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505화 (505/517)

00505  메리아놀의 도시.  =========================================================================

잠자리를 정돈한 뒤 다들 잠옷을 갈아입고 2층의 거실로 내려가니 시기 좋게 미리 렌샤엔이 집나무 앞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 저 불여우는 왜 자꾸 오는 거야?

와이스가 찾아오는 것보다 낫지. 미호는 미리 렌샤엔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지 볼을 잔뜩 부풀리며 투정을 부리지만 모른척하면서 알케마를 내려보냈다.

“알케마. 가서 문 열어줘.”

=네.=

- …주인님은 저 불여우가 좋아?

“좋고 나쁘고 할게 어디 있냐. 그래도 신경 긁는 와이스보단 확실히 좋지만.”

의자에 앉으며 하는 이야기에 미호가 입을 삐죽이며 내 목에 매달릴 무렵 미리 렌샤엔이 알케마와 함께 2층으로 올라오더니 양손을 포개 잡고 고개를 숙이며 맑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는지요.=

“네. 욕실도 있어서 씻을 수도 있었고 방도 좋아서 잘 잤어요. 미리 렌샤엔도 밤 잘 보내셨어요?”

=편하게 미리엔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저도 며칠간 괴롭혀오던 근심거리가 사라져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 미리 렌샤엔. 오늘은 보석 공주님을 만날 수 있는 거야?

편하게 부르랬더니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한 것인지 대놓고 풀네임을 부르는 미호를 온화하게 웃으며 바라본 미리엔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에 알현을 청하여 받아들여지기까지에는 이틀이 정도가 소요된답니다. 그동안 편히 쉬시며 메리아놀을 관광이라도 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관광이라…. 그럼 서쪽 프라우드 지구地區에 가서 백청의 부산물을 가공할 수 있는 프라우드를 찾아볼까?

- 왜 2일이나 기다려야 해? 뺀질이는 보석 공주님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했잖아!

=말씀대로 보희께서는 서하 님을 뵙길 학수고대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의회의 4 의장 분들은 서하 님을 보희님의 어전에 세워도 괜찮은가 의구심을 품고 있어요. 알현을 위해서는 그분들을 먼저 접견할 필요가 있답니다.=

- 그게 뭐야! 그럴 거면 차라리 하늘 섬이랑 라수비탄에 갈…!

흥분해서인지 감정적으로 틱틱거리는 미호가 너무 앞서 나가기 전에 녀석을 끌어안아 살짝 입을 막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진정시켰다.

“워워. 진정해. 우리 미호 착하지?”

- 우웅.

눈썹을 치켜뜨고 있던 미호는 내 손길에 성난 듯이 잔뜩 부풀린 꼬리를 진정시키긴 했지만 미리엔을 향한 불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실 미호가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비록 원하는 게 있어서 찾아온 거지만 일일이 허락을 받으며 굽실거릴 필요는 없으니까.

이곳이 아니더라도 하늘 섬과 라수비탄도 있고 호주 쪽에 있을지도 모를 볼굴의 도시인 몰파진의 흔적을 찾아도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왕 메리아놀에 도착한 거, 손에 넣는 것도 없이 그냥 떠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미안해요. 요즘 미호가 좀 사춘기라서 신경이 사나워요.”

- 나 사춘기 아니야.

내 손에 입이 막힌 미호가 작게 웅얼거리지만 미리엔은 웃으며 괜찮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그 의장이란 분들을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나요? 보석 공주님을 만나면 좋기야 하지만 만나지 않아도 별로 상관은 없어요. 그런데 보고 싶어 하는 쪽에서 절 위험분자로 취급하면서 그렇게 나오면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거든요.”

=위, 위험분자라니요… 그런 뜻이 아니랍니다. 4 의장 분들에게 있어 보희님은 무엇보다 소중한 분이시기에, 보희님을 보필하는 자들로써 간단히 알현을 허락해드릴 수 없는 입장으로 여겨주시면 안 될까요?=

내 말에 당황한 듯이 손사래를 치는 미리엔을 보니 중간관리직은 이래서 고달픈 거 같다.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치이고.

“…….”

내가 위험한 놈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겠다는 의지는 조금 마음에 안 들지만 4 의장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영은이는 현실에서 나에게 접근하려는 각 나라의 대사나 외교관, 세계 굴지의 재벌그룹이 보내온 사절 등을 미리 차단하며 그들이 나와 만날 자격이 있는지, 그들이 나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일은 없는지를 철두철미하게 조사한다.

물론 자격이 떨어지는 자는 사전에 칼같이 거절되지만… 아니, 대부분이 날 만나지 못하고 헛수고를 하게 되지만 영은이의 그런 행동이 가끔은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호랑이의 보호 본능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4 의장이란 자들이 나에게 하려는 행동의 의미도 영은이의 행동과 비슷한 이유겠지.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을 하고 있으니 미리엔이 가녀린 모습으로 날 간절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오자이가 생각날 정도로 얇고 몸의 굴곡에 딱 맞는 연하늘색 복장을 한 미리엔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남자라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연약하고 애처로운 모습이다.

