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2 메리아놀의 도시. =========================================================================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와이스가 보여준 말과 행동에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위상력을 저렇게 회전시킨다는 건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의도로밖에 안보여서 푸른색 공간의 벽을 펼쳐 와이스의 전신을 옭아매 버렸다.
=흡?!=
찰나의 순간에 푸른색 공간의 벽에 포박당한 와이스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푸른색 공간의 벽을 내려다보며 경악한다.
=큭, 이까짓게 뭐라고!=
이깟 포박 따위! 하는 얼굴로 힘을 쓰던 와이스는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살짝 놀라더니 와락 인상을 구긴다. 하지만 자신이 잡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지 성난 얼굴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 이게 무슨…! 당장 이걸 풀지 못하겠나!=
“풀어줄 거면 애초에 왜 묶겠어? 바보 아니에요??”
내 이야기에 두 눈을 부릅뜨고 버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몸 안에 위… 스펙스가 막 움직이던데 설마 우릴 공격하려고 한 거에요?”
=크으으으…!!=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힘을 주며 푸른색 공간의 벽을 부수려 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알케마와 히아리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번에 메리아놀은 현자의 종족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게 뭐야. 지금 우릴 함정으로 안내하려고 했다가 들키니까 억지로 힘을 쓰려고 한 거야? 이게 현자라고 불리는 자들의 행동이야?”
와이스와 내가 틱틱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알케마는 번데기처럼 묶여 버둥거리는 와이스를 보고 '망했다!'하는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나와 와이스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저,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사비 종족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분명 공정하고 현명하기가 현자 같은 이들이라고 했는데….=
“기록이 잘못됐거나 메리아놀의 성정이 와전됐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앞을 막고 있는 알케마를 옆으로 치우면서 말하니 당장에 와이스의 성난 목소리가 성내 복도를 쩌렁쩌렁 울린다.
=뭐라! 그대는 지금 메리아놀을 모욕하는 건가! 헛소리 말고 당장 이 정체 모를 술수를 풀라!=
하지만 히아리드는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표정으로 와이스의 외침을 무시하고 말한다.
=알케마가 알고 있는 것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메리아놀의 성정에 관해서는 비슷하게 알고 있었으니까요.=
“뭐야. 그럼 저 플뢰만 별종이란 거야?”
=별종이라니! 기己를 모독하는 발언은 용납 못 한, 으브븝?!=
- 시끄러워. 조용히 해.
내가 알케마와 히아리하고 나누는 대화 사이사이 와이스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떠드니 미호가 살짝 짜증을 내며 가방에서 옷 하나를 꺼내 와이스의 입에 처박아버렸다.
“미호, 나이스.”
주둥이에 옷가지가 쑤셔박혀서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지며 우구국거리는 모습에 엄지를 척 들었더니 미호가 히죽 웃으면서 따라서 엄지를 들어 보인다.
그나저나 지금 상황이 꽤 곤란하다. 자기 입으로 메리아놀에서 나름대로 위치가 있다고 한데다 최고위 이형종인데 이대로 쓱싹해버리기도 그렇고… 인질로 삼기도 곤란하고 정신 조작이나 매혹을 걸자니 좀 거슬리는 느낌이 있다.
“아, 어떻게 하지.”
내 표정에서 뭔가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알케마는 주저주저하면서 소심하게 내 옷자락을 잡는다.
=서하 님, 참으셔야 합니다.=
“참긴 뭘 참아. 시작은 저 플뢰가 먼저 했다고. 무작정 참기만 하면 호구 잡히기만 할 뿐이야. 나갈 땐 세게 나가야지.”
=으으. 그건 그렇지만….=
녀석의 울상을 보니 이대로 놔두면 질질 짤 거 같은 분위기라 살짝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어. 당장은 날뛰지 않을 테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휴우.=
알케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슬쩍슬쩍 내 시야에서 와이스를 가리는 모습을 모른척하면서 물었다.
