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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자책과 책망 (2) (37/38)


36화. 자책과 책망 (2)
2023.07.2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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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눈빛은 처음이다.

요재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서글픈 일이 생겨도, 곤란한 순간이 찾아와도, 언제나 그랬다. 힘을 내보자고. 여기서 꺾이지 말자고. 조금만 더 해보자고. 마치 그렇게 조곤조곤 말하듯이, 옆을 지켜주던 아이였다.

정작 자신은 소심하면서도 주위를 밝게 비추어주던 친구.

어쩌면 그래서인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밝고 구김살 없던 요재가 내게 저런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한쪽을 서걱 베어내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지금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하여 내가 무의식중에 난처한 미소를 떠올려 버린 것은.

“저기, 요재야?”

나는 조금은 저어되는 기분으로, 그러나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을 느끼며 요재를 불렀다. 그러나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시선은 그저 바닥의 이름모를 잡초를 향해 떨어뜨리기만 할 뿐.

다시 고개를 들면 요재의 낯선 눈길과 마주해야 할 거라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저기, 나는 말이야.”
“…….”

그러나 요재는 답이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낯선 눈길을 보내는가 싶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려는 걸까. 혹은 눈에 담기 싫어진 이를 외면하려는 걸까.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알겠다.

나한테 실망한 거겠지. 어쩌면 배신감도 느낀 거겠지. 언제나 밝고 구김살 없이 나를 대했던 만큼 상심의 크기 또한 큰 거겠지.

그래서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똑부러지는 세나나 다비라면 강한 어조로 나를 탓하거나 책망하기라도 했을 텐데. 요재는 달랐다. 그저 물끄러미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낸 것이 다였다. 이후엔 나를 눈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느껴졌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건넬 수 있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아야 했다. 어디까지나 내 잘못이었다. 목걸이에 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숨겼다.

친구들과 나의 믿음의 크기가 같지 못했다.

친구들은 언제나 나를 완전하게 믿어주었지만, 나는 친구들을 완전하게 믿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사실을 숨기고, 두려워했던 거겠지. 친구들이 날 미워할까봐. 날 오해할까봐. 그것 하나 믿지 못하고서.

그러니 나는 요재의 외면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것이 당연한 거다. 그 선명한 사실을 깨달을수록 후회와 죄책감의 한숨이 가슴을 짓눌러 왔다. 그럴수록 더욱 깨달아야 했다. 내겐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미안. 미안해.’

나는 그저 입속으로만 웅얼거렸을 뿐이었다.

저무는 노을.

새겨지는 별무리.

밤이 깊도록 요재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바닥만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무런 대화 없는 긴긴 시간을 보냈다. 서걱거리듯 시린 밤이었다.

***

사실은 알아.

네가 일부러 우리 모두가 레퓨지아 밖으로 내몰리도록 한 건 아닐 거야. 넌 그럴 아이가 아니니까.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말이야. 나는. 네가 그 사실을 비밀로 했던 게 서운하고 화가 나. 사실 그렇잖아. 네가 우리를 못 믿었던 거잖아, 결국. 그래서 우리한테 말하지 못하고서 숨겼던 거잖아.

그래서 실망이야.

우리가 그 정도였나 싶어서.

나만 그게 아닐 거라 생각하며 지냈나 싶어서.

너는, 안 그러니?

“…….”

눈을 떴다.

방금까지 귓가에 맴돌았던 목소리는 뭐였을까. 꼭 요재 목소리 같았는데. 혹은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꿈이었을까.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어색해져 버린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침묵을 지켰던 지난 밤의 시간들. 그러다가 언제 깜빡 잠이 들어 버렸던 건지. 어째서 지금은 해가 환하게 떠오르고 있는 건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는지. 전부.

“일어났어?”
“…….”

잠에서 깨어나 조금은 멍하니 앉아 있던 내게 제일 먼저 다가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요재의 것이었다. 나는 조금은 흠칫하는 기분으로 눈길을 들었다. 먼저 일어나 있었던 걸까. 혹은 까만 밤을 새하얗게 지새운 걸까. 조금은 수척해진 듯한 요재가 메마른 웃음을 지어보였다.

“움직이자.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어, 응.”

그걸로 끝이었다.

요재는 잠시 지어보였던 웃음보다 조금은 덜 건조해 보이는 메마른 나뭇가지와 마른 뿌리조각을 한아름 안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비행선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때로 사람은 표정이나 목소리보다 뒷모습으로 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이 그런 것 같다. 방금 내게 건넸던 요재의 말들보다, 멀어지는 저 뒷모습이 진짜 마음속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거든.

언제쯤 요재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렇게 못하겠다. 어쩐지 어젯밤의 일들 이후로 요재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한 겹 쳐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붉은 목걸이는 어쩌자고 눈치도 없이 옷깃 밖으로 튀어나와선 덜렁거리고 있는 건지.

“하아.”

습관처럼 목걸이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은 전부 비행선 주위에 모여 있었다. 출발 준비를 서두르는 걸까. 다가가서 보니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었다.

“어?”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모은 무릎을 끌어안고서 비행선 옆에 앉아 있는 아이.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 머리와 하늘빛 눈동자.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어쩐지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란족의 고치에서 구해냈던 아이였다. 어제 달려들던 란족 수장에게 엄청난 섬광과 함께 일격을 먹였던 뒤로는 내내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아.”

그 아이도 내 접근을 알아차린 걸까.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길이 마주쳤다. 특유의 패턴이 있는 하늘색 눈동자가 신기했다. 이내 날 향해 짓는 눈웃음도. 모두.

