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황제와 소년 (1)
“으음···.”
안개가 자욱한 정원 한복판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침음성을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는 어디지?”
자신은 분명 포츠담 신 궁전에 있는 침실에서 평소처럼 잠을 자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빌헬름 2세는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서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 있는 꽃들과 이파리 하나 없이 기괴하게 비틀어 있는 나무.
눈동자와 콧수염이 두려움으로 떨려 왔지만 빌헬름 2세는 억지로 공포를 참았다.
빌헬름 2세는 황제였다.
그리고 황제란 어떤 상황이든 항상 위엄을 유지해야 하는 법이었다.
-오오···. 빌리······.
“흐억?!”
그러나 빌헬름 2세의 다짐은 얼마 가지 못했다.
듣기만 해도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빌헬름 2세는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땅을 굴렀다.
“누, 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화아아악────
빌헬름 2세가 소리치기 무섭게 푸른 연기와 함께 반투명한 인영이 카이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령.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유령이었다.
“당신은?!”
유령의 얼굴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있던 빌헬름 2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는 얼굴이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아, 아버지···?”
-오랜만이구나. 빌리···.
유령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빌헬름 2세의 친아버지자 13년 전에 사망한 독일 제국의 선대 황제.
프리드리히 3세였다.
빌헬름 2세의 얼굴이 언제 겁에 질렸냐는 듯 순식간에 밝아졌다.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이 없다. 빌리···.
프리드리히 3세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 제국에 크나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가면 제국은 네 대에 멸망할 것이다···.
“뭐, 뭐라고요?”
제국의 나의 대에 멸망한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빌헬름 2세의 눈동자와 콧수염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체 어떤 작자들이 감히 우리 독일 제국을 위협한다는 것입니까?!”
보불전쟁에서 한 번 짓밟힌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제국에 맞서려 하는 오랜 숙적 프랑스?
위대한 빅토리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못돼먹은 뚱땡이 외삼촌이 이끄는 오만한 영국?
그도 아니면 설마 착하지만 좀 덜떨어진 사촌 니키의 러시아 제국일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빌헬름 2세였지만 프리드리히 3세는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차마 아들보고 네가 제국을 말아먹을 거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대답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 예정된 파멸을 막을 길이 아직 남아있다···.
“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넌 곧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머나먼 동방에서 귀인이 나타나 네 목숨을 구할지니. 그가 제국의 희망이다!
“예? 동방이라니···. 설마 황인종 말씀입니까?”
기대에 차 있던 빌헬름 2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아시안들은 비열하고 믿을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서구문명을 집어삼킬 기회만 노리고 있는 백인들의 적이란 말입니다!”
누가 원조 황화론자 아니랄까 봐 자신의 망상을 늘어놓는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3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여기까지다···.
“예?”
-결국 선택은 빌리, 네가 하는 것. 그러나 내 말을 결코 잊지 말아라···.
“아버지?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빌헬름 2세는 급히 아버지의 뒤를 쫓아갔지만, 그 앞은 칠흑같이 어두운 어둠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허어어억!”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빌헬름 2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헉···여긴?”
거칠게 숨을 몰아쉰 빌헬름 2세가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펴봤다.
침실.
빌헬름 2세의 침실이었다.
“꾸, 꿈이었나.”
빌헬름 2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여보?”
빌헬름 2세의 목소리에 잠이 깼는지 옆에 잠들어있던 빌헬름 2세의 아내,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 온몸이 땀범벅이잖아요. 당신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오. 도나(아우구스테 황후의 애칭). 그냥 꿈을 좀 꿨을 뿐이라 오.”
“꿈이요?”
“그렇소. 꿈. 좀 생생하긴 했지만, 그냥 꿈이었다오.”
그래. 꿈, 꿈이다.
요즘 집무에 집중하느라 몸이 허해져서 그런 것이겠지.
'제국이 망하긴 왜 망해.'
독일 제국은 언제나처럼 굳건했다.
이미 이 유럽 땅에 무적의 독일군에 맞설 간 큰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해군도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 대영제국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제도 산업도 나날이 성장하고 있으니 자기 대에서 망하기는커녕 천 년은 거 뜬히 갈 것이다.
‘게다가 아시안 따위가 제국의 희망?’
“그럴 리가 있나.”
빌헬름 2세가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꿈은 어디까지나 꿈.
결국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에 꿈인 것이다.
***
1901년 3월 6일.
독일 제국 브레멘.
“와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독일 제국 만세!”
‘결국 아무 일도 없었군.’
빌헬름 2세는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는 브레멘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꿈을 꾼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지만 빌헬름 2세의 일상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꿈은 그냥 꿈이었던 모양이다.
“자,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예, 폐하.”
빌헬름 2세가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쥐었다.
궁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빌헬름 2세가 탄 마차가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였다.
“카이저 빌헬름!”
철컥!
빌헬름 2세를 배웅하러 나온 군중 속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남자가 외쳤다.
