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97화 (497/517)

00497  4대 종족  =========================================================================

부끄러움에 숨만 색색 몰아쉬던 미호가 어느 정도 진정하고 내 앞에서 평범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됐을 무렵 알케마와 히아리드가 중위급 참매 이형종 한 마리를 잡아 왔다.

등 부분은 회색빛을 띠고 턱에서 아랫배까지는 회갈색 줄무늬가 빽빽이 나 있는 참매 이형종은 알케마의 손에 날개가 잡힌 채 쉴 새 없이 빼애액 울어대며 두 다리를 버둥 거리렸다.

놈이 도망 못 가게끔 다리에 푸른색 공간의 벽을 족쇄처럼 만들어서 묶고 알케마가 손을 거두어들이자 거세게 홰를 치며 빼아악! 끼아아악!! 하고 울면서 우리를 위협한다.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을 써봐.”

- 응.

참매의 앞에서 요리조리 놈을 살펴보던 미호는 내 지시에 잠깐 눈을 감았다 뜨더니, 은빛 눈동자와 여덟 번째 꼬리가 분홍색 빛을 환히 뿜는다.

날뛰듯이 홰를 치던 참매는 그 빛을 직시하는 순간 움찔하고 굳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하다가 검고 노란 눈을 끔뻑거리고는 곱게 날개를 접었다.

발목이 묶인 것 때문에 좀 자세가 불안정해서 기우뚱거리지만 금방 균형을 잡고 얌전히 미호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오. 이거 설마 매혹 능력인가?”

구미호 하면 사람을 홀리는 현혹眩惑이나 매혹魅惑이 특기니까.

=으음.=

알케마는 내 이야기를 듣고 미호를 살짝 옆으로 밀어내며 그 자리에 서자 참매 이형종은 다시 홰를 치며 키악! 하고 부리로 쪼으려는 시늉을 한다.

자못 위협적인 그 모습에도 알케마는 상관치 않고 손을 들어서 놈의 눈앞에 이리저리 흔드니 참매는 진짜로 뾰족하고 날카로운 부리를 들이밀어 알케마의 하얀 비늘이 붙은 손등을 콕콕 쪼아댄다.

팅, 팅팅.

신체 강화 능력에 비늘도 튼튼한지 중위급 이형종이 단단한 부리로 쪼아대지만 마치 철판을 팅기는듯한 소리만 날 뿐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미호한테만 효과가 있는 매혹인가 본데요? 미호가 한 번 만져봐.=

알케마의 이야기에 미호가 가까이 다가가니 날개를 퍼덕이던 놈은 금방 안정을 되찾고는 미호가 내민 손에 머리를 갖다 대며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알케마를 상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인 반응이다. 공간 지각으로 참매 이형종을 자세히 스캔해보니 놈의 조그마한 뇌에 아까 미호의 여덟 번째 꼬리에서 났던 빛과 비슷한 빛이 참매 이형종의 뇌에 어려있는 게 보인다.

“뇌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나 본데.”

- 주인님. 얘 발을 묶고 있는 것 좀 풀어줘.

내 이야기를 듣고 참매 이형종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던 미호는 내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주니 참매는 푸드덕하고 힘차게 날갯짓을 하면서 미호의 가녀린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아! …음. 아무것도 아니야.”

가늘고 하얀 목, 거기서 이어지는 매끈한 어깨에 참매 이형종의 억센 갈고리 같은 발이 감겨드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놀라서 소리치려 했는데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의 시선에 머쓱하게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나도 참. 녀석도 신체 강화 능력이 있는데.

“안 도망가는걸 보니 확실히 매혹인 거 같지?”

미호의 작고 연약해 보이는 어깨 위에 앉은 참매 이형종은 도망갈 생각도 없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우리를 거만한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호는 정말 대단해. 각종 속성 능력에 매혹이라니, 어째서 사대 종족 중 호족이 최강이라는지 알 거 같다.=

=저희에게는 여전히 적대하고 미호에게만 호감을 보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매혹이군요.=

“그야 꼬리마다 능력을 하나씩 쓰는데 최강일 수밖에.”

참매 이형종이 애완조처럼 미호의 가느다란 어깨에 올라앉은 채 털을 골라주듯이 미호의 머리카락을 부리로 쓱쓱 다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미호에게 매혹을 풀어보라고 시켰다.

- 응.

미호가 팔을 휘둘러 참매를 하늘 높이 띄우고 다시 여덟 번째 꼬리를 번쩍이니 평온한 참매의 기세가 갑자기 격변하며 발톱을 세우더니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미호에게 쏜살같이 내리꽂힌다.

