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514화 (514/517)

00514  껄끄러운 느낌  =========================================================================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1시간가량 눈 좀 붙였더니 끓어오르던 머릿속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누가 툭 치면 펑!! 하고 터지는 게 아니라 "아씨발, 어떤새끼야?"할 만큼은 진정했다는 거다.

- 주인님~! 갔다 올게~!

집나무 입구에서 날 향해 한쪽 팔을 붕붕 흔드는 미호에게 손을 들어주며 배웅해주었다.

미호와 알케마는 아직도 피곤해 보이는 히아리드의 양팔을 부축해주며… 부축해주는 게 아니라 질질 끌고 가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셋은 북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하얀 나뭇잎 투사 열 명이 어디서 근무 중인지 알려줬으니 엄한 데서 헤매지는 않겠지. 미호가 소울 링크로 투사들의 감정 표면을 살피고 눈썰미가 좋은 알케마와 차분하고 이성적인 히아리드가 옆에서 서포트해주면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으음.”

1회차 때 프랑을 만난 뒤부터는 언제나 옆에 누군가가 있어 주다 보니 아름드리 집나무에 혼자 남게 되자 조금 외로운 마음이 밀려온다.

…그럼 나도 나갈 준비를 해볼까.

아침에 집나무로 돌아오면서 확인했던 미리엔의 공을 들인 몸단장의 이유가 날 꼬시기 위한 거였다는걸 알았을 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접근해온다면 일부러 넘어가 주는 척 연기를 할 생각이다.

좀 답답하지만 미리엔이 육탄 공세를 할 것에 대비해 누나가 저번에 다시 만들어준 속성저항 슈트를 입었다. 힘으로든 능력으로든 내가 밀릴 리는 없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방비 정도는 해둬야지.

목적을 숨기기 위해 보란 듯이 음흉하게 미리엔의 몸을 훑어본 게 의외의 한 수가 되어서 미리엔은 내가 자신의 육체에 관심이 많은 호색한 성격으로 인식했다.

볼 굴에게 보고할 때도 내 성격을 호색한으로 착각해서 보고했고 미리엔과 통신한 볼굴 그 개새끼는 몸을 써서라도 날 유혹하라고 미리엔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그걸 역이용해서 미리엔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는 한편 미리엔 같은 존재가 메리아놀에 더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할 생각으로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를 출동시켰다.

만약 더 이상의 잠입자가 없다면 정신 조작이든 뭐든 써서 미리엔의 머릿속에 들어있을 정보를 빼낼 작정이다. 그런 다음에는…….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잔인한 고문 방법이 떠오르고 있지만 일단 겉은 플뢰다보니 내 마음대로 하기에는 좀 걸리는 기분이 든다.

미리엔의 직위를 생각해본다면 볼굴의 스파이였다는것을 멜빈지안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처분을 맡기는 게 메리아놀의 평판을 생각했을 때 바른 선택이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성을 최대한 쥐어짜내 생각해본 거다.

어느 정도 진정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볼굴과 직접 연관이 된 일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자신이 없다. 지금 마음 같아서야 미리엔을 사로잡아다가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밟아 죽여버리고 싶을 뿐이거든.

“쯧.”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야겠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한테 미뤄야지.

미리엔은 지금 플뢰 자경단 본부에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있지만, 부하를 시켜서 날 감시하게 해놨다.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를 따로 보내놓고 나 혼자 움직이는려는 것도 미리엔이 접근하기 쉽게끔 환경을 꾸민 거다.

이대로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미리엔이 접근해오겠지. 본격적인 행동은 그때부터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평화로운 플뢰의 숲 집나무들 사이 넓은 길을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제 갈 길 가던 이종족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유별난 내 복장을 신기한 듯이 바라본다.

이쪽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특이한 질감에 팔다리와 관절부를 보호하는 프로텍터에 호기심을 보이는 시선이 낯간지럽다.

그랜드 터틀의 부산물로 만든 속성저항 슈트는 팔과 다리, 상체를 가리는 프로텍터가 붙어있는데, 이건 위상 합성 고분자 화합물로 이형종의 뼈나 딱딱한 비늘, 등껍질을 형태에 맞게 가공한 뒤 카본 파이버 폴리머를 일정한 공정으로 주입해 만든 인공물이고 슈트 또한 비슷한 공정으로 합성 고분자 화합물에 이형종의 부산물을 섞은 뒤 실 모양으로 만들어서 짠 특제 슈트다.

