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1 껄끄러운 느낌 =========================================================================
=흐아아압!!=
축구장 세 개를 합친 것만큼 넓은 잔디밭에 도착해서 일광욕을 하러 나온 이종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푸른색 공간의 벽을 넓게 치고 알케마와 미호가 창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연습을 치른 지 한 시간하고 20분.
미호는 창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며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왔지만 알케마는 1시간이 넘도록 공간의 벽 속에서 수룡을 움직이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가득 넘쳐나는 잔디밭 한복판에 난데없이 반투명한 푸른색 공간의 벽이 나타났을 땐 연인들과,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일광욕을 즐기던 이종족들은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멀찍이서 살펴보더니, 알케마가 수룡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서커스를 구경하는 심심한 마을 사람들처럼 공간의 벽에 가까이 접근해 자리를 깔고 알케마의 물 쇼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 나보다 알케마가 쓰는게 더 효율이 높은 거 같아.
알케마가 대해의 창을 쥐고 수룡을 조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호가 아쉬운 표정으로 인정한다.
“그래?”
- 나는 단순하게 TP를 밀어 넣어서 물의 속성탄을 쏘아내거나 물의 속성을 쓸 때 tp 소비를 약간 줄여주는 정도밖에 효과가 안 났었는데 알케마는….
미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3m짜리 삼지창을 세워서 정신을 집중하는 알케마를 바라봤다.
=하아아앗!=
퀘에에에에엑!
알케마가 창에 TP가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면서 기합성을 지르니 몸길이 57m의 수룡이 괴성을(어떻게?!) 지르며 공간의 벽 내부를 날카롭게 휘젓는다.
수룡은 좀비 곰을 상대할 때보다 2.5배는 족히 커졌고 움직임도 물리역학을 무시하는 동작을 선보이며 알케마의 주변을 곡예비행을 하는 비행기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수룡의 꼬리가 알케마의 손과 연결되어있었던 점도 개선되어 완전히 개별의 객체가 된 수룡을 조종하는 알케마는 아주 신이 난 거 같다.
=물 속성에만 영향을 주는 대해의 창이니 알케마가 쓰는 게 가장 효율이 좋은 게 당연합니다. 마님들은 신체 강화 쪽으로 특화되신 분들이시니까요. 미호는 여러 속성을 상황에 맞춰 유동적으로 쓰니 대해의 창의 특화 기능은 오히려 방해만 될 겁니다.=
- 응. 맞아.
히아리드의 분석에 수긍하면서도 미호는 아쉬운 표정을 버리지 못했다.
정신없이 수룡의 조작에 몰두하는 알케마를 지켜보고 있으니 똑같은 경갑옷 복장을 한 다수의 고위급 이종족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공간 지각에 감지됐다.
=위상력에 비해 약한 감이 있는 알케마였지만 대해의 창으로 본신의 저력이 증대되면 서하님께도 도움이….=
“쉿.”
그중에는 미리엔도 있어서 히아리드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 입을 다물게 했다.
“미리엔이 오고 있어.”
미호는 내 모습에서 미리엔을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챘는지 눈썹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옆에 서 있던 히아리드가 날개를 자연스럽게 펄럭이며 그런 미호의 모습을 가려주었다.
“미호의 말을 듣고 난 뒤부터 미리엔이 어쩐지 신경 쓰이고 있어. 그녀 앞에서 될 수 있는 한 우리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자.”
- 아, 응.
소울 링크 능력으로도 감정을 알 수 없다는 점과 이 넓은 도시에서 꽤나 약속 없이 자주 마주친다고 생각하니 없던 의심도 절로 솟아나는 판국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미호도 내 말을 듣고 인상을 폈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인상을 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날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는데 갑자기 태도가 바뀌면 이상하게 느낄 테지.
=서하님? 이런 우연이 있네요.=
- …렌샤엔은 왜 자꾸 우리 따라다녀?
네 명의 고위 플뢰 족 전사와 함께 다가온 미리엔이 날 보며 살포시 웃자 미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며 톡 쏘듯이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아침때와는 확실히 누그러진 느낌이다.
그 모습이 내게 한번 혼났다가 자제하는 것처럼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연기라는 걸 알고 있는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요. 잔디 광장에서 민원이 들어와서 찾아온 거랍니다. 그러니까 저분은… 서하 님의 알케마 씨네요.=
- …흥.
역시나 미리엔은 이상함을 못 느꼈는지 변명하듯이 손을 저어 보이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푸른색 공간의 벽 안에서 수룡을 다스리고 있는 알케마와 녀석을 구경하는 이종족들을 보며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메리아놀의 종족들이 자주 찾는 휴식처에요. 저렇게 벽을 만들어놓고 수련에 힘쓰는 것은 도시민분들께 폐가 될 수 있….=
어디 보자. 나는 그럼 어떤 행동을 보여야 좋을까……. 살짝 시선을 내리니 얇은 천으로 만든 연하늘색 옷을 입은 미리엔의 쭉쭉빵빵하고 날씬한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휘이이잉.
