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억류자들 (1) (32/38)


31화. 억류자들 (1)
2023.06.2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 유리나. 너는 모든 곳에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될 것이야.

“…….”

나는 누굴까.

유리나.

맞아.

모두가 그렇게 불렀지.

어디에서?

내가 떠나온 곳. 나의 고향. 햇볕이 잘 들지 않던 무리카 광산의 끝자락. 끝끝내 나의 의지로 떠나온 안식처. 때론 그리워서 생각이 나고, 그리워서 원망스러운 그곳.

‘돌아가지 않아.’

무라카족의 소녀, 유리나는 실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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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액체 속에 떠 있는 전신. 어쩐지 몽롱한 의식. 포근하고도 나른해진 이지의 숨결을 머금고 있노라니, 기억 속의 편린이 가슴 한쪽을 쓰다듬듯 찔러왔다.

고향을 박차고 떠나던 날이었던가. 엄마가 저렇게 말했다. 이대로 무작정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게 되리라고. 무리카족에게 있어 그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다고. 동족과 신호를 주고받지 못하는 무리카는 끝내 녹이 슬게 되리라고.

남으라고.

그러면 될 수 있다고.

동족들의 따스한 품속에서 비로소 모든 곳에 존재하고, 어디에도 없는 이가 되어 행복하고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고.

싫었다.

그 말씀이 싫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겪고 싶었다. 그 걸음의 끝에서 나만의 꿈을 이룰 장소에 도달하고 싶었다. 오직 동족과의 소통만을 위해 동족의 온정에 갇혀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서 남에게 구애받지 않는 꿈을 찾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랬는데.

‘멍청하게도.’

란족의 꼬드김에 넘어가고 말았다. 덕분에 이런 꼴이다. 허망하게 사로잡히고, 고치에 갇혀서,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만을 몽롱하게 기다리고 있는, 이런 꼬락서니라니.

‘웃겨, 정말로.’

그때 엄마 말, 들을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후회는 없는 걸.

유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도 모르게 실눈을 깜빡였다. 예상치 못한 소리가 아스라이 귓바퀴를 간질여 왔기 때문이었다.

“……들! 저 가증스러운 란족을…… 어 버립시다!”
“…….”

뭘까.

어째서 바깥이 소란스러운 걸까. 혹시 잘못 들었나. 아닌 것 같은데. 고치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졸린데. 귀찮은데. 이대로 고치 속의 물약에 취해 있고 싶은데. 그러면…… 편해질 수 있을 듯한데.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거지.

“이봐악! 너희! 거기 반들반들하게 생긴 것들! 너흰 란족과 다르게 생겼는데! 어디서 왔나!”
“레, 레퓨지아입니다?”
“그와악! 반갑다! 나는 악타레스라고 한다악!”
“아…… 네, 반갑습니다?”

……레퓨지아?

처음 듣는 곳이다.

거긴 어떤 곳일까.

저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궁금해.’

유리나는 다시금 실눈을 깜빡였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레퓨지아라는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우선…….

‘일어나야 해.’

눈을 떴다.

온몸을 휘감은 영양액이 갑자기 불쾌하게 느껴졌다. 전신을 휘감은 구속감. 갑갑해졌다. 손을 뻗었다. 고치 내벽의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찢을 수 있을까. 이걸 가르고서 나갈 수 있을까.

두드렸다.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여기서 꺼내달라고, 몸부림치며 소리없이 외쳤다.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넌 뭘 하고 있나악?”
“네, 네에?”
“어서 고치부터 부수라고아악!”
“네, 네에!”

누군가의 재촉과 허둥거리는 대답. 뒤이어 세상이, 아니, 고치 한쪽이 벌어졌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손길이 뻗어왔다. 얼결에 맞잡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 빛보다 따스해 보이는 미소.

“괜찮아? 어서 나와.”
“…….”

눈이 마주쳤다. 또래로 보이는, 자신과 조금 다른 외모의 여자아이였다. 그 순간 유리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레퓨지아라는 곳에 도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

“……크워억!”