빛을 흡수할 것처럼 진한 칠흑색의 라이더 슈트는 완만한 곡선형으로 디자인되어있어 이쪽 세계의 덧대거나 겹치는 방식으로 만드는 방어구 양식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 나는 수준이다.

한 마디로 이종족들이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방어구라는 거지.

너무 쏟아지는 시선에 망토 같은 걸로 몸을 가릴 걸 그랬나 살짝 후회하던 찰나 뒤에서 제법 고급스러운 가죽 튜닉과 하얀 모직 바지를 입은 나이 많은 프라우드가 뛰어오더니 안달이 난 목소리로 날 불러 세웠다.

=이보게, 여행자. 가는 길 멈추고 이 늙은이와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겠는가.=

“…저요?”

=그렇다네. 자네 곁을 지나가다가 내 생전 처음 보는 양식의 갑옷에 참을 수 없어 말을 건 것을 이해해주게.=

그렇게 말하는 프라우드 노인은 내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서린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중얼하는데… 고유 명사인지 내 귀에는 못 알아먹을 단어의 나열로 들렸다.

처음 보는 방어구를 입었다고 다짜고짜 말을 걸어온 노인이 어지간히 괴짜 같다고 생각했다.

=대관절 그 갑옷은 무엇으로 만든 건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얇고 가벼워 보이지만, 그 얇이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해 보이는군.=

고분자 화합물이라던가 합성수지라던가 카본 파이버 같은걸 설명해주면 알려나? 이 노인은 대장장이로 살아왔는지 그 오랜 세월의 흔적이 정직하게 손에 맺혀있는 걸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형종…이 아니고 진수의 부산물로 만든 거에요. 이름은 저도 모르고요. 입에서 폭발하는 구슬을 쏘던 산만큼 큰 거북이의 등껍질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서 만든 방어구로 알고 있어요.”

=허어! 밀쟈 베이즐리를 잡은 건가?=

그랜드 터틀도 여기서는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나 보군.

머리가 하얗게 세고 투르발보다 주름이 더 많은 프라우드 노인은 내가 입고 있는 속성 저항 슈츠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손을 잡고 프로텍터를 조심스레 만져보기 시작했다.

성격이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긴 하지만 나도 할 일이 있는데 이렇게 붙잡혀 있으려니 좀 난감하다. 미리엔이 언제 접근할지 모르는데.

“저기, 할아버지. 제가 조금 바빠서 그러는데요.”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만 가야 한다고 완곡하게 돌려 말하자 프라우드 할아버지는 그제야 허허 웃으며 내 손을 놓아주더니 탐스럽게 기른 하얀 수염을 쓰다듬는다.

=특별한special 방어구에 홀려서 자기소개도 잊었군. 나는 가디발이라는 늙은이일세. 뒷방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늙은이지.=

…아니 자기 소개하자고 말 꺼낸 게 아닌데요….

“전 서하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안 늙어 보이시…. 가디발이라구요? 저 가디발 석장의 그 가디발?”

=그러하네. 내가 그 가디발이지.=

늙은 프라우드 족 할아버지의 말에 깜짝 놀랐다. 무슨 그런 유명한 사람이 호위도 없이 혼자 다녀? 이를테면 현실의 대기업 회장님이 비서나 경호원 같은 것도 없이 혼자 싸돌아다니는 셈이잖아.

위상력이 상위급이긴 하지만 길 가다 마주치는 이종족 10명 중 1명이 상위급인걸 고려하면 가디발의 무력이 절대 높다고는 못 본다. 거기다 늙었잖아.

……뭐, 여기가 현실도 아니고 이 도시의 주민들도 인간이 아닌데 이런 인간적인 걱정은 쓸모없겠지.

나도 할아버지한테 관심이 생겨서 있기 힘든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무릎을 툭툭 치는 가디발을 위해 앉기 좋게 뻗어 나와 있는 나무뿌리에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라우드 평의회의 도움 요청을 받고 가시는 길이었다고요?”

=그렇다네. 사용하는데 의회 안건으로 올려야 할 만큼 희귀한 재료가 들어왔는데 총의회에서 막혀 진척이 없다더군.=

아주 이유 없이 우연히 만난 건 아니었군.

가디발 할아버지는 플뢰의 숲 외곽에서 고즈넉한 여생을 보내던 중이었는데 내가 투르발에게 맡긴 백청의 부산물 때문에 불려가는 중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눈에 생전 처음 보는 옷인지 갑옷인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걸 걸치고 걸어가던 날 발견해서 호기심에 이끌려 말을 걸어온 거였단다.

