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3 메리아놀의 도시. =========================================================================
'이렇게 바라보면 뭔가 찔리거나 죄지은 게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잘못한 게 없는 사람도 께름칙한 느낌을 받거든! 자칭 배웠다는 인간들에게 나 화났음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주는 표정이야.'
영은이 말로는 스스로 배운 자를 자처하는 자에게 품위 있게 화났음을 어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길래 써봤는데, 진짜 효과가 있는지 와이스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지며 입을 다물어버린다.
내 말을 들은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가 싸움을 예감하며 마음의 준비를 갖추는 동안 나는 뒤에 도착한 11마리… 11명의 하얀 플뢰 족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여자 플뢰 한 명, 와이스와 함께 있던 검푸른 머리칼의 여자 플뢰가 앞으로 나서더니 푸른색 공간의 벽에 바짝 붙는다.
“……?”
밤하늘에 달빛이 물든 것 같이 검푸른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온화한 얼굴의 미녀는 푸른색 공간의 벽을 만져보며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정확하게 날 바라보며 입을 연다.
=여행자님. 저희는 여러분들을 공격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니 잠시 기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와이스 휜델이 한 말과 행동에 저 60명의 플뢰가 조금 전에 보여준 모습을 보니 그 말을 믿기 힘든데요.”
틈을 봐서 봐서 우선 최고위급 플뢰들만이라도 푸른색 공간의 벽을 펼쳐 묶어버릴 생각으로 주의를 기울인 채 대답하자 여자 플뢰는 쓴웃음을 짓더니 와이스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적대하지 않겠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의외의 사실을 입에 담는다.
=보희께서는 당신을 적대하면 패시지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예지하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제가 어찌 여러분들께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
저 검푸른 머리카락의 여자 플뢰가 하는 말은 나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이라 눈썹을 찡그리며 와이스를 돌아봤다.
보석 공주가 예지 능력이 그렇게 쩔어주신다면 내 지랄 맞은 성격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와이스 저놈이 지금처럼 시비를 걸어오는 게 이해가 안 갔었다.
내가 요즘 성격이 조금 죽긴 했지만 수틀리면 확 밀어버리려는 마음가짐은 언제나 하고 있는데 그 수틀리는 수작을 자꾸 걸어오는 게 조금 이상했거든.
“그걸 너도 알고 있었어?”
저 말이 진짜야? 하는 뜻을 담아 와이스를 돌아보니 놈도 내 공간의 벽에 꽁꽁 묶인 게 좀 마음에 안 들지만, 맞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그런 예지가 나왔는데도 그따위로 날 대했단말야? 폭발물인 줄 알았으면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게 정상아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고 쳐다보니 와이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기己는 밤이 늦었기에 그대들을 플뢰의 숲에 있는 휴식처로 안내해주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대는 막무가내로 기를 묶고 입을 틀어막지 않았나.=
“……뭐?”
기막히는 대답에 정신이 혼미해지다 못해 두통이 올라온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내 뒤에 있는 히아리드가 입을 쩍 벌리고 와이스를 쳐다보고 있을까.
“아니, 니가 한 행동은 무시하고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너도 날 공격할 것처럼 위상… 스펙스를 움직였고 저 플뢰들도 공격해왔잖아!!”
=기己는 방위 책임자로써 행동 지침에 따라 움직인 것 뿐이다. 저들 또한 그대들을 기다리던 환영대, 하지만 기己와 그대가 예정된 시각에도 나타나지 않으니 공간이동 진陣을 통해 나타난 것이고 기己가 묶여있는 걸 발견한 저들도 이상을 감지하고 돌격해온 것이지.=
이 말에는 간신히 체면을 차리고 있던 알케마도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버렸고 미호는 대놓고 '바보 아니야?' 하는 얼굴로 기막혀한다.
뒷골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할 말을 잃었다. 또 뭐라 말을 하려는 와이스에게 뒷목을 감싸 쥐고 손을 들어 이야기를 막았다.
“잠깐 기다려봐. 아니 진짜 너….”
=흥. 너는 정말 공격적이군. 네 종족은 다 그런 성격인가?=
“뭐어?! 그걸 지금 니가 말하는거야?!”
사돈 남 말, 아니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승천할 거 같은 기분이다.
