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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4화 (4/193)

4화 : 만찬

내가 빌헬름 2세의 궁전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란 지났다.

난 이곳에서 로열패밀리 생활을 만끽하며 제2의 인생을 즐기기는 개뿔, 동물원 우리에 갇힌 오랑우탄의 기분을 실시간으로 맛보고 있었다.

“저길 봐. ‘그’ 아이야.”

“폐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시안을···.”

“······.”

뒤에서 들려오는 사용인들의 쑥덕거리는 소리.

뒷담화를 할 거면 제발 부탁이니 작은 목소리로 해줬으면 좋겠다.

저 사람들은 내가 독일어를 못 알아듣기라도 하는 줄 아는 걸까?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신경도 안 썼는데, 며칠이 지나고도 이러니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차라리 면전에서 퍽킹 옐로 몽키라고 시원하게 욕을 듣는 게 더 나을 판이다.

“가뜩이나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골치가 아픈데 말이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앞으로 13년하고 4개월.

당장 전쟁을 대비해 부지런히 움직여도 아슬아슬한 상황인데, 지금 난 이 망할 잼민이 몸뚱아리에 발목이 잡혀있었다.

‘그 누구도 어린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듣진 않을 테니까.’

전생엔 십 년만 젊었으면 싶었는데, 지금은 제발 부탁이니 십 년만 늙었으면 싶다.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미친 척하고 라스푸틴 코스프레라도 할까?’

잠깐 혹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빌헬름 2세는 아무리 그래도 친척 니콜라이 2세처럼 사람만 좋은 멍청이가 아니다.

게다가 독일을 좌지우지하는 신비로운 동양인 예언자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융커들에게 총 맞아 죽는 미래밖에 안 보인다.

“야, 한스!”

이등병의 남은 군 생활 마냥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미래에 답답하던 차에, 뒤에서 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헬름 2세의 여섯 번째 아들인 요아힘 왕자다.

그리고 그 뒤엔 빌헬름 2세의 자식 중 유일한 딸이자 일곱 남매 중 막내였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가 오빠의 뒤를 종종 따라오고 있었다.

“요아힘 왕자님. 루이제 공주님.”

난 요아힘과 루이제를 보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이 두 남매는 그나마 사람 좋은 아우구스테 황후와 함께 나에게 호의적인 몇 안 되는 친구들이다.

날 사람 취급도 안 하며 무시하고 다니는 머리 큰 형들과는 달리, 이 둘은 나와 비슷한 나이.

아무래도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보단 또래에 대한 흥미가 더 컸던 모양이다.

‘나에겐 잘된 일이지.’

아직 애들이라도 황실 가족들과의 친분은 중요하다.

현 상황에서 내가 기댈 곳이라곤 어쨌든 빌헬름 2세와 그 가족들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것 봐. 한스 네가 신문에 나왔어!”

“제가요?”

요아힘이 어디서 들고 왔는지 자신의 몸만 한 신문지를 펼쳐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나저나 내 이름은 '한수'라고 몇 번을 말한 것 같은데 왜 자꾸 다들 날 '한 스'라고 부르는 걸까.

이젠 나조차도 내 이름을 헷갈릴 지경이다.

“여기 '무정부주의자의 총탄으로부터 카이저를 구한 정체불명의 동양인 소년.

그는 대체 누구인가.'란 기사 보이지?”

“와, 정말이네요.”

총에 맞아서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긴 했지만, 심지어 내 사진까지 실려있었다.

보아하니 빌헬름 2세 암살사건으로 혼란이 어느 정도 잠재워졌는지 언론통제가 슬슬 풀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쪽에 다른 기사들도 있어.”

루이제가 신문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대충 살펴보니 대부분 나와 카이저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빌헬름 2세가 날 왜 궁에 들였는지에 대한 추측성 기사뿐이었다.

물론 '황인종을 궁에 들인 빌헬름 2세. 카이저의 새로운 애완동물?'이란 엿같은 기사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 고소 가능하냐?

“와. 너 완전 유명인 다 됐구나?”

“아무래도 제가 엮인 사건이 사건이니까요.”