가디발 할아버지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지 날 알아보지 못한 채 속성저항 슈츠에만 관심을 보였다.

=정말 아쉽군, 아쉬워. 스펙스만 깃들어있다면 무엇보다 뛰어난 방어구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헤. 할아버지가 보기에 스펙스만 없다뿐이지 품질은 괜찮아 보이는 거에요?”

=그래. 뭔가 손재주로 보이지 않는 기계적인 짜임이 느껴지지만, 방어구의 목적이 뭔가. 몸을 지키기 위한 거야. 미의식이나 구조적인 차이점 따위는 방어구의 원초적인 목적에만 부합된다면 아무 문제 될 게 없네.=

그러한 만큼 스펙스를 부여받지 못한 덕분에 반푼이가 되었다며 속성저항 슈츠를 만지며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실은 말이죠.”

아쉬워하는 가디발의 모습에서 어쩌면…하는 마음에 현실의 방어구제작자들의 실태를 꺼내보았다. 말을 잘하면 장비에 스펙스, 위상력을 부여하는 걸 가르쳐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허어! 스펙스를 부여하지 못한다고?=

“예. 그래서 전 이렇게 스펙스가 없는 방어구가 보통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제 가디발의 석장을 방문해보고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흔한 도제들까지 스펙스가 깃든 아이템을 만드는 걸 보고 역시 아이템 제작하면 프라우드가 최고구나 싶더라고요.”

물론 도제들이 만든 아이템의 질은 능력자들이 레이드를 통해 획득하는 하급 매직 아이템과 비교하기에도 미안한 수준이긴 하지만 일단은 위상력을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고, 아무리 허접스러운 무기라고 해도 일단 위상력만 깃들면 위상력이 없는 고급 장비와 맞먹는 성능을 보여주니 놀란 건 사실이었다.

“제가 입고 있는 방어구도 제가 살던 곳에서 나름대로 실력자들이 만든 건데, 도제들이 만든 가죽 갑옷보다 못하다는 걸 깨달으니 새삼 실망스러웠어요.”

=크허험. 허허허.=

프라우드를 한껏 추켜세워주는 내 발언에 가디발은 기꺼운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하얗고 탐스러운 수염을 연신 쓸어내린다.

“상급 야장은 물론이고 일반 대장장이뿐만 아니라 도제들까지 스펙스를 부여하는 걸 깜짝 놀랐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무기나 방어구에 스펙스를 부여할 수 있는 거에요?”

=허허.=

무척이나 흡족해 보이는 가디발의 표정에 슬쩍 본론을 끼워 넣었더니 '이런 맹랑한 녀석을 봤나?'하는 얼굴로 웃는다.

=그래. 이제 알겠구먼. 네 녀석이 투르발 놈에게 희귀한 재료를 건네준 녀석이렷다?=

앗. 어떻게 눈치챈 거지? 내가 당혹해서 웃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클클 웃으면서 내 차림을 가리켰다.

=네 녀석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에 지금 입고 있는 속성저항 슈츠에 그 희귀한 재료를 투르발에게 건네준 거며.=

“어, 음. 저기.”

=얼마 전부터 이 늙은이의 귀에까지 들리던 소식의 방문자도 네 녀석이지?=

“……네.”

그 목소리에서 확신이 가득해 얼버무리기도 늦었다는 걸 깨닫고 아쉬움에 속으로 혀를 찼다. 미리엔의 일 때문에 조금 조급증을 냈더니 다 망해버렸네.

=메리아놀은 넓지만 좁아. 총의회에 안건으로 올라갈 만한 재료가 나타나는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너에게 느껴지는 기세와 그 특별한 방어구를 보니 그 특별한 경우가 너라는 건 금세 눈치챌 수 있겠더구나.=

그런가…. 되새겨지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으려니 가디발은 할아버지들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보이면서 내 허벅지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꾸나. 네가 투르발 놈에게 건네줬다는 재료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어.=

“어? 그럼….”

=자고로 거래라는 것은 공평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지 않으냐?=

“그, 그렇죠.”

=그럼 좀 이따가 보자꾸나. 어험.=

영차 하고 일어선 가디발은 내 팔을 툭툭 치며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그 얼굴에 호감 어린 흐뭇함이 가득해서 조금 어리둥절하다.

…이거, 아직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거지?

