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자이언트 러너 (1)
(19/38)
18화. 자이언트 러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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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자이언트 러너 (1)
2023.03.2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언노운.
레퓨지아 밖에 펼쳐져 있는, 끝없는 미지의 땅.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당시엔 배우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라 여겼던 것도 같다.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가며 레퓨지아 밖으로 나올 일도, 언노운을 걷는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우리가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쳐다보게 될 줄도 몰랐고 말이야.”
내 말에 제일 먼저 웃은 아이는 요재였다. 어젯밤, 힐러들의 동굴을 벗어나 언노운으로 나온 뒤부터 요재의 기분이 부쩍 좋아 보인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딱 한 사람, 조조바만 빼고.
“저기, 그게 뭐야?”
조조바가 특유의 단발을 이마 뒤로 쓸어넘기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조조바의 시선은 우리 모두가 들여다보고 있던 지도를 향해 있었다.
“아, 이거? 지도라는 거야.”
“지도?”
“응. 주변의 지형이나 지리를 그려서 표시해 놓은 거. 이게 있으면 어디에 있든지 목적지까지 수월하게 찾아갈 수 있어.”
“그래?”
내 말에 조조바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지도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가 우리가 있는 곳이야.”
“그럼, 그 옆의 작은 숲이 설마?”
“응. 생각하는 게 맞을 걸.”
“…….”
작은 가문비나무 숲.
지도 위의 그림을 보는 조조바의 눈길이 깊어졌다. 아마 자신이 평생 살아온, 어쩌면 자신에게는 세상 전부였을 숲이 지도 속의 자그마한 일부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한 거겠지.
나는 조조바가 느끼고 있을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은 나도 저랬다. 레퓨지아가 세상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여기. 작은 섬이 보여?”
“응. 혹시 이 섬으로 가려는 거야?”
“맞아. 여기가 ‘푸른 반딧불이’의 섬이래.”
“푸른…… 반딧불이의 섬?”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를 잠시 돌아보았다. 다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조조바에게 우리 일행의 목적을 알려주는 사람이 내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 겪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말야, 이곳 레퓨지아 바깥, 그러니까 언노운에는 푸른 반딧불이라는 게 있는 거 같아. 처음엔 마냥 예쁜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좀 무섭더라? 그래서…….”
“잠깐. 너희, 푸른 반딧불이를 잘 몰랐어?”
“……응?”
나름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하며 설명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조조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묘한 시선을 보내어 오고 있었다.
마치,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혹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왜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느냐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다.
“이상하네. 너희가 지냈다는 레퓨지아에는 푸른 반딧불이가 없었어?”
“어? 으, 응.”
“그래? 거긴 좋은 곳이었구나.”
“…….”
처음 알았다. 우리가 당연한 듯이 살아온 레퓨지아가 다른 이들에게는 부러움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조바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너희도 이젠 겪어봐서 알겠지만, 여긴 어딜 가나 푸른 반딧불이가 있어. 원래부터 그랬어. 내가 태어나던 때부터 말야. 그래서 사실…… 나한텐 푸른 반딧불이가 낯설거나 신기하진 않아. 그렇다고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말야. 여기, 이렇게.”
조조바가 손을 뻗었다. 한차례 허공을 세게 휘저었다. 그러자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푸른 가루가 언뜻 보였다.
조조바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봤지? 푸른 반딧불이 가루야. 사실 푸른 반딧불이는 어디에나 있어. 여기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공기에도 푸른 반딧불이 가루가 아주 미세하게 섞여 있거든.”
“……정말?”
“응.”
요재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조조바.
“그래서 푸른 반딧불이가 위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딧불이 가루와 계속해서 접촉을 하게 되고, 가루에 중독이 되니까. 한번 중독되면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니까.”
“통제라니?”
내 물음에 조조바가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힘을 얻고, 그 힘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게 돼. 예를 들자면 우리 그래프터 일족이 그랬어. 다들 봤지? 우리 일족이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는지를.”
“…….”
우리는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타인에게서 잘라낸 팔다리를 등판에 주렁주렁 붙이고 있던 모습. 그 어떤 단어로도 감히 표현할 수가 없던 그 기괴함을 어찌 말할까.
“그래. 기괴하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일족도 원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어. 한때는 뛰어난 의술로 타인을 보살폈고, 덕분에 존경심이 담긴 ‘힐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해. 그런데 푸른 반딧불이가 곳곳에 나타나고부터…… 모든 게 바뀐 거야. 너희가 본 모습으로.”
“그 말은, 푸른 반딧불이에 중독된 너희 종족 사람들이 욕망에 휩싸여서 의술을 악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야?”
“응. 바로 그거야.”
내 추측에 조조바의 씁쓸한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다들 욕망에 휩싸였지. 남을 위해 쓰던 메스를 자신만을 위해 휘두르기 시작했어. 그래프터라면 누구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타인의 신체를 도려낼 수 있고,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그 자리를 봉합할 수 있는데…… 그걸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만 쓰게 된 거야. 푸른 반딧불이의 달콤한 힘에 중독돼서, 자신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채로 말야.”
“거의…… 노예 같잖아, 그건.”
“맞아, 조안 네 말이. 부인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어쨌건, 그게 바로 푸른 반딧불이의 무서움이야. 사람을…… 더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거. 그런 욕망과 충동을 무한하게 부추긴다는 거.”