네 개의 팔을 지닌 근육질의 종족이 날뛰었다. 란족 병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추풍낙엽. 란족 병사들은 그를 붙들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물론 포기하지는 않았다. 넘어진 이들의 두 배는 되는 란족 병사들이 다시 그를 향해 온몸을 날렸으니까.

“크오오!”

머리칼 대신 수많은 촉수를 지닌 ‘사람’이 포효했다. 이리저리 내달리며 수십 줄기의 촉수를 휘둘렀다. 수많은 고치가 끊어지고, 찢기고, 갈라졌다.

이내 망가진 고치 속에서 튀어나오는 손과 발. 분노에 젖은 채 내미는 머리와 눈길. 제각각의 생김을 지닌, 수많은 종족들이 고치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외쳤다.

“다들! 저 가증스러운 란족 놈들을 찢어 버립시다!”
“그라라락!”

모두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다들 우리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당했을 테니까. 아니, 그나마 속기 직전에 란족의 정체를 눈치라도 챌 수 있었던 우리와 달리, 끝까지 란족의 호의를 믿고 있다가 모진 고초와 수모를 겪었을 테니까.

“……그렇겠죠?”

거칠게 날뛰어대는 ‘억류자들’. 그들을 어떻게든 다시 잡아두려는 란족 병사들. 바닥에서 솟구치며 억류자들을 묶으려 애를 쓰는 새싹까지.

그 모든 혼란과 혼돈, 해방과 억압, 폭력과 투쟁의 도가니 속에서 나는 눈길을 들었다. 어느새 우리 앞을 막아선 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

수장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가 침중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고치에서 풀려난 억류자들은 숫자가 제법 많았고, 모두가 화가 나 있었다. 살의로 잠깐 이성을 내려놓을 만큼, 충분히.

반면, 란족 병사들은 이미 지리멸렬하며 억류자들에게 밀려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항복하지?”

다비가 거칠어졌던 호흡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세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란족의 수장이시여. 이제는 상황을 인정하고 무의미한 다툼을 끝내는 게 나을 듯한데 말이지요.”
“동감이야. 어차피 이제 당신들, 승산이 없어 보이는데 계속 갈 거야?”

파슉, 츠카가각-!

고치 파괴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요재가 고속이동에 이은 급정거를 선보이며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요재의 어깨에는 처음보는 사람이 기대어 있었다.

우리와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 종족인 것 같았다. 생김새가 조금은 이질적이었다. 특히, 금속으로 이루어진 듯 창백한 피부와 푸른 빛이 감도는 은색 머리칼이 그랬다.

“아. 고치에서 풀려난 사람이야. 유독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여서. 난리통에 휘말리면 다칠 거 같아서 데려왔어.”

내 눈길을 의식한 걸까. 요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요재에게 부축받고 있는 여자아이는 눈을 뜨질 못하고서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많이 지친 걸까. 가엾게도.

나는 가슴 한편으로 느껴지는 안타까움을 접으며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란족 수장을 향해 물었다.

“어때요? 이래도 계속 싸울 건가요? 아니면, 이제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협상을 하겠어요?”

솔직히 더는 다투기 싫다.

란족 수장도 싫지만, 서로를 폭력으로 대해야만 하는 이런 상황이 더 싫다. 여기서 끝내면 좋겠다. 수장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충분한 보상과 함께 우리에게서 물러나 주면 좋겠다.

나는 솔직한 바람을 담고서 수장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저 사람…… 웃고 있어?

“하하……하하하…… 크크크큭!”

수장의 눈매가 어쩐지 섬뜩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의 입꼬리가 한없이 치솟았다. 만면에 머금은 기이한 미소와 함께 수장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잘못을 인정? 승산이 없어? 크크크큭!”
“…….”
“듣자듣자 하니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 고치에 갇혀 있던 잡것들 몇몇을 좀 빼냈다고 금방 기고만장해지는 꼬락서니라니. 이걸로 이겼다고 자만을 하는 건가, 지금?”
“이봐요, 당신. 이대로 계속 고집을 부리면 당신네 부하들만 더 다칠 거야.”

