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81화 (481/517)

00481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  =========================================================================

“영국은 예전부터 너한테 우호적 모습을 계속 보여왔으니까 1순위로 넣자.”

“한국은 몇 순위가 좋겠니?”

“몇 순위로 할까요?”

“0순위로 해. 우리가 사는 나라잖아.”

살짝 우리나라의 VIP로서 사심을 보이는 영은이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순위를 정해주자 얼굴색이 밝아지며 기뻐한다. 진짜 영은이의 우선순위는 알기 쉬워서 좋다. 내가 0순위. 가족이 1순위 그다음이 나랏일.

…내가 0순위라니, 여기서 내가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면 영은이는 내 아바타가 될 거 같다. 영은이를 침대 위에서 찍어누르면서 한 12시간 정도 괴롭혀주면 내 말에 복종할 거 같은데.

……그랬다간 정서하 게이트가 일어날 거 같으니 관두자. 영은이를 조종해서 국정을 내 맘대로 움직인다고 뭐 이득이 될만한 것도 없고. 차라리 내 돈 써서 내가 원하는 걸 얻고 말지.

“알았어. 그럼 2순위는 러시아로 하고… 3순위는? 미국?”

“미국은 좀 밉상이지만 요즘 열심히 아양 부리고 있다며? 이름값이랑 좀 부려먹으려면 당근도 주는 게 낫겠지. WAO 만들기 도전에 알아서 기면서 일본을 까는 데 제일 앞장서기도 했으니까 3순위로 넣어.”

연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나라별 이형종 출현 시 출동 우선순위를 정하다 보니 자연히 1등급과 2등급, 그리고 3등급으로 등급이 나누어졌는데, 1등급에는 영국, 러시아와 미국을 선정하기로 하고 3등급에는 일본 혼자. 나머지 나라는 전부 2등급으로 들어가게 짜놨다.

“중국은 왜 빼니?”

“그놈들은 한 게 뭐 있다고? 그놈들은 자기네들 잘난 맛에 사는 놈들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거기다 서해에서 중국 어선이 깽판 치는데도 중국은 그냥 나 몰라라 한다며? 거기에 동북공정 같은 미친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그냥 싫어.”

파티 때도 중국 대사 놈이 중국을 믿고 내 앞에서 나대는 거 같아 맘에 안 들었고.

다분히 개인감정이 섞인 말을 내뱉자 누나도 "확실히 중국은 여러 가지로 간을 보면서 이득만 챙기려는 모습이었지."라며 수긍했다.

“그럼 등급별 차이는 어떻게 할 거니?”

영은이의 질문에 조금 고민이 된다. 등급별로 혜택에 차등을 주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니 누나가 미리 생각해둔 게 있는지 한 가지를 제안한다.

“1등급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니가 출동하는 걸로 하는 게 어때? 2등급은 스케일러나 히아리드, 미호를 시키는 걸로 하구 3등급은 지원에서 제외.”

“그거 좋군. 확실히 서하가 직접 출동하면 최대한 적은 피해로 제압하는 게 가능하니 실속도 있고 1등급의 혜택이라는 의미도 될 거다. 2등급은 스케일러나 히아리드, 미호가 출동할 경우에 꽤 큰 범위가 파괴될 테니 2등급 국가는 1등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쓸 테고.”

“그래도 1등급은 네 곳만 선정하는 걸로 하자꾸나. 너무 많으면 1등급의 메리트도 줄어들고 서하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힘들 수 있어.”

“흥흥. 그렇게해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선착순이기는 하니까요. 1등급인 나라도 언제든 2등급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줄 수 있을테구요.”

“그럼 한 자리는 비우는건가요?”

프랑이 적당히 그려진 도표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니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1자리 정도는 비워놔야 승급의 기회를 노리면서 서하가 하는 말을 잘 듣지 않겠니?”

“그럼 마지막으로 WAO 가입 요건은 그거지?”

“응. 그거야.”

WAO에 가입 요건은 단 하나. 인류의 삶에 해가 될 행위는 절대 금지한다.

“앞으로 위상 세계가 통합되면서 위상력은 계속해서 현실에 퍼져 나올 거고 이형종은 끊임없이 출현할 테니 WAO의 역할과 등급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두될거야.”

“호호호. 회춘 능력에 WAO. 거기에 블루 스톤까지 발표되면 정말 서하가 신세계의 왕이 되겠구나.”

신세계의 왕이라니, 무슨 신세계라는 거야…. 그런데 영은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연신 기쁜 웃음을 흘리는데 그녀의 생각이 살짝 무서워졌다.

날 왕으로 만들려고 막 밀어붙이진 않겠지?

