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7 메리아놀의 도시. =========================================================================
멜빈지안의 집나무를 나와 플뢰의 숲을 걸으며 주위를 돌아보니 무척이나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빛이 내려쬐이는 햇살이 숲속을 밝게 비추는 이곳은 마을에 숲이 합쳐진 독특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겉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띄엄띄엄 무질서하게 자라있고 땅에는 푸른 잔디가 촘촘히 깔린 숲이지만, 나무 속에는 집이 존재하지만, 나무가 죽은 것은 아니다.
나무 속에는 수액이 흐르고 나뭇가지에는 싱싱한 나뭇잎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어 죽어있는 숲이 아닌 생명력이 충만한 숲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에 뚫려있는 옹이구멍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나며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온다. 집나무 입구 한 쪽에 나 있는 꽃밭에 물을 주는 플뢰 여성이 있는가 하면 꼬마 아이들은 나무작대기를 들고 웃으면서 뛰어다니고 플뢰 족 노부부는 햇볕이 드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 그런 꼬마들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반바지만 입은 털이 덥수룩한 고등어 무늬 고양이 인간이 모는 우마차를 옆으로 피하면서 우마차에 가득 담긴 우유 통 같은걸 구경하다 보니 짧고 튼실해 보이는 프라우드 족 남자들이 자기 덩치에 2배는 될 법한 짐을 짊어지고 곁을 스쳐 지나간다.
무슨 짐인가 궁금해서 공간 지각으로 짐을 훑어보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두 장의 날개를 가진 플라비우스 족 여성이 날개를 퍼덕이며 머리 위를 날아가길래 고개를 들었더니 치마 속 하얀색 팬티와 속살이 고스란히 보인다.
“…….”
=…….=
조금 치렁하고 헐렁한 토가 드레스를 입어서 치마 속을 다 볼 수 있었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플라비우스 족 여성은 잠깐 날 돌아봤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얼굴로 여섯 날개를 가진 히아리드와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는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플라비우스 족은 수치심을 모르는 게 아닐까? 히아리드가 슬라임 형태를 하고 있던 암흑이에게 스스럼없이 생식기를 조사하게 해줬던 점을 생각해보면 틀리진 않을 거 같은데.
어느 소나무 형태의 집나무 옆을 지나가면서 사비 족과 플뢰 족이 약초꾸러미를 들고 흥정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으니 알케마가 옆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서하 님.=
“왜?”
=정말로 프라우드 족을 찾아서 백청 님의 부산물을 가공해달라고 하실 생각이세요?=
알캐마의 말투는 극존칭과 평칭을 오락가락하더니 점점 예전처럼 평범하게 변해가는 거 같다.
“어. 그럴 생각으로 뼈하고 비늘, 가죽 같은걸 좀 챙겨온 거야. 뭐 문제라도 있냐?”
사비 족과 플뢰 족이 거래하는 약초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서 기억해두며 묻자 머뭇거리는 게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왜 그러는데? 하면서 재촉하니 알케마는 생각하길 포기한 표정으로 '에이 모르겠다.'하며 물었다.
=서하 님이 획득하신 부산물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백청 님의 부산물을 이종족에게 제공하는 건 조금… 그러니까….=
“명색이 너희들의 제사장이었는데 죽이고 그 시체를 마구 이용하는 게 좀 껄끄러워?”
=예에….=
“그럼 멜빈지안 스트로커한테 선물로 준 비늘 조각도 마음에 안 들겠구먼.”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좀 그분의 신성이 훼손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마음이 쓰이는지 꼬리까지 축 늘어진 알케마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신성은 개뿔.”
녀석의 이야기에 멜빈지안의 집에 있었던 마지막 일을 떠올렸다.
볼굴이라는 말을 들은 멜빈지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여주었고 와이스와 이든, 이두나는 안색이 굳어버린 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역시 볼굴의 악명은 유명하다는 걸 그들의 표정에서 재확인하고 있으니 멜빈지안은 무슨 생각을 한건지 모를 표정으로 내 얼굴을 잠시간 살피고서는 신중해진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놈들…이라고 칭한 것을 보았을 때 그것들을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는듯하군요. 이유를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절 낳아주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하고 제 삶을 비튼 놈들이에요. 호의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죠.”