미호의 여덟 번째 꼬리가 번쩍이는 순간 참매 이형종의 뇌에 끼어있던 핑크빛 기류는 모두 사라졌다. 미호는 참매 이형종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기에 미호와 참매 이형종 사이에 끼어들면서 놈을 크게 후려쳤다.

삐이이이이익!!

내 공격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크게 바닥을 뒹군 참매 이형종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웠는데, 한쪽 날개가 부러졌는지 날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미호의 다리를 부리로 쪼아대려 한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줘서 후려쳤는데도 참매 이형종은 날 한번 크게 노려만 보더니 계속해서 미호를 공격하려 한다.

내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아 뼈까지 부러졌는데도 도망가거나 날 공격하려 하지 않고 미호만 노리는 걸 보면 이건 아무리 봐도 매혹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거 같다.

자신의 정신을 조종한 미호에게 적대감이 최고치를 갱신한거지.

“미호야. 다시 매혹 걸 수 있어?”

- ……우웅. 안돼. 얘가 날 너무 미워해서 매혹이 안 듣는 거 같아.

그 말을 듣고 펄쩍펄쩍 뛰며 부리로 미호를 쪼아대려고 하는 참매 이형종을 다시금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묶어버렸다.

끼아아아악! 빼애애애액!!

한쪽 날개가 부러져 축 늘어졌지만 남은 한쪽 날개를 사납게 퍼덕이는 놈에게 힐링 터치로 상처를 아물게 한 뒤 몇 마리를 더 잡아 와서 매혹을 실험해봤는데, 매혹은 쓰기에 따라 어마어마하게 강한 힘을 발휘할 거 같다.

최고위 이형종은 찾지 못해서 실험은 못 해봤지만 고위 이형종도 수월하게 매혹을 걸 수 있고, 한번 걸린 놈은 미호가 풀어주기 전까지는 죽을 때까지 미호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지능이 낮은 것들에게 복잡한 명령 같은 건 무리였지만, 저걸 공격해라, 따라와라, 멈춰라 정도는 알아듣는 걸로 보인다.

소비 TP도 적고 매혹의 시간제한도 없는듯하고 한번 걸린 녀석은 죽을 때까지 명령을 듣는다는 걸 확인했지만, 아쉬운 점은 동시에 8마리밖에 매혹을 걸지 못한다는 거였다.

고위급이든 위상력이 없는 짐승이든 동시에 최대 8마리밖에 안되는 점이 조금 아쉽다.

능력 확인을 위해 잡아 온 이형종 들은 호박색 공간의 벽으로 고통 없이 보내주고 미호를 조용히 불렀다.

“미호야.”

- 응?

매혹을 건 다람쥐와 놀고 있던 미호는 내 부름에 여우 귀를 쫑긋 세우며 날 돌아보더니 다람쥐에게 건 매혹을 풀었다.

미호의 정수리에 올라가 있던 다람쥐는 매혹이 풀리자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후다닥 뛰어내려 숲속으로 도망가버렸다. 저런 겁 많은 작은 동물은 매혹을 풀어도 안 덤비는군.

“동물이나 이형종한테는 매혹을 마음대로 걸어도 되지만….”

- 사람한테는 걸지 말라는 거지?

눈치도 좋아졌는지 내 말에 생긋 웃으면서 선수를 친다.

“응. 사람한테 매혹을 걸면 아마도 주변에서 금방 눈치를 챌 거야. 그럼 능력자 연합의 인간들에게도 네 이야기가 귀에 들어갈 테고 연합의 입장 상 미호 널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 알았어. 주인님이 허락할 때 아니면 현실에서는 이형종 외에는 안 걸게.

기특하게도 내가 하지 않은 말까지도 알아들은 미호에게 착하다고 칭찬해주면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니 미호의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든다.

귀에 들어간다고 해봤자 우리를 어찌하진 못하겠지만 귀찮은 건 싫다. 그리고 미호가 인간을 단지 도구로만 여기게 되는 것도 좋지 못한 일이니까.

미호의 네 가지 속성 능력과 신체 강화 능력도 조금 더 강화된 것을 마지막으로 능력의 확인을 마치고 다시 출발하려 하니 미호가 내 옷자락을 잡고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주인님. 언제 시작할 거야?

“응? 뭘 시작해?”

- 아까 흑호랑 싸우기 전에… 우리 죽인다고 한 거.

……이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갑작스러운 미호의 이야기에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뭐?”

