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위험한 도박
빌헬름 2세의 장남이자 독일 제국의 황태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어 아우구스트 에른스트는 요즘 심기가 많이 불편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버지가 데려온 동양인 소년.
한스 초이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저 황인종 꼬맹이가 무려 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냥 포상금 몇 푼 주고 끝내도 될 것을 굳이 녀석을 궁에 들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과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뜻이고 결정이라지만 빌헬름 황태자는 이번일 만큼은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칭키를 궁에 들이는 게 말이 돼?”
“호엔촐레른 황실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게 생겼어.”
그리고 한스 초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건 황태자뿐만이 아니었다.
둘째 아이텔 프리드리히.
셋째 아달베르트.
넷째 아우구스트 빌헬름.
그리고 다섯째 오스카까지.
아직 너무 어려서 사리 분별이 잘 안되는 여섯째 요아힘과 막내 여동생 루이 제만 빼고 형제 대부분이 한스 녀석을 싫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와 왕자들은 당장 몇 개월 전, 저 중국 땅에서 황인종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살인, 강간, 약탈, 식인, 고문까지.
도저히 입에 담기도 역겨운 행위들이 중국에 있던 '선량한' 백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물론 독일군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지만, 제국주의란 이름의 광기가 정점을 찍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빌헬름 황태자에게 있어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보복이었다.
“근데 빌헬름 형, 한스 갠 칭(Qing)이 아니라 코레아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어?”
“야, 아달베르트. 코레아가 어디냐? 인도차이나?”
“···아이텔 형. 코레아는 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나라야. 재작년에 하인리히 숙부님이 다녀오신 거 잊었어?”
“아, 맞다. 그랬었지 참.”
“전에 하인리히 숙부님이 그랬는데 코레아는 꽤 살기 좋은 곳이래. 기후도 좋고 사람들도 착하고 예의 바르다고 했어.”
“시끄러워. 이 바보들아. 칭이나 코레아나 어차피 다 똑같은 칭키들이야. 그놈이 그놈이라고.”
“크큭, 그건 그렇지.”
물론 한스가 이를 들었다면 '그럼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은 똑같은 흰둥이니까 다 같은 놈들이냐?'라고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겠지만, 아무튼 빌헬름 황태자는 한스를 조금도 존중할 생각이 없었다.
그 녀석도 어차피 자기 동족들과 똑같은 족속일 게 분명했으니까.
“······뭐라?”
하지만 지금 빌헬름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한스에 대한 생각을 수정했다.
미쳤다.
이놈은 황인종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냥 미친놈이었다.
한스, 이 망할 자식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알면 이딴 망언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앞에서 지껄이진 않았을 테니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국, 영국이다.
아버지는 외가인 영국을 좋아하면서도 내심 심각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에겐 외숙 되시는 에드워드 7세 할아버지가 즉위한 뒤 더 심해졌다.
‘그런데 이놈은 아버지의 트라우마 스위치를 누른 것을 넘어 아예 부숴버렸어!’
황태자 자신조차 감당할 배짱이 안 나는 그야말로 미친 짓.
그리고 한스 녀석은 이 미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도 뻔뻔한 얼굴로 서 있었다.
쾅!
“당장 그 말 취소하지 못해!”
한스의 대답에 분노한 티르피츠 제독이 큰 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이 말 그대로 새빨갛게 물들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이 당장이라도 한스를 엘베강 한 가운데 담가버릴 기세다.
“우리 카이저마리네가 섬나라 놈들을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다고? 감히 네까짓게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제독, 진정하시오!”
“말리지 마시오. 총리. 아무리 어린애라 해도 이런 모욕은 절대 용납할 수 없소!”
“하, 한스! 얼른 카이저와 제독께 죄송하다고 사죄드리거라!”
어머니 아우구스테 황후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그러나 한스는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뭐라고?!”
저 녀석의 머릿속엔 대체 무엇이 든 것일까?
빌헬름 황태자는 진지하게 한스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어졌다.
“이 노란 원숭이 놈이!”
한스의 여전히 뻣뻣한 태도에 격노한 티르피츠 제독이 결국 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티르피츠 제독! 지금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 앞에서 이 무슨 무례인가!!”
그러나 그 순간, 결국 참다못한 슐리펜 참모총장이 제독의 앞을 가로막으며 호통을 쳤다.
“비키시오. 슐리펜 백작! 저놈은 나를, 우리 카이저마리네를 모욕했소!”
