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각자의 마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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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각자의 마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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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각자의 마음 (1)
2023.08.0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황폐한 대지.
황량한 오늘.
어째서 내가 사는 곳은.
어째서 우리가 머무는 곳은.
이렇게도 어김없이 황폐해진 오늘을 맞이하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
“…….”
플람족의 소녀, 코니는 불씨에 담긴 몸을 가볍게 떨었다. 지나가던 바람이 그녀의 몸을 더욱 높이, 높이 들어올려 주었다.
덕분에 더욱 잘 살펴볼 수 있었다.
어제부터 이 근처에서 난리를 일으켰던 낯선 무리의 모습이었다.
‘란족은 아닌데.’
코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종족들이었다.
생김새부터가 공중정원에 틀어박혀서 지내는 겁쟁이 란족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뭐랄까.
‘몇 명은 매끈하고. 하나는 복실복실하고. 하나는 번들거리고.’
신기하네.
코니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니 문득, 어제부터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났던가. 하여 선잠에서 깨어났던가. 조금은 멍했다. 소란이 벌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머무르던 불의 대지, 불꽃의 황야를 향해 추락해 오는 작은 비행선이 보였다.
란족의 비행선이었다.
이리저리 비틀비틀. 위태롭게 휘청휘청. 그 위에 타고 있는 이들의 모습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웬 처음 보는 외모의 여자아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덩치 큰 란족이 더욱 큰 괴성을 질러댔다.
그러다가 마침내 쿵.
비행선이 인근의 지면에 불시착했다. 그때부터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덩치 큰 란족의 정체가 란족의 수장이었다. 흥미로웠다. 겁쟁이 중의 겁쟁이 우두머리 란족 수장. 저 얄팍하고도 속 좁은 자가 무슨 일로 여자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걸까.
한데 호기심은 잠깐이었다. 그보다 훨씬 커다란 경악이 찾아왔다. 란족 수장을 들이받던 자이언트 러너의 엄청나던 충돌음과 함께였다.
‘설마 란족 수장이 그렇게 끝장이 날 줄은 몰랐는데.’
화염의 대지로 떨어진 란족 수장에겐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았다. 그가 일족의 땅에 떨어진 것을 깨닫자마자 어른들이 모조리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른들의 기쁨에 겨운 춤사위가 란족 수장을 휘감아 버렸다. 그렇게, 란족 수장은 산 채로 불쏘시개 신세가 되어 버렸고.
“…….”
그래.
항상 어른들은 그런 식이다.
우리의 땅에 오는 이들을 아무런 이해나 양해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방식으로 감싸안아 버리지. 그렇게 모처럼의 손님에게 불꽃의 세례를 내리고, 한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고 말지. 그러곤 아쉬운 마음을 담아 속삭이곤 해. 아, 이번 방문자도 우리와 좀 맞지 않았군. 안타깝게도. 어쩌고 저쩌고, 등등.
‘쯧.’
어제의 일들을 떠올리던 코니는 콧잔등을 가만히 찡그렸다. 어른들의 그런 태도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다. 주위의 모든 것을 태우고, 부수기만 하는 자신들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른들의 이기적인 태도도. 짧고 맹목적인 식견도. 전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 아이들은 우리 일족의 땅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게 됐을 테니까.’
란족의 수장이 어떻게 끝장이 났는지를 모두 보았으니, 섣부르게 이쪽으로 발길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저 낯선 외모의 여자아이들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저 아이들이 내게 큰 도움이 될 것도 같으니까.
‘일족의 어른들처럼 되기 싫어.’
배려 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머물러 있다간, 언젠가 자신도 저런 모습으로 자라나게 될 것 같았다. 그건 싫었다. 평생 자신이 머무는 땅을 황폐하게만 가꾸는 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친해지려 다가가는 이들을 불태워 버리는 불꽃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였다.
