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자이언트 러너 (2) (20/38)


19화. 자이언트 러너 (2)
2023.03.3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이거 봐, 다들 이것 좀 봐봐.”

잔뜩 흥분한 요재가 돌아온 것은, 우리 일행을 떠나 흙먼지 무리에게 달려간지 채 3분도 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대박. 다들 빨리 와봐. 빨리.”

요재는 돌아오자마자 우리를 재촉했다. 어쩐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 머리칼 가득 뽀얗게 내려앉은 흙먼지를 털어낼 생각조차 않고서 다짜고짜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세나의 물음에 요재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양가죽이래. 이거 실제로 본 사람 있어?”
“…….”

당연히 아무도 없다. 적어도 나나 세나, 다비처럼 레퓨지아에서 지냈던 아이들은 전부 그렇다. 레퓨지아에서 양가죽이라는 건 교과서 속에서나 존재하는 물건이었으니까.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요재가 내미는 ‘양가죽’이라는 걸 쳐다보았다. 끈으로 단단하게 묶인, 기다란 꾸러미였다. 요재가 자랑스레 끈을 풀었다. 보기만 해도 폭신함이 물씬 전해지는 새하얀 털가죽이 자태를 드러냈다.

“우와.”

감탄사를 내뱉은 아이는 다비였다.
요재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거 푹신한데다가 크기도 제법 커서 밤에 따뜻할 거 같아. 나중에 같이 덮고 자자. 아, 그리고 이건-”

설마 또 뭔가가 있는 걸까.
이내 요재가 내민 것은 나뭇잎으로 감싸인 주먹만 한 덩어리였다.

“어? 단슈카다.”

덩어리를 보자마자 루이샤가 말했다. 혹시 아는 물건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루이샤는 나뭇잎 덩어리를 보자마자 입맛을 다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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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음식이야. 고기와 곡물을 반죽해서 구워 만든 거.”
“고기랑 곡물?”
“응. 나뭇잎 안쪽에 꽉꽉 채워져 있을걸.”
“정답.”

요재의 웃음이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글쎄. 좀 전에 내가 저기 흙먼지가 피어나는 남쪽으로 달려갔잖아. 그런데 거기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 엄청나게 커다랗고 네 발이 달린 사람들이 뛰어오고 있더라고.”
“네…… 발이 달린 사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무슨 사람이람. 혹시 위험한 괴물은 아닐까. 하지만 대답하는 요재의 얼굴에서는 위협을 느낀 사람의 공포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응. 사실 나도 처음엔 저게 뭔가 싶고 불안했거든? 그런데 나한테 달려들거나 하진 않는 거 있지.”
“너, 설마 자이언트 러너를 본 거야?”

요재의 말에 물음을 꺼낸 건 다름 아닌 조조바였다. 어느새 요재를 보는 조조바의 눈길은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조조바는 그들을 알아?”
“응. 대강은.”

조조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일족의 어른들에게 들은 거긴 한데…… 저들은 평원을 끝없이 뛰어다니는 종족이래. 정해진 구역을 따라서 평생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나. 생김새는 엄청 특이해서 허리 아래엔 말처럼 네 발이 달렸고, 그 위에 사람의 상체가 붙어 있다고 했어. 그들 중에 제일 거대한 이들은 몸길이만 10미터가 넘어간다고도 해. 작은 이들도 우리보단 훨씬 클 거고. 그런데 그들은…… 좀처럼 다른 종족과 소통을 하진 않는다던데. 너, 설마 그들에게서 이걸 받아온 거야?”
“응.”

요재가 씨익 웃었다.

