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512화 (512/517)

00512  껄끄러운 느낌  =========================================================================

“…그러게. 왜 미리엔의 뒤를 캐려고 했지?”

조금 황망한 기분에 미호와 히아리드를 돌아보니 자기들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미호의 기분을 나쁘게 해서?”

- 에헤헤.

잠깐 생각을 해보다가 꺼낸 이유가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러운지 미호는 몸을 배배꼬더니 히아리드의 풍성한 날개 속으로 숨어버린다. 자신의 하얀 깃털 사이에 몸을 숨긴 미호를 잠깐 돌아본 히아리드는 날 바라보며 어떻게 할 건지 물었다.

=그렇다면 미리 렌샤엔은 그대로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니야.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 된다잖아. 일단 미호가 알아낸 거나 알케마가 말한 부분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미리엔이 저런 상태가 된 원인을 찾는 쪽으로 움직여보자.”

지금처럼 미리엔과 관련된 문제들이 관자놀이를 콕콕 찌르는 것처럼 신경 쓰이는 이유가 와이스와 티격태격한 감정의 편린이 남아있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남다른 내 예감이 경고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미호는 아까 말한 대로 하얀 나뭇잎 투사들을 찾아다니면서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소울 링크를 써봐. 알케마는 눈썰미가 좋은 거 같으니 미호를 도와주면서 이상한 점은 없나 확인해보고. 히아리드는 나랑 같이 피아브한테 가보자.”

- 지금 바로 움직여?

“아니. 날도 어두워졌으니까 내일부터 하자.”

=…우, 헤헤, 히헤헤=

양반다리로 팬티를 노출한 채 구부정하니 앉아있던 알케마가 갑자기 헤죽헤죽 웃으면서 꼬리로 바닥을 탕탕 내려치길래 뭔가 했더니… 눈썰미가 좋다는 내 칭찬에 이제서야 기분이 좋아진 거 같다.

형광등 같은 녀석.

의제의 결정은 하루 안에 끝날 거라는 투르발의 장담과는 다르게 백청의 뼈와 가죽이라는 게 꽤 민감한 부분이었는지 해가 지고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공간 지각으로 총의회로 판단되는 회의장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회의장은 중앙 성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심처에 있었는데, 동그란 원형 방의 중앙에는 다윗의 별처럼 생긴 거대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곳에 13명의 이종족이 모여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 종족의 지도자라고 생각되는 넷은 각각 육망성의 모가 되는 부분에 앉아있었는데 두 자리가 비어있는 건 플라비우스와 해비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건 어찌 됐든 좋다.

총의회의 4 의장이자 플뢰 족의 족장인 멜빈지안은 부드럽지만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고 프라우드 남자만큼이나 튼튼하게 생긴 프라우드 여자가 그를 향해 조금 붉어진 얼굴로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화난 거 같진 않은데… 흥분 한 건가?

붉은색의 화려한 가죽옷인지 가죽 갑옷인지 모를 것을 걸친 프라우드 족 여성은 족장인 듯 빨간색 바탕에 하얀 털과 노란 털이 드문드문 나 있는 고풍스러운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을 드레드 스타일로 땋고 등 어림에서 한번 묶은 데다 덩치가 남자 프라우드 족 뺨칠 만큼 튼튼하게 생겼다.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턱이 각져있어서 멋지다는 말이 어울리지 빈말로도 예쁘다고는 못하겠다.

처음 봤을 때 수염이 없는 남자 프라우드인게 이상해서(남자 프라우드들은 늙든 어리든 전부 수염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알몸을 투시해보지 않았다면 여자라는 걸 알 수 없었을거다.

그런 프라우드 족 족장은 왜 이걸 몰라주냐는 듯이 답답하단 얼굴로 열심히 떠들지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붉은 기가 흐르는 볼륨 헤어 스타일의 호狐족 여자는 머리카락 색과 같은 여섯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쪽 벽에 서 있는 투르발을 여우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게 어지간히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지금 머리 위에 뾰족하니 솟아있는 붉은 털의 여우 귀가 뒤로 납작하게 누워있는데, 미호도 기분 나쁘거나 시무룩하거나 할 때면 귀를 저렇게 눕히거든.

미호와는 다르게 커다란 가슴, 잘록한 허리, 탐스러운 골반과 엉덩이를 가진 호狐족 여자는 루크랑의 대표 같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쉬지 않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근처에 앉은 노란 이구아나처럼 생긴 사비 대표는 그 소리가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곁눈질한다.

보기만 하고 말은 못하는 걸 보면 좀 소심한 거 같다.

저 네 명을 제외한 여덟 명의 이종족은 한쪽 벽에 나란히 서서 무표정하게 서 있었는데 종족별로 2명씩 있는 걸로 봐서 대표나 족장들의 보좌관 같은 역할인듯하다.

