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망토를 입은 남자 (1) (13/38)


12화. 망토를 입은 남자 (1)
2023.02.1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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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우리를 환영해 줄까.

아직은 모르겠다. 더 걸어봐야 알 것 같다. 그것이 내가 반나절이 넘도록 열심히 걸으면서 내리게 된 결론이다.

“다리 아파아.”

멍하니 걷던 도중이었다. 뒤에서 들려온 푸념에 나는 불현듯 상념에서 깨어났다. 돌아보니 요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저기 있잖아, 우리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어떨까?”
“응, 아니야. 아직은 안 돼.”

요재의 애타는 외침을 한 방에 잘라낸 건 다비였다. 요재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왜애?”
“10분 전에도 쉬었잖아?”
“…….”
“아까도 너 똑같이 말했다?”
“…….”

다비의 단호한 대꾸에 요재의 요청은 일격에 침몰당하고 말았다. 내심 요재를 응원하던 나는 아쉬움 섞인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다리가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힘들어.’

솔직히 힘들다.

이렇게 끝없이 걷는 것도 힘들고, 갑자기 바뀌어 버린 내 하루도 받아들이기가 버겁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레퓨지아에 있었으니까. 제법 투덜거렸을지언정, 그건 안전한 담벼락 안쪽에서의 투정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어제 레퓨지아를 벗어난 뒤부터, 이전까지 누렸던 내 일상이 사라졌다.

아침이면 당연한 듯이 눈을 뜨고, 학교에 가고, 답답한 세상에 불만을 느끼다가, 낡은 도서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던 하루가 이제는 머나먼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대신 지금처럼 온종일 걷고, 또 걷는 하루만이 나의 오늘이 되었다. 어쩌면 내일도, 모레도, 그 후로도 계속 이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말이야.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사실 별생각 없이 꺼낸,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어, 아마도?”

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뭔가, 어쩐지 자신이 없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더니 다비가 세나 쪽을 돌아보았다.

“세나가 방향을 잘 잡고 있을 거야. 이 지도는 세나네 할머님이 그리신 거잖아?”
“난 너 따라가고 있었는데.”

세나가 즉시 대답했다.

다비의 웃음이 쩌적, 굳었다.

“응? 세나야? 난 너 따라가고 있었는데?”
“난 다비 네가 방향을 잡고 있는 줄 알고…….”
“그랬어? 난 네가 그런 줄…….”
“응. 나도 네가 그런 줄…….”
“…….”

서로를 마주보며 잠시 말을 잃었던 다비와 세나가 멋쩍게 웃어 버렸다. 그 틈을 노린 요재의 항의가 즉각적으로 빗발쳤다.

“그럼 우리 잠깐만 쉬자, 응?”
“찬성!”

내내 요재와 나란히 걷던 루이샤도 대뜸 투덜거렸다. 그런데 루이샤의 투덜거림은 요재를 향하고 있었다.

“얘 엄청 지쳤나 봐. 불편해 죽겠어, 아주.”
“…….”
“자꾸 헥헥대면서 나한테 매달리는 거 좀 봐. 자꾸 그러면 나 고양이로 변신해서 너한테 업혀 버릴 거야?”
“…….”

졸지에 루이샤 전용의 탈것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요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우리 모두는 그 모습에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알았어. 그럼 잠깐만 숨 좀 돌리자. 지도도 다시 살펴보고.”
“그럼 저쪽 숲은 어때?”

루이샤가 귀를 쫑긋거리며 한쪽을 가리켰다. 마침 그곳에 자그마한 숲이 보였다.

“너희 말이야. 레퓨지아 보안 요원들이 장벽 바깥까지 쫓아왔다며. 이렇게 확 트인 곳보단 저런 곳이 쉬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언제 다시 보안 요원들과 맞닥뜨릴지 모르니까. 점액질 안개 괴물도 신경 쓰이기도 하고.

다행히 숲은 보기보다 가까웠다. 우리는 가문비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여전한 문제가 있음을 다 함께 깨달아야 했다.

