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3화 (3/193)

3화 : 황제와 소년 (2)

편의점 아르바이트 도중 한가로울 때마다 심심풀이로 웹소설을 자주 읽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또 시간도 잘 갔으니까.

그리고 그런 소설들 속에서 사골처럼 우리고 또 우려먹던 클리셰가 바로 회귀, 빙의, 환생 삼종세트로 이루어진 회빙환이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난 것도 모자라서 내 이야기가 될 줄이야.

그럼 이제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미래 지식을 활용해 화려한 해피 마이 라이 프를 즐길 일만 남은 것일까?

“이름이 무엇이냐?”

“최한ㅅ···. 아니, 한수 최 입니다.”

아무래도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것 같다.

난 하필이면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을 파멸로 이끈 팔병신 카이저와 엮여버렸다.

마치 모바일 게임에서 가챠를 돌리다 무지갯빛이 떴는데 겉표지만 SSR이지 일러도 구리고 성능도 구린 똥캐가 나온 기분이다.

'그 망할 노친네!'

정황상 날 과거의 독일 제국으로 보낸 것은 아마도 편의점에서 만난 독일 노인.

알프스 산신령인지 라인강 물귀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철 지난 독일 제국 이야기를 할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정말 나보고 독일 제국의 멸망을 막기라도 하란 건가?

그렇다면 적어도 백인으로 환생시켜 주던가, 아니면 차라리 눈앞의 콧수염 카이저의 몸에 빙의라도 시켜줬어야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난 여전히 한국인인 것도 모자라 모 초등학생 사신 탐정 마냥 어린애가 되어 있었다.

제국주의 시절 유럽에서 황인종이란 게 어떤 존재인지는 둘째치고 이런 어린애의 몸으로 대체 뭘 하란 말인가.

게다가 아까 병실에 걸린 달력을 슬쩍 보니 현재 연도는 20세기의 시작인 1901년.

답이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13년밖에 안 남았다.

이러다간 어른이 되자마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대전쟁을 겪을 판이다.

“한스 초이? 특이한 이름이군.”

진지하게 미국으로 밀항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빌헬름 2세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 이름 최한수(한수 최)를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발음인 한스 초이로 잘못 알아들었나 보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한스가 뭐야. 한스가.’

어쩐지 커피를 맛없게 탈 것 같은 이름이라 듣기가 좀 그랬다.

그러나 내 불편한 심정을 알 리 없는 빌헬름 2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일본 출신인가? 아니면 칭?”

“···한국입니다.”

전생에서도 외국에 나간 한국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두 가지가 튀어나왔다.

순간 목구멍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다.

이 시대 서양인들에게 잘 알려진 동아시아 국가는 일본 아니면 중국이었으니까.

한국은 이 두 나라에 비하면 듣보잡이었고, 좋게 말해도 아는 사람만 아는 동방의 소국에 불과했다.

“한국? 아, 코레아 말이군.”

내가 한국인이라 말하자 빌헬름 2세의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러고 보니 실제 역사에서도 빌헬름 2세는 열강 지도자 중에선 유일하게 고종을 황제로 대우해 줄 정도로 대한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물론 그건 이 인간이 친한파라서가 아니라 그냥 일본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적의 적은 내 친구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시기를 생각하면 의화단의 난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을 시점.

내 눈앞의 콧수염 카이저는 의화단의 만행으로 독일 공사가 살해된 것에 눈이 돌아가 병사들에게 대놓고 중국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명령한 장본인이다.

당연히 중국, 그러니까 현 청나라에 대한 감정 역시 좋을 리가 없었다.

‘어라? 이거 나한텐 잘된 건가?’

그건 아직 모르겠다.

일본과 중국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어쩐지 친밀감이 느껴지긴 하는데,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될지는 일단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재작년에 하인리히가 방문한 적이 있었지. 그래, 코레아라···.”

빌헬름 2세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목숨을 구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절대 가볍지 않다.”

오.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포상금이라도 주려는 모양이다.

좋은 기회다. 그 돈으로 미국으로 가자.

그리고 미래 지식을 이용해 사업을 하는 거다.

독일 제국의 멸망?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다.

침몰하는 배에 일부러 오르는 취미는 없단 말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궁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예?”

궁으로 데려가?

누구를?

나를?!

“한스 초이. 너는 제국의 고귀한 푸른 피들과 함께 유럽 최고의 교육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제국을 빛내는 기둥이 되겠지. 아무렴 그 정도는 돼야 내 목숨을 구한 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폐하. 전···.”

“인종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직접 네 후원자가 되어줄 테니. 제국의 그 누구도 너를 하찮은 황인종이라 멸시하지 못할 것이다.”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돈으로 달라고!’

망했다.

완전히 망해버렸다.

내 아메리카에서의 야심 찬 새 출발 계획이 물 건너간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일이 이렇게 돼버리면 난 독일 제국, 그리고 카이저 빌헬름 2세와 그대로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린다.

제국이 망하고 카이저가 몰락하는 순간, 내 인생도 그대로 망해버린단 말이다!