가디발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 아무래도 내 옷차림이 너무 눈에 띈다는 생각에 아공간에서 적당히 몸에 두를 수 있는 크기의 백청의 가죽을 꺼내 망토처럼 걸쳤다.

원래라면 무두질 하지 않은 가죽이라 뻣뻣하기가 새초롬한 10대 후반 아가씨들 콧대 같아야 정상일 텐데 초위급 거죽이라 그런지 무두질 한번 하지 않아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몸에 걸치기 딱 좋다.

거기에 숙성되지 않은 가죽이라 황갈색을 띄고 있어 눈에 잘 안 띈다는 장점도 있어서 가죽을 망토처럼 걸치고 걸음을 옮기니 아까보다 확연하게 날 향하는 시선이 줄어든걸 느낄 수 있었다.

잠깐 의외의 만남에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난 준비만 반이니 얼른 접근하라고. 인형 스파이 씨.

이상하다… 왜 접근을 안 하지?

플뢰의 숲 이곳저곳을 관광하는 느낌으로 돌아다닌 지 2시간이 넘어가는데 미리엔은 자경단 건물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처음에 날 감시하듯이 따라다니던 자경단원이 교대하고 돌아가서 미리엔에게 뭔가 말을 하는 걸 본 순간 이제 시작인가? 했는데….

시작은 개뿔. 건물이 아니라 업무 공간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저럴 거면 몸치장은 왜 한 건데? 날 꼬시려고 명령받았다며? 왜 안 와?

2시간 동안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플뢰의 숲을 구석구석 구경해버렸는데 이제 어떡하냐.

미호는 둘을 이끌고 열심히 하얀 나뭇잎 투사 10명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고 있는데 나만 계획이 어긋나고 있으니 짜증이 나려 한다.

안돼. 시작도 안 했는데 나 혼자 조급해하면 일을 망칠 거야. 릴렉스하자, 릴렉스.

차라리 내 쪽에서 찾아갈까? 어차피 날 호색한으로 알고 있으니 내가 일부러 접근해도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해봤지만, 저쪽에서 접근해오길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내 쪽에서 치근거리는 건 주변인의 호감도 측면에서 좋지 못할 거다. 나만 봐도 딴 나라 남자 놈이 우리나라 여자를 괴롭히거나 성적으로 추근거리는 걸 상상해보면 마음에 안 든다. 반대로 여자가 딴 나라 남자한테 들러붙으면 "에이 극성 사대주의자 년 같으니."이러고 말지.

…아니, 내가 그런 다는 건 아니고 인터넷에서 생각 짧은 국수주의자들이 하는 말을 본 거다. 진짜로.

쩝. 마음에 안 들지만 미리엔이 먼저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플뢰의 숲을 돌아다니다 보니 집나무가 전부 가정집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수 있었다.

약초를 파는 약초 가게도 있고 애벌레나 거미들한테서 실을 조금씩 얻어내 짜서 옷감을 만들어 파는 가게나 풀과 나뭇잎을 엮어 만든 평상복 가게도 있고 활 가게, 무기 가게, 방어구 가게, 도구점, 잡화점, 음식점, 과일 가게, 빵 가게 등등 생활에 필요하다 싶은 가게들은 거의 전부 다 있었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편하고 사치를 부리며 욕구를 충족시켜 살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니라 서로 상부상조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종의 취미 생활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가게 주인의 반응도 치열하지도 않고 손님이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고, 문고리에 외출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은 채 문도 안 잠그고 주인이 자리를 비운 가게도 있었다.

처음에는 미리엔이 접근해오길 기다린다고 그냥 가게의 겉만 보고 지나쳤지만 이제는 반쯤 체념해서 쇼핑을 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눈여겨 본건 옷감 가게와 무기, 방어구 가게다. 저런 가게에서 파는 물건 중에는 석장에 만들어진 아이템처럼 위상력이 깃들어있는 것도 많아서 저것들을 사서 현실로 가져갈 생각이다.

위상력이 깃든 옷감으로 만든 옷은 주로 속성 능력자들의 속성력을 향상시켜 주는 효과가 많으니까, 재료만 갖다 주면 누나가 어떻게든 아랫사람을 부려서 방어구를 만들어 그랑 블루 소속 레이드 팀 능력자들한테 판매하겠지.

가장 먼저 옷감 가게에 들어가서 가게 주인에게 물건의 대금은 어떻게 치르는지 물어보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종족이군요. 여행을 오신 건가요? 거래에는 스페시움이나 물물 교환을 한답니다.=

“스페시움… 이거요?”

