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평범한 소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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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평범한 소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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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평범한 소망 (2)
2023.03.1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어?”
별안간 들려오는 소리. 다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일까. 다비가 멍한 말투로 뜻밖의 말을 꺼낸 것은, 슬며시 걱정이 고개를 치켜들려던 무렵이었다.
“어째서 이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방금 내가 한 이야기가 텔레파시처럼…… 조조바한테 전해진 거 같아.”
“…….”
우리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다비가 농담을 할 리는 없는데. 그런데 텔레파시라니.
다비가 떠듬떠듬, 계속 말했다.
“어, 나도 알아. 내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거. 그런데 방금 말이야. 조조바가 내 말에 ‘대답’을 했거든.”
정말일까.
텔레파시라니.
나는 다비의 표정을 살폈다. 절대로 농담을 꺼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마 요재도 나와 비슷하게 느낀 듯했다.
“대답이라니, 걔가 뭐라고 했는데?”
요재의 물음에 다비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긴…… 숫자만 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정말?”
“응. 나도 잘못 들은 줄 알았거든. 당연히 그렇잖아? 텔레파시라니, 말도 안 되잖아. 그런데…… 내가 대답이 없으니까, 한 번 더 말을 걸어왔어. 조조바가.”
“혹시 그럼 지금도 말이 통해?”
나도 물었다. 문득 희망의 문틈이 살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혹시 전할 말이 있는 거야?”
“응.”
꼭 전해주고 싶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힘겨운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고 있을 조조바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가자.”
솔직한 마음을 꺼냈다. 내 진심이 조조바에게 전해지면 좋겠다. 누구보다도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조조바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도 좋다. 보석처럼 화려한 희망의 조각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디든 말이야. 어디로든. 같이 가자. 물론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게 될지는 나도 몰라. 장담 못해. 그치만, 같이 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일들이 생길 거야. 네가 하고 싶은 일들도 생겨날 거고.”
그렇게 되면 좋겠다.
온통 고요 속 세상에 갇힌 조조바에게 바라는 일이 생기면 좋겠다.
“어려운 날도. 기분 좋은 날도. 힘든 날도. 조금 싱숭생숭할 때도. 평범해서 지루한 날도. 전부 같이 있어줄게. 그러다가 네가 하고 싶은 일들, 바라는 일들이 생기면 들어줄게. 거기에 얹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앞으로 바라는 것들도 말해볼게. 그렇게…… 너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 오래. 같이 말이야.”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부디 그러길 바랐다.
진심이었다.
나는 다비를 바라보았다. 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았다. 조조바를 향해 내가 건넨 말들을 전하는 걸까. 혹은 대답을 들으려 귀를 기울이는 걸까.
곧, 다비가 눈을 떴다.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느냐는데?”
조금은 난감한 듯한 다비의 물음.
나는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그건 나도 몰라. 확신 못해.”
이게 내 가장 솔직한 대답이다. 나는 생각을 접어두었다. 오직 내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담아내고, 건네려 애를 썼다.
“나도 그랬어. 평생 살아오던 안전한 울타리 밖을 벗어난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이제부터, 아니, 당장 내일도 무슨 일이 있을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낯선 세상에 던져지면서 무섭고, 불안했으니까.”
레퓨지아의 풍경이 떠올랐다.
지금껏 날 안아 주었던 요람이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곳. 그곳은 굴레 같은 새장이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감옥이었다.
원치 않게 그곳에서 나와야 했다. 사실은 지금도 무섭고 불안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짐작되지 않는 내일의 불확실함이…….
“설레. 참 이상한 일이지? 맞아.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그런데 이제 조금은 알겠어. 내일을 모르니까. 어제의 내가 그랬으니까. 오늘, 이렇게 널 만나게 될 줄도 몰랐으니까.”
어둑한 가문비나무 숲에서만 살아왔을 조조바의 어제가 그랬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이곳을 벗어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다.
손을 내밀고 싶었다.
조조바의 내일이 바뀌길 바랐다. 조조바도 스스로 모르고 있을 그 언젠가 미래의 소망을, 해보고 싶은 순간을, 그 날들로 이어질 길을 함께 걷고 싶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가자.”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간절한 마음으로 다비를 바라보았다. 다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시간이 한참 이어졌다.
