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9 껄끄러운 느낌 =========================================================================
현실과 관련된 부분은 빼고 백청과 싸우게 된 원인과 죽이게 된 경위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투르발과 피아브는 백청을 죽이게 된 경위보다 내가 대해의 주인, 백청이 아민-라 라고 칭한 존재를 만났다는 이야기에 두 눈을 부릅뜨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 미리엔은 생각보다 놀란 모습이 아니다. 놀라기는 했지만,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진 투르발과 피아브와 비교하면 안 놀란 거나 마찬가지지.
만약 대지의 주인인 랑그 드란과 만났다고 하면 크게 놀라려나? 그래도 그건 이들이 믿어줄 거란 보장도 없으니 그냥 말아야겠다.
이들은 백청을 죽인 증거가 있으니 아민-라를 만났다고 한걸 믿어준 거겠지.
=그, 그런 일이 있었나. 그렇다면 자네에게 명분이 있는 것이 확실하군…. 잘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떠들어서 다시 한번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사과를 받아줄게요.=
=하아. 역시 서하 정 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군요. 휜델님의 무례를 받아주신 것도 모자라 이번 일도 눈감아주시다니요.=
=크흠! 하지만 이 뼈와 가죽이 백청 님의 몸에서 난 것이라면… 나와 피아브의 독단으로 가공할 수는 없을 거 같네. 정히 가공을 바란다면 프라우드 평의회에 이 사실을 알린 뒤 메리아놀 총의회까지 안건을 올려야 할 거 같아.=
투르발은 미리엔의 말은 들은 체 만 체하며 내가 들고 있는 백청의 뼈와 가죽을 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속내는 이걸 가지고 온 힘을 다해 제작해보고 싶은데 차마 종족 윤리상 손대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곤란하네요. 메리아놀을 찾은 이유 중에 하나가 이걸 무기와 방어구로 가공했으면 해서 찾은 건데 그렇게 의회에 안건까지 올려야 할 사항이라니…. 올리고 허락을 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건 걱정 말게. 이만한 안건이라면 최중요 사항으로 하루 안에 끝날걸세.=
“허가가 날 가능성은요?”
=그, 글쎄… 그건 확답을 내주기가 좀….=
자신 없다는 얼굴로 말하는 투르발을 보니 슬쩍 경쟁의식에 불을 좀 지펴야 내가 편해질 듯한 분위기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든이 이런 말도 했었지?
“음. 그러고 보니 이든 씨가 이곳을 가르쳐줄 때 이곳 외에도 신록의 숲이라는 곳을 소개해주면서 플뢰 장인분들한테도 맡겨보라고 하시던데….”
=뭣이!?=
“제가 가진 재료라면 완성품의 질적 면에서는 석장에 밀리지 않는 완성도를 가진 아이템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하던데요.”
=뭐라!=
내 말에 순간적으로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을 지은 투르발과 피아브는 불같이 노한 표정을 지으며 펄펄 뛰기 시작한다.
=그네들의 손재주가 암만 우리와 비견된다 하지만 초강력한 화력을 다루는 우리에게 비하면 한 수 밀리는 처지일세!!=
=재료의 순수함을 끌어올리는데 얼마나 강한 불의 힘이 필요한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 숲을 소중히 여기는 그네들에게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불의 정수를 우리만이 맛보여줄 수 있다 이거야!=
한참을 펄펄 뛰던 두 프라우드는 이 자리에 플뢰가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서 험험 하며 이미 다 잃어버린 체면을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허가가 날지 안 날지 모른다면 저쪽에 가보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제가 불확실한 사정에 기대기엔 시간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걱정 말게! 내가 직접 가서 담판을 지어 보이겠네! 오히려 나중에 서로 제작을 맡겨달라고 자네에게 달려들 텐데 그 일이나 걱정하게!=
오호. 이렇게 쉽게 넘어와 주시다니, 감사감사.
=그럼 이걸 잠시 내게 맡겨주게. 평의회와 총의회의 늙은이들을 설득할 증거품이 필요하니까 말일세.=
“그러죠. 여기다 두고 갈까요?”