지금처럼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실크처럼 옷감이 몸에 찰싹 달라붙으며 볼륨 있는 가슴과 잘록한 허리, 다리가 길어 몸이 짧아 보이는듯한 보기 좋은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나게 한다.
특히 가슴에는 브래지어 같은 젖가리개를 쓰지 않는지 유두 위치마저 눈에 보일 지경이라 눈이 매우 즐겁다.
그래. 대놓고 공간 지각으로 미리엔의 몸을 조사하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여기서는 호색한처럼….
=아.=
약간 주의가 있다면 누구라도 눈치챌 만큼 미리엔의 가슴과 사타구니를 눈으로 좇고 공간지각도 피부 표면을 훑으니 미리엔이 뭔가 느낀 듯 짧은소리를 내며 날 돌아본다.
“…어, 아하하.”
몰래 훔쳐보던 게 들켰다는 것처럼 멋쩍게 웃으면서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니 미리엔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순간적으로 무표정해졌다가 다시 미소를 짓는다.
옆에 있는 고위 전사들은 눈치채지 못한 거 같은데 미리엔을 예의 주시하던 미호와 히아리드는 확실히 감지한 거 같다. 나 역시도 예의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눈치를 못 챘을 만큼 순간적인 표정 변화였다.
화난 표정은 아니었는데 뭐였지? 뭔가 이상한 느낌인데….
내 행동이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미리엔은 바람이 불어와 몸을 휘감은 옷자락을 피고 맵시를 고치는데 기분 나빠한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서하 님. 죄송하지만 잔디 광장은 여러 종족들이 함께 쓰는 휴식 공간이랍니다. 원하신다면 플뢰 자경단이 사용하는 개인 연습장을 제공해드릴 테니 알케마 씨의 수련은 잠시 중단토록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럴게요. 미안해요.”
미안한 척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공간 지각으로 미리엔의 젖무덤과 사타구니 사이를 다시 한번 훑었지만 미리엔은 아무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내 공간 지각이 자신의 몸을 훑는 걸 확실히 느꼈을 텐데 아무런 내색이 없다니, 확실히 이상하다. 오히려 화를 내거나 날 작게 힐난하는 쪽이 평범할 텐데 말이다.
어쨋든 미리엔의 요구대로 알케마의 수련을 중단시키고 푸른색 공간의 벽을 회수하니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며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이 모습은 또 평범하기 짝이 없어 이제는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이쪽으로 따라와 주세요. 연습장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앞장서서 자경단의 수련장으로 안내하는 미리엔을 일부러 두어 걸음 뒤에 떨어져서 따라가며 다시 공간 지각으로 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다리 사이 계곡의 구멍과 국화꽃 같은 핑크색 항문의 주름을 세듯이 살피고 엉덩이골이 시작되는 꼬리뼈 부근을 긁는 것처럼 공간 지각으로 스윽 훑으니 순간적으로 걸음이 살짝 흐트러졌다가 자세를 바로잡는다.
=치안장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옆에 걷던 부관 같은 고위급 여자 플뢰가 이상하다는 듯이 미리엔을 돌아보자 미리엔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흔들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미리엔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할 만큼 놀랬지만 내 쪽으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걸어가길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몸을 훑기만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이제는 말을 걸면서 살펴볼 생각으로 내 팔에 달라붙은 미호를 떼어내고 미리엔의 옆에 서며 말을 걸었다.
“플뢰의 숲은 무척이나 아름답네요. 다른 눈으로 보는 풍경은 이곳에서 살고 싶을 만큼 평화롭고 나른한 느낌이에요.”
=그 말씀을 플뢰의 숲 정원사들이 듣는다면 무척이나 기뻐할 거에요.=
“숲을 관리하는 분들이 따로 있으신가 봐요?”
대화를 나누는 중에 끈질기게 미리엔의 목덜미와 쇄골을 공간 지각으로 훑고 밑가슴의 접힌 부분이라던가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과 탄탄한 아랫배를 농밀하게 더듬듯이 훑으니 미리엔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걸 캐치했다.
=그렇…지요. 숲을 가꾸고 도움이 필요한 묘목과 새싹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그분들의 임무이자 권한이니까요.=
정원사는 주로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플뢰들이 맡는다며 생활 터전인 숲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인 만큼 플뢰들은 물론이고 다른 종족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훌륭한 직업이라고 미리엔이 설명해주었다.
