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515화 (515/517)

00515  껄끄러운 느낌  =========================================================================

그 뒤로 옷 가게와 무기, 방어구 가게들을 돌아다녔지만 가게 주인들은 배급제라도 실시하는 것인지 한 명에게 대량으로 물건을 팔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파는 만큼만 사긴 했는데 그 양이 아쉽기 그지없다.

돈이 있어도 갖고 싶은 물건을 못사는 세상은 돈 많고 욕심 많은 사람한테는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옷감 가게 여주인이 알려준 나흰의 잡화점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커다란 옹이구멍을 통해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서 아기 의자처럼 앙증맞은 나무 의자에 앉아 홍차를 마시던 검푸른 색 머리카락의 플뢰 아가씨가 방긋 웃으며 반긴다.

향긋한 홍차 냄새가 감도는 넓지도, 좁지도 않은 가게 안은 잡화점이 아니라 골동품점이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은은하게 손때가 탄 목제 선반장에는 매끈하게 윤이 나는 우윳빛 찻잔과 접시가 크기와 종류별로 놓여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손톱만 한 비늘로 무늬를 낸 적갈색 수납장 위에는 자색 꽃무늬가 그려진 꽃병이 빨간 백합 같은 꽃을 품은 채 햇빛을 반사하며 무지갯빛을 뿌린다.

한쪽 벽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깔끔하게 닦여진 청동 거울이 줄을 지어 나란히 붙어있는가 하면 나무껍질로 짠 소풍 바구니들이 한쪽에 켜켜이 쌓여있고 인간의 센스 같지 않은 면이 돋보이는 가면이나 목제 공예품, 책이나 동그란 유리구슬 등이 가게 내부를 미로처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뜻밖에 가게 안의 물건이 현실의 것과 달리 차이점이 없는 거에 신기해하며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종족분이시네요. 무엇을 찾으시나요?=

“저 아래 쪽 옷감 가게 주인분이 이곳에서 스페일을 살 수 있다고 하셔서요. 나흰 씨 맞으시죠?”

=네~ 맞아요. 오루알 아주머니의 소개를 받고 오셨나 보네요!=

옅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작은 티 테이블에 올려놓은 나흰은 포니테일로 묶은 검푸른 색 머리채를 꼬리처럼 찰랑거리며 나무 카운터로 돌아서 들어가더니 쪼그리고 앉아 나무 상자를 꺼낸다.

=손님께서는 운이 좋으세요. 마침 스페일을 석장에서 공수해와서 규격별로 다 있답니다! 대규격과 중규격, 소규격 중 어느 게 필요하시나요?=

“차이점이 있어요?”

낑낑거리면서 자기 상체보다 더 큰 나무 상자 세 개를 차례대로 올려놓더니 스페일이라 불리는 저울을 조심스럽게 꺼내며 통통 튀는 것 같이 발랄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음~ 대규격은 최대 100,000 스페시움까지 측정할 수 있고요, 중규격은 10,000까지, 소규격은 1,000까지 가능해요. 아무래도 대규격은 고급품을 거래할 때 많이 쓰여서 좀 크고 추錘도 많아서 비싸요. 작아질수록 가격도 줄어들고 크기도 줄어들지요.=

옷감 가게 등지에서 쓰던 건 전부 소규격이었군.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커다란 대야만 한 큰 접시 두 개가 달린 대규격 스페일을 가리켰다.

“이게 좋겠네요. 이건 얼마죠?”

=와~ 스페시움이 많으신가 봐요! 100,000 스페시움이랍니다!=

……뭐? 이 저울 하나가 천만 TP 짜리라고?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가격에 순간 황당해서 저울과 가게 아가씨의 얼굴을 번갈아 보니 웃으면서 뭔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에이, 설마 이종족들이 사기를 치겠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공간에서 위상석을 종류별로 꺼내 1,000만 TP를 맞춰주니 나흰은 바로 내가 고른 스페일로 위상석의 TP를 측정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되게 비싸네요. 왜 이렇게 비싼 거에요?”

1000만 TP면 현실에서는 10조 원에 달하는 돈인데 이 저울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런데 설명을 들어보니 과연 비쌀 이유가 있었다.

=이 추錘가 전부 동 등급의 스페시움으로 만들거든요. 그 때문에 추만 잘 간수해도 언제나 현금처럼 쓸 수 있어서 그래요~.=

“헐. 진짜요? 어떻게 만든 거지.”