=그 말씀은 복수를 위해서 찾는다는 뜻입니까?=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확인차 묻는 모습에 간단히 대답했다.
“네.”
=…….=
대답을 들은 멜빈지안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든다. 가만 보니 나만 빼고 식사는 다들 끝마친 거 같아서 얼마 남지 않은 샐러드를 포크로 모두 찍어 입으로 가져가고 우물우물 몇 번 씹은 뒤 남은 와인을 들이켜 넘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미호가 과일 조각을 내밀기에 입으로 받아먹으니 멜빈지안도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눈을 뜬 뒤 호의적인 모습으로 "의회에서 보석 공주의 알현 허가를 긍정적인 견해에서 의사 표시를 하겠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멜빈지안의 그 결정은 나에게 조금 의외였다.
와이스가 개 맞듯이 처맞는 모습은 나야 통쾌했지만, 아들의 팔다리를 부러트려야만 하게 만든 내게 사적인 원한을 가지고 감정적으로 나오진 않을까 조금 걱정했거든.
걱정한 이유도 현재 내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여서(스트레스를 조금 풀었지만,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다.) 이 이상 분노를 느꼈다간 더는 못 참고 메리아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거 같다는 걱정이었다는 건 비밀이다.
어쨌든 호의 어린 대접을 받고 나의 보석 공주 알현에 대한 의제에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대로 대화를 끝내기에는 좀 거시기한 기분이 들었다.
호감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한 상대에게 호감을 받았더니 내 쪽에서도 뭔가 해줘야 할 거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나름 뭔가 선물(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다.)을 할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아공간에서 손바닥만 한 백청의 비늘 조각을 꺼냈다.
원래는 내 키보다 더 큰 비늘이지만 나와 프랑과 싸우는 통에 조각조각 난 비늘도 많았기에 그중에 한 개를 선물로 준거다.
군청색이었던 비늘이 약간 색이 변한 거 같이 느껴졌지만, 곧 착각이겠거니 하고 멜빈지안에게 선물로 주자 멜빈지안은 예의상 고맙다는 말로 비늘 조각을 건네받았다.
초이스에 실수한 건가 하다가 혹시나싶어 우리가 쓰는 이형종 분류법을 가르쳐주며 초위급 이형종의 비늘 조각이라고 알려주니 멜빈지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푸른빛을 영롱하게 뿌리는 비늘을 보며 놀라워했다. 그제야 선물(뇌물)로서 의미가 충분히 전달됐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고 멜빈지안에게 인사를 한 뒤 이든과 이두나와 함께 집을 나왔다.
소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잠시 같은 길을 걸어가길래 멜빈지안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줄 줄 몰랐다고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죠?=
“그야 그의 아들이 나와 관련된 일로 벌을 받게 됐으니까요.”
내 대답을 들은 이든은 잠깐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무언가 눈치챈듯한 얼굴로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대의 종족은 행동의 결정적인 측면에 다소의 감정이 개입되나 보네요?=
그러면서 이든은 자아의 시련을 마친 플뢰라면 공적인 일에는 절대 사적인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의회의 의장을 맡을 자라면 더욱 이성적이어야 해요. 오히려 스트로커 님은 정 님이 휜델 님의 철없고 생각 짧은 행동에도 격노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한 거에 높은 점수를 매기셨을 거에요.=
“그런가요?”
=이성적인 메리아놀이라면 그런 식의 무례한 행동은 결코 참고 넘기지 않아요. 만약 능력이 있는 다른 종족의 고위 인사가 그런 대우를 받았다면 휜델 님은 틀림없이 죽거나 그에 이르는 빈사 상태가 되었을 거에요.=
아… 그때 그냥 뒈지게 두들겨 팼어도 괜찮았던 거구나. 오히려 포박하듯 묶어놓아 버린 게 고위급의 플뢰 족 전사들한테 오해를 산 거였군.
그러면서 메리아놀을 위험하게 만든 와이스의 행동에 대한 형벌은 의회에서 의제로 다루어져 무거운 형벌이 내려질 거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무거운 형벌이라면 어떤 종류가 있는데요?”