=아닐세. 지금 바로 가디발 프레빌 의장을 만나러 갈 생각이니… 어디 보자.=
투르발은 구석에 수북히 쌓인 잡동사니를 뒤적거리더니 커다란 자루와 불그스름한 가죽이 덧대여진 상자를 가져와서 백청의 갈비뼈 조각과 가죽을 건네받더니 조심스럽게 포장한다.
이들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백청의 뼈와 가죽을 이렇게 무방비하게 맡기진 않았을 테지만 내 명성(악명?)을 잘 알게 된 이들이라면 빼돌리거나 하는 수작은 안 부릴 거다.
뭐 가지고 있는 수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기도 하고.
피아브는 투르발이 가죽과 뼈를 챙기는 모습에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돌려 벽에 붙은 가열로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가열로에 달라붙었다.
=어엇! 투르발! 가열로가 죽었어!=
=뭬야?! 가열로가 왜 죽어!=
=뼈! 백청 님의 뼈에서 나온 냉기 때문이야!=
=카~! 멍청한 자식! 가열로에 신경을 안 쓰고 뭐한 거냐!!=
=머리통을 망치로 두드리는 이야기에 가열로를 신경 쓸 틈이 어디 있었다고! 투르발도 넋을 놨잖아!=
=크으. 내가 다녀올 동안 가열로를 어떻게든 살려놔!=
=끙!=
피아브가 완전히 불씨가 죽어버린 가열로를 되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투르발은 침통한 신음을 흘리다가 미리엔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플뢰 처자. 주문한 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어.=
=…괜찮습니다. 그래도 가능한 한 빨리 제작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밤을 새워서라도 최대한 빨리 맞춰주겠네.=
크오~… 가열로를 죽이다니, 이거야 야장의 이름을 내려놓아야 할 지경이구먼…. 하고 한탄하는 피아브를 두고 멀뚱히 서 있는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를 데리고 제작실을 나서니 투르발과 미리엔도 뒤따라 나오며 내게 물었다.
=그럼 나는 이걸 들고 바로 평의회로 가보겠네. 결과는 어떻게 알려주면 되겠나.=
=서하 정 님은 플뢰의 숲 여행자의 첫 번째 안식처에 계시니 그쪽으로 전령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어디로 와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날 대신해 미리엔이 대신 설명해준다. 내가 쉬었던 집나무가 플뢰의 숲 여행자의 첫 번째 안식처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었군.
가디발의 석장을 나오니 투르발은 주차장에 매여져 있던 두 마리의 늑대가 이끄는 마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사라지고 미리 엔도 늦었다며 먼저 플뢰의 숲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메리아놀을 구경하고 싶으신 만큼 구경하시다가 피곤하시면 어제 묶은 트리하우스에서 쉬시면 됩니다. 식사는 3층의 식량 창고가 언제나 채워질 테니 드시고 싶으신 만큼 드시면 될 거에요.=
…그냥 놀라는 이야기에 벙쪄서 플뢰의 숲으로 돌아가려는 미리엔을 다시 붙잡고 물었다.
“잠깐만요. 다른 의장들을 만나야 한다는 건 어떻게 해요? 그냥 무작정 찾아가면 되는 거에요?”
=아, 그것도 백청님의 부산물을 가공하는 안건과 겹쳐서 의장님들이 서하 정 님을 찾아오실 거에요. 그게 아니더라도 멜빈지안님처럼 초청이 있을 것이니 편히 기다리시면 될 거랍니다.=
“그럼 보석 공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제가 찾아서 해야 할 일 같은 건 없다는 건가요?”
=네. 손님께 일을 시키는 예법은 메리아놀에는 없답니다.=
마음 같아서는 메리아놀의 관광 안내를 직접 해드리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미리엔은 떠나갔다.
으음. 옷이 얼마나 얇으면 뒤태가 저렇게 훤히 다 보이지? 끈으로 된 팬티 라인까지 드러나는 연하늘색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뒤에 선 녀석들을 돌아…보니 미호의 얼굴색이 조금 안 좋다.