주머니에 손을 넣는 척하면서 아공간에 상위급 위상석 하나를 꺼내 보이니 얼굴에 연륜이 묻어나기 시작하는 플뢰 여성은 곱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측정기구를 가지고 오겠어요.=

측정기구? 위상석의 수치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건가?

현실에서도 못하는 걸 이곳에서는 가능한 건가 싶어서 계산대 안쪽 방으로 들어간 가게 주인이 뭘 가지고 나올지 기대했는데, 그녀가 가지고 나온 것은….

접시저울과 숫자가 쓰인 무게추였다.

…살짝 허탈한 기분을 감추면서 가게 주인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니 여주인은 삼각대를 세워 수평을 맞추고 중상위급 위상석을 올린 뒤 추를 하나하나 올리며 무게를 재본다.

=크기와 무게가 šeši 등급이군요. 스펙스 수치가 높은 상등품이네요.=

…신기하다. 내가 꺼낸 상위급 위상석은 37,260짜린데, 플뢰 여성이 올린 추의 숫자는 372였다. 100짜리가 3개, 10짜리가 7개, 1짜리가 2개.

“이것도 한번 측정해주실래요?”

호기심에 820짜리 중위급 한 개와 9821짜리 중상위급 한 개를 꺼내주니 정확하게 8과 98이 나왔다. 10단위 이하는 측정을 못 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엄청난 정확도를 보이는 거다.

내가 나름 정확한 측정에 놀라워하니 여주인은 한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곱게 웃었다.

=후후. 스페일은 처음 보시나요?=

“네. 이렇게 위상석을 측정하는 기구는 처음 봤어요. 이건 어디서 살 수 있어요?”

=나흰의 잡화점에 가면 살 수 있을 거예요. 나흰의 잡화점이 어디에 있냐면….=

그녀에게 잡화점의 위치를 들은 뒤 이 가게 안에 있는 옷감을(놀랍게도 모든 옷감에 위상력이 깃들어있었다.) 모두 사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그럴 수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위상석이 모자라는가 싶어 고위급 위상석 여러개를 더 꺼내놨지만 가게 주인은 곤란한 듯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왔다.

=당신이 옷감을 모두 사가면 이후에 옷감이 필요해서 찾아오시는 분이 곤란해진답니다.=

“그, 그럼 살 수 있는 만큼이라도.”

재고가 없는 것도 아니고 가격도 다 제값을 치른다고 해도 안 판다니, 좀 당황스럽지만 가게 주인이 안 판다는데 어쩌겠어. 그래서 살 수 있는 만큼만 사려고 했는데 가게 주인은 한 명이 옷 한 벌을 지어 입을 수 있는 만큼의 옷감을 보여주었다.

대충 폭 70cm에 길이 4m 정도의 옷감만 판다는 말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몸을 가리는 백청의 가죽을 젖혀서 입고 있는 속성 저항 슈츠를 보여주며 정말정말 옷이 필요하다고 사정을 하자 여주인은 =곤란하신 손님이시네요.= 하며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쪽에 세워둔 옷감 한 필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아가들은 실을 하루에 폭 70cm, 길이 40cm의 옷감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양만 뽑는답니다. 그래서 많이 팔 수가 없지만… 여행자님은 옷감이 굉장히 필요해 보이시니 어쩔 수가 없네요.=

“아니에요. 제가 다른 분들 생각을 못 했네요. 억지를 부려서 죄송합니다.”

=후후. 마음 착한 여행자님이시네요. 이 원단은 길이가 70m 정도 되니 여벌의 옷까지 충분히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파릇파릇한 잔디색이 입혀진 옷감은 생각보다 묵직했고 비쌌다. 폭 70cm에 길이 70m짜리를 1,200짜리 중위급 위상석 한 개를 내놨으니까 이 옷감 한 필이 12억짜린가…?

이걸로 옷으로 만들면 12억은 가뿐히 넘을 천 방어구가 여러 개 나올 거니까 아깝진 않다. 많이 못 사서 아까울 뿐이지.

아무튼, 가게에는 이런 옷감이 157필이 있으니 나중에 미호하고 히아리드하고 알케마를 보내서 더 사오게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여주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 작품 후기 ============================

인공이가 싸이코 기질이 크긴 하죠 ㅎㅎ

근데 그건 다들 15화에서 눈치채지 않으셨나요...?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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