그동안 내 가슴은 몇 차례나 뛰었을까. 설마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조조바는 괜찮은 걸까.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아직도 돌아오는 답이 없는 걸까. 이상했다. 다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니, 어느샌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저기, 미안한데…… 뭔가, 조금…… 이상해.”
“응? 뭐가?”
“텔레파시가…… 끊긴 거 같아.”
“어?”
나는 깜짝 놀랐다. 하필이면 지금 텔레파시가 끊기다니, 어째서? 다비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왜 이런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조금 전부터 대답이 없길래 조조바에게 다시 말을 걸어봤거든.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어. 그냥, 없어진 것처럼…….”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은 그저 착각일까. 혹은, 불길한 예감에 고개 흔들어 저항하려는 내 마음의 소리일까.
나는 다비에게 물었다.
“없어진 거 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그냥…… 정말로 뚝 끊어지듯이…….”
다비도 많이 당황한 듯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조조바가 없어졌다니.
어디로?
자꾸만 떠오르려는 답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불길한 생각에게 고삐를 내어주면, 그다음부터는 더욱 불행한 일들이 꼬리를 물듯이 뒤따라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제발.’
나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꼭 쥐었다. 조조바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그저 무사하기를. 그렇게 얼마나 한참을 기다렸을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을까.
돌연한 굉음이 들려온 것은, 초조함을 못 이긴 우리가 절망적인 시선을 나누려던 순간의 일이었다.
……쿠르릉!
낮은 울림이 땅을 흔들었다. 우리는 흠칫 놀랐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굉음이 들려온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곳에 그 아이가 있었다.
“조조바?”
기적처럼 열린 동굴의 또다른 출입구.
그곳에 서 있는 조조바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뛰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도 같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조바를 향해 반가운 걸음으로 달렸다. 그러나 막상 조조바에게 다가갔을 때는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과연, 이럴 때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는 걸까.
괜찮아?
혹은, 아픈 데는?
그도 아니라면, 어떻게 나왔어?
“…….”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굳이 저런 말들을 꺼내야 하나 싶었다. 어떤 때는 말하지 않는 것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마음을 전하곤 하니까. 아마도 지금이, 그런 순간인 듯하니까.
그러는 한편으로는 나는 뒤늦게야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조바가 무사하면 좋겠다고,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꺼냈다.
그런데 지금 막상 조조바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까…….
‘낯뜨거워. 그걸 말하자마자 이렇게 빨리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괜히 손발이 오글거리는 것 같다. 간지러워서 미치겠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나 싶은 후회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제발, 조조바가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내 바람(?)은 조조바가 꺼낸 첫마디의 미소 속에서 단숨에 날아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가자고 했던 게…… 너지?”
“…….”
응 아닌데.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조금 전보다도 얼굴이 더욱 빨개져 버렸으니까. 이러면 뒤늦게 시치미를 떼고 싶어도 안 되잖아.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붉어진 얼굴로 미간만 살짝 찡그렸다.
조조바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그런…… 걸까.
그래서 조조바가 저런 얼굴로 웃는 걸까. 아까까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빛으로. 예전 가득하던 쓸쓸함 대신에 한결 후련해진 눈매로. 그게 내 덕분인 걸까.
“이젠 괜찮아?”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제일 무난한 질문을 건넸다. 조조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덕분에.”
“…….”
“많이 아팠어. 설마 그 정도로 아플 줄은 몰랐어. 이대로 죽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래서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어. 여기서 다 끝내면…… 그다음엔 안 아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괴로워하는 날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힐러님들께는 죄송했지만, 정말로 그랬어.”
얼마나 아팠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을까.
조조바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였어. 너희가 나한테 말을 건넨 게. 너였지? 내 머릿속에 직접 말을 전해준 아이가. 고마워. 진심으로.”
“어, 으응.”
다비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조조바가 우리를 차례차례 돌아보며 눈을 맞추었다.
“그런데 너희는 다르더라. 난…… 그래. 구구절절 말하진 않을게. 같이 갈래, 너희랑. 그리고 이건 선물. 너부터.”