그들과 함께 서 있던 투르발만 답답함이 가득한 얼굴로 육망성 테이블에 앉은 의장들을 바라보는 걸 보면 백청의 부산물을 가공하는 안건은 해결이 안 되는 거 같다.

참다 참다 폭발한 것인지 호족 여자는 붉은색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긁더니 답답하다는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Tai garsiau nei žodžiai shoutin amžinai! Tiesiog paskambinkite jį čia!-

입술을 다시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호족 여자의 짜증 가득한 외침에 멜빈지안이 눈을 뜨더니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호족 여자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Kas jūs skambinate 서하 정 čia?-

-baltų rūdžių ar šalis pranešė žuvo! Aš negaliu tiesiog daryti išvadą, kad toks dalykas! Aš susitikti visi susirinko tiesiogiai iš vietos!-

아우 답답해. 뭔 소린지 당최 알아먹을 수 있으니 보는 거 자체가 고통이다.

루크랑의 대표인 호족 여자가 백청의 부산물을 손가락질하고 멜빈지안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걸 보면 내 이야기를 꺼낸 거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찐 고구마를 수십 개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호족 여자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심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자 개와 고양이 타입의 루크랑 족이 '또 시작이네.'하는 얼굴로 루크랑 대표를 달래기 시작한다.

초소형 아공간에서 호우반 일행이 마시던 술병과 똑같은 걸 꺼내 입에 물려주니 꼴깍꼴깍하고 술을 몇 모금 마신 루크랑 대표는 크으- 하고 숨을 내뱉으며 진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씩씩거리는 루크랑 대표는 머리카락도, 꼬리도, 여우 귀도 그렇고 체모가 전체적으로 붉은색인걸 봐서 붉은 여우 바탕의 호족인 거 같다.

미호의 순백색 여우 귀하고는 다르게 뾰족한 귀 끝이 약간 검은 색으로 물들어있고 풍성한 꼬리의 끄트머리도 살짝 까맣게 물들어있어서 좀 사나워 보이는 인상과 어우러져 살짝 귀여운 느낌이다.

진정은 했지만 답답함은 가라앉지 않았는지 자리에 도로 앉지 않고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한탄하듯이 몇 마디를 내뱉자 멜빈지안과 노란 도마뱀 인간도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투르발과 프라우드 족들만 답답한 얼굴로 가슴을 치는 게 상황이 그들이 원한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 거 같다.

네 명의 프라우드 족이 백청의 부산물을 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하는 점이나 다른 종족의 족장과 대표 셋의 표정을 봐서 저 상황을 추측해보자면 프라우드 족은 일단 백청의 부산물을 가공하는 쪽을 원하는 거 같다.

투르발이 말했던 것도 있고 말이지.

하지만 멜빈지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이름을 언급하며 거부하고 있는듯했는데, 이게 어느 한쪽의 양보를 받거나 거래를 통해서 의견 차이를 조율하면 될 텐데 멜빈지안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반응을 보여주지 않고 프라우드 족장은 계속 떠들며 멜빈지안을 설득하려는 듯 하니 회의가 지지부진하게 질질 끌고 있는 거다.

그렇게 두 이종족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니 루크랑 대표는 답답함에 저리 발버둥 치는 거지. 소심한 사비 대표는 어찌 됐든 좋다는 식으로 말없이 앉아있을 뿐이라 도움이 되지 않고.

아까부터 이 패턴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걸 보니 확실히 이종족의 성격이 독특한 거 같다. 우리나라 국회 같았다면 대번에 주먹다짐이 오갔을 거 같은데 말이야.

어쨌든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먹을 휘두를 생각은 없는지 우리나라의 억척스러운 아줌마들보다 더욱 억세고 강해 보이는 프라우드의 족장은 다시 입을 열어 아까 행동을 반복할 낌새라 그냥 신경을 꺼버렸다.

어찌 됐든 내일이 되면 내용을 알 수 있겠지.

……깊은 밤, 달도 서쪽으로 넘어가려 할 때 미리엔이 자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마치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반투명한 실크 란제리를 벗고 어두운색 계통의 셔츠와 바지를 입는다. 그리고 서랍장에서 위상력이 느껴지는 길이 30cm의 나무 막대기를 꺼내더니 허리춤에 갈무리하고 진갈색의 롱 부츠를 꺼내 신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집나무를 나섰다.

그 모습에 나도 눈을 뜨고 양옆에서 자는 미호와 히아리드를 살짝 떼어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 섬에서 깨우친 공간 지각의 변형 능력, 3차원 지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어도, 잠을 자고 있어도 마치 가상현실처럼 공간지각 범위 안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기술.