…살짝 불안한 마음을 남긴 채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후다닥 해치운 등급제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간단히 정해졌다.

1등급: 1st 영국. 2nd 러시아. 3rd 미국. 4th 공백.

2등급: 그 외 전체.

3등급: 일본.

등급외: 한국.

1등급의 경우에도 우선순위가 있어 1등급 국가에 동시에 최고위 이형종이 등장할 경우 우선순위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2등급은 그냥 발생한 순서에 따라 스케일러들을 보내기로 했고.

그 때문에 앞으로 본격적으로 싸우게 될 스케일러 녀석들에게 TP를 좀 더 주입해서 체내에 블루 스톤까지 생성시켰다. 덕분에 스케일러들은 힘과 지구력이 좀 더 강해졌고 그 강해진 힘을 가지고 대련장에서 더욱 격렬하게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최고위 이형종이 나타났을 때 두 마리, 세 마리씩 짝을 지어서 보내놓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다.

대분류와 행동 방침을 정해놓고 WAO의 협력기구로 IWO와 다리를 놓는 역할을 맡은 능력자 연합의 아란 셰이커 본부장에게 먼저 언질을 주니 본부장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1등급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꽤나 피 터지는 외교 전쟁이 일어나겠다고 중얼거렸다.

그 뒤에 WAO의 가입 의사를 열렬히 밝히던 영국과 미국, 러시아에 활동 방침을 알려주며 귀국이 1등급에 설정되었다고 알려주자 조 셀든 미국 임시 대통령은 "귀하의 호의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미합중국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라며 일에 찌든 피곤한 얼굴로도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영국은 여왕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곱게 늙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고 푸친 대통령은 보기만 해도 서늘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국가적 무력이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언제든지 연락하시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세 나라가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준 뒤 그랑 블루 빌딩에서 각국 외신 기자들을 모아 WAO의 발족과 운영 방침 및 가입 조건을 정식으로 선언하자마자 전 세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최고위 이형종, 초위 이형종의 출몰은 시간문제?!

―세계 최강의 능력자, 고귀한 직위에 따른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다!

―WAO 가입국은 최고위 이형종의 위협에서 안전?

…발표 직후 WAO에 가입하고 싶다는 나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대사나 장관들을 우리나라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국은 때아닌 귀빈 호위에 몸살을 앓기 시작했고 서울의 유명 호텔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나.

WAO의 발족을 발표하자마자 전 세계의 언론이 들불처럼 일어나며 WAO가 설립된 배경을 집중 조명하기 시작하니 1등급으로 분류된 세 나라는 등급 보전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 열성적인 반응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며 일본을 좀 더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한 거다.

비인륜적인 실험 자행 국가. 파렴치한 양심을 지닌 나라. 최고위 이형종의 위협에 노출된 WAO의 유일한 3등급 국가.

세 나라의 발표를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동시에 영국과 미국, 러시아는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본을 이형종 위험 지대로 선포했으며 해외여행 절대 금지 국가로 지정했다.

한편으로는 UN에서 발언권을 얻어 일본의 비 인륜적인 실험과 행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제를 발표, 일본이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면 WAO 공조체제를 명분 삼아 일본에 수출, 수입에 대한 무역압박과 경제 봉쇄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WAO 가입대기 중인 나라들도 너도나도 나서서 일본과 수교를 끊거나 영국, 러시아, 미국처럼 일본을 여행 위험 국가로 지정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이미 일본은 명분을 잃은 상태라 거리낌이 없다는 태도였다.

전 세계 8할에 가까운 국가에서 여행 금지 국가 명단에 오른 일본은 당장 외국인 관광객들 수가 격감하며 수천억 엔 대의 관광 수입이 80% 가까이 줄어들어 눈에 띄게 경기가 침체되어 갔다.

거기에 영국, 러시아, 미국이 일본 정부에 기본 산업 물동량을 인질로 삼아 위상학 연구를 비롯해 위상 세계와 관련된 경공업과 중공업 활동까지 제약을 가하려 하자 일본은 안팎과 위아래로 흔들리며 격심한 혼란을 빚기 시작했다.

-저러다 2차 경제붕괴가 일어나겠는걸.

-쩐다. 그럼 WAO에 가입한 나라는 자기 나라에 최고위 이형종이나 초위 이형종이 등장해도 안전하다는 말 아니야?

-어째서 미국이 세컨드도 아니고 서드지? 이해할 수 없어. 영국보다 미국이 회장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을 텐데.

ㄴ미국은 회장한테 한 번 찍혔잖아.

ㄴAh…….

-중국이 2등급인 거 봤어? 저 중화사상이 언제고 일낼 줄 알았지.

