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공중정원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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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공중정원으로 (1)
2023.05.1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협박이라는 거 말이야. 설마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난 그저 저들이 우리의 요구를 반이라도 들어주면 만족할 거 같았거든.
그런데 이 상황은 대체 뭘까. 이를 테면, 란족의 수장이라는 높은 분이 직접 우리 앞에 내려와서 질문을 던지는 이런 상황 같은 거.
“그대 마녀들은 우리의 공중정원을 위협하려던 것이 아닌가?”
란족의 수장은 키가 무척 컸다.
아들이라던 비행사?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림잡아도 2.5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식물 줄기로 이루어진 기다란 팔다리며 몸통까지도 온통 호리호리해서, 가뜩이나 커다란 키가 더욱 가늘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해 보이느냐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대답하도록. 그대들은 어떻게 자이언트 러너를 길들여서 타고 왔던 것이며, 그 목적이 무엇이지?”
수장의 어조는 내내 정중했다.
우리를 보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까닭모를 위압감이 은근히 느껴졌다. 지금은 고요하지만, 뭔가가 어긋나는 순간 저 정중함이 무자비함으로 돌변할 것 같은 예감, 혹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곁을 향해 눈짓했다.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걸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다비가 보였다. 이윽고 다비가 옆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 세나가 있었다. 역시. 다비도 똑같은 생각을 했구나.
우리 중에서 뭔가 까다로운 대상과 마주했을 때, 가장 침착하게 대꾸할 수 있을 유일한 사람. 그만큼 제일 믿음직한 아이.
“안녕하세요, 저는 세나라고 합니다.”
세나가 특유의 침착하고도 차분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란족 수장이 움직이지도 않고서 시선만 돌려 세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레퓨지아에서 왔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이곳을 지나던 중이었고요.”
“지나던 중이었다고?”
“네.”
“언노운을 그저 지나가는 마녀들의 무리라. 하.”
마녀라니. 흐음. 그러고 보니 아까 ips, 피코도 우리가 마법을 쓰는 위카족이라고 했지.
란족 수장의 어깨에 망토처럼 드리워진 붉은 꽃잎들이 흔들렸다. 비웃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수장의 입가에도 똑같은 냉소가 그려졌으니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층 신랄했다.
“위카족 마녀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지. 우리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 우리는 그냥 지나가려던 것뿐이야. 우리는 이래서, 우리는 저래서, 항상 이유가 있지. 종족적 본성인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변명거리부터 찾아. 그 행동에 의해 만들어질 결과의 책임을 묘하게 미리 회피하는 파렴치한 혓바닥들이라니.”
아무래도, 우리를 보는 수장의 개인적인 감정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듯했다.
“란족의 수장이시여. 어째서 당신은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서 지레짐작으로 우리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을 거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지요?”
세나가 물었다.
수장이 입술 끝으로만 소리없이 웃었다.
“이유를 모르는가? 재미있군. 배신당했으니까. 우리를 이 언노운에 버렸으니까. 자신들만 안전한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 틀어박히는 선택을 했으니까.”
“우리들이요?”
“그래.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대들의 윗 세대 위카족이.”
“하지만 그건 저희가 벌인 일은 아니지 않나요?”
“상관없어. 어쨌건 그대들이 자이언트 러너와 동맹을 맺고서 우리의 영역에 접근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설마…… 우리가 자이언트 러너를 타고 온 것이 공격의 이유였던 건가요?”
“당연하지.”
수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시끄럽고 요란한 족속은 우리가 발 붙일 땅을 온통 짓밟아. 뿌리가 땅에 스며 싹이 제대로 트기도 전에 달려와서 온 땅을 헤집으며 달려가 버리곤 하지. 덕분에 놈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는 그 어떤 풀도 좀처럼 자라나지 못해. 평생을 방랑하는 종족? 웃기는 소리. 그 자체가 민폐인 것을. 한데 우리가 그것들을 호의적으로 봐 주어야 할 이유가 있나? 그대들도 마찬가지야.”
“…….”
“자, 말해보도록. 자이언트 러너, 그 족속들과 무슨 거래를 했지? 그들과 어떤 형태의 협력을 약속하고서 이 땅에 온 것인가.”
……쓰읍.
나는 무의식중에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거, 란족과 우리 사이에 좀 커다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이언트 러너와 모종의 협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내가 나지막하게 혀를 차는 걸 들은 걸까. 별안간 란족 수장의 눈빛이 나를 향해 꽂혀 왔다.
“그대는 할 말이 있는가? 그런 듯한데.”
“…….”
수업 중에 갑자기 선생님의 지목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 들던데. 잠시 당황했던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느라 천천히 대꾸했다.
“아, 네. 할 말이, 으음, 없지는 않은 거 같긴 한데요.”
“뭘 말하고 싶은 것이지?”
“네. 아무리 그렇게 불만을 말씀하셔도…… 일단은 우리 손에 인질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좀 알려드리고 싶고요.”
“……뭐?”
란족 수장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솔직히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서 다짜고짜 먼저 공격을 한 건 그쪽이잖아요?”
“무슨…….”
“그러니 지금은 저희가 거기, 수장님? 아무튼. 수장님의 불평이나 화풀이성 한탄이 아니라, 사과부터 받는 게 맞는 상황이 아닐까 하고…….”
“…….”
아하.
란족은 어이가 없어지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나는 미지의 세상 언노운에 대한 사소하고도 잡다한 지식 하나를 챙기는 기분을 느끼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지금 우리가 인질을 잡고 있는 거거든요? 우선 마구잡이로 공격을 했던 것에 대한 사과부터 해주세요. 그러면 우리도 생각을 좀 해볼게요.”