“지금 당장 고를 수 있는 선택지라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너희들은 지금 보석 공주님을 만나러 가는 거랑 그냥 여기서 때려치우고 떠나는 거랑 어느 쪽이 좋아 보여? 어차피 여기서 정보를 못 얻으면 하늘 섬으로 갔다가 루크랑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고 에리와 카라를 데리고 정보 수집이라는 방법도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골라봐.”
- 저게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까 보석 공주한테 가서 왜이랬냐고 따지면 안 돼?
미호는 와이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말짓거리에 시비를 건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와이스를 손가락질하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알케마가 여기에도 폭탄이 있었네! 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입을 열었다.
=미호.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어. 아무리 와이스 휜델이 먼저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었다지만 우리가 밑도 끝도 없이 들이닥치면 우호적인 반응은 기대할 수 없을 거야.=
- 그럼 저 뾰족 귀를 데려가서 보석 공주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게 하고 사과를 하게 만들어야지. 그게 맞는 거 아니야?
저거라는 말과 뾰족 귀라는 호칭에 입이 막혀 웁웁거리던 와이스의 눈썹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다. 나름 잘생긴 호감형 얼굴이 저런 꼬라지를 하고 있는걸 보니 왠지 쌤통이다.
알케마는 미호의 질문에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내 얼굴을 힐끔거린다.
=그,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보석 공주님은 메리아놀을 아우르는 분이시기도 하고 대지의 주인을 모시는 무녀시기도 하잖아? 무례한 행동은 가급적이면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저 플뢰 족 남자도 어쩌면 함정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우리를 저 방으로 안내하려 했을 수도 있고….=
=이해가 안 가는군요. 알케마는 어째서 저자세로 나가려 하는 겁니까. 거기에 당신의 행동은 저자를 옹호하는듯한 발언으로 느껴집니다만.=
=…….=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 이상 자세를 낮춰 이들에게 맞추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자가 진실로 메리아놀의 상위 계층이라면 서하 님도 위상이 극에 이르신 분, 그의 삿된 행동을 우두머리인 보석 공주가 직접 해명해야 함이 옳은 절차가 아닙니까.=
해명이 필요하다는 히아리드의 지적에 알케마는 '그건 너희가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야!'하는 표정이 되었다.
가슴이 꽉 막힌다는 표정을 지은 알케마는 옷으로 주둥이가 꽉 막힌 채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로 우릴 노려보고 있는 와이스를 보고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이 남자는…. 하고 살짝 화난 얼굴을 한다.
그러더니 살짝 한숨을 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호와 히아리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 이야기는 굽히고 들어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서하 님의 능력은 경천동지할 수준이지만 우리도 보석 공주님의 능력을 정확히 모르니 전면전으로 벌어진다면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급적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는 이야기에요.
만에 하나 싸움이 벌어져 미호나 히아리드가 상처라도 입는다면 서하님께서는 당연히 격노하시겠지요.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적게는 이곳, 보석 공주님이 기거하는 성에서 크게는 메리아놀의 도시, 패시지 전체에 가볍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화가 났나 안 났나 힐끔 하고 안색을 살핀 알케마는 내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자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개미는 아무리 땅바닥을 헤집고 다녀봤자 자그마한 공터 그 이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거대한 붕조鵬鳥는 날갯짓 한 번에 폭풍을 불러일으켜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법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후에 후회… 아니, 아쉬워하기보다는 그 전에 수습할 수 있으면 가능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곳을 제외하고도 정보를 수집할 곳이 있다지만, 정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니 그 점도 염두에 둬야 할거에요.=
그 말에 미호는 물론이고 히아리드도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보니 알케마는 메리아놀이 제2의 헤뷜트가 될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나 때문에 벨티칼 산이 무너졌다. 그러니 여기까지 사라지면 이종족의 4대 도시 중 두 곳이 파괴되는 셈이다.
뭣보다 메리아놀에는 사비들도 살고 있다고 하니 사비 종족의 예비 장이었던 알케마로서는 이곳이 날아가는 건 필사적으로 막고 싶은 일일 거다.