그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곧바로 카이저를 향해 겨누었다.
“인민의 이름으로 널 단죄하러 왔다!!”
“꺄아아악!”
“암, 암살자다! 근위대! 근위대!”
“폐하를 지켜라!”
암살자의 등장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는 시민들.
그 혼란 속에서 카이저를 지키던 근위대원들이 암살자를 향해 급히 몸을 날렸지만, 권총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 한 발짝 더 빨랐다.
“뒈져라. 카이저어어─!!”
탕────!
귀를 찢는 듯한 총성과 함께 황제를 향해 날아가는 한 발의 총알.
“폐하! 피하십시오!”
암살자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막지 못한 근위대원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너무 늦었다.
총알은 이미 빌헬름 2세의 머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고 있었다.
‘죽는다!’
죽음을 직감한 빌헬름 2세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퍽!
총알이 무언가에 맞는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아이.
그것은 아이였다.
카이저의 행차를 구경이라도 하러 나온 것일까?
구경꾼 사이에서 갑자기 정체 모를 아이가 마차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빌헬름 2세 대신 총을 맞았다.
철퍼덕!
붉은 피가 허공에 튀며 아이의 몸이 지면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얼어붙었던 사람들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이가 총에 맞았어!”
“모두 물러나시오. 어서!”
세상 어느 국가를 불문하고 눈앞에서 아이가 총에 맞았는데 동요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아이를 향해 몰려들었지만, 근위대원들이 급히 그 앞을 막았다.
암살범은 제압되었지만,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로선 혹시 모를 또 다른 습격을 경계해야만 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창백한 얼굴의 근위대 장교가 급히 카이저의 안부를 물었다.
잘못했으면 황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뻔했다.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실책에 장교는 황제의 질책을 기다렸지만 정작 카이저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장교를 밀어내고 자신을 대신의 총에 맞은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동양인···!”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빌헬름 2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꿈이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정말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고, 아시안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군.”
그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의학에 그다지 조예가 없는 빌헬름 2세였지만 이대로 가면 이 아이는 얼마 안가 죽는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폐하?!”
빌헬름 2세가 양팔로 아이를 안아 들고 급히 마차에 올랐다.
측근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지금 빌헬름 2세의 신경은 오로지 아이에게 쏠려있었다.
“서둘러 병원으로 가라.”
“예?”
“어서!”
“알, 알겠습니다. 이랴!”
빌헬름 2세의 단호한 명령에 마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세차게 휘둘렀다.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이저의 명령이다.
마부는 독일인답게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폐하! 폐하! 제길, 어쩌죠?”
“뭘 어쩌긴 어째. 따라가야지!”
물론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보고 있는 근위대원들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
“다행히도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수술복 차림의 의사가 몇 년은 폭삭 늙은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제국의 만인지상이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에 쳐들어온 것만 해도 기겁할 일인데, 웬 황인종 남자애를 반드시 살려내라는 명령까지 들었다.
난생처음 겪는 압박감과 긴장감.
다행히 아이의 목숨은 구했지만, 그 대가로 의사의 정신과 몸은 너덜너덜하게 갈려 나갔다.
“다만 아이의 몸 상태가 원래부터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겁니다.”
“음.”
빌헬름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걸치고 있는 옷을 볼 때 아마도 빈민가 출신이거나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였겠지.
그런 곳에서 자란 아이가 건강 상태가 좋은 게 더 이상하다.
‘그나저나 정말 황인종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어쩌면 그냥 지독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아이가 자신을 구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
인종이야 어떻든 황제의 목숨을 구한 자에겐 그만큼의 보답을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위엄만 해칠 뿐이었다.
“폐하.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몇 시간 후.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병원에서 가장 좋은 응접실에서 쉬고 있던 빌헬름 2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병실로 향했다.
“폐하.”
병실에 들어가자 안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카이저의 시선이 그들에게 잠시 머물곤 곧장 아이를 향했다.
“······.”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전형적인 아시안의 외모다.
그러나 백인들의 편견과 달리 눈이 길쭉하게 찢어지거나 뻐드렁니가 튀어나와 있진 않았다.
오히려 어른이 되면 여자들을 꽤 울리고 다닐 것 같은 준수한 얼굴, 무엇보다 그 두 눈에는 총명함이 감돌았다.
“그래. 드디어 깨어났구나.”
“어···.”
빌헬름 2세의 목소리에 아이의 눈동자가 말 그대로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누군지 알아본 모양이다.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건가.”
어딜 봐도 평범한 아이.
이 아이가 정말 아버지가 말한 동방에서 온 귀인일까?
“어쨌든 고맙다.”
빌헬름 2세는 아직도 믿음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많다.
“네가 짐의 목숨을 구했구나.”
제국이 무슨 10년 후에 망할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가면 그만이었다.
삽화
작가의말
빌헬름 2세 암살 사건을 다룬 당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