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3 4대 종족 =========================================================================
와하하하! 호호호!
메리아놀의 순례자들은 말 그대로 먹고 마시며 놀았다.
사냥을 나간 순례자들은 기껏해야 사람보다 조금 더 큰 하위 이형종 멧돼지나 사슴 등을 잡아 왔는데 미호와 알케마는 둘이서만 바다로 슝 날아가더니 20m짜리 다랑어 이형종 한 마리를 잡아 오는 위엄을 보였다.
“이걸 어떻게 잡았냐?”
- 잘?
…….
어쨌든 20m짜리 다랑어 한 마리에 순례자들이 각종 들짐승, 날짐승을 사냥해온 덕분에 음식은 14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 풍족했다.
순례자들과 미호와 알케마가 구해온 식재료로 각종 탕, 구이, 볶음 등의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중에 어디서 알싸한 알콜의 향기가 풍겨오길래 뭔가 싶어 살펴보니 순례자들이 어느새 손에 흙으로 빚은 병을 하나씩 들고 있는걸 발견했다.
저 병에서 술 냄새가 난다. 그런데 분명 술은 없었는데?
어디서 구한 건가 의아해하는데 순례자 몇몇이 허리춤에 매고 있는 작은 가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주머니의 크기를 훌쩍 넘어가는 흙으로 빚은 병을 꺼냈다.
설마 매직 아이템인가 싶어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던 호우반도 주머니에서 흙병을 꺼내길래 그게 뭐냐고 물어보았다.
=우리 플뢰들이 담그는 특산주일세. 마셔보겠나?=
호우반은 내가 술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마셔보라며 한 병을 건네준다.
아니, 술 말고 주머니에 대해서 물은건데….
되돌려주려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옆을 보니 미호와 알케마가 술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시라고 준 건데 되돌려주는 것도 실례겠지.
아공간에서 소주잔 네 개를 꺼내서 따르니 딱 4잔 분량이 나온다. 술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히아리드한테도 건네주고 미호와 알케마한테도 나눠준 다음 한 모금 마셔보았다.
“우와 이거 달다.”
- 켁! 써!!
=으윽… 매운데요?=
=……시군요.=
뭐야? 다들 술과는 별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맛에 이맛살을 찌푸리길래 뭔가하고 한 모금 더 마시니 이번엔 쓴맛이 확 올라온다.
“…….”
인상을 쓰면서 또 한 모금 마셨더니 매운맛이 올라온다. 마지막은 레몬보다 10배는 더 신 맛이 들었다.
“……무슨 술맛이 이래? 러시안룰렛도 아니고.”
네 가지 맛이 입안에 맴도는 게 상당히 불쾌한데도 순례자들은 연신 술병을 들이키며 잘도 웃고 떠들면서 마시고 있었다.
입 안에서 가시지 않는 이상야릇한 맛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혀를 내두르는 중에 누나 몰래 캔맥주 몇 상자를 사놓고 아공간 안에 집어 넣어둔 게 생각났다.
그래서 이들에게 술맛을 보여주기 위해 24개들이 한 상자를 호우반 앞에 꺼내놓으니 다들 먹는 걸 멈추고 내가 꺼내놓은 캔맥주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호오. 이건 뭔가? 무척이나 신기하게 생겼군.=
“이게 제가 사는 곳에서 마시는 맥주라는 술이에요. 이렇게 따서 마셔보세요.”
=자네 마을의 술이라고? 어디.=
마을이라고 하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지만 대충 넘겨두고 순례자들에게 캔맥주 하나씩 나눠준 뒤 캔을 따고 마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커어어억!! 이, 이럴 수가?! 이게 정녕 술이란 말인가!=
=우와, 입안에서 톡 쏘면서 목구멍을 넘어가고 뱃속에서 찌르르 울리는 게 최고야!=
=몇 번을 마셔도 맛이 변하지 않아! 맛있어!=
=이거, 재질이 뭐지? 얇으면서도 가볍고… 철인가? 철은 아닌데.=
=감촉은 구리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탄력이 있구먼. 그나저나 맛있군!=
다들 맥주를 한 모금 마셔보더니 크게 감탄하며 흙병에 든 술은 내팽개쳐두고 홀짝홀짝 캔맥주를 비워간다.