‘저 아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다른 때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은 불꽃의 대지에 예속되어 있는 몸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가능할 것이다. 때마침 란족의 수장이 산 채로 태워지며 난리가 일어났고, 덕분에 모처럼의 낯선 바람이 불었으며, 그 바람이 자신을 불씨에 태워 제법 높이 날려보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가능하다.
오직 지금만 가능하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코니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바람을 타려고 애썼다. 다행히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때마침 근처에 날려가던 메마른 잎사귀를 발견했다. 잎사귀로 옮겨갔다. 한때 란족 수장의 어깨에 돋아나 있던 잎사귀가 불에 탔다. 코니는 그렇게 화염의 대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상태를 잠시나마 연장했다.
그렇게 얻어낸 잠깐의 시간이 코니에게 유용하게 쓰였다. 코니는 잎사귀에 실린 자신의 불꽃을 열심히 움직였다. 잎사귀가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바람에 효과적으로 실렸다. 허공을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소녀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소녀의 어깨에 성공적으로 내려앉았다.
“앗 뜨거.”
다비는 뜬금없는 따끔함을 느끼며 어깨를 털어냈다. 갑작스럽게 이게 뭔지.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불 붙은 나뭇잎 한 장이 손길에 밀려 팔랑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깜짝이야.’
사실은 조금 멍하니 있던 참이었다.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까닭에. 조안이 지니고 있던 목걸이 때문에 모두가 레퓨지아 밖으로 나오게 됐다는 사실을 알아 버려서. 그래서 자꾸만 들게 되어 버린 멍한 망상 때문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날 레퓨지아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됐다면.
나는 어떤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까.
……라는 망상.
‘웃겨.’
하등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망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꾸만 떠오른다. 어찌할 수 없을 상상력이 제멋대로 나래를 펼쳐 버리고 만다.
“…….”
아마도 평소처럼 분주한 아침을 보냈겠지.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씻고, 학교에 갔을 것이다.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어쩌면 쪽지시험을 하나쯤 치렀을 수도 있겠다. 결과는 당연히 만점. 그 결과로 선생님께 익숙한 칭찬을 들었겠지.
그리고 저녁엔 집에 와서 남몰래 울었을 거야. 매일 그랬던 것처럼. 엄마 때문에. 떠올리기 싫어도 자꾸만 떠오르는 엄마 때문에. 또 바보처럼. 그렇게. 엄마가 그립고 원망스러워서. 엄마를 뛰어넘겠다고. 그래야 이 허전함이 채워질 것 같다며. 악착같이 공부를 거듭했겠지.
바보같이.
지금처럼.
“괜찮아?”
불현듯 물어오는 목소리.
다비는 잠시 멍하니 빠져들었던 망상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돌아본 곁에 조안이 있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초리가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다비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 평온하여 지겹고 끔찍했던 일상으로부터 날 강제로 꺼내 버린 너를, 나는 원망해야 할까. 고마워해야 할까.
모르겠어. 지금 너한테 어떤 표정을 지어보어야 할지. 어쩌면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조금은 굳어진 얼굴로 이런 대답을 돌려주는 것인지도 몰라, 조안.
“괜찮아. 신경쓰지 말고 하던 거부터 하자. 우선 여기부터 좀 잡아줄래?”
“어, 응.”
눈치를 보며 비행선 추진기 껍질을 잡아당기는 조안. 아마도 너는 알아차렸겠지. 방금 내 대답의 온도가 평소와 약간은 달랐다는 걸. 그렇지만 넌 그걸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티 내지 않을 거야. 난 알아. 너는 전부터 그랬거든.
그래서 나는 더 모르겠다.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음, 여기.”
다비는 최대한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하려 애를 썼다. 불시착하며 망가진 비행선의 고장난 곳을 파악하려고, 오직 그것에만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지 않으면 또 이상한 망상에 빠져 우두커니 있게 될까봐. 그러다가 자칫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본심을 내보여 버리게 될까봐. 그런 자신의 본심이 조안에게 상처를 입힐까봐. 차마 그건 싫어서.