참다 못한 다비가 일침했다.

그러나 수장의 미소는 걷히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섬찟한 빛깔로 물들어가기만 할 뿐.

“더 다친다라. 그래. 위카족 애송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 내가 너희를 너무 정중하게만 대한 탓일까. 아마도 그게 잘못이겠지. 그러니 이토록 기어오를 생각이라도 해보는 것일 테고.”
“…….”
“아까도 말했겠지? 너희는 내가 직접 플람족의 땅으로 내던질 것이라고. 산 채로 타들어가며 죽어가는 너희의 비명을 음악 삼아 오늘의 피로를 풀 것이라고. 그런 내 말이 장난으로 들렸나?”

수장의 눈길이 우리 모두를 차례대로 훑었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가 조금 이상했다. 붉었다. 아까는 저런 빛깔이 아니었는데. 마치 미친 것만 같은. 광기에 잠식당하는 듯한. 그리하여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고야 마는.

……꽈드득!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어디에서? 수장의 발밑에서. 소리와 함께 새싹이 돋아났다. 수십, 수백, 수천의 줄기가 삽시간에 치솟았다. 그리고 수장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크흐! 크흐크큭! 크크학!”

콰드드득! 콰득!

그것은 실로 미증유의 섬뜩한 광경이었다. 바닥에서 솟은 새싹 줄기 한 올이 녹색 근육 가닥이 되었다. 한 올, 다시 한 올, 그 위에 한 올. 겹치고, 뒤덮이고, 다시 겹치고. 두꺼워지고. 거대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수장은 식물 줄기의 근육질로 이루어진 5미터짜리 거인이 되어 우리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감히, 나의 본모습을! 온전한 모습으로 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할 것이야!”

거센 외침과 함께였다.

수장이 바닥을 박찼다. 아니, 박찬다 싶은 순간, 순식간에 우리 앞에 도착했다.

콰드득!

착지와 함께 뭉개지는 바닥. 압도적으로 드리운 그림자. 치켜든 거대한 두 주먹이 나를 겨누었다. 내리쳐져 왔다. 그 어떠한 경고도 없이. 서슴없는 파괴의 욕구를 담고서.

“조안!”
“……!”

귓가에 울리는 세나의 외침.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수장의 주먹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빨랐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부웅, 무지막지한 돌풍이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땅을 내리찍었다.

콰작!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이 형편없이 뭉개졌다. 저걸 맞았다면? 난 지금쯤 무사하지 못했겠지.

“여기! 손!”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불쑥, 하얀 손바닥이 시야 한쪽을 침범해 왔다. 어느새 재빠르게 다가온 요재였다. 요재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거의 끌어당겨지듯 일어났다.

“어서!”

요재의 외침과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요재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두 번째 돌풍이 날아왔다.

후우웅……!

“……!”

수장이 내리쳤던 주먹을 가로로 휘둘러 오고 있었다. 거의 요재의 움직임에 버금갈 정도로 재빠른 공격이었다. 피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최후의 예감. 주위의 모든 것들이 느리게 보였다.

이게 주마등이라는 걸까. 어떻게든 나를 안은 채로 고속이동을 발동하려고 애를 쓰는 요재의 옆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런데 쉽지 않아 보였다. 요재는 다른 한쪽 어깨로 억류자 여자아이까지 부축한 상태였다.

무려 두 사람의 무게를 짊어지고서 고속이동이라. 그만큼 힘이 들겠지. 느려지겠지. 그럼 요재를 놓아주어야 할까. 그러면 요재와 저 억류자는 무사히 수장의 공격을 피할 것 같은데. 어쩌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감히 누구한테, 더러운 주먹을 들이대.”

누군가의 속삭이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어디에서?

요재에게 부축받던 아이에게서.

그와 동시에, 그 아이의 전신으로부터 치솟은 미증유의 전류가 나를, 요재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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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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