게다가 내 인종도 한몫했을 거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대통령의 목숨을 흑인 소년이 구한 격이었으니까.

사람들의 입방아에 안 오르내리는 게 더 이상하다.

난 내 기사 말고 그 밖의 흥미로운 기사가 있나 살펴봤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는 없었다.

고작 해봐야 미국의 23대 대통령인 벤저민 해리슨의 사망, 보어인과 영국군 간의 평화 협상 결렬 정도가 전부였다.

루이제가 신문을 보는 게 지루해졌는지,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밖에 나가서 공놀이라도 할래?”

“안돼. 오늘 저녁에 만찬 있는 거 잊었어? 옷을 더럽히면 어머니께서 화내실거야.”

“잠깐, 만찬이요?”

그것도 오늘 저녁?

그런 이야기 지금 처음 들었다.

“어, 몰랐어?”

“아무도 안 말해줬으니까요.”

“하긴 나도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니까. 어머니가 그러는데 오늘 총리랑 육군 참모총장, 그리고 그 누구더라···. 나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해군의 높은 사람이 궁에 올 거래. 그래서 만찬이 열린다고 들었어.”

총리야 포츠담에 온 첫날에 봤던 베른하르트 폰 뷜로고 육군참모총장은 이 시기라면 슐리펜이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이었던 슐리펜 계획을 만든 그 슐리펜 맞다.

그리고 해군 쪽은 아마도···.

“왕자님. 혹시 그 해군의 높은 사람은 제국 해군청 장관, 티르피츠 제독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이 시기 독일 해군에서 빌헬름 2세의 만찬에 초대될 만큼 신임받는 사람은 그 인간 말고 따로 없지.

그나저나 나도 이 만찬에 참석해야 하나?

‘가뜩이나 식사 때마다 왕자들 눈총 때문에 거북해 죽겠는데 거기에 뷜로, 슐리펜, 티르피츠가 추가된다고?’

...전혀 가고 싶지 않다.

차라리 굶는 쪽이 배는 고파도 마음은 편할 것 같다.

***

“음. 이 어린 친구가 폐하의 목숨을 화제의 동양인 소년이로군요.”

왜 항상 불길한 생각은 현실로 일어나는 걸까.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눈앞의 나이 든 노병과 악수를 하였다.

“반갑네.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이라네. 육군참모총장이란 과분한 자리를 맡고 있는 늙은이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한스 초이입니다.”

“그리고 이쪽이 티르피츠 제독일세. 보다시피 성질 고약한 물개라네.”

“시끄럽소. 슐리펜 백작.”

얼굴만 보면 판타지 속 드워프의 후손이 아닐까 싶은 인상의 티르피츠 제독이 뱃사람 특유의 억센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독일 해군청 장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독님.”

“자네 너무 말랐군. 아니면 아시안들이 자네처럼 마른 건가?”

흐하하!

티르피츠 제독이 내 등을 팍팍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오, 뭔 노인네 힘이 이렇게 센지.

나는 뷜로 총리와도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만찬장으로 향했다.

찌릿!

자리에 앉자마자 ‘왜 네가 여기 있냐’고 묻는 듯한 쏟아지는 왕자들의 따가운 시선.

마치 고양이 무리 속에 떨어진 생쥐가 된 느낌이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고양이보단 계급적인 의미로 사자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닌데.’

하지만 이미 와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부담되는 자리였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뷜로 총리, 슐리펜 백작, 그리고 티르피츠 제독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노력하자.

이 세 사람은 어찌 됐든 독일 정부와 육군, 그리고 해군의 톱이었으니 말이다.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자, 그럼 식사하도록 하지.”

“예, 폐하.”

간단한 식전 기도가 끝나고 빌헬름 2세가 본격적인 만찬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눈앞에 놓인 수프를 조심스럽게 한술 떴다.

처음엔 어설펐던 귀족 예법도 이젠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몸에 밴 것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지어진다.

‘맛있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다.

특히 수프 안에 들어있는 고기가 별미였다.

대체 무슨 고기를 쓴 걸까? 맛은 일단 소나 닭고기 비슷한 것 같은데···.