그러다 보니 하루가 훌쩍 가 버렸다.
다행히 비행선의 고장은 심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이틀쯤 걸리겠어. 여기랑 여기. 연결된 부분들이 조금 틀어져서 추진력이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피코도 그렇게 말해줬고.”
“피코가?”
“응.”
되물어오는 세나를 향해 다비가 말했다.
“피코가 이 비행선의 데이터도 가지고 있더라고. 덕분에 지금 비행선 상태랑 비교하면서 점검해볼 수 있었어. 조안이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
“아, 응.”
이쪽의 칭찬이 뜻밖이었던 걸까.
조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래서 다비는 세나와 요재의 기색을 살폈다. 역시나 둘 모두 조안을 보는 눈빛이 복잡했다. 아마 다들 비슷한 심정이겠지. 원망을 해야 하는 건지.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혼란에 휩싸인 거겠지, 온종일.
“그러니까 일단 쉬자. 피곤해. 지쳤어. 참, 유리나?”
“응?”
“내일 비행선 수리할 때는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찌릿찌릿. 전기 자극이 필요할 거 같아서.”
“비행선에?”
“응.”
“그거야 어렵지 않아.”
“다행이네. 그래. 다들 잘 자.”
오늘은 가급적 다른 아이들과 말을 많이 하지는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비는 서둘러 모닥불 옆에 누웠다. 아까 낮에 루이샤와 조조바가 열심히 근처에서 주워온 마른 덤불로 피운 모닥불이었다.
“…….”
또다.
이글거리는 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망상이 도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겠지. 이대로 떠오르는 망상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어느샌가 모르게 잠이 드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지도.
그런 생각으로 멍하니 있었다.
슬슬 몰려오는 졸음을 느꼈다.
한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화륵?
갑자기, 너무나 별안간, 작은 불씨 하나가 얼굴을 향해서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어, 엇?”
다비는 깜짝 놀랐다.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을 느끼며 두 손을 휘저었다. 이쪽으로 날아오던 불씨가 그 손길에 휘말려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덕분에 모처럼의 졸음이 죄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 저기, 잠깐만!
난데없이 허공에서 누군가의 가느다른 외침이 들려왔다. 심지어 연달아서, 계속.
- 낮에도 이러더니, 계속 이러기야 진짜?
“……어?”
불씨를 털어내려 손을 쉬젓던 다비는 멈칫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 건네는 인사를 이렇게 받는 경우가 어디 있어? 너희는 원래 이러니?
“무슨…….”
다비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흩날리는 작은 불씨 속에 더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아, 자꾸 내가 헛것을 보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른 아이들을 좀 깨워봐야겠다. 그래야 지금 자신이 보는 광경이 진짜인지 판별할 수 있을 듯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다비가 잠든 세나에게 손을 뻗으려던 때였다.
- 잠깐만!
불씨 속의 여자아이가 기겁하며 외쳤다.
다비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왜?”
- 친구들 깨우지 말고, 일단 내 얘기부터 좀 들어주면 안 돼?
“응 싫은데.”
- 저기, 제발 좀!
“내가 왜?”
- 난 플람족이고 이름은 코니라고 해. 그리고 난 이곳을 떠나서 너희랑 같이 멀리멀리 가고 싶어.
“그런데?”
- 넌 혹시 궁금하지 않아?
“뭐가?”
- 내가 지금 어떻게 이 작은 불씨 속에 몸을 싣고 있고, 이 작은 불씨가 어떻게 몇 시간째 꺼지지 않고서 유지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
어, 그건 좀 궁금한데.
온종일 다비를 관찰했던 ‘코니’의 전략적으로 준비된 멘트를 듣는 순간이었다. 다비는 저도 모를 호기심을 강렬하게 느껴 버리고 말았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