=가볍게는 수십 년을 메리아놀에서 떠나있어야 하는 초장기 임무를 부여받거나 무겁게는 메리아놀에서 추방당하는 경우도 있어요. 아주 심각하다면 공개처형을 당할 수도 있지만…. 기존에 휜델 님이 메리아놀에 기여한 바가 커서 사형이나 추방까진 당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아무런 지원 없이 족히 30년은 메리아놀을 떠나야 할 임무를 받게 될 게 틀림없어요.=
“지원이라면…?”
=말 그대로 모든 지원이에요. 몸을 가릴 옷 한 벌만 받고 생명의 위협이 가득한 오지로 떠나는 거죠.=
“…….”
=임무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 와중에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진짜 말과 행동 조금 잘못했다고 받은 형벌의 수준이 어마어마하다.
물론 와이스가 내게 한 행동은 친구들 사이에 이놈 저놈 하면서 장난치듯이 대화하는 거와 한 국가의 수장에게 이놈 저놈 하는 것만큼이나 차이가 있지만, 나한테 틱틱거리고 시비 걸었다고 태어난 나라에서 추방에 가까운 일을 당한다니 내가 그야말로 대단한 사람이 된 거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아니, 대단한 사람 맞나?
이든은 그렇게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는 이유에는 괘씸죄가 포함된 거라고도 설명했다.
=규정대로라면 메리아놀을 대표하는 프라우드 족과 우리 플뢰 족 중에 마중과 환영에 적당한 인선을 선출했을 텐데 휜델님께서 자신이 사절로서 마중하겠다며 강력히 주장하셨지요. 그 때문에 다른 종족들이 양보를 하신 거에요.=
그도 인선 중 한 명이기도 했고 플뢰 족의 예비 장이자 족장의 아들이란 신분이 있었기에 통한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을 크게 만들었으니 괘씸죄가 적용된 거지.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은 이미 각 종족의 족장과 대표들의 귀에 들어간 상태이며 새벽같이 플뢰족의 족장을 제외한 프라우드의 족장, 메리아놀 루크랑의 대표와 메리아놀 사비, 메리아놀 해비의 대표가 모여 이번 사건에 대한 회담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는 왜 없어요?”
=그들은 의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신경 쓰지 않고 관여하지도 않으려 해요. 그저 메리아놀의 주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며 주민으로서 누릴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뿐이죠. 의회 구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서 뭔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듯했지만 이 이상은 사견이라 생각하는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대신 이두나가 처음 입을 열었다.
=감정 탈색. 감정 폭이 좁아.=
“하늘 섬…이 아니라 팔라툼에서 나오며 감정선이 희미해졌단 말이에요?”
=응.=
정신적 거세라도 당한 건가? 좀 섬뜩한 생각에 입을 다물어버렸는데 이든은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이두나의 뺨을 잡고 늘린다. 뺨 늘리기를 당하는 이두나의 표정이 여전히 무표정한 게 또 귀엽다.
그 때문에 잠시 이야기가 중단됐는데, 이든이 그만 헤어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꺼내기에 마지막으로 궁금한 걸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프라우드 족이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데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어딜 가면 만날 수 있어요?”
=…….=
볼굴을 찾는 게 메인 퀘스트라면 백청의 부산물로 장비 가공은 서브퀘스트 격이라 높은 제작 실력을 가진 자가 어딨냐고 물었더니 이든은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귀엽기 짝이 없는 소녀의 삐진 표정을 보니 귀여워서 뺨을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에요?”
=그야 프라우드 족이 생산력이 높고 손재주가 좋긴 하지만 제품 하나하나의 질을 따지면 우리 플뢰의 장인들도 뒤떨어지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프라우드 족의 장인을 소개해 달라고 하다니 무례하잖아요.=
“아,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두 종족의 장인분을 가르쳐 주세요.”
=치이. 이두나?=
=응. 가디발의 석장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2,782m를 직진, 남부 대로를 가로질러 푸른색 3층 석조 건물과 갈색 2층 목조 건물 사이의 골목길로 진입, 27m 앞 골목에서 좌회전 후….=
…뭔가 네비게이션이 말을 짧게 하면서 가는 길을 설명해주는 듯한 이두나의 말을 기억한 뒤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이든은 =꼭 플뢰의 장인도 찾아가 주세요!=하고 나에게서 약속을 받아냈다.