뭐가 그리 심각하냐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짓는 와이스를 비 오는 날 먼지 날만큼 두들겨 패고 싶단 욕망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 검푸른 머리카락의 여자 플뢰가 다급한 얼굴로 노크하듯이 푸른색 공간의 벽을 똑똑 두드리며 날 불렀다.
=여행자님, 부디 화를 푸시고 제가 사과와 해명을 드릴 기회를 주세요.=
내 눈가에 살기가 흐르는걸 느낀 걸까, 떨떠름한 얼굴로 검푸른 머리카락의 플뢰 족 여성을 돌아보니 손을 들어 살짝 흔들며 애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과라니요.”
복합적인 의미가 함축된 한 마디를 내뱉으니 플뢰 족 여성은 와이스의 불퉁한 표정을 잠깐 바라보았다.
=와이스 휜델 님은 먼 훗날 저희 일족의 장長이 되실 분. 하지만 아직 자아의 시련을 받지 못하셨기에 정신적으로, 성격적으로도 미성숙한 분이십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 여기면 행동에 거침이 없어지기에 프라우드와 루크랑들과도 종종 마찰을 빚으십니다. 오해가 있었다면 휜델 님의 잘못이 확실할 것이니 사과를 드려야 함이 옳은 일이지요.=
플뢰족 여성의 신랄한 비판에 와이스의 표정이 점점 떫어지는 걸 보니 아주 약간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긴 한데… 본능은 저 뺀질이를 그냥 뒤지게 패버리라고 하고 이성은 그랬다간 메리아놀과 전쟁이라고 떠드는 통에 머리가 아프다.
그렇다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저놈을 떡으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어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와이스를 묶고 있던 푸른색 공간의 벽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흥! 하고 콧방귀를 끼고는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철컥이며 차림을 바로 하는 모습에 그냥 밟아버려도 되지 않을까 살짝 충동이 든다.
알케마도 이제 말리는 건 포기했는지 아무 말 없이 짜게 식은 눈으로 와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생각을 알 수단이 없는 플뢰 족 전사들은 와이스를 풀어주는 모습에서 일제히 무기를 접었고 와이스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는 중이다.
- 아. 진짜 때려주고 싶어.
=동감입니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뒤에서 세 녀석이 속닥거리는 소릴 들으며 속에서 사리가 생길 거 같은 기분에 멍하니 서 있으니 와이스가 뭘 머뭇거리고 있냐는 얼굴로 통로를 막고 있는 푸른색 공간의 벽을 가리킨다.
=뭘하는거지? 저 괴이한 벽을 치워야 지나갈 것 아닌가.=
- …말리지 마. 진짜 때려줄 거야.
=때릴 거라면 나도 같이 때리자.=
=……하아.=
공격할 낌새 따윈 전혀 없는 와이스를 보다가 검푸른 머리의 여성을 돌아보니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으로 제발 부탁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뒤에 선 10명의 최고위급 플뢰들도 '저분이 언젠가 이런 사고를 칠 줄 알았다.'는 표정이어서 와이스의 인성… 아니, 이종족성을 확인한 기분이다.
와… 오늘 진짜 참을성 레벨 많이 올린다.
저들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1m 두께의 공간의 벽을 치우니 눈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 공간의 벽에 플뢰들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검푸른 머리의 아가씨는 공간의 벽이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걸어와서 와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휜델 님.=
=말하라.=
=멜빈지안 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
=사지가 부러질 것을 각오해두시지요.=
그렇지않아도 하얀 와이스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는 걸 보고 멜빈지안은 누굴까 생각하는데, 그 말을 끝으로 내 쪽으로 돌아선 검푸른 머리카락의 아가씨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메리아놀의 플뢰를 지키는 첫 번째 방패인 미리 렌샤엔이 인사드립니다. 먼 곳에서 여행을 오신 여행자님과 일행분을 뵙습니다.=
그 정중한 모습에 나도 뭔가 자세를 취해야 할 거 같지만 치밀어오르는 두통에 그냥 고개만 살짝 숙이면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제 이름은 서하에요. 제 옆으로 호족인 미호, 플라비우스의 히아리드, 사비의 알케마구요.”
