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불꽃의 전령 (2) (23/38)


22화. 불꽃의 전령 (2)
2023.04.2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피어나는 불꽃.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불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였다.

- 누가 날 불렀지?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바로 옆에서 천둥이 치는 듯이 웅장했다. 뒤이어 자그마하던 털뭉치의 불꽃이 수십 배나 확장되었다. 너무나 삽시간에. 하늘을 꿰뚫을 듯이.

- 누가 날 깨웠는지 물었지 않나.
“……!”

어느새 우뚝 선 화염의 거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0미터? 30미터? 적어도 학교 옥상보다는 높은 것 같았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럴수록 화염의 거인이 더욱 위압적인 자세로 우리를 굽어보았다.

- 이곳은 위대한 플람족의 땅. 그리고 나는 불꽃의 대지를 지키는 수호자 파이어뉴트. 나를 일깨운 이들은 그에 합당한 공물을 준비하여야 했음이야.

저것은 우리를 향한 명백한 질책이다. 아니, 훈계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그보다 우리는 피코의 조언에 따라 그저 ‘통역사’를 불렀던 건데. 플람족과 협상을 해서 불꽃의 땅을 안전하게 건너갈 방법을 알아내려 했던 건데.

‘그런데 이러다간…… 저 거인한테 공격받겠어.’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떡하지. 냅다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내가 그렇게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을 무렵이었다.

“공물? 어떤 공물?”

뜻밖에도 세나가 한 발짝 나섰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우리와 달리, 특이하게도 세나는 거인의 오른발을 쳐다보며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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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나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 그런 눈속임이 나한테까지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나와. 공물을 요구하건 말건 상관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속이려 들지 말고 본모습으로 나와서 당당하게 이야기를 해.”

세나가 거인의 오른발을 가리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거인이 움찔하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 감히…….
“자꾸 그런 식으로 속이려 들면 이걸 부을 거야.”

세나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수통이었다. 세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수통을 세게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거인의 표정이 더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어?’

거인의 오른발 속에 뭔가 꼬물거리는 작은 덩어리가 보였다. 낯익은 모습은 아니었다. 겨우 손바닥 정도 크기에 납작하고, 다리가 넷 달렸고, 통통한 꼬리가 있고. 그러니까 저건…….

“도롱뇽?”

책에서 비슷한 그림을 본 기억이 났다.

한데 내 중얼거림을 불꽃 거인이 들어 버린 걸까.

- 도룡뇽 따위가 아니다! 도마뱀이다!

버럭 외쳤다.

외치고는 잠시 멈칫.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걸까.

- 어, 흠! 큼흠! 도마뱀과 도룡뇽은 엄연히 다른 거다. 그 명백한 사실을 멍청한 너희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거니까 오해는 말도록.

“도룡뇽.”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또 말해 보았다.

역시나 거인이 또 발끈했다.

- 도마뱀이라니까!
“…….”
- …….
“너, 사실은 거기 있는 도마뱀이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거인의 오른발을 가리켰다. 그 속에 깃들어 있던 작은 불꽃 도마뱀이 통통한 꼬리를 흠칫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제야 알겠다. 세나가 왜 나섰던 건지. 뭘 보았던 건지. 역시 세나는 우리 중에 눈이 제일 밝으니까.

그러고 보니 불꽃의 거인은 거대한 데에 비해서 별로 뜨겁지가 않았다. 보통 저만큼 거대한 불길이 바로 앞에서 활활 타오르면 온몸이 익을 듯이 뜨거워야 할 텐데, 공기마저도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달아올랐어야 했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뻔하다.

“세나의 말대로야. 너, 작은 본모습을 숨기려고 수를 쓰는 거지? 우리를 겁줘서 공물인지 뭔지부터 받으려고 잔머리를 쓴 거 아냐?”
- …….
“솔직하게 말해봐. 안 그러면 계속 도롱뇽이라고…….”
- 알았다. 미안.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순간, 거대하게 피어올랐던 불꽃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 내 이름은 파이어뉴트. 플람족의 종복이자 불꽃의 땅을 지키는 순찰자야. 다들 반갑다.

역시나 손바닥 크기의, 작은 불꽃에 휩싸인 도마뱀이었다. 녀석이 우리를 향해 앞발 하나를 들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도, 우리 모두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불꽃 도마뱀을 스윽 둘러쌌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다란 눈높이에서 도마뱀을 굽어보았다. 아까 불꽃 거인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위압적으로.

“이곳은 우리가 먼 여정 중에 지나갈 길. 그리고 우리는 레퓨지아에서 온 위카, 애니말라, 힐러족 일행. 우리를 함부로 기만하고 속이려 한 도마뱀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할 것임이야.”

다비의 선고(?)에 도마뱀, 파이어뉴트가 얼빠진 눈빛을 떠올렸다.

- 어, 지금…… 뭐 하는 거야?
“협박.”
- ……응?

한층 당황하는 파이어뉴트.

녀석을 향해 다비가 말했다.

“네가 모신다는 플람족을 불러줘. 그리고 우리의 뜻을 전달해. 안 그러면…….”
“내 털뭉치를 태운 대가를 톡톡히 받아낼 거야.”

루이샤도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말했다.

우리 친구들…… 잘한다!

나는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친구들과 파이어뉴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파이어뉴트가 난처해진 투로 반문했다.

- 요구라니? 내 주인들에게 뭘 요구하려는 건데?
“말했잖아. 여긴 우리가 지나갈 길이라고. 그런데 플람족의 땅은 허락 없이 딛는 순간 온몸이 불타게 된다며. 그러니 우리가 안전하게 여길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길 원해. 그러니 우리 뜻을 전달해줘. 협상을 할 수 있게.”

