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언노운의 루이샤 (2)
(12/38)
11화. 언노운의 루이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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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언노운의 루이샤 (2)
2023.02.0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 할머니 글씨체 같아.”
어느샌가 낡은 책자를 쓰다듬는 세나의 손길. 그 손끝이 제목을 스치듯 가리켰다. ‘푸른 반딧불이 섬의 저주를 풀어라’라는 조금은 괴상한 제목. 하지만 글씨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는 세나의 표정은 조심스럽고, 신중해 보였다.
낡은 서랍 속 추억을 매만지듯.
혹은 할머니와의 기억을 돌아보듯.
“확실해. 할머니 글씨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세나의 눈시울이 조금은 일렁여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세나가 어쩐지 물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렸던 때 말야. 저녁이면 할머니는 뜨개질을 한 후에 날 재우셨어. 그런데 하루는 문득 궁금해졌지. 날 재운 후에 할머니는 뭘 하실까. 그래서 일부러 잠든 척을 했다가 눈을 뜬 적이 있었거든. 덕분에 그날 알게 됐고.”
“어떤 걸?”
요재가 물었다.
세나의 입술 끄트머리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뭔가를 쓰고 계셨어.”
책을 지그시 바라보는 세나의 눈길. 우리 모두의 시선도 낡은 책으로 옮아갔다. 세나의 차분한 이야기가 귓가를 거닐었다.
“다만 뭘 쓰고 계셨는지는 몰랐어. 일기였을까. 그땐 아마 그랬을 거라고 여겼지. 그래서 할머니께 묻지 않았어. 볼 생각도 하진 않았고. 남의 일기를 훔쳐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세나가 책을 집어 들었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그 손가락 끝이 조금은 떨려 보였다.
“이젠 알겠네. 그때 쓰고 계신 책이 이거였구나, 하고.”
차례차례 넘어가는 페이지. 그걸 훑어보는 세나의 눈동자. 세나도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처음 알았다. 한편으로는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혹시 할머니께서 책 속에 뭔가를 남기신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나의 할머니는 그 유명한 킴이니까. 고난의 시대에 홀연히 일어서서 모두를 이끌고, 마침내 레퓨지아를 건설한 3인의 선지자이자 현자 중의 하나니까.
‘통치하는 자인 B (Boton, The Ruler), 짓는 자인 A (Ark, The Builder), 그리고 마지막이 세나의 할머니인 변화하는 자 K (Kim, The Magician)……였지, 아마.’
킴이라고 불리는 세나의 할머니는 그만큼 대단한 분이다. 그런 사람이 남긴 책이라면 뭔가를 담고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미 제목에서부터 푸른 반딧불이를 언급하기도 했고.
그럼 세나는 저 책의 내용을 알고 있을까. 의외로 대답은 세나가 아닌 요재가 했다.
“음- 사실은 내가 먼저 그 책을 좀 읽어봤는데.”
“정말?”
모두의 시선이 요재에게로 모였다. 요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응. 도서관에서 빌려온 날 저녁에 조금 읽었거든. 뭐랄까. 조금 특이한 소설이었어.”
“소설? 이제는 사라졌다는?”
“어, 응. 그럴 거야.”
다비의 물음에 요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달에 선생님이 하시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거든. 오래된 도서관 있잖아. 거기에 레퓨지아 최후의 소설책이 있다는 거야. 디지털 라이브러리에 접속하기만 하면 모든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 낡은 소설이라니, 궁금하잖아.”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린 거야? 이걸?”
“응. 내용은 뭐랄까. 조금 이상했어. 묘하기도 했고.”
“어땠길래?”
“지금 우리 상황과 약간…… 비슷하달까.”
말꼬리를 흐린 요재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잘 살던 주인공이 울타리를 벗어나고, 모험을 겪다가 푸른 반딧불이의 섬으로 가는 이야기였어.”
“그리고?”
“몰라.”
“몰라? 왜?”
“왜긴. 내용이 거기까지였으니까. 중간에 소설이 갑자기 끝나 버렸거든. 마치…… 이야기를 쓰다가 만 것처럼 말야. 여길 봐. 이곳부터 뒤쪽엔 백지만 있어.”
“…….”
나는 요재가 넘기는 종잇장 페이지의 춤사위를 바라보았다. 요재의 말대로 소설은 책의 중간 부분에서 끝나 있었다. 그 뒤로 넘어가는 페이지는 모조리 백지뿐. 마치, 소설을 쓰던 세나의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집필을 중단한 것 같은 흔적이랄까.
요재의 손가락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 내가 보기에 제일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어.”
킴이 쓰다가 중단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것은 바로…….
[그녀는 마침내 섬의 기슭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름다운 푸른 반딧불이가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아름다운 섬이었다. 물론 그녀는 속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가 모든 것을 판가름할 순간임을.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욕망, 타락과 회생의 가능성이 이제부터 결정될 것임을. 그렇기에 그녀는…….]
“…….”
무슨 뜻일까, 저건.
우리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내용을 읽었다가,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가, 알쏭달쏭함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였다가.
그러던 도중이었다.
“어? 여기 제일 뒤에 뭔가가 있어.”
고개를 골똘히 갸웃거리며 책을 살펴보던 다비가 말했다. 다비가 가리킨 곳. 책의 제일 뒤편. 마지막 페이지에 처음 보는 의아한 형태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세나의 할머니가 직접 그려서 남긴 듯한 그림.
동물? 나무? 건축물이나 풍경?