내 복잡한 얼굴을 마주한 미리 렌샤엔은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하 님.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제가 휜델 님과 동행했었는데 어쩔 도리없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이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휜델 님의 무례와 제 실수를 부디 용서해주세요.=
아까 자신이 자릴 비웠던 걸 언급하며 진심으로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에 약간이지만 감정이 풀어진다. 옆에서 와이스가 창백한 얼굴로 약간 힘이 빠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감정이 풀리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고.
“사과를 받아들이죠. 원래는 저 녀석한테 받아야 할 사과인 거 같지만요.”
와이스를 돌아보며 말하니 미리 렌샤엔이라 자기를 소개한 검푸른 머리의 플뢰 족 여성이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대신 휜델님은 멜빈지안 님께 팔다리가 부러질 만큼 혼이 나실 것입니다. 그 점을 너그러이 보아주시길.=
=……칫.=
잇소리를 내며 고개를 팩 돌리는 와이스를 보니 진짜인 거 같다. 멜빈지안이 누구길래 예비 장의 팔다리를 분지른다는 거야?
내 표정에서 궁금함을 읽었는지 미리 렌샤엔이 와이스의 철없는 모습에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플뢰 일족의 장이시자 휜델 님의 부친이 되십니다. 20만의 메리아놀이 목숨을 잃을 뻔 한 사고를 치셨으니 간단히 넘어가진 않을 거예요.=
그러면서 정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답답하고 머리도 아프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아 별 말없이 가만히 있으니 미리 렌샤엔은 한껏 미안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서하 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알현을 바라시겠지만 지금 바로는 무리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밤은 저희 일족의 처소에서 쉬시고 보석 공주님을 알현하시는 것이 어떠신가요.=
정중한 모습으로 사죄하고 조심스레 대하는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지.
나는 미리 렌샤엔의 초대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녀와 다른 플뢰들의 호위를 받으며 통로의 끝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죽을상을 쓰고 터덜터덜 뒤따라 오는 와이스를 보니 나름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거 같다.
플뢰 족 전사들이 허공에서 나타났던 커다란 방에 도착하니 은은한 위상력이 방안을 가득히 맴도는 게 느껴졌다.
위상력주제에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라 마음이 절로 편해지는데, 이런 느낌의 위상력을 함정으로 사용하면 진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 거 같은 기분이다.
어쨌든 미리 렌샤엔의 호의 어린 안내를 받으며 방의 중심에 섰더니 웅! 하는 소리와 함께 기화요초가 만발한 채 달빛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숲속으로 이동했다.
이동하자마자 위협 요소는 없나 공간 지각으로 사방을 살피니 패시지의 동남쪽 구역에 있는 숲으로 이동한 걸 알 수 있었다. 이곳이 플뢰 족의 거처인듯하다.
한밤중의 숲속이지만 나무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달빛과 그 달빛을 받으며 살랑거리는 아름다운 꽃들, 찌륵거리는 풀벌래 소리와 거대한 나무들을 보니 굉장히 평화로운 곳으로 느껴졌다.
포탈이 있으면 딱일거 같은 고풍스러운 제단 위에 나타난 우리는 미리 렌샤엔의 뒤를 따라 제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휜델 님. 같이 가시지요.=
=놓아라. 내 발로 가겠다.=
숲에 도착하자마자 와이스는 두 명의 최고위급 플뢰 족 두 명에게 양팔이 잡혔는데, 꼴에 자존심은 살아있는지 손을 밀쳐내더니 자기 발로 지름이 40m는 되는 단풍나무 집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고 보니 이 숲은 지름이 각각 10m에서 30m 가량되는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즐비한데 신기한 건 그 나무 속에 집이 꾸며져 있다는 거다. 거기다 집이 만들어진 나무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보니 플뢰들은 집을 짓거나 하지 않고 나무 안에서 사는듯하다.
말 그대로 우드 엘프… 아니, 우드 플뢰다. 나무 속에 집을 만들다니, 그야말로 판타지잖아?
아무튼, 와이스가 향하는 곳에는… 향하는 단풍나무 집 속에도 초 위를 눈앞에 둔 최고위급의 플뢰 족 남자가 있었다. 성에서 봤던 호위 같은 여성 플뢰처럼 은발에 위상력도 비슷한 수준이다.