“……어?”
조조바가 불쑥 다가왔다.
내가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더니 손바닥을 살펴보아 주었다. 그런 내 손바닥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까진 생채기가 새겨져 있었다.
“아읏.”
자각과 함께 뒤늦은 따가움이 몰려왔다. 언제 다친 걸까. 나도 모르던 상처를 조조바는 어떻게 척 알아낸 걸까.
내가 의문을 품는 사이, 조조바가 허리춤의 작은 가방에서 물약과 반창고를 꺼냈다. 조심스레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다음은…… 넌 이름이…….”
“세나.”
“응, 반가워. 어깨 좀 보여줄래?”
“…….”
“멍들었잖아. 약 발라줄게. 멍이 빨리 풀릴 거야.”
조조바의 말에 세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세나가 보여준 어깨에는 정말로 손바닥만 한 멍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아까 삼륜차가 함정을 피하던 때에, 뒤쪽 짐칸이 크게 덜컹거리는 와중에 어딘가에 부딪힌 거겠지.
그런데 정말로 조조바는 어떻게 세나의 어깨가 아프다는 걸 알아낸 걸까.
“나도 솔직히 이유를 다는 모르겠어. 그냥, 느껴져.”
우리의 의문에 찬 표정을 알아챈 걸까. 조조바가 살짝 수줍게 웃었다. 세나의 어깨에 시원한 향이 나는 물약을 바르며 말했다.
“그냥, 정말로 그냥 느껴져. 거기 고양이를 닮은 친구는, 으음, 발목을 살짝 삐었고. 나한테 말을 전해준…… 다비였지? 넌 다행히 멀쩡하고. 그리고…….”
“요재.”
“응, 요재. 너는 약간 감기 기운이 있는 거 같은데. 맞지?”
“……어! 맞아!”
“맞췄네. 다행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냥 느껴져. 바라보고 있으면 그래. 아마도 이건…… 저분들이 내게 놓아준 백신 덕분인 거 같아.”
수줍은 미소의 끝자락에서 조조바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동굴 출입구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들. 초췌한 모습으로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들. 초라하게 부패하고 있는 육신.
저들이 조조바가 말한 ‘힐러’들일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지치고 부패한 육신과 달리, 힐러들의 눈빛은 너무나 생생했다. 모두가 흐뭇한 눈길로 조조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향한 조조바의 얼굴에도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저, 아무래도 이젠 가봐야 할 거 같아요.”
미안함 때문일까.
혹은 고마움일까.
조조바의 눈매가 그렁그렁해졌다.
힐러들의 눈가도 조용히 젖어들었다.
“다 들었단다. 가렴.”
“네, 정말로…….”
“감사의 말도, 사죄의 말도, 그 어떤 말도 필요가 없단다, 아이야. 너는 네 의지로 결정을 하였고, 이겨냈고, 앞으로 갈 길을 정하지 않았니? 게다가 어차피 네 능력으로는 우리 곁에 남아보았자 할 일이 없어.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은 치유될 수 있는 종류의 병도, 상처도 아니니까. 이건 우리의 온전한 업보란다. 그러니 미련 없이 가려무나. 우린 그런 너를 그저 응원할 따름이니.”
가장 나이가 많이 보이는 힐러 할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나올 때처럼 조용히 물러났다. 곧이어 동굴 출입구가 굉음과 함께 닫혔다. 다시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조조바는 그 앞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는 조조바를 기다려 주었다.
그동안 나는 동굴 안쪽에 남은 힐러들을 생각했다. 어두운 동굴 속. 어느샌가 거울을 보아도 자신이 아닌 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 그 속에서 긴긴 시간 동안 서서히 스러져가듯 살아갈 힐러들의 남은 삶은 어떤 걸까.
또한,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조조바를 세상으로 내보낸 걸까.
후회?
반성?
모르겠다.
감히 짐작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동굴을 바라보는 조조바의 어깨가 몇 번인가, 흐느낌처럼 들썩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조조바가 우리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약속했던 그대로, 예전과 전혀 다른 내일을 조조바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푸른 반딧불이가 넘실대는 미지의 땅 언노운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