- 난 괜찮아. 주인님한테 도움만 될 수 있으면.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미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히아리드가 미호의 옆에 서서 날 약간은 슬프지만 다부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괜찮습니다만… 쓸모를 생각한다면 미호보다는 제가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미호의 능력은 여러모로 서하 님에게 도움이 될….=

“잠깐!! 잠깐잠깐잠깐잠깐.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사고가 따라가지 않는 둘의 이야기에 이대로 두면 안될 거 같아 일단 히아리드의 말을 막았다. 알케마는 저 두 녀석이 하는 말과 연관이 없는지 놀란 모습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는 미호와 히아리드가 어처구니없어서 황당한 마음에 물었다.

“내가 너희들을 죽여? 왜? 뭐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왜 일어난 건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나 좀 이해시켜줄래?”

- 아까 주인님이 진화하기 위해서 TP를 먹여서 진화시킨 우리를 죽인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주인님한테 도움이 되려고….

“……뭐어어?”

이래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옛날부터 이야기가 나왔었나 보다. 아니,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해야하나.

미호가 하는 말을 듣자 당황하고 답답한 마음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차는 기분이다. 있는 대로 한숨을 쉬면서 엄청난 오해를 하는 세 녀석에게 마지막 확인차 물어보았다.

“미호하고 히아리드가 하는 말은 아까 내가 "TP를 먹여 진화시킨 놈을 잡아 죽이는 거." 라고 말한걸 가리키는 거지?”

- 응….

=네.=

“야이…!”

크… 아니야. 여기서 화내봤자 오히려 역효과다. 여기서는 천천히 납득이갈 만한 설명을 해준 뒤에 화를…!

울컥해서 화를 내려다가 침착하게 분노를 갈무리하고 시무룩해져 있는 세 놈에게 조용조용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내가 죽인다고 이야기한 건 맞아. 하지만 그게 너희들이라고 했냐? 내가 왜 가족인 너희들을 죽여? 응? 아무 이형종 잡아다가 TP 억지로 먹이고 진화시켜 죽이면 되는데 그게 말이 돼? 그리고 내가 너희들을 죽이겠다는 식으로 믿는 건 뭐야?”

말하다 보니 점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면서 화를 참고 있으려니 세 녀석의 눈동자가 커지며 서로를 당황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 멍청한 녀석들은 다른 이형종을 잡아서 TP를 먹여 키운다는 건 생각도 못 한 게 틀림없다.

녀석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더욱 부글부글 끓는 거 같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생각해보니 미호하고 히아리드는 날 가족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같다.

정말로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비록 서론 본론 다 자른 이야기였지만, 죽인다는 이야기에 이렇게 간단히 납득해버리지 않고 다른 반응을 보여줬을 테니까.

“그래. 너희들하고의 첫 만남이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 뒤로는 너희를 못살게 굴거나 한 적 없잖아. 난 너희들을 정말로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이거저거 챙겨줬는데… 그런데….”

답답하고 화가 나는 마음에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눈을 감고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주먹을 쥔 손을 덜덜 떨고 있으니 미호와 히아리드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걸 깨달은 거 같다.

두 녀석이 앗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잽싸게 나한테 달라붙어서 날 달래기 시작했다.

- 주인님!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주인님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는걸?! 그래서 주인님이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마, 맞습니다. 저도 말씀드렸었지만 서하 님을 위해서 이 한목숨을 바치는 건 아깝지 않기에…!=

또 날 위해 죽네 마네 헛소릴 내뱉는 히아리드를 사납게 노려보니 찔끔하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날개가 얌전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걸 보니 적잖아 당황한 거 같다.

……후우. 미호와 히아리드의 이야기는 거짓이라곤 한 푼도 없는 진담이다.

내가 별 생각 없이 꺼낸 앞뒤 내용 다 자른 이야기를 미호와 히아리드는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내 말을 "너희들은 나에게 있어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니 너희들을 죽여서 흡수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두 녀석은 내 이야기를 듣는 순간 TP를 먹고 진화한 존재는 바로 자신들이라는걸 떠올린 거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기에 다른 생각은 못하고 저리 간단히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한 거지.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품고 있길래 죽인다는 이야기에 "네, 죽어드릴게요." 하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는 감정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가 보여줬던 막무가내식 행동과 이기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두 녀석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거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지금까지 워낙 폭력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 덕분에 이 두 녀석도 영향을 받은 거겠지. 미호와 히아리드의 반응을 탓할 게 아니라 날 탓해야 한다는 거다.

두 녀석이 어떻게든 내 화를 풀어주려고 갖은 아양을 떠는 걸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착각할만한 이야기를 가볍게 꺼낸 건 미안해. 하지만 너희들도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가족들하고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만큼 내 목숨이 소중해.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쉽게 죽는다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아줘.”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살아있어 봤자 인생은 하나도 즐겁지 않을 테니까.

