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501화 (501/517)

00501  메리아놀의 도시.  =========================================================================

와이스의 뒤를 따라 커다란 성문을 지나서 도시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좌우 폭이 20m는 될법한 넓은 대로 끝에 우뚝 서 있는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성이 혼합된듯한 고풍스러운 성이었다.

4km나 이어지는 도로 끝에 우뚝 서 있지만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웅장한 모습에 거리감이 마비될 지경이다. 저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선명하고 커다랗게 보이다니, 대체 얼마나 큰 거지?

공간 지각으로 확인한 메리아놀의 도시, 패시지는 거대한 성벽이 원형으로 도시를 감싸고 있었고 그 중심에 성이 위치한, 거미줄 형태의 도로망을 가진 도시였다

특히 도시의 중심에 있는 성은 10m 높이의 내성 벽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성벽은 또다시 동서남북으로 출입문이 나 있었는데, 그 출입문에서부터 시작된 도로는 각각 맞은편의 외성 벽의 성문과 일직선으로 연결되어있었다.

그렇게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뉜 패시지는 큰 대로에서 뻗어 나온 작은 도로가 사방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도로의 사이사이에는 각종 건물과 공원, 현실로 치자면 공장으로 볼 수 있는 공방이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도로는 그중 하나인 서쪽 외성 벽에서 내성 벽을 직선으로 이어주는 대로였다.

“이해가 안 되네.”

- 뭐가 이해 안 돼?

공간 지각으로 패시지의 전체적인 면을 훑어보고 중얼거리니 옆에서 같이 걷던 미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어본다.

“성벽을 지은 건 적의 침입을 대비해서일 텐데 성벽을 지나면 도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성까지 곧게 뻗은 대로를 만들어놨잖아. 이러면 성벽이 무너졌을 때 적은 바로 심장을 치러 달릴 거란 말이야.”

그렇다고 성벽 내부에도 여러 겹의 성벽을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고 적의 침입을 저지할만한 구조물이라곤 내성 벽 달랑 하나뿐이고.

내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 미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귀엽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때 와이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지의 벽은 적습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걸로 끝이야? 그 뒤에 이어질 설명이 더 붙어야 하는 거 아니고?

잠시 기다렸지만 더이상 입을 열 기색이 없는 와이스를 보고 소리 없이 입술을 삐죽이니 알케마가 슬쩍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성벽이 특수한 비술의 매개물이라는 거군요.=

“아. 지금 패시지를 뒤덮고 있는 보호막을 성벽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야?”

알케마의 말을 듣고 지금도 공간지각에 느껴지는 투명한 보호막의 존재를 꺼내자 앞서 걷던 와이스의 귀가 하늘로 뾰족히 솟아오르더니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놀란 얼굴로 날 돌아본다.

와이스의 표정을 보니 메리아놀의 성벽… 대지의 벽의 효과는 비밀인가보다.

“제가 감이 좀 예리해서요.”

=음….=

하지만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 와이스는 자신의 행동이 내 말에 진실성을 부여해준다는 것을 모르는 거 같다.

그의 행동에 피식 웃으니 와이스도 그제서야 눈치챘는지 얼굴을 살짝 굳히더니 몸을 홱 돌려 대로 한편에 세워져 있는 호화스러운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 꼬시당.

와이스가 반말을 일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개구쟁이 악동처럼 씩 웃는 미호였다.

아무튼 도시를 덮고 있는 저 보호막도 일종의 적의 침입을 막는 역장의 형태라는 건 알겠다. 하늘에서 정찰 같은걸 하지 않은 게 정답이었군.

사비의 도시인 헤뷜트가 아무 곳에서나 집을 짓는 바람에 생겨난 무계획 도시라면 메리아놀의 도시인 패시지는 칼같이 구획을 나누어 지은 철저한 계획도시로 보였다.

겉으로 봐서는 한밤중이라 그런지 대로를 오가는 행렬도 없고 건물에서 불빛도 흘러나오지 않아 숨 막히는 적막이 감도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지만, 공간 지각으로 확인한 도시는 깔끔하고 가지런히 정돈되어있어 메리아놀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정말로 20만이라는 숫자가 생활하기에 걸맞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할까?

커다란 대로로 나누어진 4곳의 구획은 장소마다 특징이 달라 1/4은 현대 도시처럼 3층 높이의 석조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면 다른 1/4은 물과 땅의 비율이 8:2 정도인 호수 공원 같은 곳이고 다른 1/4은 약간 평야처럼 이루어져 있어 듬성듬성 집과 목장으로 보이는 건물이 서 있었으며 마지막 1/4은 크고 굵은 나무가 가득 자라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성안에 숲이나 평지, 거대한 호수가 있는 게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곳곳의 보금자리에 잠들어있는 이종족들을 보니 아마도 종족성을 배려해 만들어둔 것 같다.