감시나 경계, 도촬과 스토킹에 특화된 능력이지만 공간의 벽을 만들 수 있게 된 뒤로 위상 세계에서 휴식을 취할 때 경계를 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고 누군가를 스토킹하거나 감시할 일도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미리엔의 움직임을 감시할 필요가 생기다 보니 3차원 지도가 생각났다.

덕분에 쉬면서 미리엔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3차원 지도를 쓰면 안 쓰고 있을 때보다 좀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생기긴 하지만 처음 분석 능력을 얻었을 때처럼 잠들지도 못하고 며칠을 깨어있었던 경험에 비하면 고작 이 정도쯤이야.….

아무튼, 설마 오늘 바로 문제가 생기겠어? 했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감시를 시작했던 건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어버렸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이야기가 이래서 나온 게 아닐까.

오늘도 다른 방을 놔두고 내가 자는 방에 몰려든 녀석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서 옷을 갈아입으며 미리 엔이 움직이는 걸 예의 주시했다.

…혹시 오늘 움직인 이유가 이 시간까지 중앙 성의 회의장에서 회의 중인 멜빈지안 때문이 아닐까?

다른 최고위급 하얀 나뭇잎 투사 중 절반은 자기 집나무에서 쿨쿨 자고 있고 절반은 임무에 따라 성벽에서 근무 중이라 현재 미리엔의 움직임을 파악할 만큼 위상력 감지 범위가 넓은 플뢰가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멜빈지안의 집나무 꼭대기 작은 방에서 관짝에 들어간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와이스가 보였지만 바로 신경을 꺼버렸다. 어제 일 이후로 자기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온 녀석인데 미리안이 움직이는 걸 알았다고 해서 나설 거 같지가 않다.

미리엔은 여러 번 다녀본 것처럼 익숙한 모습으로 플뢰 자경단의 순찰 코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평범하게 순찰 중인 모습으로 볼법한 장면이다.

애초에 미리엔의 직책이 치안장이기도 해서 누구한테 보인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지만 유독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저렇게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게 평범한 용무로 나온 걸 리가 없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가 의구심이 들어서 공간 도약을 펼쳐 집나무 밖으로 나온 뒤 공간 지각으로 미리엔의 위치를 파악하며 조심스레 뒤쫓다 보니 동쪽의 외성벽으로 향하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설마 외성벽 밖으로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하는데 성벽에 도착한 미리엔은 가볍게 벽을 타고 기어오르더니 훌쩍 넘어가 버린다.

헐, 설마 진짜로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성 밖으로 나가는 건 조종하는 놈과 연락을 하려고?

성벽 위를 순찰하는 경비병의 시야와 그들의 위상력 감지 범위를 피해 날래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당혹을 감출 수가 없어졌다.

도시 안에서야 다른 이종족들의 위상력 사이에 몸을 숨길 수 있어서 미리 엔이 눈치 못 챘지만 도시 밖까지 뒤쫓으면 미리엔의 위상력 감지에 바로 걸려들 텐데….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미호나 히아리드를 깨워서 데려올 걸 그랬다. 불견시의 비술을 받으면 괜찮을 텐데!

안 들키고 뒤쫓을 다른 수단은 생각나질 않아 공간 도약으로 녀석들이 잠들어있는 방으로 되돌아와 미호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깨웠다.

“미호야. 미호야.”

- 으, 우웅… 우응?

=…서하님?=

히아리드나 알케마가 깨지 않도록 살살 깨웠는데 히아리드까지 일어나버렸다. 미호는 졸린 눈을 비비다가 내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잠기운을 쫓아낸다.

“미호, 불견시 비술은 어디까지 익혔냐.”

- 어? 불견시… 아직 잘 못 다뤄서 나한테 걸고 30분 정도는 유지할 수 있어.

“나한테는 못 걸어줘?”

- 응. 숙련도가 낮아서 다른 사람한테는 못 걸어.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잠깐 기다려봐. 히아리드는 어때?”

=정신을 집중하고 가까이 있다는 조건에서 다른 개체에 건 불견시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너 자신도 포함해서?”

=네.=

“으음…. 미호의 능력이 다양해서 미호가 필요했는데 어쩔 수 없지. 히아리드는 바로 불견시를 써줘. 나와 함께 나가자.”

내 말에 히아리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정신을 집중해서 자신과 나한테 불견시를 건다. 저번 오트로스를 잡으러 갈 때 뤼아르네가 걸어줬던 것보다 느낌도 얇고 불안정한 데다 계속 정신 집중을 해야 해서 못 움직이지만 급하니 어쩔 수 없지.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히아리드를 등에 업자 미호는 진지한 내 모습에 말도 못 걸고 당황하고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와서 말해줄게. 자고 있어.”

