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6 메리아놀의 도시. =========================================================================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멜빈지안은 내게 다가오더니 오른손을 배에 붙이고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도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 절묘한 균형으로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플뢰 족의 족장인 멜빈지안 스트로커입니다. 간밤 편히 보내셨는지 궁금하군요.=
“안녕하세요. 정 서하, 성은 정이고 이름이 서하에요. 미리 렌샤엔 씨가 안내해준 곳이 편안해서 덕분에 잘 보냈어요.”
그 정중한 모습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니 멜빈지안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성이 스트로커? 와이스는 성이 휜델 아니었나?
=어젯밤에는 님페가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어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더 큰 일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죠.”
어떻게 나와 와이스의 트러블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나 했더니 아까 날려 보낸 님페라는 녹색 정령을 통해 소식을 들은 거 같다.
약간 뼈가 담긴 말에 멜빈지안은 부정하지 않고 그렇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뒤로 멜빈지안과 함께 가볍고 사소한 잡담, 예를 들면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는 왜 자리에 앉지 않고 내 뒤에 서 있느냐. 각 종족의 예비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과 함께 여행이라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보석 공주가 예지할 법한 일행이다,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죽은 듯이 누워있는 와이스를 돌아봤다.
녀석은 내가 멜빈지안과 대화를 나누니 머리를 살짝 들어 날 훔쳐보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머리를 돌려버린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영양가 없는 말만 하는 멜빈지안에게 양해를 구하고 녀석의 옆으로 걸어갔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없다.=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
“말해도 화 안 낼 테니 말해봐. 나도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팔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크게 혼나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만든 대상을 원망하거나 증오하는 모습을 보일 법도 할 텐데 와이스는 화를 내지 않겠다는 내 말에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도저히 팔다리가 부러져서 널부러져있는 놈이 보일 반응이라는 생각이 안들 정도다.
=그렇다면 묻지. 보희께서는 그대가 메리아놀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예지를 하셨다. 그게 사실인가?=
와이스의 질문에는 멜빈지안도 관심을 보였다. 난 그걸 묻는 이유가 궁금해서 와이스의 옆에 퍼질러 앉으면서 다시 되물었다.
“그 말은 보석 공주님의 예지를 못 믿겠다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는걸 알 텐데.=
팔다리가 부러진 놈치고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모습에 플뢰들은 다 이런가 싶었다.
자아의 시련이란 걸 겪지 않은 이 녀석만 해도 이질감이 들 정도인데 미리엔도 자기네 예비 장이 처한 상황에서 이성적인 행동을 보였고 멜빈지안도 자기 자식 팔다리를 똑소리 나게 분질러놓고서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내 앞에 앉아 평범하게 대화를 했었잖아.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으니 와이스가 고통에 약간 흐려진 눈빛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기己는 보희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다. 하지만 너에게서 느껴지는 스펙스의 향기는 무척이나… 희미한 느낌이다. 그런 네가 어떤 식으로 이 넓은 메리아놀을 지울 수 있는 건지 그 수단이 궁금한 거다.=
“궁금해해서 뭐하게?”
=기己는 패시지의 방위 책임자다. 메리아놀의 위협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보완하고 싶어서가 당연한 이유 아니겠나.=
“아, 그래서 마차에서부터 그렇게 기분 나쁘게 쳐다본 거였어? 이렇게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그만한 파괴 행위를 벌일 수 있는 건가 싶어서?”
=……그래. 알 수 있다면 메리아놀을 좀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하다간 상대 심기를 상하게 만들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 하마터면 니가 그 예지의 트리거가 될 뻔했다고?”
=미리 렌샤엔이 말했다시피 나는 자아의 시련을 받지 못해 한가지 생각에 빠져들면 사고의 폭이 좁아진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꼴통은 아니었네.
내가 궁금했던 건 나에 대한 보석 공주의 예지가 알려진 시점이었는데도 와이스가 날 자극하는 식의 이해 못할 행동을 보인 거였다. 자기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생각을 해보니 녀석에게는 적대심이나 적의 같은 걸 전혀 못 느꼈었거든.
나한테 포박당했을 때도 단지 묶였다는 이유로 성질을 냈었고 딱히 공격하려던 징후는 녀석이 체내의 위상력을 돌리던 그 순간뿐이었으니까.
그런 의심 가는 행동을 보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니 그럭저럭 녀석의 행동이 납득이간다.
뭐 내가 납득한건 둘째치고 멜빈지안이 의장으로 있다는 총의회는 이 사건을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어 보이니 와이스는 자신의 행동에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겠지.