거기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슬쩍 시선을 피하는데 언제나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하게 서 있던 여우귀가 반쯤 축 늘어져 있었다. 아까 자기 때문에 내가 곤란 해하고 있다는걸 알게 된 뒤로 쭉 저 모습이다.
강아지가 주인과 놀다가 힘 조절 못해서 피가 나는 상처를 입히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저, 서하 님?=
“어?”
기가 죽은 미호를 보고 있으니 알케마가 살짝 기대감이 솟은 얼굴로 날 부른다.
=여기서 북쪽에 호수 공원이 있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래요. 마침 할 일이 없어졌으니까 구경 하러 가지 않으실래요?=
“야. 솔직하게 메리아놀에서 거주하는 사비 보러 가고 싶다고 말해. 어디서 은근슬쩍 관광 핑계를 대냐.”
=윽.=
뻔히 보이는 꼬드김에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찰진 엉덩이를 때리니 찰싹하고 기분 좋은 감촉과 함께 찰진 손맛이 느껴진다.
메리아놀에 들어오기 전에 혼자 다니지 말라는 주의를 줘서 그런지 나름 머리를 굴린 거 같은데, 같이 갈 사람이래 봤자 히아리드와 미호 뿐이다.
하지만 알케마에게 있어서 히아리드는 가까이 가기도, 멀리하기도 애매한 상대고 그나마 죽이 맞는 미호는 아까부터 기가 죽어서 의욕이 바닥을 치는 상태라 같이 구경가자고 하기 신경 쓰여 그랬겠지.
“넌 얼굴에 속마음이 다 드러나니까 속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해. 응?”
=예에….=
알케마는 내 핀잔에 울상을 지었지만 미호의 손을 잡고 북쪽으로 향하자 좋다하고 활짝 웃는다.
공간 지각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프라우드의 주택가 골목길을 걷고 있으니 시무룩한 표정의 미호가 손을 꼬물거리며 내 손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몸짓을 보였다. 동시에 조금 더 세게 잡아달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도 엿보인다.
이대로 그냥 손을 놨다간 더욱 우울해 할게 뻔하지. 내 손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작고 보드라운 손을 꼭 잡아주며 녀석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호야.”
- 응….
“아무래도 히아리드는 시어머니 포지션이지?”
- ……?
미호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옅게 웃고 있는 히아리드를 돌아본다.
“실수는 어린아이의 특권이야. 그리고 넌 아직 어리니까 얼마든지 실수해도 괜찮아. 겉모습은 다 컸지만 넌 아직 세 살도 안 됐잖아? 그러니 실수하더라도 히아리드나 프랑한테 한 번 혼나면 돼.”
- 그치만 주인님을 곤란하게 했는데….
“그까짓게 뭐라고. 미리엔의 도움 같은 거 안 받아도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었어. 1층에서 아무 야장이나 붙잡고 백청의 부산물을 보여줬으면 상급 야장이나 명장들이 우르르 뛰어 내려왔을걸? 아니면 우리 미호는 내가 미리엔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사람으로 보였어?”
- 아,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좌우로 젓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너무 기죽지 마. 미호는 기운 넘치는 게 제일 보기 좋으니까.”
- 으응.
좀 두서없는 달래기였지만 기죽은 미호에게는 효과적이었는지 얼굴이 한결 밝아지며 반쯤 늘어져 있던 여우 귀도 살짝 솟아오른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꼬리들도 보송보송하게 솟아오르는 걸 보며 생각했다.
미호의 행동은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사회적 관계 방식이다.
어린아이들은 보통 자기중심적이고 의존적이기 마련이다. 어릴수록 사랑을 받고 독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지 그것을 나눈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질 못한다.
미호가 미리엔을 대하는 행동에서 그러한 어린아이의 이기심을 발견했을 때 막무가내적인 성격으로 자라기 전에 단호하게 교육할 생각이었다.