“우리가 걷는 방향이 지도에서 어느 쪽인 걸까?”

세나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은 우리가 지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당연했다. 일개 도시인 레퓨지아에선 지도를 볼 일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지도를 보는 법도 배우지 못했으니까.

“혹시 루이샤는 몰라?”

레퓨지아 밖에서 지낸 루이샤는 그래도 다르지 않을까. 나는 문득 떠오른 기대감에 루이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루이샤는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기만 했다.

“몰라.”
“왜?”
“모르니까 모르지.”
“그래도 넌 레퓨지아 밖에서 살았잖아? 점액질 안개 괴물의 정체도 알고 있었고.”
“그거랑 지도 보는 방법은 아무 상관이 없거든.”
“그래?”
“응.”
“그럼 설마…….”

문득 짚이는 게 떠올랐다. 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루이샤를 바라보았다.

“너도 혹시 여행은 처음인 거야?”
“아니거든!”
“…….”

처음인 거 맞구나.

나는 결국 깨달았다. 우리 모두가 여행 초보인 거다. 당연히 지도를 볼 줄도 모르고, 길을 찾을 줄도 모르고.

“혹시 이 숲이 지도에 나와 있진 않을까?”

요재가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레퓨지아 근처에 표시된 숲이 몇 군데가 있긴 했지만, 그중에 어느 숲이 우리가 있는 가문비숲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럴 때 iPS가 제대로 작동되면 참 좋을 텐데.”

다비가 전원이 꺼진 iPS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사위가 붉어졌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벌써 저녁이 오는 걸까. 불현듯 어깨가 으슬으슬해졌다.

“저기 혹시, 불 피울 줄 아는 사람?”
“…….”

역시 아무도 없다.

모두가 막막해하는 사이, 노을의 마지막 자락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어둠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딱 달라붙어서 어깨를 움츠리게 되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워서였다.

이런 게 추위라는 걸까.

어젯밤엔 이렇지 않았다. 점액 안개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 난리를 다 겪고 나니 금방 아침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저 차가운 흙바닥에 웅크린 채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추웠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레퓨지아는 24시간 날씨와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곳이었으니까.

새삼 레퓨지아가 얼마나 쾌적한 곳이었는지 알겠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저기, 나처럼 야영에 환상 다 깨진 사람……?”

추위로 달달 떨리는 목소리.

다비였다.

요재의 대답이 즉시 들려왔다.

“응, 나. 설마 이럴 줄은 몰랐어. 옛날에 야영이라는 걸 하던 시대에는 낭만도 많았다고 그랬는데.”
“누가?”
“선생님이.”

거기까지 듣던 나는 무의식중에 불쑥 말했다.

“정작 선생님도 야영은 해본 적 없는 거 아니었을까.”
“……푸핫.”

속았네, 속았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즐거워서? 물론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불안감에 사로잡힐 것 같아서였다. 설마하니 해가 진 이후의 숲이 이렇게나 칠흑같이 어두울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배고파…….”

요재의 중얼거림이었을까. 혹은 누군가의 꼬르륵거림이었을까. 생각해보니 레퓨지아를 떠난 뒤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춥고, 배고프고, 어둡고. 졸음이 몰려왔다. 그때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흔들며 눈을 뜨고 있으려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이봐요.”

누군가가 속삭였다.

요재? 다비? 세나? 아니면, 루이샤?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혹은, 꾸벅꾸벅 잠결에 가문비 가지를 스치는 밤바람 소리를 착각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봐요? 처음 보는 여행자들?”
“…….”

착각이 아니다. 친구들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다. 나는 섬뜩한 느낌에 잠이 확 달아나서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그대들, 혹시 길을 잃었나요?”
“…….”

저만치 멀리, 아니, 너무 멀지는 않은 딱 열 걸음 정도의 거리. 가문비 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 누군가가 서 있었다. 레퓨지아의 보안요원? 아니었다. 그들은 저런 망토를 걸치진 않았으니까.

“누구……세요?”