실컷 두드려 맞는 모습을 보고 그 뒤에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봤더니 나도 어느 정도 화가 풀어졌다.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 이쪽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는 멜빈지안을 한 번 본 다음 와이스의 부러진 한쪽 다리를 주물럭거리면서 말했다.
“내 능력은 평범하지 않아.”
=크악! 무, 무슨 짓을…!=
“치료해주려는 거야. 좀 아파도 참아.”
겸사겸사 남은 감정도 좀 풀고 말이지.
손에서 힐링 터치를 아~~주 미약하게 끌어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보통 능력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어있지? 힘과 체력 같은 육신의 능력과 원소를 다루는 의지에 관한 능력, 육체를 회복시키고 주변을 탐색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으로. 그리고 보통은 한 가지만 쓸 수 있잖아.”
=크, 윽. 그래.=
“난 그 세 가지를 다 쓸 수 있거든?”
물론 그 세 개 말고도 주력기는 따로 있지. 주력기라기보단 응용이지만 말이야. 내 이야기에 와이스는 물론이고 히아리드와 미호 근처에 서 있던 멜빈지안도 놀라워한다.
=트, 트리플리스트라고? 그것은 대단…크, 대단하지만 겨우 정도로 메리아놀을 어찌하진 못해! 메리아놀에도 트리플리스트가 일곱이 있단 말이다.=
와, 일곱이나 있어? 인간은 더블리스트가 되는 것도 A 클래스가 되어서나 가능한 일인데…. 역시 이형종이구나.
와이스는 내 능력을 축소해서 이해하려는 거 같은데 그러든가 말든가 좀 더 녀석이 아파할 만큼 힘차게 주무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자들은 모르겠고, 난 능력을 응용해서 몇가지 기술을 만들어냈어. 그걸 쓰면 대충 175제곱킬로미터 반경 정도는 1분도 안 돼서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지.”
꾸욱꾸욱!
=끄! 후욱, 그건 말도 안 된다.=
“믿든 안 믿든 그건 니 맘이고, 아까 니가 말한거에 대한 대답을 하자면 그래. 내 능력에 대해서 알았다고 한들 그걸 막을 수단을 찾아내는 건 힘들 거야.”
=컥…!=
앗, 너무 세게 주물렀는지 부러진 뼈가 허벅지를 뚫고 나오려고 한다. 슬쩍 힐링 터치의 강도를 높여서 와이스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부러진 오른쪽 다리는 완벽하게 회복시켰다.
와이스는 지르려던 비명을 꿀꺽 삼키더니 완전히 회복된 오른발을 만져보며 진땀을 흘렸다.
=흐억. 허억! 네 치료는 확실히 효과적이지만… 너무 과격하군.=
“어. 조금 사심이 담겨서 그래.”
솔직히 인정하면서 완벽하게 나은 허벅지를 철썩하고 때리니 와이스의 잘난 얼굴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구부러져 있는 왼쪽 다리로 손을 뻗으니 와이스가 기겁하면서 내 오른팔을 덥썩 잡고 황급히 입을 연다.
=돼, 됐다. 마음만 고맙게 받지. 치료해줄 이가 오고 있을 테니 여기까지…!=
“뭘. 사양하지 마.”
=아, 아니…! 사양이 아니…!=
녀석의 거부를 거부하며 힘을 줘서 손을 뻗자 와이스도 필사적으로 위상력을 회전시키며 막으려 한다.
그에 맞춰 나도 마나 시브를 대량으로 돌리며 팔에 힘을 주기 시작하니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녀석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하얀 얼굴에 붉은 물이 번져간다.
이래뵈도 내가 마나 시브를 전력으로 돌리면 신체 강화를 A 클래스, 이론상 초위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바닥 수준의 최고위급이 한쪽 팔로만 막을 수준이 아니란 거지.
얌전히 내 보복을 받아라!
“자자. 힘쓰면 상처가 덧난다고? 얌전히 치료를 받아들여.”
=돼, 됐다니까! 치료를 빙자한 복수잖아!=
“잘 아네.”
=네놈, 방금…!=
퍽!
=끄악!=
“아차, 힘이 너무 들어가 버렸당. 그러길래 버티지 말라니까. 다쳐요.”
팽팽하게 버티길래 살짝 힘을 뺐다가 힘의 균형이 와이스에게로 넘어가는 순간, 순간적으로 강하게 손을 뻗으며 실수인 척 와이스의 부러진 왼팔을 후려쳤더니, 와이스의 얼굴색이 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노래졌다가 오색찬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으, 으으윽…!=
고통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녀석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어우~. 속이 시원하네 그냥.
뒤에서 지켜보던 멜빈지안이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당부를 한다.