설명하는 미리엔에게 "네, 그렇군요.", "훌륭해요.", "우리 집 정원사분들도 보고 배웠으면 좋겠어요."하고 맞장구쳐주면서도 미리엔의 몸 구석구석을 조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플뢰 족 자경단의 연습장은 단단한 돌을 깎아서 바닥에 깔아놓은 일종의 대련장이었다. 그곳에서 미호와 알케마가 질릴 만큼 대련을 하는 동안 나는 미리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의 몸을 조사하는 것을 계속했다.
어디까지나 내 관심은 당신의 몸이라는 걸 알 수 있게끔, 하지만 다른 플뢰들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몇 시간을 살피고 또 살피며 미리엔이 곤란한 얼굴을 할 때까지 쫓아다닌 끝에야 이상한 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 주인님, 살펴보니까 어땠어?
해가 질 무렵이 되어 집나무로 돌아오자마자 몸에 묻은 먼지를 씻고 온 미호가 내 앞에 앉아 빗으로 꼬리를 빗으며 기대감을 띈 눈망울로 묻는다.
“으음. 이상한 점이라고 해야 하나….”
- 이상한 점?
그다지 신경을 안 썼을 때는 몰랐는데 성희ㄹ… 조사를 계속하다 보니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점이 느껴졌었다.
이상한 점이 느껴지는데 이게 어색함인지 뭔지… 어떤 점이 어색한지를 콕 집어서 설명하질 못하겠다는 거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미호보다 늦게 씻은 알케마가 위층에서 내려왔…는데 모습이 참 가관이다.
=미호. 옷 좀 말려줘. 옷이 다 젖어버렸어.=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늘어트린 채 물을 먹어 색이 진해진 하늘색 팬티만 입은 알케마는 큰 가슴을 출렁거리며 미호에게 다가가 흠뻑 젖은 흰 원피스를 내밀었다.
- 하아아. 너 진짜… 좀 이따 두고 봐.
=왜, 왜?=
저 녀석은 미호가 으르릉거리는 이유를 절대로 모르겠지.
- 네 능력으로 물기를 제거하면 되잖아!
철퍽!
=아푸!=
자기 머리보다 더 큰 알케마의 가슴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얼굴로 노려본 미호가 물을 잔뜩 빨아 먹어서 무거워진 옷을 알케마의 얼굴에 집어던져 버리자 알케마는 떨어지는 옷을 잡고 울상을 짓는다.
=나, 난 그런 세밀한 작업은 못 해. 옷이 찢어질 거야.=
- 으이구!
답답하고 짜증 난다는 듯이 자기 가슴을 콩콩 두드리는 미호가 알케마와 툭탁거릴 동안 보기 좋은 알케마의 나신을 구경하며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공간 지각으로 살펴본 미리엔은 뭔가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졌었어.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느낌이라 나중에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살펴볼 거야.”
- 으음. 그럼 그동안 난 다른 하얀 나뭇잎 투사들을 소울 링크로 투영해볼까?
옷이 머금고 있던 물은 물론이고 알케마의 젖은 몸도 말려준 미호는 내 앞에 주저앉아 날 올려다보며 묻는다.
“다른 투사들도 혹시나 미리엔 같을까 봐?”
- 응. 어쩌면 소울 링크를 막는 비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주인님 말대로 표본과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저기… 서하님?=
“그건 좋은 생각이긴 한데… 감정의 벽은 확실히 세울 수 있지?”
- 세울 수 있어. 한 번에 열 명은 무리지만 하루에 두 세 명씩은 해볼게.
=미호야.=
“그래. 정신적으로 과부하가 걸리는 거 같으면 바로 중단하고 천천히 해.”
- 응!
=미호야아. 무시하지 마아.=
- 아우 진짜! 주인님이랑 중요한 이야기 중이잖아! 좀 기다려!
찰싹찰싹.
=힉.=
주섬주섬 원피스를 입은 알케마가 옆에서 자꾸 알짱거리며 말을 거니 미호가 짜증이 한 트럭이라는 얼굴로 알케마의 커다란 젖가슴을 좌우로 때리며 신경질을 부린다.
=아니, 아까 주인님…이 아니구 서하 님이 말씀하신 거 때문에 나도 할 말이 있어서…!=
“내가 뭐?”
짜증 난 미호의 폭풍 젖따귀에 당혹한 얼굴로 두 팔을 들어 가슴을 막는 알케마를 돌아봤다.
“내가 방금 말한 거라니, 미리엔이 이상하다고 한 거?”
=예. 서하 님이 미리 렌샤엔에게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걸 느껴서요.=
“호오. 그래? 니가 보기엔 어땠는데?”