“감사하게 여기거라.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니까. 하하하!”

때리고 싶다.

내 심정 같은 건 모른 채 잘난척하는 저 콧수염 황제의 면상을 주먹으로 세게 때려주고 싶다.

‘참자. 한수야. 그랬다간 진짜 끝장이다.’

후. 이렇게 된 이상 좋게 좋게 생각하자.

어째서인지 지금 빌헬름 2세는 나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현 독일 제국은 입헌군주제의 탈을 뒤집어쓴 전형적인 전제국가.

그렇기에 차라리 이 기회에 황제의 신임을 얻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승리시킨다.

그래야 카이저도 살고 나도 산다.

그 이후?

거기까지 생각하면 내 머리 터진다.

그때는 일은 그때의 나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미안하다. 미래의 나!

***

1901년 3월 8일.

독일 제국 포츠담 신 궁전.

“폐하께서는 아직이신가?”

“곧 도착하실 겁니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황실 가족들과 함께 황제를 마중 나온 아우구스테 황후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암살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독일 제국의 카이저를, 그리고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노린 암살이었다.

“황후마마. 이만 근심을 내려놓으시지요.”

“뷜로 총리.”

“암살자도 체포되었고 카이저께서도 무사하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아침부터 베를린에서 급히 달려온 독일 제국의 4대 총리, 베른하르트 폰 뷜로(Bernhard von Bulow)가 불안해하는 황후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정작 뷜로도 속이 타들어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총리가 된 지 몇 개월이 지났다고 이런 악재가 터지다니!”

가뜩이나 칭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조약 체결이 질질 끌리는 것 때문에 골치가 아파죽겠는데,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무정부주의자 놈들이 거하게 사고를 쳐버렸다.

라이히스탁(제국의회, Reichstag)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고 군부는 군부대로 이참에 빨갱이들을 모조리 족치자며 난리 치는 상황.

한시라도 빨리 빌헬름 2세가 귀환해야 이 난장판을 진정시킬 수 있을 텐데, 정작 카이저는 환궁을 이틀이나 미루다가 이제야 포츠담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후, 폐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그러고 보니 총리.”

“예. 황태자 전하.”

“그러고 보니 아바마마를 암살자의 흉탄으로부터 구한 자가 동양인 소년이란 소문이 있던데 그것이 사실이오?”

카이저의 장남, 빌헬름 황태자의 질문에 뷜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최대한 숨긴다고 숨긴 건데. 벌써 어디선가 소문이 새 나간 모양이다.

뷜로는 전직 외교관 출신답게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황태자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입니다.”

“역시 그렇군.”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렇게 숨겨야 하는 이유라도 있소?”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도 아닌데 굳이?

젊은 황태자의 의문에 뷜로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황인종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

그제야 황태자는 뷜로의 이런 조심스러운 반응이 이해가 갔다.

아버지의 ‘유별난’ 황인종 혐오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카이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뷜로로선 언론들이 이 일에 대해 제멋대로 떠들도록 놔두었다가 괜히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일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설마 환궁을 미루신 것도 이 때문인가?’

황인종이 자신을 구했단 사실로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으신 모양이다.

빌헬름 황태자가 아는 아버지 카이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카이저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탄 화려한 사륜마차가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돌아오신 거예요?”

“후, 그래. 드디어 오셨구나.”

아우구스테 황후는 해맑게 묻는 막내딸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이 마차가 멈춰서고 빌헬름 2세가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폐하.”

“총리.”

뷜로 수상이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자, 빌헬름 2세가 반갑게 맞이했다.

“무사하신 것 같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께서 도우셨지. 아, 시씨(Sissy, 빅토리아 루이제의 애칭)!”

“아버지!”

빌헬름 2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오는 막내딸을 꼭 껴안았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딸바보였다.

“폐하.”

“아버지.”

“도나. 빌헬름.”

“저와 아이들과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시나요?”

“미안하오. 내가 걱정을 끼쳤소.”

“그걸 아시면 빨리 환궁하셨어야죠.”

아우구스테 황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남편을 나무랐다.

“거기에 대해선 다 이유가 있소.”

“네?”

“마침 잘됐군. 아이텔! 아달베르트! 아우구스트! 오스카! 요아힘!”

빌헬름 2세가 뒤에 멀뚱멀뚱 서 있던 다른 아들들을 불렀다.

“너희도 이리로 오거라.”

왕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버지를 향해 다가왔다.

가족들이 전부 모이자 빌헬름 2세는 마차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소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동양인?’

황실 가족 누구나 할 것 없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빌헬름 2세를 바라봤다.

뷜로 총리도 이에 대해 전혀 몰랐는지 얼굴에 당혹스러운 낯빛이 가득했다.

“한스.”

빌헬름 2세가 가족들에게 인사하라는 듯 소년의 등을 가볍게 쳤다.

“한스 초이라고 합니다.”

굳은 얼굴로 카이저의 가족들을 바라보던 소년이 아직 예법에 익숙지 않은지 어설프게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삽화

빌헬름 2세의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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