“멍청한 소리 작작 하고 이성을 찾게. 카이저께서도 가만히 계시는데 왜 자네가 난리인가!”
아버지가 가만히 있다고?
황태자가 보기엔 아버진 지금 너무 분노한 나머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뿐이다.
저 콧수염 부들부들 떨리는 것 좀 봐라.
지금 옆에서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는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아버진 벌써 한스 녀석의 목을 조르고도 남았다.
“한스 군. 카이저께 듣기론 자네는 아주 총명한 아이라고 들었네.”
슐리펜 참모총장이 말했다.
“그리고 내가 봐도 자네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을 것 같은 아이로 보이진 않아.”
“······.”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네는 그렇게 단언했지.”
“슐리펜!”
“진정하게. 티르피츠. 자, 한스 초이. 나에게 그 이유를 들려줄 수 있겠나?”
슐리펜 참모총장의 말에 갑자기 혼란스러웠던 만찬장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야, 아이텔. 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겠냐?”
“아니, 형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자식에게 물은 내가 바보지.
빌헬름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며 슐리펜과 한스의 대화에 집중했다.
***
‘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티르피츠가 달려들 땐 진짜 식겁했다.
꽤 거친 성격인 것은 한눈에도 보였지만 카이저 앞이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자중할 줄 알았는데, 설마 이 정도로 자제심이 없는 인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슐리펜이 제때 티르피츠의 앞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엘베강강바닥 구경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너무 성급했나.’
빌헬름 2세는 섬나라 친척들에 대한 열등감과 애증을 가지고 있었고, 티르피츠 또한 원 역사에서도 진심으로 영국 해국을 박살 내겠단 허황한 꿈을 꾸던 사람이다.
그런 인간들 앞에서 '너네 해군 영국 못이김'이라고 단언을 해버렸으니. 내가 생각해도 이 자리에서 맞아 죽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멍청한 짓이긴 하다.
‘그리고 난 그런 멍청할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지금은 위험해도 무리해야 한다. 무리할 수밖에 없다.
난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이 독일 제국이란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주도적인 위치까지 올라가야 했으니까.
세계대전의 패배자인 독일을 승리자로 바꾸기 위해선 지금의 내게 어른이 될때까지 기다릴 시간적 여유 따윈 없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참모총장 각하.”
나는 짧게 심호흡하며 뜸을 들인 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로 영국과 독일의 지형적인 차이입니다.”
“지형적인 차이?”
“예. 우선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영국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입니다. 다른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죠. 그들의 국경은 저 광활한 바다니까요.”
하지만 독일 제국은 다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독일 제국은 유럽 대륙 한가운데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그렇기에 여러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죠. 그리고 그중 두 나라는 독일과 화해할 수도 없는 명실상부한 적국이고 말입니다.”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 말이군.”
슐리펜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는지 어두운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이 두 나라가 독일을 적대하고 있는 한, 독일은 언제나 대규모의 육군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영국과 달리 독일은 해군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적다.
자네는 그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영국이야 육군을 줄이고 해군 양성에 전력을 쏟아도 상관없는 나라였다.
바다만 제대로 지키면 본국이 침공받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독일은 영국과 달리 절대 육군을 포기할 수 없다.
그건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만 좋아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양국의 해군력을 결정짓는 이유였다.
“독일 육군은 확실히 세계 제일의 군대입니다. 하지만 세계 제일의 육군을 유지하면서 해군까지 세계 제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저 대영제국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에서 이 짓을 하고도 나라가 멀쩡했던 건 나라 자체가 초강대국 하라고 만들어진 것 같은 치트 국가인 미합중국 뿐이다.
천조국이 괜히 천조국일까.
“그건 해보지 않고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지만 전 독일인의 힘을 하나로 모아 해군을 증강하다 보면 분명······!”
“제가 알기론 독일 제국의 재정 60%가 이미 군비에 사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티르피츠 제독님. 이 이상 영국을 무리하게 따라잡겠다고 해군에 예산을 쏟아부으면 쏟아부을수록 막대한 재정적자만 생기겠죠. 그리고 독일 제국의 재정은 결국 말 그대로 파탄 나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그 비싼 돈 들여서 만든 함대가 활약이라도 했으면 또 몰라.
근데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럼 육군을 조금 줄이면···.”
“방금 한스 군이 한 말 못 들었나? 육군은 프랑스와 러시아란 적성국이 있는 한 함부로 감축할 수 없네. 물론 그전에 나를 비롯한 육군 상층부 전체가 티르피츠 자네한테 결투를 신청하겠지만!”
