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자이언트 러너 (3) (21/38)


20화. 자이언트 러너 (3)
2023.04.0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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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라노스. 충실하고도 오랜 종복이여. 그대는 무슨 일로 이리도 급히 우리를 불렀지?”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프터 종족, 그라노스는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레퓨지아의 경비대원들이었다.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자들의 살벌한 사냥 도구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두 남자는 그 뒤에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두 늙은이, 보턴과 아크. 들리는 말로는 레퓨지아를 건설한 사람들이자 가장 존경받는 존재라지?

……사실은 위선자에 불과하면서.

그라노스는 내심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는 속내를 애써 감추고는 고개를 숙여 공경의 몸짓을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존경스러운 분들이시여.”
“형식적인 인사는 되었네. 우리를 여기까지 불렀으면 그 이유부터 밝혀 주시게. 우리가 예까지 직접 오는 일이 쉽지 않음은 그대도 익히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보턴이 물어 왔다.

그라노스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에 언질하셨던 소녀들의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뭐? 그게 사실인가?”
“예, 존경스러운 분이시여.”
“미사여구는 빼고 간단히. 설명부터.”
“알겠습니다.”

그라노스가 말했다.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제 몸의 새로운 재료로 쓰일 사냥감을 기다리며 숲을 거닐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에 한 무리의 소녀들을 발견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길을 잃고서 숲에 들어선 듯하였지요.”
“……몇 명이었지?”
“다섯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른데. 우리가 알려준 소녀의 무리는 넷이었을 터.”
“조금만 더 들어주시지요. 무리 중 하나는 레퓨지아의 사람이 아닌, 고양이의 형상을 한 애니말라(Animala) 족이었습니다.”
“그런가?”
“예.”
“계속.”
“감사합니다. 어쨌건, 저는 그 소녀 무리를 꾀었습니다. 순진한 것들이라 어렵진 않았지요. 그런데 그만 일이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어그러져? 어째서?”
“가증스러운 배신자 때문입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쯤 팔다리를 다 떼어낸 그 소녀들을 두 분께 바치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결론은, 그 아이들을 발견은 하였으나 포획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렇습니다.”
“그대는 지금 고작, 그걸 보고하기 위해 우리를 불렀단 말인가?”
“……예?”

그라노스가 흠칫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쿠웅!

“……!”

삽시간에 엄청난 무게가 그라노스의 전신을 짓눌렀다. 거대한 추? 혹은 다른 무언가가 몸 위에 얹어진 걸까.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신이 무거워졌다. 마치 주변의 모든 공기가 쇳덩이처럼 변하며 온몸을 누르는 것 같았다!

“크, 컥! 거…… 흑!”

버티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라노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신을 짓누르는 끔찍한 무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위쪽에서는 서늘해진 보턴의 물음이 떨어져 내려왔다.

“그라노스여. 나의 충실한 종복이여. 설마 그대는 나를 농락하려 함인가? 혹은 내게 더 제공할 정보가 있는가?”
“……그! 흡! 무, 물론, 예!”
“정말인가?”
“예! 예! 마, 맞습…… 크르흡, 맞습…… 니다!”
“좋아. 그대의 다음 말이 나를 더는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지.”

보턴이 손을 거두었다.

그라노스의 전신을 짓누르던 위세가 사라졌다. 그제야 간신히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가 허겁지겁 말했다.

“자이언트 러너! 그 소녀들이 자이언트 러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자이언트 러너? 평원을 내달리는 자들 말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하지만…… 사실입니다. 분명합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하면 말일세. 혹여 그들 중에 목걸이를 지닌 아이가 있었는가?”
“예? 목걸이라니요?”

그라노스는 멈칫했다.

뜬금없이 목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뒤이어 그라노스가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 그게…… 본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아!”

그라노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봤습니다! 그, 소녀들을 약으로 재웠을 때, 한 아이가 목에 걸고 있는 붉은 목걸이를 언뜻 봤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예! 제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라노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했다. 당시에 어느 아이가 걸고 있던 붉은 목걸이가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때 그 목걸이를 챙겨뒀어야 했던 건데, 제가 어리석어서 미처 그 생각을 하질 못했습니다. 그러니 기회만 주신다면 당장 그 소녀들을 찾아내서…….”
“아니, 되었네.”

보턴이 손을 저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라노스를 짓누르던 미증유의 힘은 발현되지 않았다. 늙은 지배자는 그저 입가에 뜻 모를 미소만을 희미하게 머금었을 뿐.

“그만하면 됐네. 가보게.”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 명을 어길 셈인가?”
“아닙니다!”

그라노스는 허겁지겁 일어나서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보턴의 눈동자에 경멸의 감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지금껏 말없이 서 있던 다른 지배자, 아크를 돌아보았다.

“어떤가. 자네가 듣기에는.”
“…….”

아크는 대답 대신 눈꺼풀만 한차례 지그시 깜빡였다. 보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마침내 찾은 듯하군. 마스터께서 오랜 세월 원하셨던 크림슨 하트를 말일세. 하면 응당…… 기쁜 소식을 전하여 드려야겠지.”

잠시 후.

두 지배자의 전언을 실은 까마귀가 머나먼 북쪽으로 날개를 펼쳤다.

***

“……어? 까마귀다.”

나는 깜빡 졸고 있었던 걸까. 불현듯 들려온 말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온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내 몸과 바닥이었다.

쿠두두두두두!

굉음이 귓가를 쉴 틈 없이 때렸다. 그제야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새삼 깨달았다. 그래. 나 자이언트 러너의 등에 타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벌써 며칠째 됐더라?

그때였다.

“다들 저거 봐봐. 까마귀야!”