내가 날뛴 여파를 가장 가까이서 본 당사자의 표현이기에 굉장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한 알케마에게 설득당한 미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어째 얌전해진 와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 그치만 우리가 움직이거나 하면 막 호위병 같은 게 몰려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서하 님이 성에 아무도 없다고 하셨잖아? 호위병이 어디 있다고 달려오겠어. 거기다 잘못은 이자가 먼저 했으니 호위병이 달려오더라도 우선 이성적으로 대화부터 시도하면 될 거야.=
알케마는 미호의 의견을 듣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데, 세 녀석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중 와이스가 안내하려던 통로 끝에 있던 방에서 갑작스레 일어나는 현상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다.”
그곳은 공간 이동을 위한 장소였는지 플뢰 족으로만 이루어진 전사들이 롱소드와 스피어, 연녹색 체인 메일로 무장한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뿅뿅 나타나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짓던 세 녀석도 통로의 끝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위상력을 느꼈는지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며 와이스를 노려본다.
말하는 중에도 플뢰 족 전사는 1초에 서너 명씩 방의 중앙에서 나타나더니, 30명이 모이는 순간 세련된 대리석 문을 밀어서 열고 있었다.
그그그그그그… 쿠웅!
높이가 5m는 되는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열리고 플뢰 족 전사들이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질서정연하게 문에서 나오는 순간 묶여있는 와이스와 그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멈칫했다.
처적!
…그리고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롱소드를 뽑아 들고 삼각꼴 형태의 돌격진형을 잡더니 흔한 기합 하나 없이 발소리마저 일체화해서 달려든다.
커다란 창문에서 비치는 달빛 사이로 고풍스러운 복도를 서른 명이 무시무시하게 돌진해오는 모습에서 알케마가 말한 대화는 개뿔도 안 통할 거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이게 뭐야.
=…….=
미호가 싸울 준비를 하면서 눈썹을 찡그리며 하는 말에 알케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정의 동요도 없이 날 선 눈빛으로 달려드는 30명의 플뢰 족 전사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침착하다.
“거기까지.”
순수한 고위급으로만 이루어진 저들을 가까이 접근하게 두고 싶지 않아 드넓고 긴 통로를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완벽하게 틀어막아 버리니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플뢰 족 여성이 허리춤에서 롱소드를 뽑아 공간의 벽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콰작!
공간의 벽과 부딪치는 순간 반 토막이 난 롱소드의 날은 핑 소리를 내며 벽에 날아가 뿌리까지 박혀버린다.
세상에, 벽에 내려치는 순간 칼이 부러져나가다니. 얼마나 세게 휘두른 거야?
롱소드가 부러진 플뢰 족 여전사는 잽싸게 뒤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다른 전사가 메우더니 공간의 벽을 내려친다. 그렇게 삼각 꼴의 진형을 유지한 채 자리만 교체해가며 기계적으로 한 점에 공격을 집중하는 기계적인 모습에 전율이 일어난다.
콰직! 콰자작!
고위 이형종이라 공간의 벽을 부술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저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혹시 부서지는 건 아닐까 살짝 불안감마저 들 지경이다.
플뢰 족 중에 혹시 랜슬롯정도의 영웅급이 있을까 싶어 공간 지각으로 빠르게 플뢰 족을 스캔해봤지만 플뢰 족 여자들은 다들 글래머러스하다는 점만 확인했을 뿐, 특출나 보이는 인물은 안 보인다. 남자? 알게 뭐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예의 주시하고 있으려니 통로 끝의 방에서 또다시 일단의 플뢰 족이 우르르 나타났다.
- 아. 또 나와!
미호는 2차로 나타난 서른 명의 플뢰 족 전사를 보고 얕게 신음을 흘리는데, 알케마도 플뢰 족 전사들이 문답 무용으로 달려들어 공격하는 모습에 야단났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2차로 등장한 30명의 플뢰 족 전사도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공간의 벽과 그것을 공격하는 동족들을 본 순간 1초도 망설임 없이 가세해 공간의 벽을 공격한다.