“처음엔 괴물인가 싶어서 좀 무서웠거든?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진 않고 근처에서만 머물면서 나란히 달렸어. 속도를 맞춰서. 그랬더니 그들 중에 제일 큰 사람이 나보고 엄청 놀라더라?”
“놀랐다고? 그들이?”
“응. 나처럼 자신들과 나란히 달릴 만큼 빠른 사람은 처음 봤대. 자기들 종족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암튼 조금 반가워하는 기색이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기회다 싶었지.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데 그들이 내 휴대폰을 보고는 또 엄청 신기해하는 거야. 달라고도 하고.”
“그럼 설마?”

이야기를 듣던 나는 뭔가 짚이는 구석을 느끼며 혹시나 하고 물었다.

“네 휴대폰을 그들에게 주고 이것들을 얻어온 거야?”
“응. 정답. 어차피 레퓨지아 밖에서는 필요도 없어졌으니까. 나도 잠깐 고민은 했는데, 그래도 양가죽이랑 식량이 더 유용할 것 같기도 해서.”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부터 뭔가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래서 집중했다. 나머지 아이들이 양가죽과 단슈카를 놓고 들떠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금 들었던 자이언트 러너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저기.”

나는 마침내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 저들한테 태워달라고 하자.”
“……응?”

내 말에 아이들의 수다가 멈추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남쪽을 쳐다보았다. 남쪽에서부터 다가오는 흙먼지가 아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이제 곧 5분도 지나지 않아 자이언트 러너들이 근처까지 달려올 듯했다.

“우리 말이야. 지도가 가리키는 북쪽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까 저 자이언트 러너의 무리도 북쪽으로 달려가는 중인 거 같아. 즉, 우리랑 가는 방향이 같다는 거지.”

나는 보다 생각을 정리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게다가 아까 조조바가 그랬지? 저들은 평생 정해진 구역을 따라서 달리며 살아간다고. 그럼 지금 달려가는 경로가 항상 정해져 있던 길일 거니까. 저들한테 어디까지 어떻게 가는지도 물어볼 수 있을 거야.”
“잠깐, 그럼 저들을…… 레퓨지아의 버스처럼 이용하자고?”
“응.”

나는 다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진 구역을 일정하게 달리고, 그게 우리가 가는 방향과 비슷하고, 덩치가 커서 우리 모두를 태울 수 있고, 거기에 요재 덕분에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냈어. 우리가 가진 물건에 호기심과 호감을 보인다는 것도.”
“……우리 휴대폰 몇 개 남았지?”
“세 개.”

다비의 물음에 세나가 대답했다. 나는 요재를 돌아보았다.

“요재야? 한 번만 더 가서 저들과 협상을 해줄 수 있겠어?”
“어, 으음, 휴대폰 세 개로 우리 여섯을 태워달라고 말해보라는 거지?”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요재가 저들에게 호감을 산 것 같으니까.
나는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며 말했다.

“조심스럽게 물어봐. 그래서 성공하면 정말로 좋은 거고, 만약 저들이 화를 내면…….”
“화를 내면?”
“도망치자고.”
“…….”

요재의 안색이 살짝 핼쑥해졌다. 다른 아이들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나는 묘한 확신을 느꼈다. 그런 덕분일까. 요재가 머리에 앉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남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가장 큰 우두머리 자이언트 러너의 등에 흔쾌히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

***

투두두두두……!

지축이 몸을 떨었다. 수백에 달하는 거대한 생명체 자이언트 러너, 초원의 가장 역동적인 종족이 대열을 이루어 내달렸다.

그들의 발굽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의 선도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달렸다. 이미 수십 년째 달렸던 길을 따라 본능적으로. 더욱 빠르게 내달리겠다는 욕망에 온몸을 내어놓듯이.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경로 앞에 무엇이 있건 결코 달리기를 멈추는 경우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러했다.

“……!”

그래프터족 남자, 그라노스는 기겁해서 눈을 부릅떴다. 이내 그는 깨달았다. 저 무지막지한 자이언트 러너의 무리가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고 있음을. 이대로 어물쩡거리고 있다간 저들의 발굽에 밟혀 뼈조차 추려내지 못할 꼴이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젠장!’