“오! 바다거북은 오랜만이군요.”

“푸흡?!”

씨발, 뭐?

바, 바다거북?

이거 바다거북 고기야?!

“한스, 왜 그러니?”

아우구스테 황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얼른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황후를 향해 괜찮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큼.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후마마. 수프의 맛이 굉장히 훌륭해서요.”

“아아, 그러고 보니 넌 바다거북 수프가 처음이겠구나.”

아우구스테 황후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만화에서 이 시기 영국을 중심으로 바다거북 수프가 굉장한 인기를 끌었단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확실히 그럴만한 맛이긴 해.

“제가 젊었을 적 생각이 나는군요.”

뷜로가 말했다.

“그땐 바다거북 요리가 서민들도 간간이 즐길 정도로 흔한 요리였는데 말입니다.”

“그러게나 말일세. 요즘엔 바다거북 구하기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야.”

그거야 사람들이 다 잡아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인간이 미안하다. 거북아.

“그나저나 티르피츠. 브라운슈바이츠급의 건조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물론 순조롭습니다. 폐하.”

와인을 마시다 문뜩 생각이 났는지 빌헬름 2세가 티르피츠 제독에게 물었다.

제독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

독일의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작년에 통과된 2차 해군법에 따라 계획된 첫 번째 전함이다.

하지만 취역한 지 2년 만에 드레드노트가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구식전함으로 전락해버린 비운의 전함이기도 하다.

“우선 다가오는 5월에 시하우-베르케(Schichau-Werke)에서 2번 함 엘자스의 건조를 시작할 예정이고, 1번 함 브라운슈바이크 또한 게르마니아베르프트(Germaniawerft) 조선소의 선거에 여유가 생기는 10월에 바로 건조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으음.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말게. 티르피츠 제독. 브라운슈바이크급은 고작 시작일 뿐이니까.”

빌헬름 2세가 티르피츠를 바라봤다.

카이저의 두 눈은 야심, 그리고 집착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저희 카이저마리네의 최종목표는 저 영국의 왕립 해군조차 뛰어넘는 세계최강의 해군. 이 티르피츠, 단 한시도 그걸 잊은 적 없습니다!”

“푸하하! 영국 왕립 해군을 뛰어넘는다. 하하, 좋군. 아주 좋아!”

“하하하하!!”

만찬장에 울려 퍼지는 카이저의 티르피츠의 야심가득한 웃음소리.

하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카이저마리네가 영국 왕립 해군을 뛰어넘는다?

‘그런 거 없다. 빌리야!’

원 역사에서 독일 황립 해군 카이저마리네는 영국 왕립 해군을 뛰어넘긴커녕 따라잡은 적도 없었다.

카이저와 티르피츠의 무지성 해군 증강 계획은 독일에 독이 되면 독이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 대양 함대는 세계대전에서 그다지 활약도 못 했잖아.’

빌헬름 2세는 독일 재정을 파탄 낼 수준으로 해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정작 독일 해군은 유틀란트 해전에서 잠깐 반짝했던 것 빼곤 대전 내내 영국에게 처맞고 다녔다.

그러다 결국 전후에 스캐퍼플로 인근 해역에서 대규모 자침이란 선택을 하면서 완전히 소멸하고 만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스.”

“예?”

“네가 보기엔 과연 우리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을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

이 인간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걸 묻고 지랄일까.

아무리 봐도 어린애에게 할 질문은 아니잖아.

‘곤란한데···.’

일단 무난한 대답은 그냥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카이저는 만족할 테고 여기 있는 모두가 행복해지겠지.

하지만 내 독일 제국 살리기 프로젝트는 더욱 요원해질 게 뻔했다.

카이저의 야심 넘치는 무지성 함대 증강 계획은 독일 제국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여기선 저질러 봐?’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내 주가는 확실히 올라간다.

독일 제국에도 어느 정도 이득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건 위험성이 너무나도 큰 도박 그 자체.

일이 잘못되면 난 끝장이다.

“폐하.”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중히 리스크와 이득을 계산했다.

그리고 이내 결정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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