설명을 듣고 공간 지각으로 저울추의 내부를 살피니 확실히 아가씨 말대로 위상력이 감지된다. 이 도시에는 위상력이 느껴지는 게 너무 많아서 조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런 건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그렇죠? 저도 처음에 봤을 땐 무척이나 신기했답니다. 가디발 씨가 이걸 발명한 덕분에 거래가 무척이나 편해졌어요. 앗, 10만 스페시움이 넘어간다!=

아가씨는 바로 옆의 중규격 저울에서 추를 꺼내 수치를 측정하더니 초과하는 만큼의 위상석을 거스름돈으로 넘겨주었다.

“스페일을 그 할아버지가 발명했다고요?”

=네. 그 발명의 공로로 프라우드 족의 족장에 추대되기도 했지만, 자신은 그런 자리는 싫다며 거절하신 분이기도 해요.=

간단한 질문 하나만 던졌는데 나흰은 묻지도 않은 이것저것을 꾀꼬리처럼 지저귀며 메리아놀의 사정을 알려주었다. 간첩이 있다면 소중한 정보원이 될 수 있을 거 같은 여자다.

나도 적당히 맞장구 쳐주며 도시에 온 김에 필요한 걸 사가려고 했더니 배급제처럼 일정 이상 팔지 않아서 슬프다며 다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미로 장사하는 거 같다고 푸념을 하자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취미로 장사를 한다는 말이 정말로 적절하네요! 호호.=

그녀가 떠드는 이야기에 영양가가 있었다면 좀 더 시간을 썼을 텐데 그 이야기는 대부분 어느 집에서 아기가 태어났고 어느 집 자식이 영웅심에 가출했다가 아비한테 붙잡혀 끌려왔다거나, 어느 집 아가씨가 어떤 집 청년에게 고백했는데 차였다던가 하는 사소한 거여서 그만 가봐야겠다며 작별인사를 하자 나흰은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주었다.

나중에 가디발 할아버지를 만나면 이거 만드는 법도 가르쳐달라고 졸라봐야겠다. 스페일이 있으면 위상석 거래소에서 크기와 형태를 대중 삼아 거래하는 방식이 크게 바뀔 거다.

비록 1억 단위부터 거래하게 되겠지만 그 정도야 문제 될 일은 없겠지.

스페일이 든 상자를 품에 안고 아름드리 집나무로 돌아가며 멀찍이서 교대 중인 자경단원 둘을 공간 지각으로 쓱 살펴봤다. 벌써 3번째 교대지만 미리엔은 여전히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늘은 접근하지 않을 생각인가…?

그냥 속 편하게 생각해야겠다. 저녁때까지 접근 안 하면 저녁 식사를 빌미로 접근해봐야지.

하늘을 보니 해가 어느새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돌아가서 점심 먹고 가디발의 석장에나 가봐야지.

달각. 달그락.

…눈앞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식기를 준비하는 미리엔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언제나 입던 아오자이 같은 옷보다 더 얇은 질감에 얼굴의 옅은 화장으로 생기와 발랄함이 입술에 발려진 은은한 붉은색 연지와 어우러져 눈을 떼지 못할 색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년은 내가 집으로 돌아와서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아공간에서 고르고 있는 중에 찾아와서는 괜찮으면 같이 점심을 먹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었다.

나야 기다리던 차였으니 좋다고 승낙했지만… 도시락 바구니에서 야채 샌드위치 같은 거랑 생과일에 우유牛乳인지 마유인지馬乳모를 음료수를 꺼내는 모습을 보니 처음부터 점심때 찾아올 목적인 걸로 보였다.

그럼 자경단원을 보내서 감시하게 해놓은 건 뭐였냐.

=제가 준비한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미리엔은 손을 멈추고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자기가 챙겨온 음식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기 짝이 없어 눈썰미가 좋은 알케마나 공간지각이 있는 나, 소울 링크가 가능한 미호가 아니었으면 누구도 이상한 점을 눈치 못 챌 정도다.

“아뇨. 전 가리는 음식 같은 거 없이 다 잘 먹어요. 단지… 미리엔은 플뢰 중에서도 높은 지위 아니에요? 일부러 이렇게 점심까지 챙겨와 주실 줄 몰라서….”

하지만 나도 누나와 엄마를 상대하면서 눈치를 단련하고 내숭 연기를 익혔다. 일상생활에서 감정을 숨기고 연기하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기에 미리엔이 속아 넘어간 건지 도시락 바구니에서 나머지 음식을 꺼내며 예쁘게 눈웃음친다.

=아! 후후.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직위는 플뢰의 숲 자경단장이자 치안장이지만 근무시간 외에는 평범한 플뢰들 중 한 명이니까요. 지금은 점심시간으로 근무 외 시간이거든요.=

“그런가요? 그럼 사양 안 할게요. 이 음식들은 미리엔이 직접 준비한 거에요?”