허탈한 마음에 힘없이 말하니 미호와 히아리드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날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 주인님 나도 착각해서 이상한 말한 거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

=저번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었는데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죄송합니다. 서하 님.=

“아니야. 이번엔 내가 너무 핵심적인 말만 꺼내서 그런 거야. 나도 조심할게.”

나도 손을 들어 미호와 히아리드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사이에 끼인 알케마는 어떤 말도 못 하고 우리 눈치만 살피다가 일이 잘 해결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번 일은 진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사례다.

이 아이들이 나와 평범한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몇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다 보니 단순한 말 몇 마디가 오해를 불러서 죽네사네하게 된 거다.

어쩌면 날 맹목적으로 사랑해주는 연인들도 내가 생각 없이 꺼낸 이야기에 오해해서 어떤 일을 저지르고 그 대가로 생명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흐른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이번에는 금방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지만 다음에는 또 어떨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경각심이 일깨워진다.

오해를 불러 일으킬법한 말은 진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해를 푼 미호와 히아리드는 마음의 짐을 덜어낸 모습으로 최고위 아종으로 진화시킨 이형종과 싸울 것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어떤 놈을 잡아 와서 진화시켜야 가장 상대하기 쉬울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거나 잡아 와도 돼.”

- 왜? 그래도 싸울 거면 적당히 약한걸 찾는 게 좋지 않아?

“정신 조작으로 묶어놓고 단숨에 죽일 거거든. 그러니 대충 눈에 보이는 거 잡아 와.”

- 아항. 알았어.

그렇게 둘이 진화의 희생양으로 삼을 한 이형종을 찾는 과정에서 날지도 못하고 움직임이 빠르지도 못하고 잘 싸우지도 못하는 안쓰러운 알케마는 하늘에 펼쳐둔 공간의 벽에서 나와 함께 대기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에 풀이 죽어서 기운 없는 모습으로 쪼그려 앉아있던 녀석은 숲을 뒤지며 적당한 이형종을 찾고 있는 미호와 히아리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옆에 서 있는 날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서하 님은 미호와 히아리드를 정말로 가족으로 여기시는 겁니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알케마의 표정을 살펴봤다. 녀석의 눈에는 다른 의도는 없고 정말로 그걸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음…. 내 가족의 범주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틀릴지도 몰라. 그래도 소중하다는 건 확실해. 그건 왜 묻냐?”

=아, 아니에요. 그냥 그게 궁금해서요.=

대답을 들은 알케마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길래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질문을 한 걸까 잠시 머리를 굴려봤다.

혹시 나와 녀석들의 유대감이 부러운 건가? 하긴, 알케마는 우리와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조금 서먹하긴 하지.

이번에 위상 세계로 들어오면서 나름 어색하던 미호와 사이도 좋아졌고 히아리드하고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예전 비하면 조금 삐걱거리긴 해도 사이가 꽤 개선됐다.

그렇게 미호와 히아리드와 사이가 좋아지니 자연스레 녀석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두 녀석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알게 된 걸 테고…….

이렇게 생각하면 알케마가 나와 히아리드를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게 설명되는데.

그래서 직접적으로 물었다.

“나하고 미호랑 히아리드 사이의 관계가 부러워?”

기습적인 질문에 깜짝 놀란 나머지 꼬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걸 보자 그게 정답이었다는걸 눈치챘다.

=어, 어떻게….=

놀라면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는 녀석이 왠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금 너와 저 둘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나는 저 녀석들을 좋아해. 녀석들도 날 좋아하지. 거기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걸 똑같이 좋아하거나 공경해줘. 하지만 니가 한 행동은 어땠냐.”

프랑이나 화연이가 몇 번 저택에서 함께 살 수 있었던 기회를 준 걸로 안다. 하지만 녀석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뒤로도 누나가 알케마에게 집도 지어줬지만, 행동은 바뀌지 않았다.

“정원 남쪽에 연못을 만들어두고 거기서 나오지 않았지. 내 연인들하고도 데면데면하게 굴면서 대화도 잘 안 했고.”

내 말에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는지 알케마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솔직히 널 데려올 때 별로 기대한 건 없었어. 그래서 신경을 안 쓰고 적당히 살 수 있을 환경만 꾸며줬었지. 그 뒤로 관심도 별로 안 줬었고.”

=…….=

입을 다물고 아래만 바라보는 녀석이 가장 듣고 싶어 할 부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내가 보여준 하나의 길에 알케마도 희망을 발견했는지 시무룩한 표정이 걷히며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 됐다.

……결심한 얼굴이 되긴 했는데 어째서 자기 몸이랑 날 번갈아 보면서 얼굴을 붉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 작품 후기 ============================

미호의 정신적인 성장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왜냐구요? 로리 대기열 1번이 발권됐거든요.

미호야. 힘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