약간 심기가 불편해진 듯한 와이스의 뒤를 따라가니 거대한 도로 한편에는 불곰만큼이나 덩치가 커다란 청회색 늑대 네 마리가 매여있는 호화로운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개썰매도 아니고… 마차馬車가 아니라 견차犬車인가….

호박 모양을 본떠 만든듯한 새하얀 마차는 6명은 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랬고 마부석에는 와이스에 비해 칙칙한 연갈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플뢰 족 여성 두 명이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이쪽이다.=

아무래도 마차는 날 위해 준비되어있었던 듯, 와이스는 잠시의 머뭇거림 없이 우리를 호화로운 마차로 안내했다.

말없이 와이스의 뒤를 따르며 조금 전 성문에서 와이스가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희珤?라면 보석 공주겠지. 보석 공주가 왜?

만약 내가 오는걸… 예지 같은 걸로 알고 있었다면 호우반을 통해서 내게 언질이라도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미래를 본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연주의자 혹은 방임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법한 행동을 한다고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미래를 봤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줘서 확정 요소를 늘리는 쪽이 낫지 않나?

내가 조금만 더 늦거나 빨랐거나, 방향을 약간 돌아서 대동강을 지나치지 않았고 크라켄을 만나지 않았다면 호우반을 구해주지도 못했을 테고 결과적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 아냐.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미 결정된 미래라는 것이 가지는 진행성을 생각해봤을 때 호우반 일행이 크라켄에게 잡히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우리도 대동강을 지나쳐서 그들을 구해주는 게 확실한 상황이었으니 호우 반을 통해 나에게 은패를 전달할 수 있게끔 호우반을 벨티칼 산으로 보내는….

어우. 생각하니까 뇌가 꼬이는 거 같다.

갖은 생각을 떠올리며 마차에 올라타니 마차 내부는 겉에서 보던 호박 마차보다 굉장히 넓었다. 겉에서 보면 4명이 겨우 탈법한 크기였는데 속은 50평형 아파트 수준이다.

이 신기한 마차를 미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하며 히아리드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할 때 마차가 출발하는지 창밖 풍경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진동도 없고 소음도 나지 않는 마차라니 대단한데.

호화롭게 꾸며진 동양풍 거실을 쓱 둘러보고 거실 중앙에 놓여있는 여러 개의 방석 중 하나에 앉으니 와이스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날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뭐랄까… 예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자기 호기심 충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기적인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어떠한 설명도 없이 날 관찰하는 시선에 약간 불쾌감이 들어서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뭘 보냐는 듯이 마주 바라봐줬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쉬운 쪽이 먼저 말을 열어야지 뭐.

“와이스는 높은 신분이라고 했죠?”

=그렇다.=

혓바닥 한번 짧네.

“보석 공주라는 분이 내가 올 거라는걸 알고 당신을 서쪽 성벽에 보내놓은 건가요?”

=…그렇다.=

“그럼 호우반을 만날 거라고 예지도 했겠군요. 내가 그들을 도와줄 거라는걸 알고 메리아놀로 향할 수 있도록 은패가 건네지게끔.”

=그렇다. 보기보단 똑똑하군.=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것과 동급의 인과관계에 관한 딜레마 때문에 대뇌가 꼬일 거 같은 고통을 겪었는데 그걸 저딴 식으로 말하니 조금 화날 것 같다. 그리고 '보기보단'이라는 말은 뭐야?

날 얕보는 거 같은 와이스의 대답에 조금 화가 났지만 그걸 언급해서 관계를 나쁘게 만드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인 거 같아 속으로 꾹 눌러 참는 대신 약간 비꼼이 담긴 말로 견제를 넣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할 질문이 뭔지 당연히 알겠네요?”

=그 대답은 보희께서 해주실 것이다.=

견제에도 불구하고 눈썹도 꿈쩍 않고 대답하는 모습이 뭐라고 할 말이 없을 만큼 깔끔한 거부의 태도다. 이야기를 더 이어갈 의지도 없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나올 거면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데? 예쁜 아가씨라면 좋게 봐주겠지만 볼 것도 없는 불알 두쪽달린 사내새끼가 그렇게 쳐다보면 나도 심기가 사나워진다고!