=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샌드위치는 아까 공간 지각으로 꼼꼼히 살펴본 결과 평범한 야채를 쌓고 슬라이스한 과일을 올린 뒤 과일 잼을 뿌린 음식이다. 과일과 음료에도 수상한 점은 없어서 음식에 장난질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뒤라 망설임 없이 샌드위치를 집어 들어 한입 베어먹으니 미리엔은 내 반응을 기대하는 모습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맛있네요!”

=다행이다.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했어요.=

“저도 이렇게나 제 입맛에 맞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 맛있는데요?”

=후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곱게 웃으면서 내 맞은편에 앉아 샌드위치를 집어 드는 미리엔은 정말로 현혹을 당해 이지가 날아가 버린 인형으로는 안 보인다. 평범한 플뢰 족 처녀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쩌다가 볼굴의 꼭두각시가 된 건지 모르겠다.

날 호색한으로 알고 꼬시려고 온 미리엔의 기대에 부응해주기 위해 공간지각으로 어제보다 더욱 농밀하게 미리엔의 속살을 음미하며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으니 중간중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묘한 눈웃음을 보내는 게, 목적을 몰랐다면 정말 이 아가씨가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착각할 모양새다.

이대로 음식만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에는 아까운 기회라 아주 가벼운 신상 질문부터 꺼내보았다.

“미리엔은 몇 살이에요?”

=여름이 오면 317살이 되요. 서하 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헐… 317살? 진짜 엘프…가 아니고 플뢰는 오래 사는구나. 그냥 봐서는 20대 중반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데 300살이 넘었다니.

“저는… 음. 나이가 너무 적어서. 흐흐.”

=어머. 제 나이만 묻고 자기 나이는 비밀로 하시기에요?=

밉다는 듯이 곱게 눈을 흘기는 미리엔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포도처럼 생긴 흰색 열매를 따서 입에 문다. 그 모습을 보고 난처한 척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음. 얼마 전에 20살이 됐어요. 많이 적죠?”

=후후.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자신의 가치는 힘과 가진 능력으로 결정되는 거랍니다.=

그러면서 식탁에 상체를 내밀며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묻는다.

=제가 서하 님 나이 때는 힘자랑을 하고 싶어서 얌전히 지낼 수가 없었는데… 서하님은 어찌 그렇게나 착실하시고 어른스러우신지 그게 궁금해요.=

연인들과 비교해도 작거나 처지지 않은 가슴이 식탁 위에 올려지며 먹음직스런 질감이 얇은 옷 너머로 적나라하게 비쳐 보여서 미리엔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음. 너무 좋게 봐줘서 부끄러운데요. 사실 저도 성격이 급하고 힘자랑하는 거 좋아해요. 하지만 사리분별 없이 날뛰면 다른 분들한테 피해가 가니까 참을 뿐이죠. 그렇게 참은 걸 괴물들과 싸울 때 푸는 거 뿐이에요.”

=아아. 생각이 깊으시기도 하셔라. 처음 뵀을 때부터 그러실 것 같았어요.=

눈을 반짝이면서 손을 마주 쥐는 걸 보니 문득 이 꼴이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실소가 흘러나왔다. 서로 원래 목적을 감추고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는 꼴이라니.

내 실소를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미리엔은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 겉으로는 평화롭기 짝이 없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입으로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눈으로는 맛있어 보이는 몸을 보면서 식사를 끝내고 양치를 한 뒤 1층 거실로 내려오니 미리엔은 주방에서 챙겨온 찻잎과 다기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내가 내려오는 모습을 본 미리엔은 식후의 나른함과 온화함이 감도는 미소를 짓는다. 옹이구멍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에 밤하늘 같은 검푸른 색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빛이 나는 거 같다. 그러고 보니 나흰하고 똑같은 색이네. 얼굴도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자매일까?

플뢰는 몇 살까지 사는 거지. 317살이면 인간의 나이로 쳤을 때 몇 살 정도일까.

잠시 악의적인 감정은 묻어두고 냉정하게 미리엔을 분석해봤다. 317년의 삶. 최고위급의 위상력. 하얀 나뭇잎 투사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직위.

어쩌다가 볼굴에게 걸려서 현혹을 당해 놈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 걸까 생각하니 이든이 와이스가 받을 처벌을 이야기해줄 때 임무라는 단어를 꺼냈던 게 기억났다.

=서하 님. 오셔서 차 한 잔 어떠세요?=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루비처럼 고운 빛깔의 선홍색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셔보니… 뭐 그냥 복잡한 쓴맛의 차다. 난 차에는 문외한이라서 이게 좋은 것인지 맛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미리 엔은 과거에 임무를 띠고 메리아놀 밖으로 나갔다가 볼굴과 만나버린 게 아닐까?

