대로 폭탄이 터졌다.
슐리펜이 젊은 시절 겪었던 쾨니히그레츠 전투도 이 정도로 격렬하진 않았다.
누군가는 카이저가 미쳤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카이저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남색에 빠진 게 아니냐며 괴담을 떠들어댔다.
그렇기에 슐리펜은 카이저의 만찬 초대에 응하며 '한스 초이'란 소년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호기심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한스라는 동양인 소년이 만약 황실과 독일 제국에 해가 될 것 같으면 육군을 움직여서라도 쫓아낼 생각이었다.
‘폐하, 죄송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한스 초이라는 소년은 뭐랄까 슐리펜의 상상 이상이었다.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해도 좋았다.
카이저의 말에 그리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비스마르크가 해임된 이후 정말 오랜만에 봤다.
첫인상은 그냥 예의 바른 어린아이에 불과했는데 그 배짱 하나만큼은 확실히 인정할만했다.
그래서 슐리펜은 한스를 격노한 티르피츠로부터 지켜줬다.
단순한 흥미였다. 그냥 이 아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 나선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슐리펜은 다시 한번 놀랐다.
한스 초이라는 소년은 평범한 동양인 소년이 아니었다.
저건 하늘이 내린 천재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몸에 미래인이 들어있었기에 그렇게 보인 것뿐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슐리펜의 눈엔 한스는 이미 어린아이를 뛰어넘은 무언가였다.
거기다 개인적으론 육군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침 최근 의회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샌님들이 해군 건설을 위해 육군이 조금 양보해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를 지껄여서 짜증 나던 차에 간만에 속이 시원해지는 말이었다.
‘갖고 싶다!’
슐리펜의 눈이 오랜만에 인재욕으로 번뜩였다.
현 독일 제국군 내에서도 저 정도의 전략안을 가진 자는 드물었다.
한스는 반드시 군에 들어와야 하는 인재였다.
아니, 군에 필요한 인재였다.
저 재능을 군을 위해서 쓰지 않으면 대체 어디에 쓴단 말인가!
물론 평범한 한국 남자답게 군대에 그다지 좋은 추억이 없는 한수가 들었으면 격렬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겠지만, 어차피 슐리펜에게 있어 한스의 의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슐리펜 자신도 본래 군인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육군 참모총장의 자리까지 오른 몸.
일단 하다 보면 다 익숙해지는 법이다.
‘아직 어린아이인 게 아쉬울 따름이군.’
다섯 살만 나이가 많았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육군사관학교에 들여보냈을 것을.
슐리펜은 한스가 들었으면 기겁을 했을 생각을 하며 안타깝다는 듯이 입술을 매만졌다.
“하지만 이 '드레드노트'란 신형전함이 실제로 검증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신병기란 게 원래 그런 법이지. 게다가 개념 자체는 이미 예전부터 존재해왔소!”
슐리펜이 한참 한스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뷜로 총리와 티르피츠는 아직도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드레드노트.
한스가 제안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혁신적인 신형전함.
왜 굳이 영국식 함선명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론대로라면 기존 전함들론 상대가 안 되는 괴물이다.
상대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먼 거리에서 압도적인 화력과 명중률로 포격을 퍼붓는 드레드노트를 느려터진 현 전함들이 대체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해군에 문외한인 슐리펜이 봐도 확실히 ‘궁극의 전함’이라 할 만했다.
그렇기에 저 티르피츠 제독조차 드레드노트에 대한 설명을 듣자마자 한스를 찬양하며 당장 도입하자고 노래를 불렀다.
아까 한스보고 노랑 원숭이 놈이라 지껄였던 건 이미 기억에서 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뷜로 총리는 신중히 접근하자는 쪽이었다.
슐리펜이야 육군 예산만 안 건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드레드노트는 기존 함선들보다 배로는 건조 비용이 배로는 들 겁니다. 그 예산은 또 어디서 끌어오란 겁니까!”
“건조 예정이던 브라운슈바이크급과 도이칠란트급을 취소하고 그 예산을 드레드노트 쪽으로 돌리도록 하지. 물론 비용이 비용이니만큼 건조되는 함선의 수는 줄겠지만, 드레드노트의 위력과 가치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할만하오.”
“그래도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만약 실패라도 한다면···.”
“그쯤 하게. 뷜로.”
“폐하?”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네.”
티르피츠와 뷜로의 토론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이저가 손을 들며 뷜로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아무래도 마침내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티르피츠 제독.”
“옛!”
“모든 신형전함 건조 계획을 일시 중단하고, 내일 해군청으로 해군 간부 전원을 소집하게. 내가 직접 그들과 드레드노트에 대해 논의를 할 것이네. 그리고 뷜로 총리.”
“예. 폐하.”
“실패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네. 한스의 말이 옳아. 우린 후 발주자. 우직하게 따라가봤자 차이는 좁혀지지 않지. 지금은 모험을 해야 할 때야.”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뷜로 총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지만 카이저의 뜻을 거스르진 않을 것이다.
슐리펜이 아는 뷜로는 그런 사람이었다.
“슐리펜.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육군은 폐하와 해군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어차피 기존에 책정된 예산으로 건조하는 것이다.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지금 드레드노트를 선점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영국이나 다른 열강들이 놀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영국이 드레드노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은 쓰시마 해전 이후였지만, 그 밑바탕이 되는 개념은 이미 존재했다.
슐리펜이 보기에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영국이 먼저 드레드노트를 개발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맞는 말이네. 그리고 만약 영국이 우리보다 먼저 드레드노트를 손에 넣는다면, 우리 독일은 영국을 영영 따라잡지 못하겠지!”