“그럼, 너는? 계속 그 유혹을 참은 거야?”
“응.”
조조바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
“솔직히 나도 종종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영원히 늙지도 않고 살아가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혼자 수술 연습을 해보기도 했어. 얼마 하지도 않고서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고 섬뜩해져서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
나는 조조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맑게 웃는 아이도 가끔은 그런 유혹을 느낄 정도라니. 푸른 반딧불이 가루가 그만큼 무서운 건가 싶었다.
하긴. 우리가 레퓨지아를 떠나던 날에도 그랬지. 그때 반딧불이와 접촉했던 여자아이는 무사한 걸까. 모르겠다.
“그럼 우리도 반딧불이 가루 때문에 이상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는 건가?”
가만히 듣던 다비가 질문했다.
조조바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그런데 다들 지금까지 스스로한테서 느껴지는 이상한 생각이나 충동 같은 건 없었어?”
“생각이나 충동? 어떤 거?”
다비의 되물음에 조조바가 말했다.
“평소엔 전혀 하지 않았던, 자신이 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던 끔찍한 충동 같은 것들 말야.”
“끔찍한 충동이라면…… 으음, 있는데?”
가만히 듣던 요재가 불쑥 말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눈을 조금 휘둥그레 뜨며 요재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요재가 씨익 웃었다.
“야식.”
“…….”
“나 원래는 야식 별로 안 좋아했거든. 배 부른 채로 자려고 누우면 속이 더부룩해져서. 그런데 레퓨지아에서 나온 뒤로는 야식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어.”
“그건 그냥 배가 고파서 그랬던 거 아냐?”
“……그런가?”
세나의 말에 요재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조조바는 여전히 웃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데, 그건.”
조조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야식 그런 거 말고. 다른 충동은? 느껴진 적이 없어?”
“응.”
요재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나나 다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조조바가 난처한 듯 웃었다.
“너흰 참 신기하구나? 그거 불가능한 건데.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 공기에는 이미 푸른 반딧불이 가루가 희미하게 섞여 있어서. 호흡을 하는 이상 무조건 시시각각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혹시 너희 체질이 좀 특이한 걸까?”
문득,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생각해 보니 그래. 다비는 작은 소리도 잘 듣고. 심지어 동굴 안쪽까지 텔레파시도 가능하고. 요재는 바람처럼 빠르게 뛰어다니기도 했고. 세나도 자욱한 안개 건너편은 물론이고 동굴 벽 너머를 투시하기까지 했잖아?”
내 말에 세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새삼스러운 확신이 들었다. 다들 특이한 능력을 지니게 된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퓨지아에 있던 동안에는 자각하지 못하던 자신의 모습들을 찾아가고 있는 건지도.
그리고 어쩌면…….
“조조바 네 말대로 우리가 조금 특이해서 푸른 반딧불이 가루에 영향을 덜 받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면 레퓨지아를 빠져나오던 날에도 그랬다. 공기 중의 희미한 가루 정도가 아니라,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푸른 반딧불이를 보기까지 했다. 분명 제법 많은 가루를 마셨겠지.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나한테만 아무런 특기나 능력이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문득 느껴진 자괴감을 얼른 털어내며 말했다.
“어쨌건 가다 보면 알겠지. 어차피 푸른 반딧불이 가루는 지금도, 나중에도 계속 마실 거니까. 그런 거지?”
“뭐, 대강은?”
조조바가 싱긋 웃으며 지도로 눈길을 던졌다. 우리는 어렵사리 지도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아냈다. 자연히 갈 길도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하루 내내 북동쪽으로 걸었다. 얼마나 걸은 건지는 모르겠다. 쉬다가, 걷다가, 배가 고프면 다시 쉬며 허기를 채웠다. 다행히 동굴 속의 힐러들이 조조바에게 챙겨준 식량이 넉넉했다. 하지만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다리가 아픈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라는 고민을 다들 품을 무렵이었다.
쿠두두두두두……!
마침내 드문드문 놓인 숲마저 전혀 보이지 않는 평원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다들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빵으로 배를 채우려는데, 웬 땅울림이 희미하게 지축을 흔들었다.
어디서?
“저쪽인 거 같은데?”
방향을 처음 짚어낸 아이는 루이샤였다. 우리 모두는 토끼눈을 뜨고서 남쪽을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멀리 남쪽 지평선에 알 수 없을 흙먼지가 피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점점 커져 갔다.
그 뜻은 명확했다.
“이쪽으로 오는 거 아냐?”
내 말에 모두가 굳었다. 확실했다. 흙먼지가 점점 커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심지어 땅울림도 아까보다 커졌다. 어느새 땅을 딛고 있는 발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잠깐 내가 보고 올게.”
숨어야 하나 고민이 들던 무렵, 요재가 나섰다. 몸을 이리저리 풀더니 남쪽으로 달려갈 채비를 했다.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도망치면 되지. 나 빠르잖아.”
내 걱정에 요재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다가오는 남쪽으로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때부터였다. 우리는 초조한 심정으로 요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요재는 금방 돌아왔다. 그리고 어쩐지 흙먼지가 뽀얗게 덮인 머리칼을 하고서는-
“대박. 다들 빨리 와봐. 빨리.”
우리를 재촉했다.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엉겁결에 요재의 재촉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곧, 나는 깨달았다. 남쪽에서부터 지축을 흔들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거대한 존재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를.
‘저거 완전, 버스잖아?’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