어차피 재료는 많으니까 장인匠人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실력이 있다면 이쪽이 부탁해야지.
회상을 끝내고 시무룩해져 있는 알캐마의 엉덩이를 살짝 때리면서 말했다.
“죽어서도 추앙받는 존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백청이 그런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년은 너희를 그야말로 쓸모없는 하등 동물로 여기는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괴물이었다고.”
=…….=
“그리고 볼굴을 상대하려면 어쨌거나 사용 가능한 수단과 몸을 지킬 방법은 많을수록 좋아. 그 때문이라도 백청의 부산물로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어야 해. 현실에서는 가공할 수단이 없으니 손재주가 가장 뛰어나다는 프라우드한테 부탁할 수 있다면 해야지.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쓰고 있는 알케마를 보니 살짝 한숨이 나왔다. 내 공감 능력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지 알케마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가긴 한다.
오랫동안 사심 없이 우러러보던 사람이 알고 보니 존나 나쁜 놈이었다! 라는 말을 듣는다면 평범한 사람은 알케마처럼 반응하는 게 보통이겠지. 더군다나 우러러보던 사람을 죽인 상대가 자신이 몸과 마음을 바쳐서 충성해야 할 대상이라면 더욱더 그럴 테고.
알케마의 뒤에서 녀석을 바라보며 살짝 안 좋은 눈빛을 하는 미호와 히아리드를 보고 알케마를 다시 보며 말했다.
“나와 백청 사이에 있었던 일은 너도 들었지?”
=예….=
“네 심정도 이해가 가니까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나쁘다는 말은 안 하겠어. 하지만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원리에 따라 나와 백청은 목숨을 걸고 정면에서 맞붙었고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어. 승자가 모든 걸 갖는 방식은 너희 세계에서는 당연한 거지?”
=예. 건방지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내 말에 알케마는 고개를 숙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살짝 슬퍼하는 느낌이 들어서 한숨을 쉬며 나보다 40cm는 더 큰 알케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냐. 내 밑에 있는 녀석이 내 행동에 속으로 반감을 품고 있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딪쳐 물어오는 게 나아. 그러니 너무 죄송해할 건 없어. 앞으로도 이해가 안 가거나 납득이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지금처럼 물어보도록 해.”
=…예!=
적당히 당근을 주며 쓰담 쓰담 해줬으니 남은 건 채찍을 써야 하는데, 그건 미호와 히아리드가 잘해줄 거 같으니 난 여기까지만 해야지.
이두나가 알려준 대로 무슨 국립공원만큼이나 넓은 플뢰의 숲을 빠져나와 커다란 대로를 가로지른 뒤 가디발의 석장石場이라는 곳을 찾았다.
뒷골목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야 한대서 현실의 슬럼가나 조금 오래된 허름한 집이 밀집된 으슥한 뒷골목을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무슨 부잣집 동네처럼 밝고 깨끗하고 깔끔하게 다듬은 돌이 포장되어있는 골목길이 나왔다.
골목길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게 폭이 5m가 넘는 데다 띄엄띄엄 조경수까지 심겨 있어 내가 상상하던 그런 이미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 그치만 숲 마을의 길이랑 비교하면 골목길이나 마찬가지 같아.
“그건 그래. 거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최소 30m였으니까.”
내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는 미호의 말을 받아주며 주위를 둘러보니 빌라 형태의 집이 촘촘히 세워져 있고 플뢰의 숲처럼 길목마다 프라우드 족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게 보인다.
어느 종족이든 어린아이들은 다 귀여운 거 같다. 특히 짧고 굵은 종족적인 특성 때문인지 아직 굵은 모습이 안 보이는 젖살이 통통한 아이들은 인간이나 플뢰 족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아서 더욱 귀여었다.
작을수록 더 귀엽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꺅꺅거리며 공놀이를 하다가도 우리가 다가오니 놀기를 멈추고 똘똘한 눈을 끔벅이며 우리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다시금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호가 귀엽다고 난리를 치는데…. 나이로 따지면 미호 니가 더 어리지 않냐?