내가 4 의장의 접견을 거절해버리면 날 만나고 싶어 하는 보석 공주의 원願을 들어주지 못하게 돼서 문제가 되기 때문일까.

“알았어요.”

허락의 대답을 들은 미리엔은 약간 과할 정도로 기뻐하며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방긋 웃었다.

딱히 저 모습에 넘어간 게 아니라 어차피 프라우드 족을 만날 생각이었기 때문에 기왕 하는 거라면 그들의 의도에 따라주면서 프라우드 족의 호의를 사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멜빈지안님께서 아침 식사 초대를 하셨답니다. 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시길 부탁드려도 될까요?=

“식사 초대에 미리엔이 말한 접견의 의미도 포함되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방긋 웃음 짓는 미리 엔의 말에 적당히 흠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옷을 차려입고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와 함께 미리 엔의 뒤를 따라 집나무를 나서니 여기저기를 오가던 플뢰 족들이 잠시 멈춰 서며 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미리엔에게 평범하게 아침 인사를 걸어오는 플뢰가 많아 그녀가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느라 걸음이 지체되기 시작하니 미호가 못마땅한 얼굴로 미리엔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 안내하러 왔으면 안내에 충실하란말야! 언제까지 인사만 할 건데!

=죄송해요. 아침 첫인사는 중요한지라.=

미호의 신경질에도 미리엔은 미안한 표정으로 웃기만 하더니 조금 걸음을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미호의 어깨를 끌어당기고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미호야. 뭔가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 …우우.

못된 시누이가 생각날 만큼 짜증을 부리는 미호를 보면 뭔가 싫은 일이 있긴 한데, 녀석은 나한테 말하긴 싫은지 입을 꾹 다물고 검푸른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미리엔의 뒷모습만 노려본다.

아무래도 미호는 미리엔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거 같다.

설마 어제 에스코트한다고 내 손을 잡은 그거 때문인가? 하지만 평범한 스킨십은 다른 사람들하고도 몇 번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이런 반응을 안 보였는데…. 아니면 소울 링커 능력으로 미리엔의 감정을 엿본 걸지도 모르겠군.

엿봤다 치면 뭘 봤길래 이 착한 녀석이 암코양이처럼 아르릉 거리는 거지?

미호의 짜증이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었는지 미리엔은 인사를 건네오는 플뢰들에게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 우리를 지름 40m의 플뢰의 숲에서 가장 큰 나무로 빠르게 안내했다.

=멜빈지안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미리엔은 같이 안 들어가요?”

=저는 석장石場에 용무가 있어서 동석할 수 없답니다. 서하 님이 들어가시면 바로 업무를 위해 이동해야 해요.=

미리엔은 그렇게 말하고 들어가라는 듯이 문 옆에 서서 방긋 웃는다. 석장? 채굴장 비슷한 건가?

멜빈지안이 있다는 집나무를 살펴보니 적갈색 거목에 일곱 갈래로 나눠진 나뭇잎이 무성한 단풍나무였다.

거대한 동체에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문에 옛날 전통한옥에서 쓰일법한 늑대 얼굴이 동그란 고리를 물고 있는 문고리가 달려있어 그걸 잡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니 안쪽에서 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미리엔은 내가 문고리를 잡고 노크하는 모습에 허리를 숙이고는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군청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걸어가는 미리엔의 뒷모습에 혀를 날름하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문고리를 잡아당기니 방향제처럼 달콤한 수액 냄새가 안쪽에서 은은히 흘러나온다.

집나무 안으로 들어서며 공간 지각으로 내부를 쓱 훑어보니 플뢰의 숲에서 가장 큰 집나무 답게 총 10층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학교 운동장의 절반만 한 넓이를 가진 1층은 그 넓이에 비해 자그마한 차 탁자 4개와 의자 12개가 벽에 붙어있을 뿐, 중앙은 텅 비워놓은 걸 봐선 아무래도 수련이나 모임을 위한 장소로 보인다.

그 증거로 홀의 중심에는 와이스가 평범한 옷차림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 옆에 중년인 듯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 플뢰가 품이 넓은 통짜 로브와 비슷한 회색 코트를 입고 팔짱을 낀 채 와이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검은색 가검假劍, 날이 죽은 이미테이션 소드를 들고 있는걸 봐선 와이스를 저 꼴로 만든 게 그인 거 같다.

아까 목소리는 와이스가 아니었으니 저 중년 남자 플뢰의 목소리였을 테고, 그럼 저 남자가 멜빈지안이겠군.

집나무 안은 어둡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천장의 다섯 개의 구슬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1층 전체를 밝히고 있었다.

