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92화 (492/517)

00492  4대 종족  =========================================================================

넙치 배는 정말 엉망이었다.

메인 마스트가 있었을 법한 곳은 부러져나간 흔적만 남았고 갑판의 이곳저곳도 부서지고 우그러진 곳 투성이에 배의 측면에는 용골이 뒤틀리면서 벌어진 틈새로 해수가 밀려들고 있었다.

이대로 한 30분만 지나면 물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을 거다.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와 함께 프라우드 족 남자한테 다가가니 남자는 우릴 보고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

그의 몸이 통통하다고 느꼈던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늘을 덧대 만든 두꺼운 비늘 갑옷 때문이었다. 이걸 몸으로 착각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많이 마른 상태다.

어깨까지 기른 갈색 머리카락은 기운을 잃어 푸석푸석해져 있고 숱이 많은 턱수염도 엉망으로 엉켜있는 데다 수십 일은 굶은 것처럼 뺨이 홀쭉해져 있는 프라우드 남자는 우릴 보고 손을 힘겹게 뻗어오는 게, 도와달라는 표현으로 보인다.

“괜찮아요?”

=도, 와주… 쿨럭쿨럭.=

쉰 목소리로 힘겹게 도움을 요청한 프라우드 족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기절해버렸다.

남자를 편히 눕혀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서 프라우드 족 남자를 지켜보는 셋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알케마는 이거 먹고 선창에 들이치는 물을 내보내면서 해안가로 배를 몰아. 미호하고 히아리드는 날 따라와. 선창에서 기절한 이종족들을 밖으로 옮기자.”

TP가 거의 바닥까지 내려간 알케마에게 고위급 블루 스톤 하나를 던져주니 녀석은 놀라서 허둥거리며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걸 본 미호가 눈을 번쩍하고 빛내더니 몸통 박치기하듯이 달려들어 내 허리를 껴안는다.

- 나도! 주인님 나도!

“그래. 미호도 먹고 히아리드도 먹어.”

- 우왕~!

=감사합니다.=

셋 다 TP가 많이 소비되어있어서 100만 TP 짜리 블루 스톤을 하나씩 건네준 뒤에 넙치의 코처럼 생긴 문을 열고 비좁은 계단을 걸어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알케마가 물을 조종해 배를 움직이는지 배가 좌우로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균형을 잡으며 2명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폭의 통로를 걸어 배의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선창으로 들어가니 엉망으로 망가진 내부와 함께 사방에 널브러져 기절해있는 이종족 아홉이 눈에 들어왔다.

선창 내부를 잠시 둘러보고 있으니 미호는 서로 포개져 있거나 구석에 처박혀있는 이종족들을 발견하고 바람을 일으켜 아홉을 한 번에 들어 올리며 씩씩하게 소리쳤다.

- 주인님~. 난 이 사람들 데리구 먼저 올라갈게!

“그래.”

미호는 곧 이종족을 줄줄이 공중에 띄워 세워 내려왔던 길을 도로 올라갔다.

뒤따라 올라가기 전에 선창에서 특별한 게 없는지 둘러봤다. 가장 큰 선창은 식당이었는지 돌로 반듯하게 만든 식기라거나 나무로 만든 그릇들이 부서진 나무 의자와 테이블과 함께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배는 총 3층으로 흘수는 3층 아래에 있었다. 선창은 1층에 있었고 2층은 선실, 3층은 무슨 용도로 쓰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공간이 있었다.

왜 여기 모여있었던 거지?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아도 돼서 편하긴 했지만.

=서하 님?=

내가 선창에서 안나오니 미호의 뒤를 따라 나갔다가 되돌아온 히아리드가 날 부른다.

“어. 갈게.”

뭐, 저들을 치료해주면 알 수 있겠지.

갑판으로 올라가니 미호는 이종족들을 갑판에 2열로 주르륵 뉘어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고 알케마는 선수에 서서 두 손을 좌우로 벌린 모습으로 물을 조종해 배를 움직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단발머리가 하늘거리고 하늘색 원피스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걸 보니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아야 할 거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잡생각은 버리고 미호가 바람으로 갑판까지 옮겨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종족들을 살펴봤다. 홀로 갑판으로 나와 있던 프라우드 족 남자도 그들 틈에 누워있었다.

이종족들은 열 명 중 아홉이 상위급이고 갑판에 혼자 나와 있던 프라우드 족 남자만 고위급이다. 고위급이라서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버텼던 건가?

“다들 TP가 바닥이네. 위상력도 흔들흔들거리는게 위험해 보여.”