이두나가 가르쳐준 대로 움직이다 보니 회전 교차로처럼 화덕을 거대하게 형상화한 건물을 중심으로 폭 7m의 길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장소가 나왔다.
그리고 로터리의 중심에 지어져 있는 종합 운동장만큼이나 큰 건물 입구에는 거대한 현판에 알아보기 힘든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로 뭔가가 적혀있었는데 저기에 가디발의 석장이라고 적혀있는 거겠지?
- 커! 그리고 더워!
더위에 익숙한 미호가 질색할 만큼 100m가 넘게 떨어진 이곳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지경인데, 건물 안쪽은 얼마나 더울지 짐작도 안간다.
건물 옆에는 주차장처럼 마차 50여 대를 세울 수 있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그곳은 수화물 적재장이라도 되는지 수십 명의 다양한 종족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분주하게 짐을 싣거나 내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바빠 보인다. 짐도 각종 주괴나 광석에서부터 병장기나 생활용품까지 다양하다.
3층 구조의 대장간은 여러모로 현실에서 본 적 없는 특이한 형태였다.
1층은 천장의 높이가 20m나 되고 곳곳에 천장을 받치는 지름 5m의 기둥이 세워진 벽이 없는 통짜 형태였는데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서 화로를 이용해 각종 병장기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도구, 화살촉이나 말발굽, 만드는 제작 공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탑승물을 제작하는 제조 공간으로 나뉘어있었다.
제작 공간에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가열로만 50개가 넘게 만들어져있고, 각각의 가열로에는 프라우드 족 2명과 기타 등등의 이종족 다섯이 한 팀이 되어 병장기나 농기구,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철판이나 도구 등을 만들고 있었다.
…아니, 정정한다. 망치를 들고 모루를 두드리는 대장장이, 야장冶匠은 프라우드 2명뿐이고 이종족 다섯은 잡일을 도맡아 하거나 야장을 서포트하며 기술을 배우는 도제인 거 같다.
“이거 굉장한데… 난 그냥 평범한 시골 대장간 같은걸 생각했는데 이건 뭐 산업화에 성공한 대규모 철공소잖아?”
한쪽에 만들어져있는 높이 10m짜리 용광로와 각종 형태의 거푸집이 산처럼 쌓여있는 걸 보니 감탄 밖에 안 나온다. 가디발의 석장이라는 이름에서 평범한 대장간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오늘 정말 여러 가지로 예상이 빗나간다.
- 주인님. 얼른, 얼른 들어가 봐. 응?
공간 지각으로 본 석장을 설명해주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얼른 들어가 보자고 보채던 미호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꼬리털을 곤두세우더니 기분 나쁘단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어머. 서하님. 석장에는 무슨 용무이신가요?=
- 왜? 우리가 여기 오면 안 돼?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너 싫어!' 하는 기색을 풀풀 풍기는 미호가 날카롭게 쏘아주자 미리엔은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미호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이곳에서 서하님과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 해서예요.=
- …흥!
미호가 계속 아르릉 거리며 미리엔을 적대하는 모습을 보니까 지금 잡고 있는 미호의 허리를 놓으면 달려들어서 미리엔을 할퀼 거 같은 기세라 놓질 못하겠다.
“전 여기에 무구 제작의 명인분이 계시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미리엔은 석장에 들른다고 하시더니, 그게 여기였나 보네요. 볼 일은 다 보신 거에요?”
=네. 어젯밤에 무기가 부러진 전사들의 무기를 주문하기 위해서 온 거랍니다. 방금 주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에요.=
- 주문했으면 얼른 가버려!
이거 참… 미호의 하악질에 미리엔이 계속 곤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부탁하기가 꺼려진다. 저 대장간을 잘 아는 거 같으니 도움을 받으면 좋을 텐데.
=미호. 그만하십시오. 서하 님이 곤란 해하시는 게 안보입니까.=
- 으, 응?
그때 보다 못한 히아리드가 나서며 미호를 제지하니 여우 귀를 움찔하면서 날 돌아본다.
진짜야? 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미호를 보며 이번 기회에 제맘대로 행동하는걸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머리가 굵어졌으니 말도 어느 정도 통하겠지!
============================ 작품 후기 ============================
(버둥버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