명색이 최고위 아종에 종족적인 능력도 최고급이다.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자라난다면 가족을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하지만 내가 자기 행동에 곤란 해한다는 이유로 잔뜩 기가 죽은 모습을 본 순간 그럴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른의 이기적인 성격이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다면 히아리드의 말을 들었을 때 까칠한 반응을 보이거나 되려 나에게 섭섭하다는 감정을 보였겠지.
고작 한마디 지적을 당했다고 풀이 죽을 만큼 마음이 약한 녀석인데 어떻게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크겠어.
그래도 궁금한 점이 있어서 안색이 펴진 미호의 뺨을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그런데 미리엔은 왜 그렇게 싫어한 거였어?”
- 우웅. 그게….
“그게?”
이걸 말할까 말까 잠깐 고민하던 미호는 '에이 모르겠다!'하는 얼굴로 자기가 미리엔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 처음에는 주인님한테 웃고 눈웃음 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도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이해하려고 했는데….
미호는 주인님인 나한테 접촉하려는 여자들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짜증 내면 내가 싫어할 거란 생각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왔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어째서인지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솟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미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아무리 봐도 불여… 렌샤엔의 행동은 주인님한테 단순히 호감을 느낀 걸로는 안보였어. 굉장히 미심쩍게 느껴졌는걸.
그런 마음이 내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는 미리엔의 모습에서 폭발하듯 커져 버려 한동안 소울 링크를 안 썼으니까 아주 얕게, 그리고 잠깐만 쓰는 건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미리엔의 마음을 투영해봤다고 한다.
- 근데 아무것도 안 느껴졌어.
“뭐?”
- 감정을 투영하면 아무리 무감정한 사람이라도 한 가지 감정 정도는 느껴졌단 말이야. 영은 같은 경우에는 머리가 팽팽 돌아갈 정도로 많은 생각이랑 감정이 전달되는데 렌샤엔은 그런 게 전혀 안 느껴졌어.
마치 한지에 먹물을 부은 것처럼 새카만 느낌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미호가 소울 링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안 뒤로 그 능력에 대한 교육과 조언을 하기 위해서 프랑과 함께 소울 링커에 대한 학술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봤었다.
그중에는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가 한 가지 이상의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감정이 없는 존재는 시체나 무생물일 것이다. 라는 항목이 있었던 것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하다못해 개미한테 소울 링크를 투영하게 했을 때도 옮기자! 라던가 먹자! 라던가 찾자! 라는 감정이 느껴졌다고 했는데 그보다 고차원적인(개미에 비해서) 존재가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고?
“뭔가 방어 능력 같은 거에 막혔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 아니야~. 주인님이랑 소울 링크를 쓰고 막기 연습할 때랑은 완전히 달랐단 말이야. 가려져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느껴졌어.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황당한 기분에 걷는 걸 멈추고 미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니 초롱초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은빛 눈동자가 내 눈을 주시한다. 이런 내용을 농담이나 거짓말할 아이는 절대 아니다.
“흠. 그래서 미호는 그렇게 미리엔을 싫어했던 거구나? 감정도 안 느껴지고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불쾌했던 거지?”
- 응….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그래.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그전에 먼저 나한테 말을 해줘.”
- 응!
솔직히 털어놨더니 개운해졌는지 아까보다 더 표정이 밝아진 미호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서하 님. 그 부분에 대해 조금 조사를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은 예감이 듭니다.=
옆에서 모두 듣고 있던 히아리드는 나쁜 예감이 드는지 굳은 얼굴로 말하기에 끄덕여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야겠지. 나도 조금 신경 쓰여.”
=네.=
좀 복잡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놈의 메리아놀은 얼마나 넓은 건지 지구地區와 지구 사이를 걸어서 이동하려니 한 번에 40분씩 걸릴 정도다. 달리기에 가까울 만큼 빠르게 걷는데도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온갖 마차와 이종족들이 오가는 중앙 성과 서쪽 외성벽을 잇는 서쪽 대로(이름도 서부대로西部大路다.)를 건너 호수 공원 외곽의 숲에 들어서니 청량한 물 냄새와 함께 찰랑대는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호수에서 파도 소리를 듣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으니 알케마는 길다란 용 꼬리를 좌우로 붕붕 휘두르며 미호와 함께 숲 안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호수 공원에는 어지간한 도시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호수가 지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호수의 밑바닥에는 1,700명이 조금 넘는 해비가 살고 있었고 호반과 호수에 띄엄띄엄 떠 있는 섬에는 2,900에 달하는 사비들이 살고 있었다.