=서하 정. 부디 아들을 병신으로만 만들지 마십시오.=
“걱정 마세요. 제 힐링은 죽지만 않으면 완벽하게 치료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치료를 빙자한 짜증 풀기를 멜빈지안의 승낙 아래 자행하며 녀석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있으니 어제 봤던 하얀 바탕에 오색 수실로 화려한 무늬가 놓여진 고급 로브를 입은 두 명의 플뢰 족 소녀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하얀 나뭇잎의 투사라고 했었지? 근데 쌍둥이네? 그럼 저 소녀들의 이름이 이든과 이두나겠군.
두 소녀는 내가 하는 짓을 보고 멈칫했다가 다시 다가오며 나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시는 거지요?=
=치료? 폭행?=
가을 하늘처럼 푸른 빛이 머리카락에 어려있는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들은 내가 와이스에게 하는 행패를 보며 어이없어한다.
“일단은 치료인데요.”
=환자가 눈이 돌아가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는데 치료라고 주장하는 건가요?=
“음, 치료적인 의미는 20% 정도 밖에 안되지만, 치료는 치료죠.”
포니테일인데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비단처럼 늘어져 있어 차분한 느낌을 주는 플뢰 소녀들은 날 경계하듯이 쥐고 있던 지팡이를 뻗어 쉿쉿 하면서 밀어낸다.
=적당히 하세요. 그러다 병신 됩니다.=
“제가요?”
=아니요. 휜델 님이요. 종종 말썽을 일으키긴 하지만 일족의 소중한 예비 장이니 원한 갚기는 그쯤 해두세요.=
눈치채고 있었나. 뭐 어느 정도 스트레스는 풀었으니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힐링 웨이브 1단계를 가볍게 펼쳤다.
=?!=
=아….=
푸른 안개가 1층 홀 내부를 메우는 모습에 한번 놀란 두 소녀는 와이스의 부러진 왼팔과 반쯤 나아있던 왼 다리가 우두둑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모습을 찾는 현상에 두 번 놀란다.
=세상에. 이런 능력이 있으면서….=
쌍둥이 소녀 중 말이 많은 쪽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하고 우묵한 눈빛으로 날 보는 멜빈지안에게 다가갔다.
=용무가 끝나셨으면 아침 식사를 하시지요. 위층으로 올라갑시다. 이든과 이두나도 와이스를 깨워 같이 올라오게.=
역시 저 소녀들이 이든과 이두나군. 그나저나 쌍둥이처럼 머리 스타일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은 데다 분위기도 비슷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모를거 같다.
화연이랑 영은이는 분위기가 틀려서 아무리 똑같이 입고 있어도 보는 순간 알 수 있는데 말이야.
멜빈지안은 단풍나무 집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내부 구조를 가볍게 설명해주었다.
=이 트리하우스tree house는 대대로 플뢰 족의 장이 기거하는, 패시지의 오랜 역사와 함께하는 전통 깊은 나무입니다. 1층은 일족 회의용 강당講堂으로, 2층은 부족 회의 대기실이며 3층은 부족 내에서 이루어지는 중요 의제를 해결하는 회의장으로 쓰입니다.=
주요 의제는 족장과 하얀 나뭇잎 투사 11인이 회의를 통해 해결하는 부족계급 사회로 이루어져 있단다. 7만가량의 부족 인구에 최고위급이 13명이나 있다니, 어쩌면 이 숫자가 평균일지도 모르겠다.
사비 종족도 비슷한 9만의 숫자에 15명인가 되는 최고위급이 있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4층은 플뢰 족의 역사가 담긴 책자가 보관된 서고로 쓰고 있었고 5층부터가 현 족장 가족이 쓰는 거주지로 되어있었다.
“나무가 되게 크던데 몇 살이나 먹었어요?”
=6,600살 정도 됩니다.=
우와~ 메리아놀이 생긴 것도 6600년이나 됐다는 거야? 역사가 어마어마하네.
6층의 다이닝 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러운 밀 빵과 잼, 버터와 각종 생과일에 씁쓰레한 맛을 내는 샐러드, 그리고 와인과 몇 가지 음료수가 커다란 테이블에 가득 준비되어있었다.
비록 고기는 없지만 전부 싱싱하고 맛있어 보여 입에 절로 침이 고인다.
