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억류자들 (2) (33/38)


32화. 억류자들 (2)
2023.06.3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내가 이런 힘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하찮은 것들에게. 고작 이따위 것들 때문에. 내 근원의 힘까지 쓰는 순간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러나…….

‘잡았다!’

거침없이 뻗어가는 주먹.

그 앞에 놓인 하찮은 위카족 마녀들.

조안을 보며 란족 수장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울러 확신 또한 머금었다. 잡았다. 저 어린 소녀가 아무리 위카족의 마녀라 해도, 지금껏 제법 잔머리를 굴려왔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빠져나갈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더불어 목걸이도 확인할 수 있을 테지!’

가슴이 뛰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

북동쪽 푸른 반딧불이의 섬. 오랜 시간 그 섬을 지켜온 자칭, ‘수호자’. 그에게서 날아온 전령이 제안을 건네어 왔던가.

조만간 위카족 소녀들이 근방에 올 것이라고. 그들을 꾀어, 일행 중에 붉은 목걸이를 지닌 소녀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그리하여 확인이 된다면, 소녀들을 위협하고 궁지로 몰아넣으라고.

‘……그 일만 해내면!’

대가로 힘을 빌려주겠노라 했다. 란족의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고도 했다. 빌어먹을 플람족에게 빼앗긴 소중한 땅. 고향의 터전을 다시 마음껏 밟게 해주겠다고 했다. 분명히. 약속했다. 그러니까. 꼭. 반드시. 저 소녀의 목걸이를.

‘내놔!’

확신이 들었다. 다른 소녀들의 목덜미는 이미 살펴보았다. 다들 목이 훤히 드러나는 차림이었으니까. 그러나 단 하나. 조안이라 불리는 소녀만이 유독 목덜미를 여미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콰아악!

휘두른 주먹이 조안이라 불린 소녀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이제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소녀는 피떡이 되어 날아갈 테지. 나는 그 주검에서 목걸이를 확인한 후에 챙기면 될 것이고. 그래. 따지고 보면 죽는 것도 궁지이고 위기지. 그거면 된 거야. 모두가 행복해질 테니까. 나도, 나의 일족도. 모두.

‘목걸이! 내놓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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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확신과 함께 수장이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감히 누구한테, 더러운 주먹을 들이대.”

어디선가 속삭이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어디에서? 눈앞의 소녀들 중 하나에게서.

그와 동시에, 늘어진 채 부축을 받고 있던 소녀로부터 치솟은 기이한 섬광이 시야를 온통 뒤덮어 왔다.

“……!”

***

파츠즛!

섬광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강렬한 백색 섬광이 사방을 물들였다. 바닥에서부터 치솟았다. 나를, 요재를 휘감았다. 구불거리는 새하얀 모습이 보일 만큼 강렬한 전류의 장막이었다.

덕분에 이쪽으로 휘둘러져 오던 란족 수장의 주먹이 전류의 장막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

저 기괴한 비명을 무어라 해석해야 할까. 안타까움? 분노?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억류자 아이가 어느새 들어 올린 시선으로 란족 수장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답해. 감히, 어디서.”
“……캬으아억!”

란족 수장이 온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그의 몸을 거대한 근육질처럼 휘감았던 수천 줄기의 새싹이 모조리 와락 일어섰다. 마치 지렁이 수천 마리가 그의 몸을 뒤덮은 채 기어다니는 것처럼 기괴한 모습으로 경련했다.

하지만 그걸 계속 감상할 틈은 없었다. 억류자 아이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눈빛도 서서히 흐려졌다. 그와 함께 우리를 감쌌던 전류의 장막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나는 깨달았다. 시간이 없다고.

“요재야! 어서!”
“……어? 응!”

전류의 장막과 수장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요재가 내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몸을 웅크리며 힘을 모으는 요재. 이내 땅을 박차는 감각과 함께 순간적인 속도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투훅!

“……!”
엄청난 단거리 이동이 불러온 멀미가 위장을 쥐어짰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란족 수장에게서 순식간에 스무 걸음이나 멀어질 수 있었다.

“이봐? 괜찮아? 응?”

나는 뒤집어지려는 속을 참아내며 억류자 아이부터 살폈다. 그러나 고치 속에서의 오랜 감금이 몸을 쇠약하게 만든 걸까. 그 상태에서 방금 같은 전류의 장막을 만들었던 대가인지, 아이는 이미 반쯤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물러나자. 이 아이는 내가 부축할게.”
“어, 응!”

요재가 다시금 아이를 부축했다. 나는 요재를 따라 재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구조용 비행선으로!”

다행히 이 난리통에도 아직껏 망가지지 않은 구조선 한 대가 보였다. 우리 모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구조선을 향해 열심히 뛰었다.

그런 우리의 의도를 깨달은 건지, 몇몇 란족 병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의 저지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다른 억류자들이 란족 병사들을 가만히 두지 않은 덕분이었다.

“어딜 감히 우리의 은인들을!”
“저 애들을 건드리려거든 내 시체부터 밟고 지나가라, 이것들아!”
“크오아악! 저것들 다 찢어 버려!”

이미 성이 날 대로 났던 억류자들이었다. 그들이 대놓고 달려들며 훼방을 놓자, 란족 병사들은 우리 앞을 가로막기는커녕, 제 몸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거기에도 예외가 있었다.

란족 수장이었다.

“크르륵! 그…… 으읏! 크아악!”

뒤쪽에서 란족 수장의 괴성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전류의 장막에 감전되며 쓰러졌던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소름이 돋았다. 그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땅을 박차는 모습에도. 그의 벌겋게 물든 눈동자도. 모두.

“거기 서어어어억!”