…쯧. 쳐다보든가 말든가 나도 이젠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공간 지각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마차 내부와 마차 밖 사이에 기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 마차도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에 손대는 비술의 힘인가보다. 혹시나싶어 마차를 전체적으로 조사해보니 마차의 바닥이 나무로 3겹이나 겹쳐져 있는데 겹과 겹 사이에 그림 같은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거기서 미약한 위상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미약하다고 우습게 볼 게 아니라 약하지만, 무척이나 세밀하면서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게, 마치 파텍 필립같은 최고급 시계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이다.

이게 지금 마차 내부의 공간 확장 현상을 일으키는 건가? 이걸 배껴서 그랑블루 연구소에 연구감으로 던져주면 어떠려나.

- 주인님. 배 안 고파?

마차 내부 탐험은 끝났는지 미호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목에 매달리면서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자기가 배고프면서 직접 배고프다고 말을 꺼내기에는 소녀 감성으로는 부끄러운가 보다.

아공간에서 먹을 걸 꺼내줘도 되겠지만, 와이스 앞에서는 별로 능력을 보여주기가 싫기도 하고 그의 반응에서 틱틱거리고 싶기도 한 기분이라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손님 초대해놓고 뭐 대접해주는 건 없어요?”

=……있다. 기다려라.=

마차 내부에 있는 네 개의 방 중의 한 곳으로 들어간 와이스는 직접 나무 쟁반에 찻주전자와 나무 열매, 과일을 가득 담아 챙겨 나왔다.

찻주전자라고 생각한 건 그냥 달콤한 나무 수액이 담긴 주전자였지만 미호는 그것도 맛있었는지 산딸기 같은걸 날름날름 집어먹고 달콤한 나무 수액을 마시며 허기를 채워나갔다.

그렇게 와이스의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독특한 맛의 처음 보는 과일을 먹고 세 녀석에게 먹이고 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내성의 서쪽 출입구에 다다랐다.

특이하게 성문 경비병도 없는 출입구를 지나 성의 내부로 들어서니, 성은 생각보다 더 넓고 복잡했다.

못해도 5천 명은 수용할법한 성의 내부를 와이스의 안내를 받으며 걷고 있으니 이렇게나 커다란 성에 인기척이라고는 우리를 제외하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 성에 비교하면 1/30 정도밖에 안 되는 내 집에도 고용인이 100명 가까이 있는데 이만한 성을 관리하려면 1,000명도 부족한 거 아냐?

무엇보다 인간의 성이었다면 경비만 수백이 있었을 텐데 경비병이나 호위병 등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서 역시 인간하고는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종족이구나 생각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고즈넉함이 묻어나는 대리석처럼 반들반들한 통로를 걸으며 성 전체를 공간 지각으로 쓱 훑어보니 성의 이곳저곳에 위상력이 고여있거나 움직이는 장소도 있고 지하에 보물 창고로 보이는 곳도 있고 성다운 면모가 보이긴 하지만, 지금 이 성에는 우리와 와이스를 제외하면 1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그 1명은 성에서 가장 높은 첨탑 같은 곳의 궁전에 홀로 서 있었다.

궁전. 그래, 말 그대로 궁전宮殿이다. 저 멀리 아랍 지역의 옛날 공주나 왕녀가 머무는 방이 있다면 저러할 거다.

수백 평은 되어 보이는 넓은 첨탑의 꼭대기는 사방이 트여있었고 천장을 받치는 기둥은 파도를 형상화한 조각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기둥이 받치고 있는 궁전의 처마 전체에도 비슷한 형태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얼마나 세심하고 세밀하게 조각했는지 공간 지각으로 그 정보를 받아들이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바닥은 유백색으로 반들반들하며 기기묘묘한 수가 놓여진 거대하고 푹신해 보이는 양탄자가 궁전의 이곳저곳에 깔려있었다.

그러한 궁전의 정중앙에는 20명이 누워도 넉넉할듯한 거대한 원형 침대가 놓여있었고 침대의 위에는 하늘하늘한 캐노피가 잔뜩 달려 침대를 가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침대의 안쪽이 공간 지각으로 감지가 안 된다.

처음 보는 현상에 의아해졌지만 이내 침대 옆에 서 있는 한 명의 플뢰 족 여성에게 모든 신경이 쏟아졌다.

그 여성은 와이스처럼 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성으로, 앞서 가고 있는 와이스가 입고 있는 갑옷에 버금가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동그란 초대형 침대 옆에 깍듯이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위상력을 제대로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음….”

미호와 히아리드는 내가 공간 지각으로 성을 살피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는지 나지막한 신음에도 반응하지 않고 내 좌우에 서서 앞만 바라보는데 뒤따라오는 알케마가 =으응?=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저 녀석은 대체 멍청한 것인지 똑똑한 것인지…. 녀석의 소리 때문에 앞서 걷던 와이스가 다시 뒤돌아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린다.