저 플뢰가 멜빈지안인가?
공간 지각으로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60명의 고위 플뢰 족 전사는 마치 의장대 사열처럼 2열로 쭉 늘어서더니 각 잡힌 차렷 자세를 취하고 여덟 명의 최고위 투사들은 제단 아래에서 적당히 늘어섰다.
그리고 미리 렌샤엔은 내 앞에 서서 온화하게 웃으며 양손을 좌우로 뻗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플뢰의 숲에 도착하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게 와이스가 말한 환영대의 모습인 거 같다. 뭔가 조금 소소한 거 같지만, 지금은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거의 모두라고 할 만큼 플뢰 족들이 집나무 안에서 잠들어있으니 환영식이 있을 리 없지.
아니, 이들이 날 환영해야 할 이유라곤 하나도 없을 텐데 이렇게 환영해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워해야겠지.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해주고 플뢰 족 전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땅을 밟으니, 미리 렌샤엔이 내게 손바닥을 보이며 내민다.
“……?”
의아한 얼굴로 공손한 자세로 내민 손을 잡아서 위아래로 흔들어주니 미리 렌샤엔이 살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쉬실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어, 어?”
- …….
=…….=
뭐야, 에스코트 하겠다는 거였어?
여자가 남자를 에스코트 한다는 거에 순간 당황했지만 여긴 위상 세계고 저들은 인간이 아닌 플뢰인데 인간처럼 의식하는 것도 이상한가.
그래도 예쁜 여자의 호의는 나쁘지 않아서 손을 뿌리치지 않고 걸어가는데, 이 모습을 미호는 뚱한 얼굴로 심기가 사나운 듯 여덟 꼬리를 너울거리고 히아리드도 미간을 찌푸린 채 미리 렌샤엔을 노려보았다.
미리 렌샤엔은 우리를 지름이 20m는 되는 아름드리나무로 안내해주었다.
아름드리나무는 높이만 30m가 넘는 커다란 나무로 지름 20m에 높이 30m이라 짜리몽땅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집나무의 내부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하며 굵은 나무뿌리가 얽혀 통나무 문처럼 되어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액이나 진액 때문에 찝찝하거나 꿉꿉하지 않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가득 차 있는… 이를테면 연인의 품에 안긴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편히 쉬시길.=
미리 렌샤엔이 살풋 웃으며 문을 닫자 캄캄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어둡네.”
공간 지각 덕분에 장님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시각이 막힌 느낌이 좋은 편은 아니라 응접실로 보이는 내부로 들어가며 중얼거리자 히아리드가 빛 구슬을 몇 개 띄워 올렸다.
은은한 빛이 집나무 내부를 밝히자 연노란 나무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난 벽과 나무의 나이테가 보일 만큼 평평하게 다져진 바닥이 보인다.
탁자나 서랍, 장롱, 찻장 같은 생활 가구는 나무 속살에서 돋아난 듯 벽이나 바닥과 일체화된 모습이었고 한쪽에는 나선 계단처럼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6층까지 연결되어있어 생활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신기한 구조다.
집나무는 1층부터 6층까지 층별로 나뉘어있었는데 1층과 2층은 응접실과 거실, 3층은 식사와 식량창고 같은 게 있는 층이었고 4층과 5층은 층마다 2개의 방이 만들어져있었다.
그리고 6층에는 몸단장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나무 욕조와 이런저런 옷걸이와 옷장 같은 게 채워져 마치 오피스텔 복층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나무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네추럴한 집이군.
미리 렌샤엔이 편히 쉬라는 말과 함께 온화한 웃음을 남기고 사라지자 미호는 바로 내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가더니 나무줄기와 잎으로 이루어진 흔들의자에 날 앉히고는 고양이처럼 내 발치를 차지한 채 꽁알거리기 시작했다.
- 아까 그 여자 마음에 안 들어! 여우 같아!
…여우는 너잖아.
층마다 빛의 구체를 띄워 빛을 밝혀놓고 내려온 히아리드도 미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여자의 호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조건적인 느낌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의는 경계함이 옳겠지요.=
- 그치? 그 여자, 주인님한테 묘하게 눈웃음치는 꼴이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게 틀림없을 거야!