성난 파도가 몰아치듯이 공간의 벽을 두드려대는 플뢰 족 전사들을 보다가 와이스를 노려봤다.
“우리는 그냥 몇 가지 질문이 있어서 찾아온 거 뿐인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와이스 이놈은 아까 동족들이 나타난 순간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었다. 그러더니 공간의 벽이 넓게 펼쳐진 모습에 잠깐 놀랐다가 플뢰 족 전사들의 침착한 행동에서 금방 안정을 되찾더니 바로 부서지지 않는 모습에 다시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눈썹을 찡그리고 동족들과 푸른색 공간의 벽을 번갈아 보는 와이스를 보니 혹시? 하는 생각이 든다.
이놈, 혹시 겉보기보다 어린 거 아냐?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거나 자기 직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행동 같은걸 보면 딱 철없는 어린 왕자인데….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놈을 지긋이 노려보고 있으니 와이스도 내 시선을 느끼고 나와 눈싸움을 하듯이 마주 노려본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보여주는 치기 어린 모습에 어린놈이라는 의심이 한층 더 짙어진다.
알케마는 혹시라도 내가 와이스를 죽일까 봐 전전긍긍해 하며 내 소매를 소극적으로 잡으며 애원하듯이 말했다.
=주, 죽이시면 안 됩니다, 서하 님.=
“야. 넌 날 무슨 무차별 살인귀로 보냐? 함부로 안 죽여!”
척 봐도 인간처럼 보이잖아! 난 여태껏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은 하철수 그 개새끼 하나 뿐이라고.
아무튼 짧은 시간 차륜 공격을 해봤지만, 여전히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공간의 벽에 플뢰 전사들은 일제히 물러나더니 60명이 간격을 두고 4열 횡대로 서더니 등에 매고 있던 스피어를 꺼내 들고 투척 자세를 취한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 살짝 긴장하는데, 60명 전원은 적지 않은 양의 위상력을 동시에 움직이며 TP를 스피어에 응축하더니 일순간에 투척한다.
쿠과과강, 쿠구그그그긍….
……60명분의 일제 사격은 솔직히 말해서 공간의 벽이 부서지는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쫄 만큼 장관이었다.
장관은 장관이고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푸른색 공간의 벽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멀쩡했다.
고풍스러운 통로에 보기 흉한 자국을 잔뜩 새긴 플뢰 족 전사들은 전혀 개의치 없고 몇 번 더 위상력을 응축시켜 공격을 해보더니 그제야 자신들의 공격력으로는 푸른색 공간의 벽을 어찌하지 못한다고 깨달았는지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 서서 이쪽을 조용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공격을 멈춘 저들의 행동에 침을 꼴깍 삼켰다. 다음에는 무슨 공격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아무도 공격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60명의 플뢰 족은 모두가 고위 이형종으로 이루어진 데다 반수 이상이 위상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정예다. 그런 자들이 어떤 소란도 없이 조용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으니 묘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 주인님. 어떻게 해?
미호는 이런 압박감은 처음인지 살짝 울상을 지으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호의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와이스는 주둥이에 옷가지를 물고 있는 꼴사나운 모습이면서도 기세가 살아나는지 근엄한 척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아무리 봐도 역시 이놈은 어린 게 맞는 거 같다. 행동에서 나처럼 철없는 어린 티가 난다고 할까.
“무서워하지 마. 저들은 고위급일 뿐이야. 너희들은 초위급이잖아?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너희들은 내가 꼭 지켜줄 테니까.”
- …응!
신뢰감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미호는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끔 몸을 풀기 시작했다.
와이스 이놈과 저들을 두고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나면 될 텐데 어째서인지 그래서는 안될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 때문에 푸른색 공간의 벽을 사이에 두고 플뢰 족 60명과 대치하고 있으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다.