“무슨 생각을?”
“수장님의 하소연을 계속 들어줄지, 인질을 풀어주고 화해를 할지, 아니면 이대로 계속 서로 미운 말을 나누면서 꼼꼼하게 인상을 쓸지를 결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생각나는대로 말했다.
“저는요. 수장님이 뭐라고 오해를 하건 말건 상관없어요. 이건 오히려 우리가 화를 내야 할 상황이라고요.”
정말이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했잖아. 그걸 모면하려고 이렇게 예정에도 없던 인질극까지 벌이고 있는 거잖아. 따지고 보면 우리가 피해자라니까? 이런 인질극이라는 거, 직접 해보니까 알겠다. 이게 얼마나 진 빠지고 피곤한 일인지를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쏘아붙인 나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날 보며 어깨를 으쓱. 루이샤가 엄지를 슬쩍 치켜드는 것도 보였다.
반면 란족의 수장은?
여전히 떡 벌어진 아래턱을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괜찮다면 입을 다물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 하하. 하.”
수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다음 차례는 뭘까. 설마 불 같이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아니었다.
“……그래. 미안하군. 함부로 공격을 했던 우리의 행동을 사과하지. 됐나?”
“네. 사과를 받아들이죠.”
“그럼 이제 내 아들을 돌려주겠나?”
“수장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봐서요?”
“나도 그대들이 자이언트 러너와 군사적 동맹을 맺은 것인지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군사적 동맹 같은 건 안 맺었어요.”
“어떻게 믿지?”
“버스비만 준 사이거든요.”
“……버스비?”
“네.”
나는 레퓨지아에서 종종 이용하던 교통수단을 떠올리며 요재를 돌아보았다.
“아직 가지고 있지?”
“응? 뭐를?”
“털가죽.”
“아!”
내 대답에 요재가 탄성을 내뱉었다. 이내 요재가 주섬주섬, 배낭에서 작은 털가죽 한 장을 꺼냈다. 자이언트 러너와 처음 만났던 때에 물물거래를 하며 받았던 가죽이었다.
나는 털가죽을 받아서 란족 수장을 향해 내보였다.
“이거요. 드릴게요.”
“뭐?”
고개를 갸웃거리는 란족 수장. 아직 내가 뭘 말하려는 지를 잘 모르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버스비요.”
“무슨…….”
“자이언트 러너들과 만났던 때에도 이랬거든요. 우리 물건을 건네주고, 대신 그들의 등에 탔어요. 덕분에 한동안 제법 편하게 다닐 수 있었구요. 물론 목적지까지 가기에는 한참 모자랐지만.”
“목적지?”
“네. 푸른반딧불이 섬이요.”
나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우린 그곳으로 가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마냥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멀고 힘들잖아요?”
“그래서…… 자이언트 러너들에게 그랬듯이, 우리의 비행체를 빌려타시겠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
오히려 더 태연하게 되물었다.
“혹시 이게 교통비로는 좀 모자랄까요?”
“…….”
입을 다무는 란족 수장. 어쩐지 날 보는 눈초리가 좀 묘하고 복잡했다. 쏘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고, 한편으로는 내 속내를 꿰뚫어보려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나는 그 눈빛을 끝까지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니까.
오해를 풀어야 하니까.
그런데 차근차근 설명과 설득만 해서는 끝까지 평행선만 유지될 것 같았다.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부딪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이를 테면 이건, 일종의 협상인 셈이었다. 잠깐의 오해와 충돌은 접어두고, 서로 나눌 것만 각자 나누자는, 뭐 그런 식의 협상 말이다.
“…….”
언제까지 계속 시선을 마주해야 할까. 나, 몇 번쯤 눈을 깜빡거렸을까. 아니, 한 번도 안 깜빡였나?
그렇듯 슬슬 부담감이 느껴질 무렵이었다.
“하.”
란족 수장이 피식 웃었다.
설마 협상 결렬?
다행히 아니었다.
“좋군. 어차피 사과까지 주고받은 사이이니, 사소한 시비는 이쯤에서 접는 것도 좋겠지. 괜한 다툼을 길게 이어봤자 서로에게 득이 될 일도 없어 보이니까.”
“그럼…… 이걸 받을 건가요?”
“교통비로?”
“네.”
“낡은 가죽 한 장으로는 많이 모자랄 텐데.”
“그럼요?”
“내 아들과 추락한 비행체 모두를 돌려받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마 그렇겠죠?”
“그렇겠지.”
란족 수장이 싱긋 웃었다.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협상 성공.
마침내 오해를 풀 수 있게 됐다. 수장이 정중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탑승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우리 모두는 란족 수장의 전용 비행체에 올라탔다. 비행체는 너무나 가볍게 우리 모두를 하늘로 끌어올렸다.
“……!”
순식간에 땅이 멀어졌다. 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얀 구름이 달려왔다. 부딪치는 걸까. 아니. 볼을 스치며 지나가는 촉촉한 감촉. 귓불을 간질이는 무지개의 잔향.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장난스러운 바람을 느끼며 나는 깨달았다.
‘예쁘다.’
방금까지 땀 흘리며 걷던 땅이, 그 너머의 황야가, 저 머나먼 숲의 끄트머리가, 그 모든 것을 뒤덮고 있는 아득한 하늘 속의 언노운이 숨이 멎도록 맑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을 거닐어 란족의 거대한 비행 나무, 공중정원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