- 으… 알았어.

바로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쳐 동쪽 외성벽 근처로 되돌아오니 역시나 미리엔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히아리드의 위상력 감지가 있지. 등에서 살짝 흘러내리는 히아리드를 추슬러 올리고 물었다.

“히아리드. 성밖에 빠르게 움직이는 위상력이 느껴져?”

=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내 목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던 히아리드가 진땀을 흘리며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킨다.

=직선으로 움직이는 위상력이 저 방향에서 느껴집니다.=

“좋아! 히아리드는 불견시가 절대 풀리지 않게 집중해 줘.”

=네.=

바로 공간 도약을 펼쳐 성벽 밖으로 나간 뒤 신체 강화를 돌리고 공간의 벽을 밟으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울창한 나무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중에 불견시를 유지하는 데 힘이 드는지 히아리드가 진땀을 흘리는 게 느껴진다. 얇은 잠옷이 땀에 젖고 있고 숨결도 거칠어지는 게 어지간히 힘든가 보다.

내 몸을 가리고 있는 불견시의 느낌도 점점 위태위태해지는 게 자칫 불견시가 풀리려는 느낌이다.

달리는 걸 멈추고 공간 도약과 땅을 달리는 것, 어느 쪽이 더 버티기 쉽냐고 물으니 공간 도약 쪽이 더 낫다고 말해준다.

=연달아 펼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그럼 한다.”

=네.=

단번에 6.75km를 도약하니 불견시가 크게 출렁이더니 풀리기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걸린 시간이 3초.

3초마다 공간 도약을 펼치자 히아리드의 하얀 얼굴이 표백되는 것처럼 희게 질리기 시작한다.

비술을 유지하는 게 그렇게나 힘이 드는 건가?

“조금만 더 힘내.”

=윽, 네, 네.=

그렇게 약 110km 정도를 이동한 뒤에야 미리엔을 발견할 수 있었다.

6.75km를 꽉 펼쳐 마지막으로 이동한 순간 저 앞에,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리엔이 서 있는 게 보여서 화들짝 놀랐지만,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다행히 들키지 않고 집채만 한 바위 두 개가 바짝 붙어있는 곳에 숨을 수 있었다.

“…….”

놀란 심장이 벌렁거리며 피를 확확 뿜어낸다. 입을 앙다물고 거칠어진 숨결을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등에 업혀있는 히아리드를 조심스레 내려 품에 안은 뒤 공간 지각으로 미리엔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미리엔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나보다. 챙겨온 위상력이 깃든 나무 막대기를 꺼낸 미리엔은 땅에 무릎을 꿇고 정체 모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0분에 걸쳐 일관성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괴상한 모양의 도형 같은 걸 완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상위급 위상석을 꺼내 잘게 부숴 그림 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ˇ˘˝˚˙…….=

……?? 위상석 가루를 뿌리면서 뭔가를 중얼거리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말도 아니고 흥얼거림도 아니고 한쪽 귓구멍으로 들어와서 뇌를 안 거치고 반대쪽 귓구멍을 통해 빠져나가 버리는 소리를 나직하게 읊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 눈여겨보고 있으니 미리엔은 위상석 가루를 다 뿌리고 나서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눈썹을 찡그리며 일단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우우웅.

도형 위에 뿌려진 위상력 가루에서 위상력이 뭉클거리며 뿜어져 나오더니, 도형을 시퍼런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안개처럼 뿜어져 나온 위상력이 한데 뭉치더니 무언가의 상반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화아악….

형체가 완전히 잡히는 것과 동시에 불쾌하면서도 그리운 느낌,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면서 욕지기를 일으키는 바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눈앞이 하얘지고 눈알을 찍어누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귓가에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가슴이 억죄이는듯한 통증을 견디고 있으니 혀끝에 비리고 쓴맛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씹어버렸는지 상처를 통해서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상처를 인지하니 입술에서 고통이 올라오며 가슴을 조이던 통증이 사라진다. 동시에 눈을 아프게 찌르던 통증도 사라지고 이명도 사라지며 오감이 원상태로 돌아온다.

입을 열면 거칠게 숨을 몰아쉴 거 같아 식은땀을 흘리면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이상한 도형 위에 나타난 상반신으로 공간지각을 돌렸다. 그 순간 명치에 벼락이 꽂힌 것 같은 전율이 온몸을 타고 지나간다.

“……!!”

그 상반신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푸른 피부의 악마의 모습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한국 근현대사에 기록될만한 날이네요.

헌법재판소에서도 하루 속히 42페이지의 주인공에게 확실한 제재를 가하길 빌어봅니다.

내가 썼는데 왜요.

우리 집 유령이 안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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