거기다 이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데 보석 공주는 대체 뭘 하는가 싶어 공간 지각으로 첨탑 꼭대기의 궁전을 살펴봤더니 초위급을 앞둔 여자 플뢰는 침대 쪽으로 돌아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역시 저 침대 안에 보석 공주가 있는 게 맞는 거지? 여기 상황을 눈치챈 건가? 뭐라고 하는 거지?
대화하는 걸로 보이긴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렇게 플뢰 족 전사들이랑 대치하고 있을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니 세 번째 웨이브가 도착했다.
- 또 왔어!
=이, 이번에는 뭔가 달라. 11명인데?=
=…….=
알케마의 말대로 이번에는 11명이 나타나서 열린 문을 통해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을 공간 지각으로 훑어본 순간 팔에 전율과 함께 닭살이 스르륵 돋았다.
……위상석을 몸 안에 만든 자들은 하나도 없지만, 전부가 1,000만 언저리의 위상력을 지니고 있다. 즉, 저들 11명은 전원이 최고위 이형종이었다.
신체 강화 타입 다섯과 회복 타입 둘, 속성 타입 셋, 신체 강화와 속성의 하이브리드 타입하나.
전투가 벌어진다면 굉장히 까다로울 구성이다. 거기에 최고위급부터는 호박색 공간의 벽을 어느 정도 저항한다는 점과 저들의 파티 구성을 봤을 때 진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날 더욱 긴장하게 하는 건 그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새하얀 색으로 통일된 장비도 평범한 무기와 방어구가 아니라는 거다.
하나같이 적지 않은 위상력을 강하게 머금고 있는 최고급 장비다.
신체 강화 타입 다섯은 와이스가 입고 있는 갑옷에 버금가는 훌륭한 모습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있었고 허리에는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으며, 속성 능력자와 회복 능력자 다섯 또한 기묘한 모양이 오색으로 수놓아진 고급스러워 보이는 로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모두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장비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반짝반짝 빛나는듯한 가죽 갑옷을 입은 검푸른 머리카락의 여자 플뢰가 눈에 들어왔다.
“어? 저 여자는 아까 성벽에서 본 그 여잔데….”
내가 그들을 공간 지각으로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사이 플뢰 족의 60명 전사들은 좌우로 나뉘어 길을 만들어주며 그들이 공간의 벽에 접근할 수 있게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도 이번에 나타난 플뢰에게서 뭔가가 느껴지는지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는 내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야 이 녀석들도 안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일부러 담담한 얼굴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봤다.
전투를 예상하고 마음을 다잡고 있으니 와이스가 갑자기 읍읍거리면서 자기 입에 물린 옷가지를 빼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놈에게 다가가 입에 강제로 물린 옷가지를 빼주었다. 어차피 일어날 싸움이라면 이놈이 뭐라고 지껄이던 일어날 테고 가장 먼저 죽을 놈이니 적어도 죽기 전에 뭐라고 하는지는 들어봐야지.
입을 막고 있던 게 사라지자 놈은 인상을 쓰며 거칠게 욕을 하…진 않고 나름 품위 있게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침을 삼키더니 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미쳤군. 설마 저들과 싸울 셈인가? 네게는 저들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나 보군. 열한 장의 하얀 나뭇잎의 투사들은 7만 플뢰들 중 최정예들이다. 또한 녹색 나뭇잎의 투사들도 일당백의 전사들....=
저들이 나타나기 전이었다면 그냥 몸을 피해버리는 걸로 끝났을 텐데 저들이 우리 넷을 본 순간 뒤로 물러날 수 없게 되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위상 세계가 통합되면 능력자들과 함께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 상황에 위상 세계의 대규모 전력에게 적대감만 심어놓고 몸을 피했다간 나중에 어떤 피해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그래서 어쩌라고. 긴말은 필요 없고, 오늘 메리아놀이 멸망하게 되면 그건 네놈 탓이라는 것만 알아둬.”
=……!=
와이스에게 영은이한테 교육받은 [공식 석상에서 화가 났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표정 no.1],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기를 쓰며 나지막하게 쏘아주었다.
============================ 작품 후기 ============================
트롤은 어디에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