슐리펜이 뻔뻔하면서도 단호한 얼굴로 말하자 티르피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실제로 원 역사에서도 슐리펜을 비롯한 독일 육군 수뇌부는 해군 증강을 위해 육군 예산을 줄이려던 빌헬름 2세의 계획에 거세게 반발한 끝에 빌헬름 2세가 한발 양보하게 만든 전적이 있었다.
그만큼 프로이센 융커들은 육군에 진심이었다.
“하지만···하지만 해군의 증강은 필요하네.”
“폐하?”
분위기가 카이저마리네가 영국 해군을 뛰어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자 나와 슐리펜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빌헬름 2세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와 동급의 열강으로 성장하려면 강대한 해군은 필수야.
게다가 해군의 증강은 나뿐만이 아니라 이미 독일 제국 시민 전체의 열망. 인제 와서 포기할 순 없네!”
“폐,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해군 증강에 대한 카이저의 열변에 다 죽어가던 티르피츠 제독의 몸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 두 배박이는 해군 증강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말 것이다.
‘어차피 내 목적은 건함경쟁 그 자체를 막는 게 아니다.’
그리고 막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해군 문제를 빌드업으로 삼기로 했다.
카이저의 신뢰를 얻고, 내 주가를 올리기 위한 빌드업 말이다.
“폐하. 전 폐하께 해군 증강을 포기하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한스 군?”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지금과 같은 양적 경쟁으로 영국 왕립 해군을 넘기는커녕 따라잡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다. 힘내자.
“한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카이저마리네가 영국 해군을 따라잡기 위해선 접근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접근 방법을 바꿔야 한다···?”
"현존하는 모든 전함을 모조리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궁극의 전함."
“!”
“지금 폐하께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드레드노트(Dreadnough).
20세기 초 해양 패권의 핵심.
탄생하자마자 기존 전함들을 모두 구식으로 도태시켜버린 강철의 괴물.
“자세히 말해봐라.”
배박이 카이저가 이걸 거부한다?
나는 아니라는데 걸겠다.
작가의말
빌헬름 2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의 사이에서 총 6남 1녀를 낳았습니다.
빌헬름 2세의 장남, 빌헬름 황태자는 아시다시피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유명합니다. 원 역사에선 독일 제국 멸망 후 제정복고를 위해 극우단체인 철모단에 가입하고 나치를 지지했지만, 호엔촐레른의 복위에 관심이 없었던 히틀러에게 외면당하게 됩니다.
빌헬름 2세의 차남, 아이텔 왕자는 용맹하고 리더쉽있는 군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최전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전후 아이텔왕자는 다른 형제들 처럼 극우단체인 철모단에 가입하는 행보를 보입니다만 히틀러를 지지하진 않았으며 1942년에 사망합니다.
삼남, 아달베르트 왕자는 위 사진에서 혼자만 해군 정복을 입고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육군이 아닌 해군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달베르트 왕자는 독일 제국 멸망 후,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스위스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사남,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는 빌헬름 2세의 자식들 중 나쁜 의미로 유명한데 이는 아우구스트가 히틀러를 손절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일하게 히틀러를 열렬하게 지지한 진성 나치였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결국 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습니다.
오남, 오스카 왕자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베르됭에서 큰 공훈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전후엔 둘째 형 아이텔 왕자에게 성 요한 기사단장직을 물려받았는데 이때 오스카 왕자는 나치의 문화적 숙청에 맞서 독일의 전통을 수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육남, 요아힘 왕자는 빌헬름 2세의 자식들 중 가장 불행한 삶을 보냈습니다. 어릴 적부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몸이 약해(이는 나중에 나오겠지만 빌헬름 2세의 여동생이자 당시 그리스의 왕세자빈이였던 조피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카이저 부부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요아힘 왕자는 독일 제국이 멸망하자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요아힘은 결국 1920년에 권총으로 자살했고 이는 카이저 부부에게 크나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빌헬름 2세의 막내딸이자 고명딸인 빅토리아 루이제는 빌헬름 황태자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마음에 아늑한 자리를 얻는데 성공한 유일한 사람’ 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빌헬름 2세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었습니다.
빌헬름 2세는 아들들에겐 엄격한 아버지였지만 빅토리아 루이제에게 만큼은 자상하고 관대한 아버지 즉, 딸바보였기 때문입니다. 빅토리아 루이제는 후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하여 브라운슈바이 크 공작부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