=TP를 과도하게 쓴 탓으로 신체와 위상력의 균형이 무너졌나 봅니다.=

“이대로 두면 어떻게 돼?”

옆에서 허리와 다리를 살짝 굽히고 무릎을 짚은 자세로 지켜보던 히아리드의 대답에 얼굴은 물론이고 팔다리에도 푸른 털이 난 키 큰 여자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며 물었다.

=이 상태로 회복되지 않으면 이후로 위상력이 천천히 줄어들며 위상력이 바닥나는 순간 먼지로 변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 흐음….”

여자는 2m가 넘는 키에 민소매 갈색 가죽 재킷과 갈색 가죽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공간 지각으로 옷 안을 투시해보니 신기하게도 유두와 음부의 중요 부위를 제외한 전신에 보슬보슬한 털이 난 사람이었다.

몸은 무척 말랑말랑한 게 푸들을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일으켜 세운 뒤에 사람 같은 골격을 주면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히아리드는 이 종족이 어떤 종족인지 알아?”

=루크랑에 속해있는 수인獸人 중 하나인듯싶습니다.=

“아, 루크랑.”

그 종족이 있었지. 짐승 인간으로 된 자들이 모인 종족.

미호도 푸른 털의 개 인간이 신기한지 호기심을 보이며 쪼그려 앉아서 개 인간의 손바닥에 난 젤리 같은 말랑말랑한 육구를 만져보고 있었다.

살펴보는 건 이 정도로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갑판에 드러누워 정신을 잃고 있는 이종족을 다시 한 번 쓱 둘러봤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크라켄에게서 구해주기까지 했고 그걸 고위급 프라우드 족 남자도 지켜봤다. 거기다 치료까지 해주면 이들의 호감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우리 목적인 메리아놀의 도시를 찾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어쩌면 도시까지 안내해줄지도 모르고.

생각을 정리하고 그들의 중심에 서서 힐링 웨이브 3단계를 발사했다.

시퍼런 안개 같은 힐링 웨이브를 뒤덮어 쓴 열 명의 이종족은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던 위상력이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아가며 TP가 느리지만 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힐링 웨이브가 통하지 않으면 블루 스톤을 먹여서라도 TP 고갈을 치료해주려고 했는데 다행히 힐링 웨이브가 통하는 거 같다.

파리하던 안색도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불규칙한 숨소리도 안정적으로 바뀐 걸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선수에 서 있던 알케마가 날 돌아보며 소리쳤다.

=서하 님! 곧 육지에 도착합니다!=

“그래.”

해안가의 모래사장에 도착해서 배를 모래사장 위에 올려놨다. 평범한 선박이었다면 모로 기울어지며 난장판이 벌어졌겠지만, 넙치처럼 넙적한 덕분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상태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이종족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으, 으으….=

=윽, 머리가….=

흐음. 난 고위 이형종들만 히아리드나 알케마처럼 위상력을 의지화해서 대화에 이용하는 줄 알았는데, 상위급인 저들도 비슷한 능력을 쓰는 걸 보면 뭔가 자질이나 태생의 영향이 클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린 그들에게 아공간에서 생수병을 꺼내 하나씩 들려주니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갈증이 심했던지 물을 마신다.

그중에 아까 내가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던 푸른 털의 개 인간이 단숨에 생수병을 비우고는 투명한 생수통을 보며 신기해하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후우. 후우….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누군가요? 플라비우스에 호족에 저분은 사비…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푸른 털의 개 인간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우릴 보며 약간 혼란스런 감정이 깃든 눈으로 묻는다.

보통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정신이 혼란스럽기 마련일텐데 바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걸 봐선… 이종족들의 정신력이 뛰어난건가? 아니면 눈 앞의 개 인간이 뛰어난거?

그보다 미호나 히아리드는 물론이고 형태가 크게 변한 알케마까지 한눈에 종족을 파악했는데 나는 짐작도 못 하는걸 보면 위상 세계에는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종족은 없는 거 같다.

“저는 서하라고 해요. 그보다 당신들은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크라켄에게 잡혀있었던 거에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기가 좀 그래서 대충 내 이름만 대답해주고 질문을 던졌더니 푸른 털의 개 인간은 화들짝 놀라면서 주변을 휙휙 둘러본다.

=아! 그 바다의 악마가…! 이,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얼른 도망쳐야!!=

=카낫. 진정하고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봐.=

푸른 털의 개 인간 이름이 카낫인가? 그녀가 허둥거리니 옆에서 지친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던 녹색 도마뱀 인간이 길다란 꼬리를 움직여 카낫의 등을 탁탁 치며 힘없는 목소리로 진정시켰다.