빛 구슬은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형태에 그 속에는 조그마한 빛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길래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손가락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자그마한 요정이 다리를 모으고 얌전히 앉아 아래쪽을 구경 중이었다.

빛을 내는 요정을 잡아다가 가둬서 전등으로 쓰는 건가?

- …뭐 하는 거지?

뒤따라 들어온 미호가 깨금발을 들고 내 어깨너머를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그럴 만도 한 게 아침 식사라고 초대해놓고는 보여주는 게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대련 아닐까? 식전 대련은 전사라면 다들 하는 거니까.=

=대련이라고 보기에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 나, 나도 프랑 하구 대련 많이 했지만, 프랑은 저런 경직된 모습은 아니었어.

내 뒤에서 녀석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와이스에게 멜빈지안으로 생각되는 중년의 남자 플뢰가 입을 열었다.

=몸도 적당히 풀었고 손께서도 오셨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꾸나.=

=크윽!=

짧게 신음을 흘린 와이스는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갈색 가검 집어 들더니 짧게 기합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체내의 위상력을 쓰지 않는 걸 봐선 단순한 대련인 거 같다. 하긴, 멜빈지안도 성에서 봤던 호위 여성 플뢰처럼 최고위급 중에서도 극한에 이른 이종족인데 와이스와 전력으로 붙으면 집나무가 무너지겠지.

뻑!

=끄…!=

라고 생각하는 찰나 멜빈지안은 눈이 착시를 일으킬 것 같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와이스의 허벅다리를 후려쳐 바닥에 호쾌하게 처박아버리고는 날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벽 쪽의 차 탁자를 가리켰다.

=잠시 아들을 훈육할 시간이니 손께서는 저곳에 앉아 구경하시지요.=

아, 이게 미리엔이 말했던 크게 혼난다는 그건가? 나한테 보여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와이스는 비명도 못 지르고 맞은 허벅지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는데, 아까 들린 살벌한 타격음을 봐서는 진짜 다리가 부러진 만큼 아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차 탁자로 걸어가서 의자에 앉으니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는 앉지 않고 내 뒤에 자리를 잡고 홀 쪽을 바라보며 선다.

이 모습을 본 멜빈지안은 심유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와이스의 등을 가검으로 찍어 누르며 말한다.

=와이스 휜델. 너도 곧 자아의 시련을 받을 만큼 큰 녀석이니 긴말은 않으마. 오너라.=

=…크읍!=

등을 누르던 가검이 떨어지자 와이스는 흡사 윈드밀처럼 다리를 풍차처럼 돌리며 멜빈지안을 물러서게 만들더니 그 회전력으로 발딱 일어서며 동시에 가검을 내질러 찔러 들어갔다.

그 와중에 검극을 살짝살짝 흔들면서 기교를 부려 눈을 현혹하려 하지만 멜빈지안은 검로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벼운 갈 지之자 걸음으로 와이스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아까 후려쳤던 허벅다리를 다시 한번 후려쳐버렸다.

뻐억!

=컥!=

맞은 데 또 맞은 와이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더니 멀쩡한 다리로 황급히 백 점프를 하며 견제하듯 횡 베기를 날리지만… 멜빈지안은 벌어지는 거리만큼 서슴없이 좁히는 동시에 손가락으로 검면을 퉁겨 비껴가게 하더니 오른손에 쥔 검 자루로 와이스의 명치를 세게 찔러버렸다.

=꾸엑!=

명치를 찔린 와이스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주춤하는 순간 중년 남자의 검이 거무스름한 잔상을 남기며 춤추기 시작한다.

뻐벅! 퍽, 퍼버벅! 퍼벅! 딱!

검은 잔상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묵직한 타격음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전신을 난타당하는 와이스는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공격을 멈추게 하려고 가검을 휘두르지만 멜빈지안의 손에 들린 검은 멈출 생각을 않는다.

아니, 와이스가 휘두르는 검과 맞부딪치지도 않았다.

겉보기에는 마구잡이로 내려치는듯하지만 가검을 쥔 팔의 헐렁한 소맷자락은 멜빈지안의 움직임에 부드럽게 따라가는 모습과 절묘하게 와이스가 휘두른 검격을 피해도 미동도 않는 모습에서 검술의 묘리를 극極에 가깝게 익힌 걸 알 수 있었다.

프랑이 하늘하늘한 스커트를 입고 검무를 출 때도 저렇게 비슷한 모습을 보였었거든. 내가 프랑을 따라 하니까 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이더라고.

문득 단순한 신체 강화 타입의 멜빈지안이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함이 든다.

프랑은 거대 이형종을 상대하는 데에는 병장기보다 맨손 박투搏鬪가 효과적이라고 했는데 저 플뢰는 검술을 익혔잖아. 극한으로 익힌 검술은 뭔가 또 다른 게 있는 건가?