아무튼, 은발의 플뢰 족 여자는 초위급을 눈앞에 둔 위상력 3,980만에 위상석 3,309만의 최고위급 이형종이었다.

내가 그녀의 위상력을 감지하는 순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플뢰 족 여성은 쓱 고개를 들더니 주변을 살핀다.

순간적으로 뮈르딘이 말했던 반계에 든 존재라는 게 생각났다.

반계에 든 존재는 내 공간 지각을 알아볼 수 있을거라고 했었지. 저 모습은 틀림없이 내 공간 지각을 감지하고 움직이는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 저 여성 플뢰가 보석 공주가 아닐까 했지만, 그때 여성이 갑자기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뭐라 뭐라 입술을 움직인다.

설마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침대 안쪽에 누군가 있는 건가?

…혹시 보석 공주?

=왜 그러지?=

날 돌아보던 와이스는 그제서아 내 모습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서서 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모습에 속으로 찔끔했지만 시치미떼듯이 그 눈빛을 받으며 되물었다.

“뭐가요?”

=…….=

와이스의 눈빛에서 의심의 기운이 점점 차오르는 걸 보며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아무리 밤이라지만 성에서 일하는 존재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원래 이래요? 경비도 안 보이고….”

=밤이 되면 성녀와 성인은 모두 자택으로 귀가한다. 또한, 메리아놀에서 그분의 무녀인 보희를 공격할 자는 존재하지 않아. 경비라니, 이상한 말을 하는군.=

…성녀聖女 성인聖人이 아니고 성녀城女 성인城人이란 말이지? 거기다 보석 공주를 공격할 존재가 없다니, 생각 이상으로 사고방식이 다르다는걸 와이스의 대답에서 알 수 있었다.

이런 야밤중에 경비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랑그 드란을 섬기는 무녀를 공격할 자가 없다는 말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거겠지.

나는 태생적으로 우두머리가 없는 인간 종이라 그런지 저런 사고방식은 이해 할 수가 없다. 만약 미치거나 돌아버린 놈이 갑작스레 난입해서 무녀를 공격하면 어쩌려고?

그런데 이런 질문이 또 와이스의 의심병을 건드렸는지 눈빛이 점점 싸늘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성벽에서부터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여준 와이스는 아니었기에 나도 나쁜 감정이 쌓이고 있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싸늘하게 노려보니 나도 반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가요? 제가 사는 곳은 이곳과는 조금 윤리가 달라서 물어본 거에요. 그리고 저도 속이 넓지 않아서 그런 눈빛을 받아주는 데 한계가 있으니 그만두시죠?”

=이런 눈빛을 받을 만큼 그대의 행동은 정말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인가?=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뜨며 쏘아주는 와이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난 그저 공간 지각으로 도시와 성 구경을 한 것뿐인데?

하지만 와이스에게 내 능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고 더는 호구로 보이기 싫어 비죽 웃으면서 비꼬는 말을 꺼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신체 강화 타입의 최고위 이형종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죠.”

=뭐라?!=

최고위와 이형종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어서 와이스에게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표정이 확 변하는 걸 봐서는 자신의 능력 형태를 내가 알아챘다는걸 확인한 거 같다.

난 쿡 찌르면 어디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놈이라고. 그런 날 마구 찔러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

놀람과 경계심이 극도로 차오르는 와이스의 얼굴을 보면서 심드렁하니 입을 열었다.

“보석 공주가 날 보고 싶다고 데려오라고 들었으면 그냥 얌전히 안내나 해주세요. 아니면 제가 알아서 찾아갈까요?”

=무슨 말….=

“보석 공주님은 저 위쪽 첨탑 끝의 궁전에 계신 분이죠? 제가 도착한걸 아신 거 같은데 그리로 안 가고 왜 딴 데로 가요?”

=…….=

와이스의 시선이 순간 내 뒤쪽 통로로 향하는 걸 보며 픽 웃었다. 미끼를 던졌더니 그대로 무는 꼴이 참.

“지금 와이스 당신이 안내하는 복도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방 뿐인데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이유는 뭐에요? 보석 공주님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이곳이 아니라 한참 전에 왼쪽으로 꺾이는 곳으로 가야 했잖아요. 설마하니 함정?”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와이스의 안색이 굳더니 몸 안의 위상력이 급격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뭐야, 진짜 함정이야?

============================ 작품 후기 ============================

500회 축하 메시지 감사합니다~!

얼굴이 트고 입술에 물집이 나서 간질간질 욱신욱신 따끔따끔 괴로웠는데 축하 메시지를 보니까 괴로움이 가시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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