=아, 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 악마는 어디 간 거야?=

=내가 알겠나. 서하라고 했소? 그대가 우릴 구해준 거 같군.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오. 내 이름은 갈둠이오.=

혼란스러워하는 카낫에게 퉁명스레 말하고는 그나마 정신이 있는지 녹색 도마뱀 인간은 양손으로 깍지를 끼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확실하다. 저게 사비 종족의 인사법이다.

인사를 마친 갈둠은 길쭉한 주둥이로 생수병에 남은 생수를 들이키는데, 어째 개구쟁이처럼 생긴 짜리몽땅한 키의 남자가 갈둠의 어깨를 탁탁 치면서 말한다.

=갈둠, 봐라. 여섯 날개의 플라비우스다.=

=…뭐 어쩌라고.=

이름 모를 프라우드 족 남자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갈둠이라 불린 녹색 도마뱀 인간의 어깨를 잡고 말하니 갈둠은 인상을 쓰며 손을 탁 쳐낸다. 히아리드를 보니 웬지 심기가 나빠진 거 같다.

역시 사비는 플라비우스를 싫어하는 거군.

이종족들이 점점 정신을 차릴수록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가는데 가장 마지막에 깨어난 프라우드 족의 남자, 홀로 갑판에 나와 있던 남자는 1ℓ짜리 생수통을 단번에 비워버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더니 조금 힘이 돌아온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를 그 악마로부터 구해주어서 고맙소이다. 감사하오.=

“뭘요.”

그는 잠시 내 일행을 쓱 살펴보더니 엉망으로 엉킨 갈색 수염을 굵고 짧은 손으로 슥슥 훑으며 날 향해 말했다.

=그대가 일행의 리더인가 보군. 내 이름은 호우반. 순례 일행의 대장이오.=

순례자? 블레어패치가 말한 순례자들이 이들일 가능성은 없을 테니 다른 곳을 향하던 이들이겠군. 그럼 메리아놀 확정인가?

“제 이름은 서하에요. 이쪽은 차례대로 미호, 히아리드, 알케마구요.”

셋을 가리키며 간단하게 소개해주니 호우반은 놀랍다는 얼굴로 미호와 히아리드, 알케마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허어. 호족의 고위 전사에 플라비우스의 최고위 사제와 사비의 특급 사제? 그대는 누구길래 저리 거창한 이들을 데리고 여행 중인 거요?=

호우반의 이야기에 근처에서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회복하던 이종족들이 깜짝 놀란다. =그 악마를 저들 넷이서 물리쳤어?=, =여섯 날개 플라비우스잖아. 호족도 일곱 꼬리고.=, =저 하얀 사비는 사비 맞아? 전혀 다른데?= 하며 서로 정신 사납게 떠들어댄다.

주변이 갑작스레 시끄러워져서 대화를 나누기 힘들어지자 호우반은 주먹으로 갑판을 쿵! 내려치며 조용히 시킨다. 그를 보며 대답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 메리아놀의 도시를 향하던 여행자일 뿐이에요. 그러다 여러분들을 구할 수 있었던 거구요.”

=오오, 그렇소? 이거 참 공교로운 일이로군. 대지의 주인께서 우리를 보살피신 것 같소.=

호우반은 내 대답에 허허하고 웃다가 쿨룩거린다. 옆에서 지켜보던 카낫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들어 호우반의 등을 쓰다듬어준다.

=크흠. 그렇게 강한 이들이 모여있으니 그 저주받을 악마를 간단히 처리한 것이겠지. 일행을 대표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하겠소.=

“괜찮아요. 그나저나 호우반도 메리아놀을 향하는 순례자에요?”

=음. 우리는 메리아놀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오. 예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던 중이었지. 그러다 재수 없게 그 악마 놈에게 당했던 것이고.=

예언? 혹시 날 찾으러 온 건가? 이거 참 우연이 다 있구나 생각했다.

……했는데 이어진 호우반의 이야기에 김칫국물을 원샷했다는걸 깨닫고 말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서쪽 지평선 저 먼 곳의 벨티칼 산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에 확인차 떠나는 길이었다오. 이 일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대들의 메리아놀을 향한 순례행을 도와주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군.=

크윽. 자뻑도 이 정도면 병인 거 같다.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이들이 날 맞이하러 나온 자들이라고 생각했을까….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얼굴이 다 붉어질 지경이다. 민망함을 애써 지우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크라켄을 두들기는중에 놈의 입에서 갑자기 배가 튀어나오길래 깜짝 놀랐었거든요.”