=잘 교육받은 동물 같았어요.=
뜻밖의 대답에 의아해서 녀석을 빤히 쳐다보니 미호도 알케마의 가슴을 때리는 걸 멈추고 녀석에게 물었다.
- 동물? 조교라도 받았단 말이야?
=조교가 뭔지 모르겠지만, 미리 렌샤엔이 서하 님의 행동에 보여주는 반응을 보면, 외부의 자극에 훈련받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었어. 그 중간마다 대응법을 몰라서 멈칫하거나 잠시 행동을 멈추는 모습도 있었고.=
그 설명에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며 어긋나있던 퍼즐이 딱딱 맞춰가는 듯한 정신적 쾌감이 전두엽을 찌르르 울린다.
“맞아! 내가 느낀 건 어색함이 아니라 위화감이었어! 1234567890 같은 숫자의 나열에서 중간중간 숫자가 빠진 12356790 같은 느낌이었던 거야!”
- …그럼 내가 소울 링크로 렌샤엔의 감정을 알 수 없었던 건 뭐 때문이었던 거야?
그리고 미호의 질문에 뒷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이 밀려왔다.
“소울 링크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 무생물 아니면 죽은 시체뿐이지.”
- 응. …어?
“그리고 알케마는 미리엔의 행동이 잘 교육받은 동물 같았다고 했고. 그 말은 미리엔이 누군가에게 행동지침을 주입받은….”
- …인형?
=이, 인형? 미리 렌샤엔이?=
알케마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미호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는데, 미호의 말대로 인형이라면 내가 느낀 위화감에 대한 설명으로 맞아떨어진다.
감정이 거세된 인형이라면.
날개 때문에 씻느라 오래 걸린 히아리드가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미리엔에 대해서 오간 이야기를 해주니 담담한 얼굴로 이 일의 핵심을 짚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미리엔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게 누구 인가군요.=
=헤뷜트의 역사 기록보관실에서 사령 술사들을 기술해놓은 걸 본 기억이 있어요. 그것들이 렌샤엔을 사자死者로 일으켜 세운 건 아닐까요?=
“언데드는 아니야. 내가 세 시간 동안 미리엔을 따라다니면서 공간 지각으로 몸 안팎을 꼼꼼히 조사해봐서 확신하는데, 절대 죽은 몸은 아니었어. 심장도 뛰고 혈액도 순환하고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몸이라고. 거기에 미리엔이 언데드였다면 우리가 아니라 미리엔의 동료들이 진작에 눈치챘겠지.”
언데드가 풍기는 느낌을 생각해보면 진작에 들켜도 들켰을 거다. 거기다 이든은 플뢰의 대신관大神官이라고 했잖아. 내가 아는 판타지적인 신관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와 동족을 구분도 못할 만큼 머저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서 히아리드가 빛의 구슬을 천장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중요한 점은 다른 플뢰가 미리 렌샤엔의 상태를 알고 있느냐와 미리 렌샤엔의 진짜 목적인 거 같습니다.=
- 언제부터 그 상태였는지도 중요하지 않을까?
“음. 그 시기를 알아낸다면 목적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것들을 알아낼 방법도 문제네.”
눈을 감고 나무덩쿨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고민하고 있으니 알케마가 미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면서 묻는다.
=그냥 한밤중에 서하님이 공간 도약으로 미리 렌샤엔을 납치해오면 안 돼?=
- 렌샤엔의 뒤에 어떤 악당이 있을지 모르는데 막 납치해오면 참 일이 잘 풀리겠다. 그치?
=….그, 그렇군.=
정신 조작도 인형 같은 상태에게 통할지 의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미호의 매혹도 마찬가지겠지. 그럼 그 외에 쓸 수단이라고는 알케마의 말처럼 납치를 하거나 고문을 하거나….
고민해봤지만, 마땅히 마음에 계획이 생각 안 난다.
=미리 렌샤엔 그녀 자체에 접근하는 방식은 무리겠습니다. 그녀와 관련된 자들에게 차근차근 접촉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거 같습니다만. 서하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시 그 방법이 제일이겠지? 적당한 대상이라면 역시 투르발과 피아브려나.”
=그런데 서하님. 우리가 미리 렌샤엔의 뒤를 캐야 할 이유가 있는거에요?=
“……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알케마를 돌아보니 자기 머리에 난 뿔을 만지작거리면서 잘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로 말을 꺼낸다.
=미호가 미리 렌샤엔을 까칠하게 대하는 거에서 시작된 거긴 한데, 미리 렌샤엔이 인형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서하 님한테 피해가 오는 게 있나 해서요.=
…알케마의 질문에 허점을 찔린 기분이다.
============================ 작품 후기 ============================
506화에 나왔던 이든의 직위 - 신관을 대신관으로 수정했습니다.
언제나 보러와주시고 추천, 댓글,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