상황을 깨달은 그라노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은신을 위해 살금살금 움직이던 태도를 즉각 버렸다. 살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한쪽으로 뛰었다. 자이언트 러너 무리의 이동 경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헉! 허억! 헉!”

열심히 달려는 보았지만, 생각만큼 속도가 나질 않았다. 등에 매달아둔 예비 팔다리가 덜렁거리는 까닭이었다. 거추장스러웠다. 그렇다고 당장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라노스의 가슴이 위기감으로 쿵쿵 뛰었다.

‘조, 조금만 더!’

삽시간에 다가오는 자이언트 러너의 선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그럼에도 아직 저 끔찍한 무리의 경로에서 완전히 벗어나질 못했다. 위기감이 가슴을 콱 죄어왔다. 그러다가 얼핏,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바위와, 그 아래에 자연적으로 생겨나 있는 움푹한 구덩이 암굴이었다.

“……그읏!”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라노스는 바위 아래 암굴로 몸을 던졌다. 웅크렸다. 그 직후, 자이언트 러너 무리가 위로 지나갔다.

콰투두두두두두!

압도적인 굉음이 사방을 수놓았다.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그 전에 난폭한 진동 때문에 전신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거대한 발굽이 근처를 수백 번쯤 때렸을까.

갑작스럽게 평화가 찾아왔다.

“…….”

실눈을 뜬 그라노스는 제일 먼저 자신의 팔다리부터 확인했다. 멀쩡했다. 등판에 매달아 놓은 예비용 팔다리도 전혀 다친 곳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욕지기가 나왔다.

몸을 일으킨 그는 북쪽을 쳐다보았다. 자이언트 러너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욱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끈질기게 미행하던 소녀들. 사냥감을 안타깝게 놓쳤기 때문이었다.

문득, 얼마 전의 밤이 떠올랐다.

가문비나무 숲에서 길을 잃은 한 무리의 소녀들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어찌나 기쁘던지. 모처럼의 만만하고 싱싱한 사냥감이었다. 자신의 몸에 붙여서 써먹을 팔다리와 얼굴, 가죽을 제법 많이 얻을 수 있을 듯하여 얼마나 설렜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망할 배신자, 조조바…… 그 가증스러운 것 때문에.’

탐스러운 사냥감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점액안개에게 당할 뻔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집요하게 소녀 무리의 흔적을 추적했다. 마침내 근처까지 접근했다. 저들을 어떻게 제압할까 즐거운 고민을 품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쯧.”

설마 자이언트 러너의 등에 올라탈 줄이야. 저 배타적인 평원의 달리기 종족이 소녀들을 흔쾌히 받아들일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래서 더욱 아쉽고, 화가 났다.

‘저것들을 잡기만 했으면…….’

싱싱한 팔다리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거기에 더하여 두둑한 포상도 얻었을 터인데.

그라노스는 안타까움을 곱씹으며 걸음을 돌렸다. 남쪽으로 사흘 동안 꾸준히 걸었다. 그곳에 그가 오랜 시간 모셔왔던 높은 분과의 접선 장소가 있었다.

황량한 계곡 가장 깊은 곳. 오랜 세월 햇볕조차 들지 않아 이끼만 무성하게 버려진 제단. 그곳에 도착한 그라노스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안심하며 수술용 칼을 꺼냈다.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흐르는 피를 제단에 뚝, 뚝,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기다렸다.

기다림이 이틀째 이어졌을 때, 연락을 받은 ‘높으신 분’들이 마침내 왔다.

“그래, 그라노스. 충실하고도 오랜 종복이여. 그대는 무슨 일로 이리도 급히 우리를 불렀지?”

레퓨지아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한 두 남자. 반듯하게 주름진 고결한 낯빛과 눈매. 수십 년간 모두의 존경을 두루 받아온 존재들.

레퓨지아의 지도자인 보턴과 아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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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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