쾅!
그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는 듯, 카이저가 격정적으로 주먹을 책상에 내리쳤다.
“알겠나? 이건 속도전일세. 영국인들이 드레드노트의 가치를 눈치채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모두 이번 일에 총력을 다하게. 해양 패권을 손에 넣을 마지막 기회이자 절 호의 기회. 절대 놓쳐선 안 되니!”
“예. 폐하!”
늦은 밤.
바깥 공기는 차가웠지만 카이저의 집무실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한스, 내가 오늘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빌헬름 2세가 내 제안에 대해 뷜로 등과 논의해보기 위해 집무실로 간 후.
나는 만찬에서의 일로 아우구스트 황후에게 한참이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늘 네가 한 일은 매우 무례하고 성급한 일이었다. 물론 너도 다 생각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 생각을 말하기 위해선 때와 장소, 그리고 방법을 가려야 하는 법이야.”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하아, 정말 큰 문제가 없었기에 다행이지.”
“······.”
“부탁이니 다시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거라.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황후마마.”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렴. 나중에 황제 폐하와 티르피츠 제독께 오늘의 무례를 사과하는 것 잊지 말고.”
“예.”
여전히 한숨짓고 있는 아우구스테 황후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후우. 어째 아까 만찬장에서 떠들어댔을 때보다 진이 더 빠진다.
“그래도 어찌어찌 일은 잘 풀렸어.”
빌헬름 2세가 지금 집무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카이 저는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독일이 드레드노트를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 것쯤은 아무리 빌헬름 2세도 알아챘을 테니까.
아무렴 내가 그렇게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으면 그건 그냥 멍청한 수준이 아니라 인간 이하다.
“슐리펜과 티르피츠도 날 마음에 들어 한 것 같고.”
뷜로 총리가 아직 날 미심쩍어하는 것이 좀 아쉽긴 했지만, 그 둘의 눈에 든 것만 해도 충분히 이득이다.
특히 슐리펜과 친해지면 나중에 독일 제국군을 위한 신무기 개발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영국이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아직 완전히 깨지진 않았지만, 이미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영국은 지금 여러모로 패기 넘치는 신흥 열강 독일의 성장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여기서 독일이 드레드노트급을 선점하게 된다?
영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보였다.
‘영국은 당장 움직이지 않을 거야.’
영국은 아직 자꾸 남쪽으로 기어 나오려는 러시아 제국이란 거대한 동방의 곰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3년 후에 있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의 그레이트 게임이 끝나는 순간, 영국은 러시아를 향했던 총부리를 곧장 독일을 향해 돌릴 테니까.
“이 문제는 일단 그때 가서 생각하자.”
어차피 드레드노트가 최대한 빨리 건조된다고 해도 최소 1년은 넘게 걸린다.
독일 제국의 암울한 외교 상황은 지금의 나로선 섣불리 손댈만한 게 아니니, 지금은 그때를 위해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자.
“한스.”
“황태자 전하?”
방 앞에 도착하니 지금까지 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인지, 빌헬름 황태자가 서 있었다.
황태자가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온 걸까?
빌헬름 황태자와 나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물론 황태자 쪽에서 대놓고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솔직히 이렇게 말을 건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어머니에게서 이제야 풀려난 거냐?”
“예. 아까 만찬장에서의 일로 꽤 꾸중을 들었습니다.”
“음. 어머니는 좋은 분이시지만 잘못엔 엄하시지. 그나저나 그때의 일은 나도 흥미롭게 봤다.”
“과, 과찬이십니다.”
“뭐? 아니, 널 칭찬하려는 건 아니야. 혼내려는 것도 아니지만.”
빌헬름 황태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것참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말씀이시군.
“그냥 널 다시 봤다고 말하고 싶었다.”
“예?”
“너도 알다시피 난 널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싫어하면 싫어했지.”
이유야 뭐,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하지만 네가 아까 만찬장에서 아버지의 말에 대놓고 반박한 것도 모자라 역으로 설득하는 모습을 보고···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엔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지만 말이야.”
“하하···.”
“난 아버지의 앞에서 그렇게 못해. 넌 잘 모르겠지만, 우리 독일에서 자식들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경스러우면서도 두려운 존재들이거든.”
황태자는 그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리 말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빌헬름 2세는 여동생 시씨(빅토리아 루이제의 애칭)에겐 매우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아들들에겐 무척 엄했다.
그러니 황태자에게 있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 고향도 별반 다를 건 없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의외로 다 비슷한 법이거든요.”
“하, 그래?”
“네. 워낙 어렸을 때 떠나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요.”
참고로 존재하지도 않는 현생의 부모님은 모종의 이유로 대한제국에서 아기였던 날 데리고 독일에 왔다가, 재수 없게 이 시대엔 불치병에 가까웠던 결핵에 걸려 돌아가셨단 ‘설정’이었다.
갑자기 눈 떠보니 독일이었다고 말할 순 없어서 지어낸 이야기이긴 한데 의외로 잘 먹히더라.
“어쨌든 얘기해서 좋았다.”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론 편하게 대해. 동생들에게도 말해놓을 테니까.”
슬슬 널 무시하고 다니는 것도 귀찮아졌거든.
빌헬름 황태자는 그리 덧붙이며 킥킥 웃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었다.
빌헬름 황태자와 왕자들이 내 편이 되어준다면 상당히 든든할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한스.”
“예?”
“너 축구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