맥주 맛에 환장하는 순례자들을 보니 잘하면 맥주를 교섭 도구로 쓸 수 있을거 같다.
아직 아공간에 캔맥수 5박스가 남아있지만, 꺼내놓은 이게 마지막이라며 남은 13개의 캔맥주를 순례자들에게 하나씩 더 나눠주니 다들 크게 기뻐하며 아껴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이 적잖게 들어가니 분위기가 저절로 풀어지며 서로 마음에 드는 자들을 붙잡고 웃고 떠들며 풍족한 저녁을 즐겨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벌게진 얼굴로 한 손에는 사슴고기 꼬치와 다른 손에는 캔맥주를 들고 흐뭇하게 웃는 호우반에게 남은 맥주 3개 중 하나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저기, 보니까 다들 주머니에서 주머니보다 더 큰 술병을 꺼내던데,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것도 아공간인가요?”
=어어. 아공간이라니, 거창한 이름이구먼 그래. 그냥 평범한 가죽 주머니에 보관의 비술을 걸어놓은거 뿐이라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일반 주머니에 비술을 걸어서 가방 같은 걸로 쓴다는 말이다. 넓이도 내 아공간처럼 가로세로 높이가 500m씩 되는 수준은 아니고 0.1%인 50cm * 50cm * 50cm 밖에 안된다고 한다.
=예전에는 창고의 비술이라고 불리면서 이보다 100배 정도 컸었는데, 메리아놀들 전원이 익혀버리다 보니 크기가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보관의 비술로 이름도 바뀌고 크기도 지금 수준으로 줄어 들어버렸다네.=
100배라면 엄청 큰 건데…. 메리아놀 종족 전체가 보관의 비술을 알고 있어서 크기가 확 줄어든 거 같다. 누호디는 같은 비술을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효과가 줄어든다고 했으니까.
=메리아놀이라면 다들 배우고 있는 비술이니 비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지경이지. 헌데 자네도 보관의 비술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아까 내가 허공에서 맥주캔 한 상자를 꺼낸 걸 두고 하는 말 같다.
“제껀 능력이라서요. 비술이라면 저도 배우고 싶은데……. 안 되겠죠?”
=허허허. 비술이 아닌 능력이라니, 상당히 넓은듯 하구만. 저런 상자를 넣어 다닐 정도인 걸 보면 말이야. 뭐, 원한다면 가르쳐줌세. 우리 순례자들 전원의 생명의 은인인데 이 정도쯤이야 당연히 해주어야지. 다만 다른 이들에게 너무 막 퍼트리면 곤란하네.=
퍼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얼굴이 불콰하게 변한 호우반은 맥주캔 하나를 비워가며 보관의 비술의 비문과 주문을 알려주었다.
사실 딱히 넓은 공간도 아니고 어디에 쓸 것도 아닌 비술인 데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들 가능성이 큰 비술이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그나저나 미호하고 히아리드는 내가 알려줬던 비술을 얼마나 익혔으려나?
파티에 가까운 저녁이 끝날 무렵 순례자들과 미호, 알케마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백사장 이곳저곳에 픽픽 쓰러져서 잠들어버렸다.
봄이긴 해도 밤에는 좀 쌀쌀한데… 뭐, 다들 이형종인데 별일이야 있을라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바람도 막아줄 겸 이형종의 습격에 대비해서 푸른색 공간의 벽을 펼쳐놓고 미호와 알케마한테 모포를 덮어주었다.
음냐음냐거리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공간의 벽 밖으로 나오니 약간 쌀쌀한 밤바람과 함께 파도 소리가 밀려온다.
히아리드는 어디 있나 살펴보니 넙치 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맥주 캔 하나에 취했는지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여섯 날개를 살랑살랑 움직이는 히아리드는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순례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떨어져 있었다.