=미인계로 방심하게 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숙덕거리며 날 쳐다보는 꼴이 꼭 나보고 들으라는 거 같은 행동이다.
미호와 히아리드가 숙덕숙덕거리니 조금 덩치가 큰 덕에 자기 몸에 맞는 의자가 없어 나무뿌리가 촘촘히 이어져서 만들어진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던 알케마가 슬그머니 중얼거렸다.
=…그냥 친절하게 대해주는 착한 플뢰 같던데….=
- 아앙?!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아,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그 불여우 같은 여자를 실드쳤잖아! 아까도 와이스를 옹호하더니!
=혹시 알케마는 사비가 아니라 플뢰인거 아닙니까. 외모도 그들과 비슷하니 나름 신빙성이 느껴집니다만.=
=그런!=
괜한 말로 둘의 심기를 건드린 알케마가 미호와 히아리드의 인신공격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여태까지의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정신이 지치는 기분이다. 골치도 좀 지끈거리고.
B 클래스 인간 능력자 11명이라면 전혀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이형종이, 그것도 인간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날 듯한 지성체가 레이드 팀 같은 구성에 무기와 방어구까지 갖춘 모습은 좀 충격적이긴 했지.
“메리아놀에 도착한지 3시간도 안 지났는데 느낌상으로는 3일이 지난 기분이야.”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중얼거리니 그때까지 협공을 받던 알케마가 반색하면서 내 말을 받아준다.
=피, 피곤하셔서 그렇습니다! 그럴 때면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피로를 푸는 게 좋지요! 제가 목욕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모습에 미호가 알케마를 밉상이라는 듯이 흘겨봤지만 괴롭히기보단 내 쪽이 더 중요한지 종종걸음으로 내가 앉은 의자 뒤에 서더니 내 어깨를 조물조물 만져주기 시작한다.
- 주인님 피곤해?
“조금.”
=층마다 빛 구슬을 설치하면서 보니 6층에 욕조가 있었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피로를 풀고 주무시지요.=
“그래야겠어.”
히아리드의 말을 듣고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일으켜 6층으로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의 주적인 종족의 이름은 불굴不屈이 아니라 볼굴 bole-ghoul입니다.
대화 표기가 이콜(=)로 시작되서 끝마침도 이콜로 끝나는 대화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매커니즘에 의해 주인공이 알고 있는 단어로 번역되어 들리기에 고유명사가 아닌 것은 주인공의 중2력에따라 한자나 영문자로 자동 번역되어 들리게 됩니다. 이건 외전과 초반에 슬쩍 스쳐 지나간 내용.... @_@;;
때문에 이종족 몇몇이 주인공이 애타게 찾는 악마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볼굴로 들리는 거죠.
주인공이 때때로 갑갑하게 행동하거나 갑자기 막 나가는 행동을 하는 이유도 그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 브레이크가 되어줄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진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이 있으면 좀 막 나가는 행동을 보입니다.
일본에 한 짓이라거나 미국에서 깽판 친 거라거나 말이죠.
브레이크를 걸어줄 만한 존재가 없다면, 오히려 행동을 부추길법한 존재가 옆에 있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적당히 브레이크를 겁니다. 너무 심각하게 날뛰면 자신의 안위에 부정적인 영향이 온다는 걸 무의식에서 계산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무의식에 의해 조절되는 만큼 자신의 주관과 기준에 벗어나는 간섭과 견제, 시비 등이 들어오면 그때까지 참았던 만큼 폭발한다고 보면 될 겁니다. 왜, 팩트리어트 맞은 멧돼지가 꽁지에 불붙은거마냥 날뛰는걸 상상 해보세여ㅋㅋ
요약하면 옆에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생각하길 포기하는 거고, 없으면 그나마 없는 머리를 굴리면서 간격을 재는 거죠 ㅋㅋ;
꺠애애앵파아아안!! 을 기대하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메리아놀의 도시에서 주인공이 미쳐 날뛰는 일은 없을 겁니다 ㅠㅠ
날뛰었다간 주인공이 죽...진 않고 주변 인물이 죽어 나갈 거거든요. 아, 그렇게 되면 주인공도 미쳐 날뛸 테니 결국 죽게 되려나;
이걸 if 스토리로 써보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