우리가 6층으로 올라오고 얼마 있지 않아 굉장히 지치고 창백한 얼굴의 와이스와 함께 이든, 이두나 자매도 올라왔다. 각자가 적당히 음식이 준비된 식탁에 앉으니 멜빈지안이 두 자매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일족의 대신관인 이든과 서고장인 이두나 자매입니다.=
=안녕하세요? 일족의 제례를 맡는 신관들의 우두머리인 이든이에요.=
=…이두나. 역사를 기록, 보관하는 일을 해.=
말수가 없는 쪽이 이두나였군. 이든은 방긋 웃으며, 이두나는 무표정으로 짧게 인사를 나누고 아침 식사를 시작하니 멜빈지안 스트로커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가족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70년 전 아우스트라시아 휜델이라는 여자 플뢰와 결혼해서 30년 전 슬하에 와이스 휜델을 보았으며 아우스트라시아 휜델은 보석 공주의 호위무사護衛武士로서 평소에는 성에서 지내기에 1년에 하루밖에 볼 수 없어 외롭다는둥의 이야기.
성의 첨탑,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꾸며진 궁전에 서 있던 플뢰 족 여자가 아우스트라시아인가보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색이 멜빈지안하고 와이스하고 다 똑같네.
플뢰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가는 건가?
멜빈지안의 이야기를 듣던 이든은 빵을 반으로 쪼개 부드러운 속살을 뜯어먹으며 방긋방긋 웃는다.
=스트로커님이 휜델 님께 고백하기 위해 홀로 우쿠하 대산맥의 마수를 잡아 바친 일은 메리아놀에서 유명한 이야기지요.=
약 40분간 지속된 아침 식사에 멜빈지안은 대화를 주도하며 말 그대로 소소한 신변잡기만 이야기하기에 괜히 긴장했구나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식사 분위기에 나름 만족하면서 날 초대한 이유를 언제쯤 물어볼까 시기를 재고 있으니 쌍둥이 자매 중 이든이 히아리드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플라비우스의 육익六翼 분들은 보통 팔라툼에서 나오지 않으신다 들었는데요. 여행을 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살짝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에 한 입 베어먹은 호피 무늬 사과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하늘색 머리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교에 가까운 그걸 히아리드가 솔직히 말했다간 큰일 날 텐데!
=서하 님과 운명적인 만남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걱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히아리드는 의미심장한 단어로 문장을 꾸며 대답해주었다.
히아리드가 아삭하고 달콤새콤한 맛이 일품인 샐러드를 찍어 먹으며 짧고 간단하게 대답해주자 이든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지 눈을 반짝 빛내더니 바로 질문을 이었다.
=그 말씀은 팔라툼을 완전히 떠나셨다는 건가요?=
달칵.
접시에 옮겨 담은 샐러드를 다 먹은 히아리드는 포크를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뒤 이든을 주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엇이 궁금하시기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연속되는 질문에 히아리드는 서늘한 말투로 벽을 만들듯이 말하니 미호와 알케마가 히아리드를 돌아본다.
호우반이 말한 플라비우스의 성격을 히아리드도 가지고 있는 걸까. 내가 잘 중재하면 큰 다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랬으니 잠시 듣다가 분위기가 나빠질 거 같으면 중간에 개입해야겠다.
그런데 히아리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멜빈지안이 대신해주었다.
=플라비우스의 시점으로 보는 서하 정의 성정性情이 궁금해서입니다.=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대답하는 모습에서 조금 전 사적인 대화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부족을 이끄는 장으로써의 기백이 느껴진다.
잠시 생각에 잠긴 히아리드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적에게는 무자비. 타인에게는 무관심하지만, 동료와 가족에게는 누구보다 믿음직하며 강한 분으로….=
=음….=
=어지간해서는 적을 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분이 서하 님입니다. 하지만 무척이나 짜증 나는 행동에는 적과 마찬가지로 대응하시지요. 와이스 휜델이 주인님의 성격을 조금만 더 자극했더라면 메리아놀은 역사상 유래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와이스는 자리에 앉은 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래만 보며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방금 이야기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나와 히아리드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히아리드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멜빈지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양 소매에 집어넣은 자세로 진지하게 날 바라보며 말했다.
=서하 정. 메리아놀의 4 의장 중 일인이자 플뢰 합의체合議體를 대표하는 자로서 당신이 메리아놀에 찾아온 이유를 듣고자 합니다. 대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어, 식탁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줄은 몰랐는데… 잠시 눈을 껌뻑이다가 물었다.
“그 대답에 따라 보석 공주님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되나요?”
=제 의견만으로는 결정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결에 영향을 미치겠지요.=
“…우선 대답부터 해드리죠. 저는 볼굴, 혹은 메오 아지토스라고 불리는 놈들을 찾고 있어요. 그걸 위해 벨티칼 산의 헤뷜트에 방문했었고 해비 종족의 마을에도 들렀죠. 그리고 메리아놀을 찾은 이유도 그놈들이 있는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찾아온 거에요.”
=볼굴….=
내 목적을 들은 네 명의 플뢰의 안색이 굳어졌다.
============================ 작품 후기 ============================
핫무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