추측하기에 볼굴, 그 괴물들의 성질머리 상 미리엔을 잡고 나서 험하게 굴리다가 먹어버리기에는 아까웠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현혹을 걸고 사냥개로 삼아….

아니다. 쓰레기, 버러지, 암캐라는 단어를 쓴 걸 봐선 아까웠으리란 생각은 안 든다. 그저 필요에 의해 도구로 사용했을 거다. 그 이유를 꼽아보자면… 뻔하지. 메리아놀을 감싸고 있는 외성벽때문일 가능성이 99%다.

패시지를 뒤덮고 있는 보호막, 그리고 그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대지의 벽.

볼굴은 패시지의 위치를 알고 있지만, 이 보호막 때문에 어찌하질 못하고 때마침 손에 들어온 미리엔을 개조에 가까운 세뇌를 통해 인형으로 만들어버린 뒤 대지의 벽에 관한 시스템을 캐내게 하려 한 걸 거다.

차 한 잔을 마실 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던 미리엔은 찻잔을 내려놓고 날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눈빛이 뭘 뜻하는 걸까, 본격적으로 미인계를 쓰려는 건가 의구심이 들 무렵 미리엔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곧게 쭉 뻗는 기다란 다리가 겹쳐지니 탄력과 생기가 넘치는 사슴 같은 허벅지가 그림 같은 자태를 잡아간다. 옷감이 얇은 바지는 그 자태를 가리기는커녕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으니 미리엔은 탁자에 턱을 괴고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서하 님은 제 몸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질문에 맞춰 일부러 어깨를 움찔해주니 웃음이 조금 더 진해진다. 모르는 척 얼마 남지 않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가 5초를 센 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이에요?”

=모르는 척 하시기에요?=

그럼 아는 척할까? 대답하기가 무척이나 곤란한 듯이 눈을 데룩데룩 굴리고 있으니 미리엔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붙는다. 진주처럼 봉긋 솟아있는 가슴의 첨단이 내 팔뚝을 살짝살짝 간지럽히는 게, 순진무구한 남자라면 애간장이 탈만큼 고혹을 느낄 몸짓이다.

와, 옷 진짜 얇네. 바람에 옷이 몸에 휘감길 때부터 알아봤지만, 옷 특유의 질감이 전혀 안 느껴진다. 거기에 풋풋한 숲의 향기가 나는 게 연인들이나 히아리드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향기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도 몸은 미리엔의 가슴을 피해 몸을 기울이니 미리엔의 눈가에 떠오른 미소가 즐거운 듯 일렁인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피하기만 하니 미리엔은 보라는 듯이 작게 한숨을 쉬고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서하 님이 능력으로 제 몸을 더듬으신 것, 다 알고 있답니다?=

잘됐군. 이번 기회에 몇몇 이형종들이 내 공간 지각을 감지하는 원리를 좀 파봐야겠다. 어떤 놈들은 감지하고 어떤 놈들은 못하니까 함부로 공간 지각을 쓸 수가 있어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증거 있어요?”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는걸 눈치챌 만큼 어색하게 가슴을 펴고 당당한 척 말하니 미리엔의 색 깊은 사파이어 같은 눈이 웃음을 머금고 동그랗 떠진다.

그 모습이 '이렇게 나오시는 건가요?'하고 말하는걸로 보였다.

=제 감이 증거랍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억측이네요.”

=후후. 증거를 내밀 수는 없지만, 서하 님이 제 몸 깊은 곳까지 보신 것은 정황상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발뺌하시면 미워할거에요.=

흐음. 그러니까 공간 지각을 당하면 누군가 만진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게 누구의 능력인지 특정하지는 못한다는 거지?

중세 시대처럼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 현상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모건 르 페이처럼 공간 지각을 느끼다 못해 본체인 날 발견하기까지 하는데 이형종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군. 좋은 걸 알았다.

“음. 몰라요. 난 모르는 일이에요.”

=나쁜 남자시네요. 서하 님은.=

오리발 내밀기 스킬의 최고봉인 아몰랑을 시전하며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가 찻잔이 빈걸 확인하고 내려놓으니 미리엔은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어버렸다.

============================ 작품 후기 ============================

6회 77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머릿속에 줄거리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있어서 쓰기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데 6회 77 페스티벌에 참여하면 제 성격상 보나 마나 내 마음대로는 뒷전으로 밀려날 게 뻔해서 도저히 참가를 못하겠네요 ㅠㅠ

참았다가 7회에나 참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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