갈둠이라는 사비는 노골적으로 히아리드를 공기 취급했고 다른 순례자들도 비슷하게 히아리드와 눈이 마주치면 살짝 고개를 끄덕이거나 잠시 마주 보다가 시선을 돌리면서 알게 모르게 왕따를 시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메리아놀도 플라비우스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네.”
공간 도약으로 히아리드 근처에 내려서며 말하니 히아리드는 내가 건네줬던 캔맥주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다가 날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적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하긴. 알케마는 널 처음 봤을 때 적을 보는듯한 모습이었지.”
=네.=
히아리드의 옆에 앉아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으니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기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구름 같은 포근한 냄새에 약한 맥주 향이 히아리드의 몸에서 나고 있었다.
“메리아놀에 가기 싫다거나 하면 날 생각해서 참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뭐,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나중에라도 그런 기분이 들면 꼭 말해. 알았지?”
=네.=
내 배려가 기쁜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히아리드를 보고 있으니 슬그머니 낮에 치렀던 정사가 생각난다.
히아리드의 풍만한 가슴이 내 팔에 닿는 걸 느끼며 히아리드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올려 포동포동한 밑가슴을 살살 간지럽히니 히아리드는 간지러움에 몸을 살짝살짝 비틀며 가느다란 비음을 흘렸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야릇한 신음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녀석의 허리를 잡은 채 하늘 높이 공간 도약을 펼쳐 공간의 벽을 치고 쉘터를 꺼냈다.
히아리드는 내 행동에서 다가올 행위를 예감했는지 기대감을 내비치며 조금 더 몸을 밀착해왔다.
낮에는 미호와 알케마때문에 급하게 일을 치르느라 제대로 못 했으니까 이번에는 쉘터에서 제대로 해야지.
다음 날 아침, 바다 안개가 낀 백사장에서 숙취 해소로 스튜 stew인지 탕 湯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음식을 떠먹는 호우반에게 다가가 그만 떠나겠다고 말을 꺼냈다.
=벌써 가는 건가?=
“네. 시간이 별로 많은 편이 아니라서요.”
=그거 아쉽군. 며칠간 좀 더 우애를 다졌으면 했는데.=
어젯밤의 연회 같은 저녁을 보내면서 꽤 친해진 호우반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요.”
사실 어제저녁 파티 때 호우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도 메리아놀에서 낮은 위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순례행렬 자체가 경험과 실력이 되는 메리아놀들 중에서만 뽑히고 그 순례행렬의 대장은 수만의 메리아놀 중에서도 20명이 채 되지 않는 전사장戰士將 중 하나가 맡는다고 한다.
호우반은 순례행렬의 대장이니 4만이 넘는 메리아놀 전사 중 상위 0.0005% 안에 든단 말이다. 더군다나 메리아놀의 인구수가 4만 명이 아니라 20만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에 적잖게 놀랬다.
=흐허허. 그걸 말해준 이는 전사戰士의 숫자만 두고 이야기한 거 같구먼.=
호우반의 이야기에 알케마를 돌아보니 고기가 가득한 스튜를 먹고 있던 알케마가 내 시선을 받고 목을 움츠린다.
아무튼, 그도 꽤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내게 호감을 느끼는 호우반을 통해 내가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물어도 되지만, 호우반과 다른 프라우드 족 남자가 나누는 대화에서 '보석 공주'라는 인물이 언급되는 걸 보고 직감적으로 '보석 공주'라는 메리아놀을 만나야 한다는 예감을 받았다.
그래서 그냥 그때까진 그냥 평범한 여행자 코스프레를 하려고.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말을 꺼내면서 혼자 스튜를 조금씩 떠먹는 히아리드를 돌아봤다. 거의 밤새도록 위와 아래, 앞쪽과 뒤쪽으로 시달린 히아리드는 살짝 피곤한 모습으로 스튜를 떠먹고 있었는데, 주변에 순례자 서너 명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아침을 먹는 알케마나 미호와 비교되서 슬퍼 보일 지경이다.