괴성과 함께 그가 두 팔을 뻗었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새싹 수백 줄기가 두 팔을 따라 길게 쏘아졌다. 땅에 박혀 들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의 전신을 잡아당겼다.

투확!

단 한 번의 기괴한 도약.

그것만으로도 우리와 그의 거리가 1/3 가량 줄어들었다. 요재의 고속이동에도 견줄 수 있을 엄청난 돌진이었다. 문제는, 성난 억류자들도 수장의 앞을 좀처럼 막아내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비켜!”

콰아앙!

어느 억류자가 분노에 가득 찬 몸짓으로 수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억류자는 수장이 휘두른 손짓 한 번에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가고 말았다. 흩날리는 핏물. 망가진 장난감처럼 비틀어져 버린 이름 모를 억류자의 상반신. 나는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며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뒤를 보지 마! 계속 뛰어!”

세나가 외쳤다.

나는 이를 악물고서 뛰었다. 제멋대로 거칠어진 호흡. 날뛰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뒤쪽에서는 수장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걸까. 절망적 굉음이 두방망이질 치듯 서슴없이 거리를 좁혀왔다. 그만큼 호흡이 더 가빠졌다. 무서웠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정말로 무섭다.

수장은 대체 왜 나한테만 유독 집착을 하는 걸까. 어째서 저렇게나 집요하게 나만 죽이려 드는 걸까. 어째서? 왜?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에도 수장의 외침이 가까워져만 왔다.

“거기 서라고 했지!”
“……!”

수장의 괴성이 이제는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지 마. 당장에라도 붙잡힐 것 같았다. 돌아보면 안 돼. 아까 봤던 억류자의 뭉개진 상반신이 떠올랐다. 돌아보면 안 된다고. 나도 그렇게 되는 걸까. 그러면 나는…….

“숙여!”
“……!”
별안간, 엉뚱한 외침이 앞쪽에서 날아왔다. 낯선 목소리. 이름도 모르는 또 다른 억류자였다. 언니뻘의 숙녀인 걸까. 파란 피부에 커다란 키를 지닌 억류자가 내 뒤쪽을 손가락질하며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 마치 돌부리에 발이 걸린 것처럼, 내달리던 기세 그대로 넘어졌다.

“아읏!”

온몸이 쓸리는 충격.

그러나 아픔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딴 감각을 느낄 사치도 주어지지 못했다. 넘어지자마자 뭔가 섬뜩한 연녹색 실루엣이 머리 위를 세차게 휩쓸며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후우우웅-!

란족 수장이 휘두른 수백 줄기 새싹의 다발이었다. 마치 거대한 방망이나 망치 같았다. 그걸 본 나는 무슨 정신으로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바닥을 긁고 기며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땅을 박차고 달렸다. 아니, 적어도 최소한 그러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이었다.

“옳지, 잘했다! 다음은 이 언니한테 맡겨!”

앞쪽에서 달려오던 억류자 언니가 내 곁을 스치듯 지나쳤다. 그대로 뒤쪽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정체 모를 기이한 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왔다.

콰득!

“……!”

뭔가가 부서지고 망가지는 듯한 소리. 뒷목에 투둑, 투둑, 날아와 묻어나는 끈적한 액체. 더는 들려오지 않는 억류자 언니의 호쾌한 외침. 보지 않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왈칵, 나도 모르게 눈앞이 일렁이며 흐려졌다. 하지만 절대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멈추면, 그래서 수장에게 붙잡히면, 방금 있었던 희생은 헛된 것이 되어 버릴 테니까. 그러면 그 언니한테 너무 미안해질 것 같아서.

그런데…….

“그래! 계속 뛰어라! 너희는 우리가 지킨다!”
“……!”

억류자들.

수많은 억류자들.

각양각색의 억류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향해. 정면에서. 그러나 나를 보지는 않으며. 결의로 채운 뜨거운 눈길을 오직 내 뒤쪽을 향해서만 고정한 채로. 두 주먹 불끈 쥐고서. 누군가는 날카로운 이와 손톱을 드러내고서.

달려왔다.

저마다 외쳤다.

“널 위해서 희생하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수장! 저놈한테는 우리도 볼일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 갈 길이나 가라고!”

저마다 소리치는 목소리.

아닌 듯 무심한 격려.

미안해하지 말라고.

희생 아니라고.

그러니까 마음에도 두지 말라고.

그리고, 꼭 여길 빠져나가 살아남으라고.

모두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곁을 차례차례 지나갔다. 뒤쪽에서 돌진해 오고 있을 수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하나씩 스러져 갔다.

“……!”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저들을 막고 싶었다. 그러지도 못했다. 차라리 내게 거창한 힘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요재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면. 특출난 능력이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그럼 저들이 몸을 던지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픈 희생을 감내하지 않아도 됐을까. 나는 무력감에 치를 떨며, 눈물을 삼키며 계속 달렸다. 나란히 달리는 세나와 다비, 조조바도 비슷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구조용 비행선에 올라탈 수 있었다.

“조종! 내가 할게!”

다비가 허겁지겁 조종간을 잡았다. 아까 란족 병사들이 비행선을 조종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며 익힌 걸까.

……큐우우우웅!

비행선이 굉음과 함께 떠올랐다. 란족 수장의 짐승 같은 고함도 들려왔다. 다비가 조종간을 힘껏 밀었다. 비행선이 선착장을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공중정원을 벗어나 급강하를 감행했다. 일순간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해방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해방감은 일순간일 뿐이었다.

“내가! 너희를 놓칠 줄 알고!”

콰아앙!

“……!”

거친 진동과 함께, 세차게 뻗어온 란족 수장의 새싹 촉수다발이 비행선 뒤쪽을 힘껏 움켜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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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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