=보호막을 만들어 배를 지키고 있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소. 근 칠주야를 버티긴 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대가 때마침 악마 놈을 잡아주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보호막이 끊겨서 우리 모두 저 악마 놈의 먹이가 되었을 거요.=

묻지 않아도 스스로 이야기해주는 호우반 덕택에 어찌 된 상황인지 다 이해했다. 그러니까 서쪽으로 향하기 위해서 배를 만들고 건너가려고 했는데 저 크라켄한테 잡아먹혔다 이거구만.

입속에서 보호막……. 비술이겠지? 열 명이 선창에 모여 비술로 보호막을 치고 버티는 중에 우리와 크라켄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지겠다 싶은 크라켄이 배를 뱉어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거다.

말하면서 그 상황이 떠올랐는지 진저리치는 호우반에게 다른 프라우드 족의 남자가 접근하더니 신중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호우반. 이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메리아놀로 향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법한데, 순례행을 도와줄 겸 일이 이렇게 됐으니 메리아놀로 돌아갔다가 재정비를 하고 다시 출발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안돼. 보석 공주께서 우리에게 직접 내린 말씀이란 걸 잊었나. 우리는 메리아놀을 떠난 이상 벨티칼 산을 향해 반드시 가야 해.=

다른 프라우드 족 남자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호우반은 미안함이 잔뜩 든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은인에게 은혜를 갚지 못하고 떠나는 게 괴롭지만…. 이해해주길 바라오. 우리에게 보석 공주의 당부는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임무라오.=

“아니에요. 그런데 벨티칼의 최근 소식이라면 제가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로는 안되나요?”

=…음? 아, 그러고 보니 저 아가씨도 사비였지. 헤뷜트 출신이시오?=

호우반은 내 이야기에 알케마를 돌아보며 묻는다. 알케마는 저 말에 질문에 대답해도 될지 눈빛으로 허락을 구하길래 고개를 끄덕여주니 호우반의 앞으로 나서며 두 손을 깍지 끼고 가슴께로 올린 뒤 우아하게 상체를 숙였다.

=뒤노이의 알케마입니다. 반갑습니다, 메리아놀의 호우반.=

=뒤노이! 사비 종족의 갈둠이 일족의 예비 장을 뵙습니다!=

……알케마의 소개를 받고 호우반이 눈을 크게 떴을 때 뒤에서 편히 서 있던 갈둠이 후다닥 뛰어와서는 알케마와 똑같은 자세로 좀 더 깊이 허리를 숙인다.

뭐야. 대장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부하가 막 이야기에 끼어들고 그래도 되는 거야? 계급 사회가 아닌가?

키 2.7m의 갈둠은 의젓한 모습으로 서 있는 알케마를 내려다보며 죄송함을 머금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모, 모습이 너무 변하셔서 알아뵙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시길.=

=아닙니다. 모두… 으음, ……의 축복이지요.=

알케마는 틀림없이 대해의 주인의 축복이라고 하려다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우물우물하면서 그 부분을 얼버무린 걸 거다.

그 행동이 왠지 귀여워서 피식 웃었는데 히아리드는 그렇지 못한지 서릿발이 감도는 눈으로 알케마를 노려본다.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모습에서 화가 난 거 같다.

=예비 장께서 여행을 나오시다니, 혹 수행의 길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사비를 떠나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중입니다.=

=느헛?!=

알케마의 이야기에 갈둠은 온몸의 비늘이 모두 곤두설 만큼 놀란다. 알케마는 그 모습이 부담스러운지 갈둠을 끌고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구석에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인가보다.

호우반은 왕방울만 한 눈을 끔벅이며 알케마와 갈둠을 쳐다보다 날 돌아보며 물었다.

=……놀랄 일이군. 그녀가 말한 새로운 주인이 설마 그대인 거요?=

=그녀뿐만이 아닙니다. 저도, 여기의 미호도 서하 님을 섬기는 중입니다.=

그 말에 순례자 일행 전원이 경악에 빠진다. 아, 이거 참. 이런 반응은 언제 받아도 거북한데.

“아무튼 벨티칼 산과 헤뷜트의 일이라면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데, 그럼 직접 가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여기서 그곳까지 가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텐데.”

=그렇다 해도 그곳을 향해야 하는 점은 달라질 게 없소. 우리는 순례자. 확인 이외에도 해야 할 목적이 있지.=

“그래요?”