호우반도 스튜를 떠먹다 말고 내가 바라보는 쪽을 보더니 =흐음.= 하고 덥수룩한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흐음. 저 처자가 뭐 문제라도 있는가?=
“히아리드는 플라비우스잖아요. 어제부터 지켜봤는데 아무래도 순례자들이 히아리드랑 거리감을 두는 거 같아서요. 플라비우스는 메리아놀 내부에서도 별로 환영을 못 받는 거에요?”
=으음…. 자세히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지만, 플라비우스라고 외면받고 따돌림당하고 그러는 건 아닐세. 왜, 그런 거 있잖나. 저쪽에서 스스럼없이 다가온다면 친해지기 쉽지만, 저쪽이 벽을 치고 거리를 두면 접근하기 힘든 거.=
“음.”
=플라비우스들은 잘 모르는 자가 본다면 냉랭하다고 느낄법한 화법을 구사하는 데다 표정도 별로 없는 이들일세. 그러다 보니 가까이하기 힘든 구석도 있고… 뭐 종족성향이 그런 거지. 그래서 그런 거야.=
뭔가 애매한 화법을 즐겨 사용하는 호우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국 플라비우스라고 외면하고 왕따 하는 게 아니라, 플라비우스 종족의 성격이 배타적인 편이라서 다른 이들도 잘 다가가지 않는다 이건가. 알케마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갈둠이라는 사비나 미호를 우러러보는 듯한 카낫이라는 푸른 털의 개 인간은 자기 동족이니까 먼저 접근하는 거였고?
그럼 메리아놀에 간다고 해서 히아리드때문에 싸움 난다거나 그런 일은 없겠네.
호우반은 내 걱정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내 등을 툭툭 치면서 다정스레 웃었다.
=너무 걱정 말게. 자네는 성격이 나빠 보이지 않으니 저 처자와 메리아놀들의 사이에서 적당히 중재한다면 문제 같은 건 생기지 않을걸세. 뭣하면 저 처자가 깃털 갈이를 할 때 그걸 모아뒀다가 선물로 한두 장씩만 선물해주어도 호감을 사기 쉬울 거야.=
플라비우스의 부산물은 인기가 좋다는 게 진짜인가보다. 마침 오늘 아침에 침대 주변에 떨어져 있는 히아리드의 날개 깃털을 챙겨뒀는데 잘됐군.
호우반의 조언에 고맙다고 하면서 마지막 남은 캔맥주 하나를 품에 슬쩍 찔러주니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간다.
=크허험. 뭐 이런 걸 다 주고 그러나. 어허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잽싸게 캔맥주를 낚아채서 보관의 비술이 걸린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잠시 주머니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그러더니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받게.=
“이게 뭐에요?”
=자네가 우리에게 해준 게 많지 않나. 약소하지만 그 답례일세. 물론 이걸로 대신할 생각은 없으니 나중에 만난다면 단단히 은혜 갚기를 할 것일세. 기대해도 좋네!=
공간 지각으로 내용물을 보니 예쁘게 가공된 보석들이 들어있었다. 연인들한테 주면 좋아하겠네.
“음. 고마워요.”
=허허. 자네의 발이 닿는 대지에 그분의 가호가 가득하길 빌겠네.=
“고마워요. 호우반도 몸조심하세요.”
우리가 떠난다는 이야기에 다른 순례자들도 제각기 다가와 우리에게 작별인사와 함께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하는데, 유독 히아리드만 모른 채 하는 모습에서 살짝 한숨이 나온다.
뭐, 그걸 히아리드는 전혀 신경을 안 쓰지만 괜히 따돌림당하는 친…구? 같은 걸 보는 기분이라 찝찝하다.
짧은 만남을 끝내고 손을 흔드는 호우반과 순례자들을 남겨둔 채 미호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렇게 위상 세계 입장 5일째에 메리아놀의 도시로 가는 단서를 얻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조금 짧네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