뿌억! 빠박! 퍽, 퍼걱!

=크아, 악! 끄, 어억!=

더이상은 견디기 힘든지 얻어맞을 때마다 와이스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멍멍이탕을 해 먹는다고 개를 잡는 모습을 본 적 있는데, 그때 마을 어른들의 참나무 몽둥이에 두들겨 맞으며 죽어가던 개보다 지금 얻어터지는 와이스가 더 불쌍할 지경…은 개뿔, 속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하다.

와이스는 안 맞은 곳이 없을 만큼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멜빈지안을 공격하기 위해 팔을 휘두르지만 그럴 때마다 타격음이 더욱 묵직하게 터져 나온다.

감히 어딜 공격하려고! 하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빠각!!

=끄아아악!!=

- 으. 부러졌어.

=대련 중에는 흔한 일이야.=

결국 공격을 막기 위해 든 왼쪽 팔에 멜빈지안의 검이 정확하게 꽂히며 위팔뼈가 직각으로 똑! 하며 부러진다.

우리가 지켜본 뒤로 가장 큰 비명을 지른 와이스는 왼팔을 축 늘어트린 채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공격해 나가지만 정말 보는 내가 안쓰럽고 신날 만큼 맞추질 못한다.

하다못해 검과 검을 맞대기라도 하면 덜 억울할 텐데 멜빈지안은 와이스의 공격은 전부 흘려넘기거나 피해버려 와이스의 피로가 쌓이는 데 더욱 일조하고 있었다.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팔도 고통을 배가시키고 있겠지.

뻐걱!! 우득!

=크허억!=

이어서 강하게 맞은 오른쪽 허벅지가 뚝 하고 부러진다. 하지만 맞아서 부러졌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부러진 모습에 감탄이 나온다.

보통 타격에 의한 골절상은 복합골절에 부러진 단면이 뾰족해 2차 피해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인데 저건 칼로 자른 것만큼이나 깔끔하다.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니지.

- 으익….

팔다리가 부러져서 기괴하게 늘어진 모습에 미호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지만 축 늘어진 팔다리를 추스르지도 못하고 왼발로만 서서 버티며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아는 와이스는 더욱 죽을 맛인지 인상을 죽을 듯이 찡그린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멜빈지안은 가혹하리만치 단호한 얼굴로 와이스의 왼쪽 허벅지마저 분질러버린다.

우득!

=으아아악!!=

결국 몸을 지탱할 두 다리를 잃은 와이스는 볼품없이 털썩 쓰러져버리고 그 충격에 팔다리가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인 모습이 약간은 섬뜩하다.

그 상황에서도 가검을 놓치지 않은 와이스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이빨을 깨물며 가검을 들어 멜빈지안을 향한다.

고통으로 검 끝이 처량맞게 흔들리는 걸 보니 비록 내가 두들겨 패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속이 조금 풀리는 거 같다. 하지만 미호는 저렇게 멀쩡한 사람… 이종족의 팔다리가 분질러진 걸 보니 마음이 편치 못한 거 같았다.

=아비로써의 훈계는 이걸로 끝이다. 허나 네가 메리아놀에 입히려 한 죄의 무게는 플뢰 평의회와 메리아놀 총의회에서 결정 날 것이니 그때까지 방에서 근신하도록 하거라. 이것은 일족의 장으로서 하는 명령이다.=

=으윽… 예.=

음. 역시 와이스의 아버지였군. 이름이 멜빈지안인건 확실하네.

사지 중 세 개가 부러진 와이스는 죽을 듯이 아플 텐데도 앓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식은땀에 범벅이 된 채 늘어진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으니 멜빈지안은 가검을 허리춤에 갈무리하고 자그마한 녹색 페어리를 불러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님페. 가서 이든과 이두나에게 전해다오.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나의 집에 잠시 와주게].=

까르륵!

정령인가? 검지와 중지를 합친 것 만큼이나 작은 요정은 귓가에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옹이구멍을 통해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와이스를 묵사발 내고 페어리를 전령으로 누군가에게 날려 보낸 멜빈지안은 죽은 듯이 늘어진 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오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긴장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지만 속 편히 있을 수는 없지.

============================ 작품 후기 ============================

제 스토리 진행 속도가 느려서 고구마 찐 고구마 100개 처먹은 거 같이 목이 멘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죄송한 마음뿐이네요 ㅠㅠ

성에서 깐죽거리는 걸 보고 바로 얻어터지는 걸 봤으면 나름 아무 맛 안 나는 탄산수 정도는 됐을 텐데....

하지만 와이스의 험난한 인생 굴곡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는 틀딱님들의 발언은 이해가 안가지만 일단 아프게는 해볼게요 ㅎㅎ

그리고 후원 쿠폰 주시는 분들은 언제나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있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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