호수가 큰 만큼 사는 민물 고기도 많았는데, 잘 보니 해비들이 그 담수어를 기르고 있었다.
골반 아래쪽이 물고기인 여자 해비가 초음파로 수백 마리의 물고기 떼를 조종하며 먹이를 주고 운동을 시키는 모습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미호가 알케마와 함께 싸돌아다니며 배를 타고 낚시중인 사비와 해비를 붙잡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햇볕이 따스하게 드는 양지바른 잔디밭에 히아리드를 앉히고 녀석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아~~~~.”
온 몸으로 광합성을 하는듯한 느낌을 만끽하며 뒤통수로 말랑말랑한 히아리드의 허벅지 감촉을 느끼고 있으니 오만 생각이 다 밀려든다.
백청의 뼈랑 가죽이 왜 그렇게 변한 거지? 미호가 말한 미리엔의 일도 신경 쓰이고 연인들도 보고 싶다. 히아리드가 해준 목욕탕 서비스의 후편도 받고 싶다. 와이스를 좀 더 괴롭힐 방법은 없을까, 보석 공주는 어떤 모습일까, 볼굴은 어디에 숨어있을까, 무기랑 방어구 제작은 어떻게….
“읍.”
고주파음을 내듯이 고저차 없이 ㅏ 소리를 수 분간 내고 있으니 히아리드의 예쁘고 하얀 손가락이 내 입술을 살짝 꼬집는다.
=마음이 심란해 보입니다.=
“프우.”
큰 가슴 너머로 날 내려다보는 히아리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입바람을 세게 뱉으니 입술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떠나간다. 그 손을 낚아채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여유가 생기니까 별게 다 생각나서 그래.”
=기다리기 지루하시면 이대로 공간 도약을 사용해 보석 공주를 만나러 가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메리아놀의 의회에서 항의와 분노를 표시하더라도 대지의 주인과 조우했었다는 말과 함께 갈 길이 멀기에 시간이 없다 하면 저들도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걸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닌데, 그렇게 해서 얻을 시간적 이득과 의장이라는 자들의 호감도가 떨어지고 그 뒤에 이어질 불이익을 계산해보면 안 좋겠더라고.”
가디발의 석장에서 본거지만 현실에서는 무기와 방어구에 위상력을 주입조차 못 하는데 그곳에서 대량 생산되는 것들은 하나같이 적게나마 위상력이 깃들어있었다.
무기의 질 같은 건 모르겠지만, 날이 번쩍번쩍하고 튼튼해 보이는걸 봐서 무기 자체의 성능도 좋겠지. 그러니 가능하면 메리아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기와 방어구를 거래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 무기와 방어구를 현실로 가져와서 그랑블루 소속 능력자들에게 무장시켜놓으면….
생각만 해도 좋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을 푹 쉬니 히아리드 특유의 구름 같은 채취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반사적으로 내 아래에 깔려서 몸의 중심을 들락거리는 고기 막대에 울듯말듯한 표정으로 하앙거리던 모습이 생각나면서 하반신에 힘이 불끈하고 들어가 버렸다.
…그걸 숨기기 위해 슬쩍 다리를 꼬았지만 히아리드의 이목을 속이기엔 이미 늦은 거 같다.
히아리드는 귓볼이 살짝 붉어진 모습으로 저 푸른 하늘에 홀로 흘러가는 작은 구름을 봤을 때처럼 미소 지으며 내 뺨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우와! 물고기 엄청 커!"
"되게 맛있어 보이는군!"
"...하, 한 마리 드셔보실래요...?"
""고마워!! 근데 한 마리 가지고는 부족할 거 같아.""
"여, 여기 하나 더 가져가세요."
""우리 일행은 네 명인데...."
"그냥 다 가져가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