이번에는 세나가 답했다.

그런데 파이어뉴트의 돌아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곤혹스러움에 잠겨 있었다.

- 어, 그건 좀…… 곤란한데.
“왜?”

요재가 반문했다.

파이어뉴트가 말했다.

- 내 주인들은 ‘협상’을 하지 않아. 오로지 대가를 받을 뿐이지.
“대가라면, 통행료 같은 거야?”
- 그래.
“어떤 거? 혹시 식량이나 귀중품?”
- 아니. 생명.
“뭐?”

설마.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파이어뉴트가 나를 올려다보며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 내 주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나가려는 여행자에게서 생명을 받고 길을 열어줘. 그들은 언제나 배가 고프거든. 그래서 누군가를 태워서 재로 만들 때에야 비로소 만족감을 느껴. 그것조차도 일시적인 만족감일 뿐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관대해지지.
“잠깐만. 그럼, 산제물을 원한다는 거야? 플람족이? 태워서 잡아먹을?”
- 그래.
“말도 안 돼. 이곳을 지나가려는 사람을 태워서 죽이면, 정작 그 사람은 이곳을 건너가지 못하게 되는 거잖아? 모순 아냐?”
- 아니.

내 반문에 파이어뉴트가 고개를 저으며 우리 모두를 돌아보았다.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하나씩 차례대로.

- 한 가지 팁을 알려 주자면, 꼭 이곳을 건너갈 당사자가 전부 제물이 될 필요는 없어.
“뭐? 그럼 설마…….”
- 짐작했니?
“어.”

나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추측을 그대로 말하자면…….

“아무 생명이나 바치면 된다는 거구나. 맞지?”
- 정확해. 그렇게 내 주인들이 ‘만족’을 하는 사이에 나머지 일행은 이곳을 건너가면 돼. 다른 방법은 없어. 간단하지 않아?
“…….”

아니. 하나도 간단하지 않다. 이곳을 지나려면 누군가가 한 사람은 반드시 희생을 해야 한다는 건데. 그걸 어떻게 간단하다고 말하겠어.

‘어떡하지?’

나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아마 지금 내 눈빛도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의 곤혹스러움을 담고 있겠지.

“아무래도…… 안 되겠어. 돌아서 가자.”

제일 먼저 입을 연 아이는 조조바였다.

“고작 여길 지나가자고 누군가가 제물이 될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도 안 되고. 그냥 조금 멀리 돌아서라도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동감이다.

아무리 이곳이 유용한 지름길이라고 해도 그런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지. 게다가 여긴 너무나 황무지 그 자체라서, 제물로 던져볼 법한 벌레 한 마리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조조바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도 똑같았다. 다비만 빼고.

“저기, 그런데 이곳을 우회해서 가자는 의견 말이야. 나도 동의는 하는데, 조금 문제가 있어.”

문제?

어떤 문제?

다비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여기, 지도를 봐봐.”

다비가 숨을 푸우 내쉬며 지도를 내밀어서 한 지점을 짚어보였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야. 그리고 여기부터 여기까지.”

슥슥, 다비의 손가락이 제법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걸 보던 요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설마, 전부 플람족의 땅이라는 거야?”
“응.”

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에는 이렇게 나와 있어. 면적으로만 따지면 아마 레퓨지아의 수십 배는 족히 될 거야. 그런데 이 드넓은 곳을 우회해서 걸어가려면 지금 우리가 지닌 식량과 물로는 어림도 없을 거 같아.”
“…….”

현실적인 장벽이 눈앞에 쿵, 하고 놓였다.

생각해보니 진짜로 그랬다. 자이언트 러너 일족에게서 약간의 식량과 물을 나누어 받긴 했다. 하지만 저 넓은 곳을 빙 둘러서 걸어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열흘? 한 달?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식량도, 물도 어림조차 없겠다. 게다가 이곳 근방은 모조리 황무지라서 더욱 희망은 없어 보였다.

다비가 콧잔등을 잔뜩 찡그렸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곳을 섣불리 둘러서 가려다간 우리 전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물론 제물을 바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그러니 뭔가 다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아.”

마음에 드는 의견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현실적인 의견이었다. 나도, 다른 아이들도 다비의 지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쯧. 그럼 어떡해? 날아서라도 가야 하나?”

루이샤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살랑?

난처해하고 있는 우리 사이로, 자그맣고 새하얀 꽃잎 한 장이 떨어져 내려왔다. 벚꽃? 목련? 알 수 없었다. 다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우리 모두가 잠시 멍해져서 그 꽃잎을 쳐다보았을 뿐.

“뭐야…… 이거?”

요재가 멍하니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새하얀 자태의 궤적을 거슬러 더듬듯, 우리 모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격할 수 있었다. 어느새 우리 머리 위쪽 상공에 떠올라 있는 거대한 실루엣을.

‘하늘을 나는 땅…… 아니…… 거대한 나무?’

그것은 거대한 나무였다. 그냥 거대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것 같았다. 충분히 레퓨지아에 필적하는 크기로 보였으니까.

아니, 과연 저걸 그저 ‘나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저렇듯 거대한 나무가 어째서 허공에 떠 있는 건지, 우리 머리 위쪽 상공에 머물러 있는 건지 궁금증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이내 나무에서 분리되어 나온 수많은 꽃잎들이 우리를 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반가움을 느꼈다.

아, 날아서라도 건너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마당에 딱 맞춰서 나타나 준 반가운 비행체라니.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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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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