나는 무의식중에 어깨 가득 힘을 주며 물었다. 망토를 걸친 사람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소리 없이 웃는 걸까.

“숲 근처에 사는 사람이랍니다. 모처럼 밤 산책을 나왔다가 그대들을 발견한 거고요. 그런데 그대들은 어쩌다가 이런 숲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거죠? 여긴 무척 춥고 위험한 곳인데.”

망토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그가 나직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마침내 그가 다섯 발짝 앞까지 다가왔을 때, 온전한 달빛이 그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었다.

“아…….”

아름다웠다. 걸친 망토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안감은 폭신해 보였다. 망토 아래로 드러나는 부츠는 더없이 단정했다. 다만 얼굴을 완전히 볼 수는 없었다. 망토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망토 아래에 드러난 우아한 입매로 다정하게 웃었다.

“아, 혹시 제가 두려운가요? 이해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다가왔으니 그렇게 여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오해는 갖지 말도록 하죠. 사실은 저도 갑자기 숲에 들어온 그대들이 조금 무섭거든요.”
“그건…….”

나는 흠칫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약간은 미안함도 느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저 사람도 우리를 무서워할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만 생각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

그때였다.

“저기? 혹시 음식을 좀…… 갖고 있나요?”

어느새 다들 깨어 있던 걸까. 요재가 불쑥 남자를 향해 물었다. 나는 놀라서 요재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요재의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꼬르르륵.

남자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의 입술에 난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 이런. 미안합니다. 지금은 먹을 것을 갖고 있지 않아요. 아까 말했듯이 그냥 산책을 나온 참이어서. 하지만, 으음, 변변치 않은 오두막에는 따스한 스프와 먹을 것들이 있는데. 어떤가요?”

위험하다.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음식이라니. 하지만 거부하기엔 우리의 배고픔이 너무나 극에 다다라 있었다. 사실은 이미 한계였다.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차가운 바람 속에 웅크려 잠든 몸은 너무나 지쳐 있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다시금 소리 없이 매혹적인 웃음을 그렸다.

“자, 그럼 다들 이쪽으로.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요.”

남자는 시종일관 친절했다. 우리를 자신의 숲 언저리 오두막까지 안내할 때도, 온기로 가득한 오두막 문을 열어줄 때도,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에게 음식을 내어주면서도 내내 상냥한 미소를 보였다.

“설마 이렇게 손님이 올 줄은 몰라서 거창한 음식까지는 마련하지 못했어요. 모쪼록 맛이 마음에 들면 좋겠군요.”

식탁 가득 음식이 놓였다. 물론 그의 말대로 거창한 음식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스프와 빵 몇 조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배고픔에 지쳐 있던 우리에게는 축복과 같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빵을 집어 들고, 스프를 그릇에 담았다. 빵은 딱딱했지만 고소했고, 스프는 묽었지만 따뜻했다.

‘맛있어.’

태어나서 먹어본 최고의 음식이지 않을까. 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품었던 것 같다. 빵을 스프에 찍어서 먹다가 깜빡 의식이 사라지기 전까지, 분명 그랬다.

그랬는데…….

“…….”

나는 눈을 떴다.

어쩐지 어지러웠다. 이상했다. 나는 분명 남자가 친절하게 건네준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어째서 어지러운 건지. 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지. 온몸이 나른한 이유는 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언제 잠든 건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멍하니 뜬 눈에 비치는 풍경도 그랬다.

팔다리가 주렁주렁.

남자의 등에 제멋대로 달린 팔다리가 주렁주렁. 망토가 사라진 자리에 기괴한 팔다리가 주렁주렁. 매달려서 흔들리고. 남자가 흥얼거리고. 즐거운 듯 휘파람을 불고.

“후흐흐. 이게 웬 횡재야. 오래오래 써먹을 젊고 싱싱한 신체들이. 그것도 다섯 마리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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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하던 목소리 그대로, 남자가 흥얼거렸다. 즐거운 듯. 등판 가득 기괴하게 솟아난 팔다리를 흔들거리면서.

“…….”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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