-저렇게까지 그랑 블루가 헌신해야 할 이유가 뭐지? 저렇게 하면 그가 얻는 이익이라도 있는 거야?

ㄴ지금 일본 꼬락서니 봐봐. 회장의 목적이 저거라는 말이 있더라.

ㄴ순위 발표장 때 1등급에 공석 하나 있다는 말에 대사들 눈빛이 바뀌는 거 못 봤나 봄?

ㄴ공석에 서로 들어가려고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질 거야. 그로 인한 반사이익만 봐도 어마어마할걸.

ㄴ글쎄. 회장이 벌어들이는 수익을 보면 그런 반사이익은 껌값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진짜 대단하다. 고위급 위상석 판매랑 최고위 이형종 처리 두 가지만 가지고 세계 여러 나라를 쥐락펴락하네.

ㄴ두 가지'만'이라고 할 게 아니라 두 가지'나'라고 봐야지.

-그랑 블루 회장이 거주 국가는 등급제에서 열외라며? 우리 캐나다도 안전한데 우리나라로 이민 오면 좋겠다.

WAO의 발표에 1등급인 나라들 국민들은 대체로 안심하며 발표를 곱씹는 모습을 보였지만 2등급인 나라들은 불안해하면서도 1등급의 공석에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가즈오카 정권 퇴진!!]

[일본을 망하게 하려는 주범, 내각은 총사퇴하라!!]

무려 30만 명의 시민이 모여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을 치고 연일 농성 중이었다.

의사당뿐만 아니었다. 도쿄의 이름난 지역이라는 지역에는 작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까지 모인 시위대가 도쿄 일대를 휩쓸고 있었고 요코하마. 오사카. 나고야. 고베. 교토 등 일본의 대도시라는 대도시 또한 시위대가 일어서며 국가 경제마저 마비되고 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최악이면 갖은 노믹스 정책으로도 떨어지지 않던 엔화 가치가 폭락할 조짐까지 일고 있었다.

이 상황을 누나와 영은이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듯한 편안한 자세로 구경하고 있었다.

“이미 엔화 폭락은 예견된 상황이야. 강대국들이 얼마나 벼르고 있는데. 일본이 건방지게 고개 빳빳이 들고 있으면 바로 붕괴할걸? 안전통화가 엔화라는 건 옛말이지~.”

“거기에 일본은 이형종 위험지대라는 인식이 크게 박혀버렸죠. 세 나라가 참 잘 움직여줬네요.”

“맞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덕분에 일본의 능력자나 돈 좀 있는 재벌들은 알게 모르게 일본을 떠나고 있대. 거기에 물밑 협상으로 일본의 위상산업 분야가 강대국들 때문에 규제강화가 시행되기 직전이거든.”

경제 마비, 엔저 현상, 국민의 불만감 폭등으로 연일 시위가 일어나고 쿠데타의 조짐까지. 진짜 나라가 폭삭 망할 징조다.

누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라토리엄이 선언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란 거다.

영은이 말로는 일본이 저 꼬라지가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가 생일 파티 때 단상 위에 올라 일본의 행동에 분노를 넘어선 실망을 느끼고 절대 용서치 않겠다는 선언이 크리티컬이었고 그 뒤에 이은 WAO 평가 기준이 결정적이었단다.

그 선언 때문에 괜히 일본 옆에 있다가 불벼락이 튈까 지레 겁먹은 다른 나라들이 일본을 피하면서 영국과 미국, 러시아의 행동을 거든다나.

뭐, 모난 놈 옆에 있다가 정 맞는다는 한국 속담도 있으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이해가 간다.

아무튼, 엔화의 가치가 지속적인 하향 그래프를 그리고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니 버티다 못한 일본 총리가 날 찾아왔다.

비공식 방문이었다.

공식 방문이 아닌 비공식 일정이라는 언질을 영은이에게 미리 듣고 미용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가진 소피아에게 머리를 손질 받았다. 그 뒤 국내 탑이라는 디자이너가 직접 내 몸에 맞춰 제작한 수제 수트를 입은으니 젊고 야심 찬 사업가 같은 이미지가 묻어난다.

작게 감탄하는 수한과 소피아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와서 그랑 블루 빌딩의 내 집무실로 이동하니 때마침 통역을 대동한 가즈오카 내각 총리 일행이 그랑 블루 빌딩에 도착했다는 그랑블루 비서실장의 연락을 받았다.

“집에서 만났으면 더 위압을 주기 쉬웠을 텐데.”

누나는 흠 잡힐 데 없는 완벽한 OL 룩에 검은색 뿔테 안경으로 포인트를 준 모습을 한 채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내 오른쪽에 섰다.