“안녕?”
“어…… 안녕.”
“난 유리나라고 해.”
“유리나?”
“응. 너는?”
“어, 난, 조안.”

스스럼없이 이름을 밝힌 유리나 덕분에 얼결에 통성명까지 했다. 나는 약간은 낯이 가려지는 어색한 기분을 애써 감추기 위해 물었다.

“이젠 좀, 괜찮아?”
“다행히도.”

유리나라고 자신을 밝힌 아이가 맑게 웃었다.

“조금 기운이 없긴 하지만 심하진 않아. 너희 덕분에 고치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모처럼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어서. 아마도 그래서인 것 같아.”
“깊은 잠이라니?”
“란족의 고치에 갇히면 잠을 잘 수 없거든. 내내 악몽에 시달려야 해서.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로 몽롱하게만 지내야 했거든.”
“…….”

그거 참 끔찍한 일이다.

함께 듣던 조조바가 물었다.

“그런데 넌 어쩌다가 란족에게 잡혀 있었던 거야?”
“나? 초대를 받았었어.”
“역시.”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와 요재도 한마디 거들었다.

“상습범이었네, 란족 수장.”
“그러게. 어쩐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더라니.”
“그런데 넌 혹시 무리카족이야?”

마지막에 물은 아이는 루이샤였다. 루이샤가 특유의 고양이 같은 샐쭉한 눈빛으로 유리나의 위아래를 의미심장하게 훑어보았다.

“내가 전에 부족 어른들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 황야 건너편 동쪽이라던가? 찌릿찌릿한 힘을 다루는 종족이 있다고 했어. 딱 너처럼 은빛 머리칼과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정전기를 조심하라고. 자칫 잘못 만져지면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곤두서게 된다나. 그러니까 너, 무리카족 맞아?”
“어, 응. 맞아.”
“와아, 역시.”

루이샤가 방긋 웃으며 유리나에게 다가섰다.

“그럼 나한테도 그거 해줄 수 있어? 찌릿찌릿.”
“으음, 그건 왜?”
“어른들이 하도 겁을 줘서. 그때 그 말이 맞는지 확인 좀 해보려고.”

루이샤가 당장에라도 고양이 모습으로 변할 듯이 말했다.
듣고 있던 나는 결국 끼어들고 말았다.

“굳이 직접 확인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란족 수장이 어떻게 당했는지 너도 봤잖아.”

사실이었다. 어젠 굉장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란족 수장이 한순간이나마 엄청나게 괴로워했을 정도였으니까.

루이샤도 그걸 떠올렸는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어…… 그런가?”
“그렇지. 잘못하면 털이고 수염이고 홀랑 다 태워먹을걸?”
“그, 그러면 곤란하겠지?”
“당연하지.”
“……풉.”

나와 루이샤를 번갈아 보던 유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우리를 향해 물어왔다.

“있잖아. 사실 나, 갈 곳이 없는데. 혹시 너희도 그래?”
“응? 우리가 그래 보여?”

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유리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응. 나랑 비슷해 보여서.”
“비슷하다니, 어떤 점이?”
“잘 지내던 집에서 나온 처지.”
“…….”
“난 말야. 바깥 세상이 궁금했어. 내가 살던 고향이 갑갑하기도 했고.”
“어째서?”
“내 몸에서 나오는 이 찌릿찌릿한 힘 말야. 어른들은 그걸 ‘전기’라고 불렀거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기가 뭔지를 탐구하는 건 금기였단 말야?”
“금기?”
“응. 그게 전통이래. 함부로 탐구하지 않는 거. 대대로 물려받은 힘에 의문을 품고 파헤치는 일은 무례한 거라나.”
“그게 답답했던 거야?”
“어. 난 궁금했거든.”
“그래서 그 전기라는 걸 탐구하려고 집을 나온 거였어?”
“응.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유리나가 맑은 얼굴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하는 부탁인데, 나도 너희랑 같이 가면 안 될까?”
“우리랑?”
“응.”
“우리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모르니까 그냥 부탁하는 거지.”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유리나라는 이 아이, 맑고 신비로운 외모와는 달리 은근슬쩍 저돌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사실 이 경우는 나름 절실한 처지 때문인 걸까.

“다시 혼자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건 조금 싫어서. 그렇다고 해답을 얻지도 못한 채로 고향에 돌아가는 건 더 싫고. 너희랑 같이 움직이면 서로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 같고.”
“도움이라. 구체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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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물은 아이는 다비였다. 유리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침마다 일행 전체의 잠자리 정리. 내가 신입이니까 그 정도는 기꺼이 할게.”
“어, 달랑 그것만?”
“그 정도 역할이면 충분한 1인분 아닐까?”
“당당하네?”
“내 장점이야.”
“오케이. 합격.”

다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세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황야는 혼자 다니기엔 너무 위험하니까.”
“나도 찬성. 숫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든든하잖아?”

요재도 질세라 의견을 밝혔다.

나머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조바는 유리나의 전통을 ‘탐구’하는 자세가 멋져 보여서. 루이샤는 정전기 세례를 꼭 받아보고 싶다는 이유로. 그리고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당연히 찬성.”

일행에 새로운 친구가 들어온 덕분일까. 어젯밤 친구들과의 사이에 맴돌았던 어색했던 공기가 상당히 희석된 게 느껴졌다. 나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자아. 그럼 다들, 아침 먹고 비행선부터 수리하자.”

세나의 말과 함께 우리 모두는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는 몰랐다. 어제 란족의 수장을 불태운 플람족의 땅. 그 이글거리는 대지에서 피어난 불씨 중의 하나가 우리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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