모두 아니었다.
그건 바로…….
“이거, 지도인데?”
다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항상 화면으로만 보다가 종이에 그려진 걸 보니 조금 색다르긴 한데, 이거 지도 맞네. iPS 화면에 뜨던 거랑 비슷하지 않아?”
“……어, 진짜 그래.”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다비의 말대로였다. 종이에 그려진 지도가 처음이라 어색하긴 했지만, 이건 분명한 지도였다.
게다가 이 지도는 iPS에 뜨던 레퓨지아의 것과는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거, 기억나? 모두가 비좁은 레퓨지아에 모여 살기 전에는 걸어 다닐 수 있는 세상이 훨씬 드넓어서, 어딘가로 여행을 가려면 이런 지도가 꼭 필요했다던 거.”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지도를 살펴보았다. 산과 강, 들과 숲까지. 온세상이 한 장의 지도에 담겨 있다니. 신기했다.
“그리고 여기, 이게 레퓨지아인 거 같은데.”
다비가 지도 왼쪽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 자그마한 도시와 높은 담벼락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넘어온 장벽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우리를 가두고 있던 철창이었을지도 모르지. 레퓨지아가 확실해 보이는 작은 표식을 보며, 나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레퓨지아가 저렇게 작았구나, 라고.
“…….”
정말이었다.
내게 있어 가장 드넓은 세상이었던, 아니,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이었던 레퓨지아가 이제는 지도 위의 한 점에 불과해졌다. 장벽 너머에 광활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살짝 소름이 돋았다.
새장을 벗어나 처음으로 날아오르는 새는,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끝없이 푸르른 하늘을 보며 막막함과 경외감, 해방감과 아득함을 함께 느낄지도 모르겠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기분인 듯했다.
“그럼, 소설에 나온 푸른 반딧불이의 섬은?”
세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지도를 향해 눈길을 모았다. 푸른 반딧불이의 섬은 어디에 있는가. 역시 제일 궁금한 점은 그거다. 세나의 할머니, 선지자인 킴이 취미 삼아서 소설을 썼을 것 같지가 않았다. 거기에 우리가 오늘 겪은 푸른 반딧불이의 일들을 돌이켜보면 더욱 그랬다.
우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지도를 살폈다. 마침내 나는 자그마한 섬을 찾아냈다.
“여기.”
내가 짚은 곳. 드넓은 땅의 북동쪽 끄트머리. 그곳에 작은 섬이 있었다. 섬 아래에 표기된 ‘푸른 반딧불이의 섬’이라는 글씨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레퓨지아와 거의…… 반대편이네.”
요재의 목소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아니.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이곳의 어느 누구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불안감은 지녔을지언정, 그보다 더욱 큰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슴을 콩닥거리고 있다.
내가 그러니까.
다들 나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그럼 우리, 저 섬으로 가는 거야?”
“그래야지?”
“어차피 이제 레퓨지아로는 못 돌아가니까. 그러니 기왕 가는 거, 할머니가 말씀하신 저 섬 끝까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쩌면 그곳에 지금 우리 문제를 해결해줄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고.”
요재의 물음에 다비와 세나가 차례로 말했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난 전부터 레퓨지아 바깥에 뭐가 있는지 항상 궁금했어.”
“……사실은 나도.”
요재가 배시시 웃었다.
우리는 같은 모양의 미소로 서로를 마주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나는 사소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런데 요재? 넌 언제부터 도서관을 다닌 거야?”
궁금해졌다.
킴이 남긴 소설책을 찾아낸 요재는 대체 언제부터 도서관에 다닌 걸까. 생각해보면 묘한 일이었다. 그 도서관이야말로 외톨이였던 내게 거의 유일한 도피처였으니까.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으니까.
당연히 도서관에 있는 동안은 요재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과도 그랬다.
한데 이내 돌아오는 요재의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 아침에. 도서관 문 열자마자.”
“……응?”
“항상 도서관에 먼저 들렸다가 학교에 가곤 했거든. 너는? 학교 마치고?”
“어, 응.”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엔 다비가 또 뜻밖의 소리를 했다.
“너희도 도서관에 매일 다녔던 거야? 나랑 세나는 저녁 늦게 가곤 했는데.”
“뭐어?”
“뭘 그렇게 놀라.”
다비의 눈웃음에 장난기가 배어났다.
“난 코딩 연구하거나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세나도 이것저것 자료에 관심이 많아서. 그러다 보니 도서관에서 밤을 보내는 날이 종종 있었거든. 매일은 아니었지만.”
“…….”
나는 대답 대신 세나를 돌아보았다. 세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는 알겠다. 레퓨지아의 유일한 낡은 도서관. 나만의 외로운 공간인 줄 알았던 그곳을 사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쓰고 있던 거였다. 각자 시간은 조금 달랐지만, 우리 모두는 같은 도서관에서 저마다의 하루를 보냈던 거였다.
“하, 하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혼자만의 공간을 잃었다는 상실감? 물론 아니었다. 그동안 혼자였지만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던 거라는 묘한 깨달음에 그동안 가슴 한쪽에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저기? 다들 훈훈한 건 좋은데, 나도 좀 끼워줄래?”
이때껏 팔짱을 끼고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루이샤였다. 루이샤가 묘한 매력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짓궂은 미소를 그려냈다.
“너희랑 같이 가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어때?”
“…….”
우리는 누구도 먼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다들 같은 마음이니까.
고양이로 변신하는 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