“내 집에 그런 인간들을 들이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을 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사과할 요량이라면 공식적인 행보를 보여아지 이게 뭐야? 사법 거래라도 할 생각이야?”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니 왼쪽에 서 있던 하얀 원피스를 입은 프랑이 살짝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수행원은 몇 안 데리고 왔네요. 하지만 그 수행원 전원이 신체 강화 능력자인 걸 보면 자신의 안위를 어지간히 챙기는 타입으로 보여요.”

“내가 보기에도 그래. 얄팍하게 생겨가지고 말이야.”

집무실 한쪽의 접대 소파에는 미호가 자리에 앉아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일본 총리가 비공식적으로 입국해서 나와 회견을 바라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생각했던 게 있던 터라 에리와 카라에게 사회성 공부를 시키고 있던 미호를 데려왔다. 저 녀석만 있으면….

미호를 보면서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고 있으니 엘리베이터의 도착 음이 울리고 문이 열리면서 그랑 블루 경호팀과 가즈오카 총리가 내 집무실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댄 채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모든 잘못을 시인할 테니 부디 WAO 3등급 안건만이라도 철회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국가의 수장인 신분으로, 아무리 비공식 회견이라지만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을 줄은 몰랐다. 따라온 통역관도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가즈오카 총리가 하는 말을 통역해준다.

저런다고 해서 대응을 바꿀 생각은 없다. 일본을 용서해야 할 주체는 내가 아니고 이제 일본에 관해서는 신경도 쓰기 싫으니까.

완전히 망해서 나라 이름이 바뀌든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이번에 만나준 것은 일본이 영은이를 하도 귀찮게 한다고 해서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였지 용서하자고 만난 건 절대 아니다.

“그 사과가 향해야 할 곳은 제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사과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곤란함만을 어떻게든 모면하려는 행위로 보입니다만. 제 말이 틀렸습니까?”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가즈오카 총리는 내 차가운 말투에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그 상태로 배에 힘을 준 듯이 소리쳤다.

“절대 아닙니다! 실험으로 피해를 본 피해자의 유족분들께도 배상하겠습니다. 저희 일본의 잘못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사죄문도 발표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사죄와 배상을 국가정책으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

“일본의 1억 국민이 흔들리는 경제 아래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디 모쪼록 여러 국가의 압박과 규제를 완화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찍기 시작한다. 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서 찍어봤자 별로 안 아플 텐데.

미호는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일본인의 도게자土下座 자세를 취하고 있는 총리를 빤히 바라본다. 시킨 대로 잘하고 있겠지? 미호를 힐끔 보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그 많은 나라가 제가 시켜서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한다고 알겠습니다. 제 말 한마디에 미국이나 러시아, 영국 같은 강대국이 쉽게 움직인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그것은….”

억눌린듯한 목소리에서 가즈오카 총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 거 같다. 틀림없이 '니놈이 WAO와 위상석 판매건을 빌미로 사주해서 영국 미국이 저 지랄하는 거 아니냐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랑 블루 회장님의 발언은 금세기에 있어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저희 일본국민이라면 3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부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부디 선처를….”

총리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피가 끓는듯한 목소리로 호소하는데 약간이지만 호소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의 문제다.

더이상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아있는 미호의 뒤로 걸어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아십니까? 미호는 얼마 전에 소울 링커의 특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약간이지만 훈련을 통해 누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게 됐지요. 마침 이 자리에 미호도 있으니 가즈오카 총리께서 방금 하신 말씀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물어볼까요?”

“어헉.”

내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가즈오카 총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사색이 된 얼굴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호야. 어때?”

- 거짓말~ 거짓말쟁이야. 자기 마음도 속일만큼 거짓말쟁이야. 근데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선처라는걸 해달라는건 진심이야.

“?!”

미호의 말에 가즈오카 총리의 잘게 떨리던 어깨가 순간적으로 멈춘다. 역시 그런가. 일본인들은 겉과 속이 많이 다르다더니… 아니, 이건 그냥 정치꾼들 속성이려나.

'나 잘했어?'하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미호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여준 뒤 여우 귀를 파닥거리는 미호를 뒤로하고 내 의자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뭐, 예상했던대로군요.”

“…….”

흥. 미호가 아니었다면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겠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지땀을 흘리는 총리와 통역을 위해 옆에 무릎 꿇고 앉아 덜덜 떠는 젊은 통역관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식은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세요. 그리고 해야할 일을 하세요. 그전에는 귀찮게 하지도 마시고요.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 차가운 추방령에 가즈오카 총리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좀비처럼 터덜거리며 되돌아나갔다.

============================ 작품 후기 ============================

으흑. 제 글을 보기 위해서 결제를... ㅠㅠ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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