다시금 들려온 말소리. 요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요재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손길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파아란 하늘. 끝없는 공간을 수놓듯 날아가는 까만 물체.

“저게 까마귀라고?”
“응!”

요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봤어. 저렇게 까만 몸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있다고 말야.”
“…….”

저렇게 하늘을 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듯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를 들고 있던 나는,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커다란 얼굴.

깊은 눈매.

거친 풍파를 헤쳐왔을 것임에도 어쩐지 험상궂음은 느껴지지 않는, 바위 같은 인상.
우리를 태워주고 있는 자이언트 러너 무리의 우두머리 아저씨였다. 그가 달리는 채로 물끄러미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어, 음, 왜 그러세요?”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우두머리 아저씨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쳐다보고 있으니 제법 부담스러웠다.

그때였다.

우두머리 아저씨가 말없이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내가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까마귀를 가리켰다. 날 보는 눈빛이 묻는 듯했다. 저 날짐승이 부러운 거니? 라고.

“으음, 조금은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혹시나 내가 우두머리 아저씨의 손짓을 잘못 이해한 건 아닐까. 그래서 엉뚱한 대답을 해 버린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우두머리 아저씨가 새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후회에 잠긴 내가 둘러댈 말을 꺼내려던 무렵이었다.

……빙긋.

말없이 푸근한 웃음.

그리고 다시금 질문을 던져오는 손짓.

우두머리 아저씨가 두 손을 모았다. 손가락을 나비의 날갯짓처럼 움직이며 고개를 갸웃. 무슨 뜻일까. 나는 그 물음의 의미를 곧 깨달았다.

“맞아요. 날아보고 싶죠. 가능하진 않겠지만요.”

나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살면서 저렇듯 자유롭게 날아볼 일이 있을까. 물론 없겠지만,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푸륵!

우두머리 아저씨가 돌연, 거센 투레질을 했다.

갑작스럽게 땅을 힘껏 박찼다.

콰두두두두두-!

“……!”

머리칼이 휘날리는 급가속!

나는 기겁해서 우두머리 아저씨의 등에 몸을 납작 숙였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갑자기 맹렬하게 달리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틈이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우리 모두를 실은 우두머리 아저씨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으니까.

“아…….”

땅이 멀어졌다. 하늘이 가까워졌다. 구름에 닿을 듯이. 바람이 볼을 스쳤다. 갑작스러운 해방감.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우두머리 아저씨가 착지했다. 그리고는 새삼스럽게 우리를 돌아보았다. 마치, 어땠느냐고 자랑스레 묻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 하…… 하…… 감사…… 합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맙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덕분에 우리 모두는 또 다시 도약하려는 우두머리 아저씨를 다급히 말려야 했다.

하지만 나도, 다른 아이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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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 아저씨가 다섯 차례나 더 하늘로 훌쩍 뛰어올라 주었음은.

어쩌면 또한, 그래서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두머리 아저씨와 헤어져야 할 장소가 다가왔을 때, 우리 모두가 아쉬움을 느낀 것은. 우두머리 아저씨도 우리를 향해 서글픈 미소와 손짓을 내보인 것은.

“……그래요. 알겠어요. 이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거죠?”

내 물음에 우두머리 아저씨의 커다란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듯, 자신의 무리를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나머지 자이언트 러너 무리 전체가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중이었다. 그래, 저들은 평생 정해진 코스를 계속 맴돌듯 달린다고 했던가. 그럼 여기가 저들이 반복하는 경로의 북동쪽 끝인가보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래요. 고마웠어요. 진심으로.”

내 말에 우두머리 아저씨가 푸근한 얼굴로 화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더 고마웠다’라고 말해주는 듯해서 잠시 뭉클했다.

우리는 우두머리 아저씨의 커다란 손을 잡고서 차례로 땅에 내려섰다. 며칠 만에 딛는 단단한 땅이 오히려 어색했다. 새삼 이제부터 우리 스스로 헤쳐가야 할 미래가 느껴졌다.

“조심히 가요!”

우리 모두는 남쪽으로 멀어지는 우두머리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두머리 아저씨도 우리를 몇 차례나 돌아보며 멀어졌다. 나머지 무리와 함께. 거대한 흙먼지를 피워내며. 우리의 눈인사가 닿는 지평선 너머까지.

그렇게 자이언트 러너 무리가 떠나갔다. 주위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갔네.”
“응. 그러네.”

며칠 만에 되돌아온 고요함. 그 느낌이 허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내색했다간 침울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는 헛헛함을 떨쳐내듯, 일부러 더욱 씩씩하게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뙤약볕 아래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황야였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잠깐. 저건 뭐지?”

세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 지평선 방향의 지면에 뭔가가 세워져 있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마침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었다.

“가보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차근차근 걷는 사이 지면에 세워진 것들의 정체가 확연히 보였다.

땅 곳곳에 세워진 새카만 기둥이었다. 비슷한 모양, 다양한 크기의 기둥 수십 개가 지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었다. 마치, 외부인의 접근을 경계하듯 울타리를 세워놓은 것만 같았다.

“저건 뭘까?”

다비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나마 우리보다 언노운에 해박한 루이샤나 조조바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살짝 긴장한 채로 기둥을 향해 다가갔다. 기둥 사이를 통과했다. 마침내 기둥 너머로 첫 걸음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조심해요, 피코!]
“……!”

난데없이, 다비가 짊어진 배낭 속에서, 웬 중성적인 기계음이 우리를 향해 외쳤다. 그 서슬에 우리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기계음?

배낭 속에서?

휴대폰은 전부 자이언트 러너들에게 줬는데?

그럼 우리한테 남은 기계는…….

‘iPS? 그게 말도 해?’

우리는 토끼눈을 뜨고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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