조금 아쉽다. 메리아놀까지 쉽게 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안되면 가는 길 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해야지.

“그럼 저희가 메리아놀이 어딘지 몰라서 좀 헤매는 중인데, 혹시 가는 길을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으응? 혹시 메리아놀의 초대를 받지 않고 가는 거요?=

“네? 네. 그런데요… 설마 초대를 안 받으면 못 가는 거예요?”

=물론이오. 이걸 받으시오.=

헐, 초대를 받아야 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어?! 뭔가 억울함과 분노가 솟아오르는걸 잠시 치워두고 호우반이 건네준 조선 시대 마패처럼 생긴 기묘한 은패銀牌를 살펴보았다.

이게 뭔데?

은패와 호우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으니 호우반은 두 손으로 무릎을 촥 하고 때리면서 입을 열었다.

=메리아놀은 이 땅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지. 인연이 없는 이들은 볼 수도, 갈 수도 없는 곳이오. 이것이라면 그대를 메리아놀로 안내해줄 거요.=

아, 일종의 네비게이션인가.

그나저나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삽질이었다니, 충격이다. 여기서 이들을 못 만났다면 10일 동안 수색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을 거란 이야기잖아?

아니, 그 뒤로도 쭉 못 찾았을 테니…. 그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는다.

속으로 작게 쇼크를 먹고 있는데 나와 호우반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카낫이라고 불렸던 푸른색 개 인간과 몇몇 이종족이 미호에게 다가가더니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저기저기. 미호는 어떻게 라수비탄을 나온 거야? 일곱 꼬리면 대전사장 후보 아니야?=

- 우웅? 라수비탄이 뭐야?

=……라수비탄을 몰라?!=

- 몰라!

=고위 호족 전사가 어떻게 라수비탄을 모를 수가 있지?!=

아까 갈둠을 보고 생각한 거지만, 메리아놀은 굉장히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종족집단인가보다. 나와 호우반의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다들 각자의 관심거리를 향해 움직인다.

방금까지 기절해서 골골거리던 자들이라곤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호우반은 이런 모습이 당연한지 주변 상황에는 신경 쓰지 않고 내 안색을 살피더니 쓰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표정이 안 좋은걸 보니 메리아놀을 상당히 찾아다니고 있었나 보군.=

“아, 뭐… 좀 많이 움직이긴 했죠. 이 땅의 남쪽 끝에서부터 찾아 올라왔으니까.”

=허어! 그거 안됐구먼.=

“아니에요. 아까 호우반이 말했잖아요. 인연이 없는 이들은 갈 수 없다고. 오늘 만날 인연 때문에 지금까지 못 찾았었나 봐요.”

=으하하.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마운 일이군!=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어서 호우반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호우반은 배의 수리를 위해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겠다고 대답했다.

=배를 수리하는 거야 한나절이면 충분하지만, 준비해둔 식량이 바다 악마 놈 때문에 죄다 못쓰게 되어서 새로 준비해야 하거든.=

헉, 용골마저 뒤틀린 배를 수리하는데 한나절 밖에 안 들어? 손재주가 어마어마한가 보네.

“아, 그럼 잡은 크라켄을 식량으로 쓰면 되겠네요. 바닷속에 가라앉긴 했지만 꺼내줄 수 있는데, 먹을 만큼 갖다 줄까요?”

=음? 그대들은 그것을 크라켄이라고 부르시오? 그걸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아나보군.=

…어? 뭐야, 크라켄은 별로 맛없어? 왠지 말하는 투가 그런 뉘앙스인데?

“아뇨. 저도 먹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해비 종족은 크라켄을 식량으로 사용하길래 말해본 거에요.”

=하하하, 그런 거였소? 해비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맛있게 먹는 종족이오. 그네들의 입맛을 너무 믿진 마시게. 크하하하.=

그랬군. 크라켄은 진짜 이형종 중에서도 몇 없는 쓰레기더미였나보다. 위상석이 아니면 돈이라곤 전혀 안 되는 걸어 다니는 쓰레기장.

=자자, 그만 놀고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게! 우린 갈 길이 먼 순례자들 아닌가!=

호우반의 외침에 다른 순례자들이 미호와 알케마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제각기 할 일을 찾아 나선다.

쉬면서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했는지 의욕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힐링 웨이브를 한 번 더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불을 피우기 위한 장작을 구하러 숲으로 뛰어들어가거나 무기를 꺼내 들고 사냥을 나가는 자들도 있고 배의 파손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선창으로 내려가는 순례자들을 보며 우리도 저녁으로 먹을 이형종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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